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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03화 (898/1,794)

템빨 49권 - 5화

남다른 재능과 열정, 그리고 노력과 인내로 랭커가 된 플레이어들.

그들은 자신이 이룬 업적에 높은 긍지를 지녔다.

페이커 또한 마찬가지다.

20억 플레이어 중 최고의 반열에 오른 자신에 대해서 돌이켜 볼 때면, 적어도 조부께 부끄러운 손자는 아니라는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단, 오직 한 사람.

그리드 앞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건 역시 네가 배웠어야했다.”

그리드의 호의로 초상비(草上飛)를 습득한 페이커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초상비의 효과가 예상보다 훨씬 더 대단했던 까닭이다.

페이커는 자신이 아닌 그리드가 이 스킬을 배웠어야한다고 판단하며, 그리드의 호의를 거부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PvP에서 패배한 경험이 없다.’는 명성과 함께 살신으로 추앙 받는 페이커조차도 그리드 앞에서는 겸손해지는 것이다.

그리드가 한숨 쉬었다.

“아니라니까? 네가 익히길 정말 잘했다고.”

진심이다.

모든 속도 20퍼센트 상승이라는 효과는 물론 그리드에게도 큰 도움이 됐겠지만, 그리드는 이미 의도적으로-버프 사용 시- 공속을 최대치로 올릴 수 있는 입장이다.

‘초월자의 시선으로 봤던 세계’를 떠올려 보면 현재 제한되어 있는 공속이 과연 최대치가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리드는 페이커에게 초상비를 준 것을 추호도 후회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숲길이나 초원에서 이동속도가 2배 상승하는 효과에 있었다.

페이커는 그리드와 달리 대륙 전역을 누비며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수행할 때가 많았으니까.

한 달에도 몇 번씩이나 대륙을 횡단하며 자신의 시간을 희생하는 페이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이제 마음의 부담을 좀 줄일 수 있어서 그리드도 기뻤다.

더군다나 그리드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페이커를 의지하고 있었다.

‘페이커는 계속 더 강해져야 돼.’

그리드는 동료들과 종종 대련을 한다. 몇 년 동안 축적 된 대련 경험은 벌써 500회 이상으로, 아직까지는 전승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불사가 빠질 정도의 위기를 수십 차례 겪었었다.

그리고 그리드에게 가장 많은 위기를 안긴 사람이 바로 페이커다.

이미 옛날에 홀로 1개 길드를 몰살시킨 이력이 있는 페이커의 대인전 능력은 템빨단 내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었고, 또 꾸준히 성장해왔다.

그리드는 언젠가 동료 중에서 자신을 넘어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첫 번째는 당연히 페이커일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무신 또한 페이커를 지목했을 정도다.

심지어 무신은 페이커가 이제 막 강해지기 시작한 애송이라고 표현했다.

앞으로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한계를 돌파해야하는 그리드와 달리, 페이커는 보다 빠르고 수월하게 강해질 여지가 많았다.

그리드는 어서 그날이 오길 바랐다.

종종 발생하는 자신의 부재를 페이커가 완전히 대체해주길 바라서였다.

‘그리고 만약.’

내가 결국 파그마의 후예라는 한계를 극복 못하고 도태되고 말 경우.

그래서 다시 크라우젤에게 지존의 자리를 빼앗기고 템빨국이 위태로워진다면.

‘그때는 페이커 네가 지존이 돼서 모두를 지탱해줘.’

이런 바람을 품을 정도로, 그리드는 페이커를 신뢰하고 있었다.

초상비는커녕 답설무흔이나 능공허도를 익힐 수 있었어도 페이커에게 양보했을 것이다.

물론 이 신뢰는 페이커 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 함께 온 동료 모두가 그리드에게는 신뢰와 기대의 대상이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제국 병사들과 스컹크 탐사대가 도착했습니다.”

“응, 그래.”

그리드는 유적지의 모든 비급을 확보할 각오였다.

혼자서는 아무리 강해져봤자 한계가 있다.

모두 함께 강해져야만 더 많은 위기와 변수에 대응할 수 있다.

믿어 의심치 않으며, 라우엘의 보고를 듣고 막사를 나온 그리드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료들과 칠공작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그렌할 공작이 다가와 말했다.

“이곳에 새 기지를 구축하라고 병사들에게 지시했습니다. 우리가 다음 관문에 도전하는 동안 스컹크 탐사대는 이곳에 남아 벽화 연구에 열중할 것입니다.”

“좋소. 출발합시다.”

그리드가 앞장서자 템빨단원들과 칠공작들이 그의 뒤를 쫓았다.

이제는 칠공작들도 자연스럽게 그리드를 따르고 있었다.

“흐음....”

다시 거세진 53개의 폭포수를 모두 지나 계곡의 끝에 서 보니, 아래로 길게 이어지는 강이 보였고 저 멀리 산 하나가 보였다. 해발 약 1,000미터 정도로 크게 높지 않았지만 풀 한 포기 없는 암산이라는 점이 특이했다. 그저 회색 암벽만 덕지덕지 붙은, 문자 그대로 메마른 산이었다.

깎아지르듯이 날카롭게 선 정상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어서 지슈카가 안력을 돋아도 무엇이 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뭔가 좀 불길한데....”

너무 음산하다.

중얼거리는 휴렌트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저곳에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현재 휴렌트의 실력은 궁극기를 사용해야만 1명의 추종자를 사냥할 수 있는 수준.

솔직히 이 이상 행군에 참여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물론 휴렌트가 혼자였다면 유적지에서의 사냥은 더 이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혼자가 아니다.

강을 지나 암벽을 등반하기 시작한 일행을 노리고.

“무신의 비급은 어디냐....!”

추종자들이 끊임없이 도전해 왔지만.

“떴다! 사냥감이다!”

이미 추종자에게 익숙해진 템빨단원들은 도리어 눈을 반짝이면서 추종자들을 사냥했다. 철저한 협력으로 추종자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 치명적인 반격을 가해서 추종자들을 빠르게 잿빛으로 산화시켰다.

무신의 추종자가 아무리 강해봤자 일반 몬스터로 분류되는 이상은 하이 랭커들의 다굴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덕분에 휴렌트는 큰 피로감을 느끼지 못했고 차곡차곡 쌓이는 경험치와 손상 된 비급을 보고 도리어 흐뭇함을 느꼈다.

‘이것이 진정한 파티 플레이.’

자신 이상의 실력자들과 팀 플레이를 해본 경험이 휴렌트에게는 거의 없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만나보기 힘들었던 그에게 팀 플레이는 고통이었고 차라리 혼자가 편했었다.

하지만 이제 변해가기 시작했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함께하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인 사냥을 추구할 수 있으며 빠르게 강해지는 법임을 그는 알게 됐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딱딱 맞아떨어지는 실력자들의 호흡을 느낄 때면 짜릿하기까지 했다.

몇 년 동안 밭일만 하느라 잊고 있던 사냥의 묘미가 그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제길.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돼버리겠군.’

재밌다.

게임에서 추구해야할 가장 원초적인 쾌감이 휴렌트의 뇌와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휴렌트는 직감했다.

이 기분에 도취되었다가는 템빨단을 떠날 수 없게 될 거라고.

앞으로도 계속 이들과 함께하고 싶어질 거라고.

결정적인 원인은.

츠카카카칵-!

가장 선두에서 활약하며 동료들의 사냥을 수월하게 만들어주는 그리드의 존재에 있었다.

단 한 명의 절대강자가 사냥을 몇 배나 더 빠르고 안전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렇다.

사실 휴렌트는 ‘버스’를 체험 중인 것이다.

심지어 그리드표 버스다.

논밭에서 피아로의 버스를 탈 때와 비견되는 쾌감이 그를 엄습했으니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신의 사원을 발견하였습니다!]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속도전.

거침없이 암벽을 등반한 일행은 오래지 않아 산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고 짙은 안개에 둘러싸인 사원과 마주하게 되었다.

낡고 허름한 사원.

혹시 이곳 또한 10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가 지키고 있는 걸까?

긴장한 그리드와 칠공작들, 그리고 템빨단원들이 잠시 자리에서 호흡을 골랐다. 섣불리 사원에 다가가지 못한 채 주변을 경계했다.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 말고 누가 벌써 이곳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저벅. 저벅. 저벅.

수백 개의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일행의 시선이 사원의 입구로 향했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장찌앤, 랴오위, 메이샤오, 리쮠드어 등.

역대 국가대항전에서 큰 활약을 펼쳤던 중국인 랭커들이었다.

숫자가 족히 200명에 달했는데, 그들 사이에는 템빨단과도 인연이 깊은 인물이 있었다.

“템빨단이었군. 너희라면 이만큼 빨리 여기까지 도달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중국 최강자.

모든 랭커가 입을 모아 인정하는 무재(武才).

플레이어 최초의 반(半)용족.

바로 하오였다.

중국은 개인의 권리보다 공산당의 판단과 명령이 우선시 되는 국가다.

무신의 유적지가 등장하자 하오를 비롯한 중국인 랭커들은 중국 정부의 지시를 받았다.

당장 무신의 유적지로 출항하여 무신의 비급을 최대한 많이 확보할 것, 이라는 지시였다.

중국의 가장 큰 강점은 인구.

중국인 플레이어 중에는 각 분야 랭커가 많다.

하오 일행은 다소 시일이 걸리긴 했지만 무신의 유적지의 항로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하필 그들이 유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그리드 일행이 계곡에 며칠 발이 묶여있던 시점이었다.

이미 밀림의 함정이 깨끗이 해제된 상태였기 때문에 하오 일행은 어려움 없이 밀림을 돌파, 굳이 계곡을 경유하지 않고 이곳 사원까지 찾아왔다.

하여 템빨단보다 한발 앞서 사원에 도착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드, 미안하지만 이곳에서는 잠시 물러나줘야겠다.”

침통한 표정을 지은 하오가 부탁했다.

그의 여동생 메이샤오를 제외한 중국인 랭커들이 이미 전원 무기를 꺼내 템빨단을 겨누고 있었다.

한숨 쉰 하오가 사정을 설명했다.

“주석께서 국가대항전에 관심을 갖게 되셨다. 우리 중국이 국가대항전에서 단 한 번도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에 분노하셨다는 소문이다. 그 결과가 이거야. 우리는 이곳에서 반드시 비급을 확보하고 강해져야한다. 그리고 내년 국가대항전부터 제대로 성과를 남겨야해. 그러니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이곳은 우리에게 양보해줬으면 좋겠다.”

하오는 본래 악연으로 시작했던 관계다.

한때 템빨단의 적이었다.

하지만 몇 번의 싸움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하오는 그리드와 템빨단의 실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오래 전부터 그리드에게 호의를 보여 왔다. 그리드에게 크라우젤의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 한국까지 찾아갔을 정도다.

그렇기에 괴로웠다.

하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리드와 템빨단의 앞길을 가로막아야하는 자신의 신세가 죽도록 싫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도 없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외국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일이겠지만,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공산단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정은 대충 이해하겠지만....”

그리드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뭐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감히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다니 정신 나간 놈들이구나?”

맹수왕 모르이즈가 나섰다.

제국의 칠공작 중에서도 수위권을 다투는 실력자.

암벽을 등반하고도 하나도 지치지 않은 샤벨 타이거를 앞으로 몬 그가 중국인 랭커들에게 뛰어들었다.

“저건 또 뭐야?”

“그리드의 새로운 부한가?”

중국인 랭커들은 모르이즈의 정체가 뭔지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제국 칠공작이 워낙 유명한 까닭에 이름 정도야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그리드와 함께하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템빨국과 제국은 큰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드와 제국 공작들이 동료가 되었다?

그리드와 함께하는 사람이 제국의 공작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의 생각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모르이즈의 강권은 천둥과도 같은 폭발을 발생시키는 것이 특징이었다.

중국인 랭커들의 반격을 무시한 그가 주먹을 그대로 내지르자 중국인 랭커 수십 명이 폭발에 휩쓸려 죽어버렸다.

“....?”

“.....”

믿기지 않는 파괴력에 어안이 벙벙해지는 중국인 랭커들과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 그리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르이즈가 소리쳤다.

“대사하란 제국의 공작과 템빨국 국왕전하의 앞길을 가로막은 죄! 나, 맹수왕 모르이즈가 엄히 물것이다!”

“아, 아니, 뭐? 뭐라고?”

귀를 의심한 중국인 랭커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반면.

‘정말이지 대단하군.’

하오의 얼굴에는 환희에 찬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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