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9권 - 4화
S.A그룹 본사.
툭.
누군가는 먹다 남은 닭다리를.
투툭.
또 누군가는 아직 한 입도 뜯지 못한 닭날개를.
“.....”
손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플레이어 최초로 서드 클래스를 획득한 그리드에게 넋을 빼앗긴 여파다.
“....아.”
뒤늦게 정신을 수습한 윤상민 이사가 탁자 위에 널브러진 치킨 조각을 바라보았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나는 가슴살을 떨어뜨렸다.
휴, 안도한 윤상민 이사가 맥주 대신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정신을 각성시킨 그가 입가에 묻은 양념소스를 닦아낸 후 말했다.
“최초의 서드 클래스 획득자는 아그너스가 될 줄 알았는데 반전이 생겼군요.”
사실, 냉정하게 말해서 최초라는 개념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서드 클래스를 최초로 얻었다고 해서 어떤 혜택이 발생하는 건 아니니까.
단, 명예가 뒤따른다.
현존하는 세컨드 클래스 보유자는 1,311명.
그중 <최초의 세컨드 클래스 획득자>라는 타이틀은 단 하나뿐이며 후로이에게 있다.
그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빼앗지 못할.
영원불멸의 기록이다.
무려 20억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최초로 서드 클래스를 획득한 그리드의 자부심은 얼마나 대단할지 가늠조차 안 됐다.
더군다나 이번 사건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그리드가 ‘신화로의 가능성이 직접적으로 명시 된 직업’을 얻었다는 점에 있었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최초로 서드 클래스를 획득하였습니다.]
[그의 서사는 전설로 시작하여 신화로 마무리 될 것입니다.]
모니터 속.
월드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신화 직업의 존재여부를 확실히 인지하게 됐을 것이다.
거대한 파장은 이미 예고된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데.
“....어째 정작 당사자의 반응은 담담하군.”
그리드는 크게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기뻐할 틈이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그리드는 추종자와의 전투에 집중해야만 했고 이후에는 무신의 저주를 극복해야만 했으니까.
자리에 모인 임원들은 치킨을 먹는 일도 잊은 채 그리드를 지켜보았다.
빨리 모든 일을 마무리한 그리드가 기뻐 환희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 역시 훈훈한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일종의 대리만족을 바라는 것이다.
그리드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임원들의 내면에는 그리드를 응원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폭포 속 <비급함>에 도달하기까지 그리드는 딱히 어떤 감흥을 표출하지 않았다.
기대 이하의 반응에 몇 몇 임원들이 의문을 품었다.
“성장형 레전드리 직업을 얻고도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나?”
“왜 저러지?”
물론 그리드가 그동안 세운 업적은 세기 힘들 정도로 많다.
최초로 레전드리 직업을 얻고 최초의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했으며, 에트날 왕국을 구원한 영웅 출신으로 템빨국을 건국하여 최초의 왕이 되었다.
국가대항전 금메달 최다 획득자, 번헨 열도를 정화한 영웅왕, 전대 전설 브라함과 무패왕의 힘을 일부 계승한 자 등등.
독보적인 타이틀도 여러 개다.
사하란 제국이 외교를 하게끔 만든 입지전적인 인물이자 직접 아스가르드에 올라 신과 대적하기도 했다.
그리드의 위업들은 정녕 대단해서, 평범한 플레이어가 그중 하나만 이뤘어도 월드스타나 하이랭커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그리드가 세운 업적은 그중에서도 각별했다.
기뻐서 방방 날뛰는 반응을 보여줘야 정상이었다.
한데 그리드가 크게 반응하지 않자 임원들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순전히 우연과 행운으로 얻은 기회인만큼 기쁨도 적은 건가...?”
비꼬는 게 아니다.
극소수의 임원들은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그너스가 앞으로 한 달 내에 얻게 될 <마계 귀족>이라는 서드 클래스는 예정 된 수순. 순전히 아그너스의 노력과 의도가 이끌어낼 결과다.
반면 그리드가 이번에 얻은 <서사시의 마검사>는?
우연과 행운이 겹쳐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스컹크가 무신의 유적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덕분에 그리드가 유적지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면 브라함이 무리해서 잠에서 깨어날 일도 없었고 그리드에게 서드 클래스는 아직 요원한 개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임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리드가 무신의 유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게 우연과 행운이라고? 전혀 아닙니다만.”
“그치. 그리드가 미리 후로이를 적진에 심어둬서 항로를 빼돌렸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덩달아 카츠의 재력도 큰 도움이 됐고.”
“애초에 만능 열쇠를 만들어놓은 일과 브라함과의 호감도를 최대치 이상으로 쌓아놓은 일도 모조리 그리드가 깔아놓은 밑밥 아닙니까? 그리드가 서드 클래스를 얻은 건 순전히 그의 역량에서 비롯된 결과죠.”
“암.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행운과 우연이 다가와도 붙잡을 수 없게 마련이지.”
“흐음....”
듣고 보니 또 맞다.
술기운 탓인지 잠시 생각이 짧아졌던 것 같다.
그리드의 업적을 단순히 행운과 우연의 결과라고 치부했던 소수의 임원들이 뒤늦게 반성하며 입을 다물었다. 마음속으로 그리드에게 사과했다.
숙연해지는 S.A그룹 임원 회의실.
그곳은 마치 그리드 팬모임 장소처럼 변질돼 있었다.
임철호 회장이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이 인간들, 업무는 다 끝내고 온 거 맞나?’
***
밀림을 돌파하고 10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를 해치운 템빨단과 칠공작들.
그들이 세운 업적은 이미 충분히 대단했다.
그에 합당한 보상이 내려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비급함>
무신 제라툴이 직접 서술한 비급이 하나 들어있습니다.
무신의 비급.
궁극의 스킬북이라고 추측해도 손색이 없는.
그것을 손에 넣게 된 그리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세계의 진실.
Satisfy의 최종 보스는 악신 야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이다.
‘그래, 설령 레베카 여신이 최종 보스라고 해도 뭔 상관이야? 애초에 플레이어는 드래곤도 어쩌지 못하는데.’
세계관 최종 보스는 플레이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플레이어가 아닌 다른 존재가 처리해줄 것이다.
세계의 진정한 흑막에게 내 백성들과 가족이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걱정을 벌써부터 미리 사서할 필요는 없다.
일단 나는 즐기자.
다만 만약을 대비해서 더욱 더 강해지도록 노력하자.
그렇게 마음을 다스린 그리드가 만능 열쇠를 이용해서 비급함의 자물쇠를 땄다.
하지만 곧바로 비급함을 열어보지는 않았다.
비급함을 열기 전에 분명히 해둬야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엄 스탯의 극대화를 노리고 목소리를 깐 그리드가 칠공작들에게 물었다.
“이것을 얻을 권리는 내게 있다고 생각하는데. 귀하들의 생각은 어떻소?”
기사들이 술렁였다.
밀림을 돌파할 수 있었던 것도, 10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를 해치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리드의 공이 가장 컸다고는 하지만.
설사 그리드가 없었다고 해도 칠공작들은 결국 여기까지 도달했을 것이다.
분명히 시간은 훨씬 더 많이 걸렸을 테고, 전력에도 큰 손실을 입기는 했을 테지만.
그리고 애초에 밀림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칠공작들의 공이 상당했다. 칠공작들이 누구보다 더 많이 추종자들을 쓰러뜨렸다.
무신의 비급.
어쩌면 황실의 보고(寶庫)에서 간직해야할 수도 있는 신화적 보물을 그리드에게 순순히 양보한다는 건 솔직히 말이 안 됐다.
....어디까지나 기사들의 생각이었다.
“당연히 전하의 몫이지요.”
“전하가 아니었다면 지금 저희들의 목숨도 없었겠죠. 저희에게는 비급을 탐할 권리가 없습니다.”
불사왕 그렌할과 금관 바사라는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그리드의 입장을 존중해주었고.
“...흐음, 우리의 공도 적지는 않을 텐데.... 나중에 폐하께서 알게 되시면 화내실 수도 있는데.... 뭐.... 템빨왕 전하의 공이 가장 큰 게 맞으니까.... 우리는 다음에 더 큰 공을 세워서 다음 보상을 노려보는 게 좋겠군....”
맹수왕 모르이즈는 다소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혼자 중얼거렸지만 대놓고 반론을 제기하진 못했다.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은 둘째 치고 비급의 주인이 될 자격은 명백히 그리드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양보해줘서 고맙소.”
양보가 아니다.
당연히 내가 취해야할 권리다.
하지만 그리드는 겉으로나마 공작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이는 공작들의 체면을 크게 세워주었다.
그리드의 배려 덕분에 공작들의 호감도가 1씩 올랐을 정도다.
힐끔, 그리드가 동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템빨단원들은 당장 눈앞의 비급보다 조금 전 떠올랐던 월드 메시지가 더 궁금한 눈치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게. 일단 비급의 내용을 확인하고 주인을 정하도록 하자.”
무신의 비급의 종류는 최소 수백 가지다.
여태껏 만났던 추종자들이 선보인 무공의 개수만 해도 족히 100개에 달했으니 합당한 추론이다.
만약 비급에 창술이 담겨있다면 폰에게, 방패술이 담겨있다면 반트너에게 양보하는 식으로 그리드는 비급을 나눌 생각이었다.
자신에게는 도움도 안 되는 비급을 굳이 공을 앞세워서 독식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부디 이 기회에, 자신을 대신해서 제국과 싸우다가 피해를 입었던 동료들이 피해의 일부라도 수복하길 바랐다.
“옳은 생각이십니다.”
라우엘이 그리드의 의견에 동감하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십공신들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 역시 강해져야했기에.
이 이상 강해지지 못했다가는 평생 그리드의 발목만 붙잡을 것이었기에.
‘언제까지고 신세만 질 수는 없어. 기왕 신세 지는 김에 크게 지고 나중에 몇 배로 갚는다.’
십공신들이 다짐했고.
‘대인배로군.’
휴렌트와 스컹크는 속으로 크게 놀라고 있었다.
누가 봐도 무신의 비급의 권리는 그리드에게 있는 상황.
한데 그리드는 그것을 동료들과 공평히 나누겠노라 선언했다.
보통의 길드 마스터는 쉽게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이다.
조직을 운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망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알고도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간과하게 마련이니까.
‘탁월한 리더다.’
라우엘의 추천대로 템빨단 산하로 들어가도 좋지 않을까?
동료들에게 당당하게 그리드를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
스컹크가 생각할 때였다.
딸칵.
드디어 그리드가 비급함을 열었다.
순간.
쏴아아아아아아아-
상자로부터 오색찬연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온갖 밝은 색이 순차적으로 교차하며 폭사했다.
템빨단원들과 스컹크, 그리고 칠공작들의 기대감이 증폭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화려한 연출이었다.
그리드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걸렸다.
‘이거 랜덤 뽑기 같은데?’
계속 다른 색이 교차하는 연출 효과를 보니 분명하다.
비급함은 뽑기 시스템이다.
순전히 운에 의해서 등장 비급이 결정되는.
하긴, 비급의 종류가 많은 만큼 비급마다 가치가 다를 테고 등급이 다를 것이다.
뽑기 시스템이 채택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다.
‘그리고 운하면 바로 나지!’
내게는 행운 스탯이 있다.
나는 이제 과거와 다르다.
행운의 여신이 내 곁에 있다.
‘최상급 비급이 나오겠군!’
믿어 의심치 않은 그리드의 자신감과 기대감이 고조됐고.
띠링~
비급함에서 뿜어지던 빛이 잠잠해지더니 안에 담긴 내용물이 정체를 드러냈다.
[<경공술:능공허도(凌空虛道)>의 비급을 획득하였습니다!]
<경공술:능공허도(凌空虛道)>
종류:스킬북
등급:레전드리
하늘을 유유자적 누빌 수 있는 전설적인 수준의 경공술이 담긴 비급입니다.
습득 조건:민첩성 8,000.
“.....”
“.....”
비급의 내용을 확인한 템빨단원들의 낯빛이 똥색으로 변했다.
습득 조건을 보니 ‘무신이 보여준 무의 길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한탄하던 추종자의 말이 이해가 갔던 것이다.
한데 정작 그리드의 표정은 밝았다.
[무신의 비급을 획득하여 <비급 조합>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10개의 손상 된 비급과 1개의 온전한 비급을 합성하여 새로운 비급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 같은 종류의 비급만을 얻을 수 있고 비급의 등급이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공술 비급을 합성하면 경공술 계열 비급만 나온다 이건가?”
동료들에게 비급 조합 시스템을 알려준 그리드가 질문하자 라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요.”
“지금은 조합해서 등급을 낮추는 게 도리어 좋은 거겠지?”
“그럼요. 추종자들이 굳이 손상 된 비급을 갖고 다닌 이유가 뭔지 이제야 알겠군요.”
민첩성 8천은 플레이어가 이루기 힘든 경지다. 설령 이룰 수 있다고 해도 앞으로 몇십 년이 더 걸릴지 몰랐다.
비급의 등급을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습득 조건을 완화시키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