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900화 (895/1,794)

템빨 49권 - 3화

[사하란 제국의 공작 ‘그렌할’과의 호감도가 50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렌할은 당신과 언제라도 식사할 의향이 있습니다.]

[사하란 제국의 공작 ‘모르이즈’와의 호감도가 30이 되었습니다. 모르이즈는 당신의 가벼운 농담에도 싱글벙글 반응할 것입니다.]

[사하란 제국의 공작 ‘바사라’와의 호감도가 62를 달성하였습니다. 바사라는 당신이 어떤 부탁할지라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입니다.]

“.....”

제국의 공작들과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그리드는 감회가 새로웠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이들이 지금은 호의와 찬사를 보내오는 것이다.

그리드는 작금의 상황이 꿈만 같았다.

뭔가,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보람을 느꼈다.

기쁘면서도 얼떨떨했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에 빠졌다.

‘왜 하필 바사라의 호감도가 제일 높지?’

칠공작들의 수장격인 그렌할과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심지어 무방비하게-손재주를 억제하지 않고- 악수를 나눈 탓에 반동이 생기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서 생명의 은인이 된 계기로 그렌할과의 호감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바사라와의 호감도는 왜 이렇게까지 높아진 건지 잘 이해가 안 됐다.

그녀는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성격인 듯했고 다소 무심한 면이 있어서 대화조차 몇 마디 나눠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알다가도 모르겠군....’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폭포로 시선을 돌렸다.

브라함에게 마나를 빼앗긴 여파로, 53개의 폭포수는 최초의 기세를 잃고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무신의 추종자가 보였다.

10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

양반 가람보다는 한 수 정도 아래인.

그렇기에 궁극의 실력자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최강자가 반쯤 주저앉아 있었다.

덜덜 떨리는 두 다리는 살갗이 뭉텅이로 찢겨나가 있었고 왼쪽 팔과 귀는 아예 잘려 없었다. 목덜미에서는 피가 철철 흐른다.

조금 전까지 홀로 칠공작과 십공신들을 압도했던 위용을 잃고 초라할 뿐이었다.

‘빨리 마무리 짓는 편이 좋겠군.’

무신의 추종자의 남은 생명력은 이제 1할이 채 안 되는 수준. 몸 상태도 성치 않아 본래의 실력을 발휘할 가능성은 무척 적다.

“이만 일어나시오.”

“예, 전하.”

저벅.

기사들의 부복을 푼 그리드가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는 어서 빨리 추종자에게 최후의 일격을 꽂아 넣고 싶었다.

혹시라도 회복했다가는 난감했고, 브라함이 잠든 것을 눈치 챈 무신이 또 다시 접신을 시도할까봐 두렵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막타는 내꺼야!’

칠공작에게 막타를 뺏기면 안 되니까 서둘러야한다.

저벅. 저벅.

추종자와의 거리를 점차 더 좁혀나가는 그리드의 두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추종자가 과연 얼마나 많은 경험치를 줄지 기대하는 한편 ‘온전한 비급’을 꿈꿨다.

5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들이 가끔 드롭하는 비급은 죄다 훼손되어 있어서 스킬북으로서의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파그마의 검무.”

추종자와 거리가 좁혀진 순간 그리드가 춤사위를 펼쳤다.

체내의 검기와 마나가 동시에 빠져나가는 감각이 들면서 신을 겨누는 검에 푸른 검기가 맺혔고 4종류의 마법이 동시에 개화되기 시작했다.

연살화극(極殺花落)의 전조다.

순간.

[검술과 마법이 합일의 경지를 이뤘습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하는 추종자를 겨냥하고 있는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세상은 당신 같은 존재를 마검사라고 일컫습니다.]

[당신을 규정하기 위해서 새로운 직업을 부여합니다.]

[서드 클래스, <서사시의 마검사>를 획득합니다!]

띠링~

<서사시의 마검사>

등급:레전드리(성장형)

파그마의 힘을 계승하고 브라함의 가호를 받아 탄생한 마검사.

그의 서사는 전설로 시작하여 신화로 마무리 될 것이다.

[<서사시의 마검사> 직업 효과로 자원 <검기>와 <마나>가 영구적으로 20퍼센트 상승합니다.]

[<서사시의 마검사> 직업 효과로 검술과 마법이 일체화 된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영구적으로 10퍼센트 감소합니다.]

[<서사시의 마검사> 직업 효과로 근력과 지력 스탯이 영구적으로 100씩 상승합니다.]

[<서사시의 마검사> 직업 효과로 앞으로 레벨 업시 2개의 스탯 포인트를 추가로 얻습니다. 추가로 얻는 스탯 포인트는 근력에 자동 투자됩니다.]

[<서사시의 마검사>가 신화 등급으로 성장할 경우 더 많은 이로운 효과가 추가됩니다.]

[당신의 격이 크게 상승했습니다. 당신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격의 상승으로 특수 패시브 <진원진기>가 생성되었습니다.]

★진원진기★

보유량:3

진원진기 하나를 소모해서 특정 능력치 하나를 2배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지속 시간은 1분입니다.

진원진기를 전부 소모할 경우 모든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2배 하락합니다.

*진원진기는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

진원진기.

그 개념을, 그리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메르세데스의 머리가 백발이 되게끔 만든 원흉이니까.

곱등이와 대적하기 위해서 진원진기를 끌어냈던 그녀는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분적인 노화를 맞이했고 아름다운 푸른 머리카락을 잃었다.

그때의 메르세데스를 떠올리자 죄책감에 휩싸인 그리드가 질끈, 입술을 깨물며 상념을 털어냈다.

‘난 죽어도 이거 안 써.’

고작 3번밖에 쓸 수 없는, 원초적인 생명력.

3번 모두 사용할 경우에는 모든 스탯이 영구적으로 절반 하락.

폐인이 되는 셈이다.

겁나서라도 건드리지 못한다.

쿠쾅-!

쿠콰콰콰콰쾅!!

인챈트 웨폰, 디텍트 포스, 라이트닝과 윈드 커터.

무려 4개의 마법이 깃든 연살화극의 검무가 추종자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호신강기를 펼친 추종자는 반격의 무술을 활용하여 그리드에게 저항했지만 반쯤 주저앉은 채 외팔만으로 버틴다는 건 무리였다.

결국.

그리드가 초연화와 극살, 하회를 비롯한 파그마의 검무를 연속적으로 더 사용하자.

“큭....! 쿨럭....!”

추종자는 모든 생명력을 잃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녀석이 남긴 말은.

“고맙....다.”

“....!”

너무나도 의외였기에, 그리드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여태껏 만났던 추종자들은 죽어도 다시 같은 자리에서 리젠되는 몬스터였던 반면.

“내 이름은 멀린.... 무신이 보여준 무의 길을 쫓아 모든 것을 버리고 50년을 수련해왔지만....”

10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는 대화까지 가능했던 대상이다.

“....끝이 보이지 않아 절망 속에 눈이 멀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드디어 끝이구나. 나는, 안식을, 반긴다.”

몬스터가 아니라 차라리 NPC에 가까운 것이다.

쏴아아아아아--

자신의 이름을 멀린이라고 밝힌 추종자가 잿빛으로 산화하기 시작했고.

까드득!

그리드는 이를 갈았다.

새로운 직업을 얻었다는 기쁨은 좀처럼 느끼지 못한 채, 그는 무신 제라툴에게 큰 분노를 느꼈다.

멀린에게서 파그마의 모습이 투영됐기에 느끼는 분노였다.

‘너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모멸하고 농락한 거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파그마와 브라함처럼 고통 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끔찍하다.

느끼는 순간.

[무신 제라툴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내게 이를 드러내는가.

무신의 패기 넘치는 음성이 뇌리에 들려왔다.

그리드의 태도를 괘씸해한다거나 불쾌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당연하다.

무신 제라툴은 더 없이 교만한 존재.

한낱 인간이 자신을 향해 적대감을 품었다고 해서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리드의 얼굴이 더욱 무섭게 일그러졌다.

무신의 여유 넘치는 작태가 얄미운 것이었다.

이미 어떤 저주가 그리드를 좀먹고 있었다.

무신과 접신했던 추종자를 해치운 여파로 발생한 저주였다.

[주체할 수 없는 화가 느껴집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분출하고 싶습니다!]

[적아의 구분이 불가능해집니다!]

“큭....!”

빙글, 그리드의 시야가 붉게 물들더니 한 바퀴 크게 회전했다.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뀐 듯한 혼란에 휩싸인 그리드의 몸이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쿠워어어어-!

간신히 정신을 바로 잡고 보자, 그리드의 주변에는 어느새 추종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몰려온 건지 숫자가 족히 3백이 넘었다.

칠공작들과 기사들은 물론이고 소중한 동료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 새끼들이....!”

그새 내 동료들을 해쳤다고?

눈에 핏대를 세운 그리드가 검무를 추기 시작하는 순간.

-진정해라.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가 당신을 다스려줍니다.]

“그리드...! 그리드! 정신 차려!!”

“아.....”

붉게 물든 채 정신없이 회전하던 그리드의 시야가 정상적으로 회복됐다.

그리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수백의 추종자들이 사라지고 동료들과 칠공작들, 그리고 기사들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설마....’

내가 조금 전 보았던 추종자들이 사실은 이들이었다고?

내 손으로 이들을 해칠 수도 있었다고?

신의 저주.

그 형벌의 무게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달은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두려움에 떠는 그의 어깨를.

“왜 그래? 귀신이라도 봤어?”

유라와 지슈카를 비롯한 동료들이 붙잡아 주었다.

그들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따뜻한 눈빛으로 그리드를 바라볼 뿐.

그것만으로도 그리드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귀신은 아니고. 괴물을 봤네.”

피식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리드가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모르는 새에 당한 저주로 인해서 통제가 안 됐던 감정을 차분하게 다스렸다.

10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를 해치운 대가로 무려 20퍼센트의 경험치가 올라있었다. 다만 이번에도 역시 온전한 비급은 얻지 못했다. 훼손 된 비급만이 인벤토리에 들어와 있을 뿐이었다.

‘제대로 된 보상은 저 안에 있는 건가?’

추종자가 죽은 자리를 미련 없이 떠난 그리드가 걸음을 옮겨 폭포 뒤쪽으로 향했다.

본래 추종자가 지키고 있던 자리였다.

스컹크의 추측에 의하면 보물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은 공간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그곳은 온통 벽화로 도배되어 있었다.

마치 불교의 벽화처럼 색채가 화려하면서도 신비롭고 동시에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그런 몽환적인 그림들이 모든 벽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해석에 엄청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군요.”

규모를 본 스컹크가 침음했다. 답이 없다는 듯이 혀를 내두르고 있으나, 반짝이는 눈을 보니 굉장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벽화의 내용을 하나씩 풀어갈 때마다 알게 될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대되는 것일 테지.

생각하면서, 그리드는 자신의 통찰력을 이용해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리고 작은 동굴의 입구를 하나 발견했다.

“내가 먼저 들어가 보겠다.”

성큼 동굴에 진입하려는 그리드를 붙잡아 세운 페이커가 조심스러운 보폭으로 동굴에 진입했다.

어쌔신인 그는 함정을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곧 안전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그가 일행에게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동굴은 약 100미터 깊이로 그다지 크지 않았다.

“저건....”

동굴의 끝.

커다란 벽화가 있었다.

개미처럼 작게 그려진 인간들이 하늘을 향해서 절을 올리는 그림이었다.

그들이 절을 올리는 대상은 명확하지 않았다.

하늘 위에는 단지 붉은 광채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태양은 아니었다.

그 광채는 태양보다 찬란하고 거대하게 표현되어 있었으니까.

“장소의 특성 상 무신을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소견을 밝힌 스컹크가 벽화에 가까이 다가가 섰다.

그리고 그림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신을 숭배하는 그림치고는 조금 이상합니다. 보통 이런 그림 속에 묘사되는 인간들은 간절하거나 환희에 찬 표정을 짓게 마련인데 이 그림 속의 인간들은 하나 같이 절규하고 있군요.”

순간.

구오오오오-

동굴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땅이 솟구쳐 올랐다.

솟아오른 지면은 제단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그 위에는 낡은 상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비급함>

“이것도 자물쇠가 달렸.....”

열쇠를 찾아야한다는 말을, 스컹크는 끝까지 잇지 못했다.

딸칵.

어느새 만능 열쇠를 꺼낸 그리드가 자물쇠를 열어버렸기에.

‘개사기.’

스컹크가 혀를 내둘렀다.

***

같은 시간, 유적지의 해안가.

“드디어 도착했군.”

제국의 함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2배 이상 더 걸린 항해 끝에 도착한 원군이다.

“저건....?”

함선에서 뛰어내린 취공 디아스가 템빨국의 국기가 달린 함선이 정박해 있음을 발견하더니 히죽 웃었다.

“못 다한 전쟁이 여기서 계속되겠군.”

취공 디아스는 적국의 왕 그리드를 코앞에서 놓친 전력이 있다.

그것은 장수로서 더없는 수치였고 반드시 만회해야할 실수였다.

“기다려라, 템빨왕.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목을 따주마.”

참고로.

디워스는 그렌할, 모르이즈, 바사라와 비교해서 권세도 무력도 한 수 아래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