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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95화 (890/1,794)

템빨 48권 - 20화

대악마 베리드의 출현이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흥분시켰다.

대량의 부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랭커들과 길드들이 베리드 레이드에 도전했다. 기존의 강자들뿐만 아니라 은밀하게 힘을 비축해온 세력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처참하게 실패했다.

때로는 수십 명이, 때로는 수백 명, 수천 명이 베리드의 거짓말과 연금술 앞에서 죽어나갔다.

베리드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고 베리드가 발을 딛는 모든 땅이 폐허로 변했다.

특히 대륙 동부의 왕국 2개가 수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하켄 왕국의 도시 사갈티나가 멸망하였습니다.]

[하켄 왕국의 도시 아갈르나가 멸망하였습니다.]

[로테몬 왕국의 도시 게르온이 멸망하였습니다.]

[로테몬 왕국의....]

수십 개의 마을과 도시가 지도에서 사라졌다.

군대조차도 베리드를 막지 못했다는 뜻이다.

플레이어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베리드의 손에 멸망하는 영토가 많아질수록, 자신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과 사냥터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어서 빨리 베리드를 없애야 한다고.

이대로는 우리가 설 땅이 사라질 거라고.

지금만큼은 랭커들도 합심해야할 때라고.

이제 베리드 레이드는 부를 쫓는 기회가 아닌,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 기회로 승격했다.

더욱 더 많은 길드들이 영웅이 되고자 도전장을 내밀었다.

랭커들도 경쟁을 잠시 잊고 협력해서 베리드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또 모조리 패배했다.

레이드에 재도전한 아레스 군단을 포함한 대규모 원정대가 베리드의 생명력을 절반이나 깎는 쾌거를 이뤘으나, 생명력이 떨어지자 새로운 페이즈에 접어든 베리드는 더욱 더 막강한 힘으로 원정대를 궤멸시켰다.

이후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계속되는 전투 과정에서 충분한 ‘영혼’을 확보한 베리드가 그것을 제물로 삼아 지옥문을 열고 자신의 첫 번째 군단을 소환했다.

이제는 군단까지 거느린 베리드는 더욱 더 막강해졌고 대륙의 황폐하는 가속화됐다.

하켄 왕국과 로테몬 왕국이 멸망 직전에 몰렸다.

그 왕국들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플레이어들은 삶의 터전을 거의 잃었다.

인계에 악마들이 날뛰기 시작하자 기존의 규칙과 치안이 무너졌고 수많은 플레이어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베리드 레이드는 부와 명예를 좇는 수단이 아닌, 플레이어 전체를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할 공통의 문제가 되었다.

초조해진 사람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템빨단은 왜 나서지 않느냐고.

왜 이 재앙을 외면하느냐고.

무책임하다며 비난했다.

웃기는 일이다.

벨리알 레이드를 독점했다고 비난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또 나서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잖은 사람들이 템빨단에게 일방적인 잣대를 들이댔다.

물론 라우엘은 그들의 비난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템빨단은 사조직이다.

굳이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사람들의 바람에 부응해줄 이유도, 의무도 없다.

더군다나 충분한 명분이 있었다.

“아직 우리는 베리드에게 도전할 여력이 없습니다.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유적지를 탐사하는 일이 최우선이에요. 우리가 없는 동안 베리드가 레이드될 가능성도 낮으니 일단은 방관합니다.”

접속 제한 시간 때문에 게임에서 로그아웃한 라우엘.

새로 뜬 기사들과 여론의 상황을 전부 확인한 그가 길드원들에게 메일로 보낸 공지 내용이다.

그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다.

***

제국 진지 사령관 막사.

그리드와 십공신, 그리고 칠공작과 스컹크가 서로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렌할이 그리드의 정면에 앉은 것을 보아, 그의 권위가 칠공작 중에서도 으뜸인 듯했다.

“임시로나마 손을 잡게 되었으니, 현재 우리의 사정을 솔직하게 밝히고 여태까지 우리가 확보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주도록 하겠소.”

운을 뗀 그렌할이 바사라에게 시선을 돌리자 바사라가 설명을 시작했다.

“병사 4,959, 기사 300. 우리의 병력은 총 5,259명 입니다. 그러나 병사들의 전투력은 추종자들 앞에서 무용지물이었고 기사들은 함정에 무력했죠. 그간 실질적으로 싸워온 사람은 우리 셋이 전부에요.”

천하의 제국군이 이런 작은 섬에서 고초를 겪고 있었단다.

저 고귀한 공작들이 고군분투 해왔다니, 솔직히 잘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바뀌었죠. 전하께 열쇠가 있으니까요. 앞으로는 기사들까지 전력에 포함시킬 수 있게 되었네요. 기사들의 실력은 여덟이서 추종자 하나를 격퇴하는 수준이니 큰 도움이 될 거에요.”

십공신들은 2개의 비급을 습득한 추종자들과 싸워본 경험이 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십공신 둘이 힘을 합쳐야 추종자를 쓰러뜨릴 수 있었지만, 이제는 시간이 꽤 지났고 그동안 성장해왔으니 1대1도 가능할 터였다.

한데 기사들은 8대1을 해야 한다고 한다.

어깨가 으쓱해진 극검이 입 꼬리를 올렸다.

‘칠공작의 기사라고 해도 우리보다는 못하군.’

역시 우리 십공신은 강하다.

아까 칠공작 앞에서 병풍이 됐던 건.... 다만 칠공작이 너무 대단했을 뿐이다.

애써 자위하며, 자부심을 갖기 위해 노력하던 극검이 귀를 의심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5개의 비급을 습득한 추종자를 상대할 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밀림을 배회하는 추종자 대부분은 5개의 비급만 익힌 상태에요. 여태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말하건대 최소한 밀림지역만큼은 어떻게든 돌파할 수 있을 겁니다.”

별이 다섯 개.

라는, 인터넷에 고전 짤방으로 돌아다니는 광고 멘트가 극검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다섯 개’라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는 뜻이다.

‘....미친. 5개라고?’

2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조차도 간신히 1대1이 가능한 수준인데 5개?

극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유적지의 난이도가 예상보다 훨씬 높았고 칠공작들의 기사는 역시 강했으니 여러모로 근심이 앞섰다.

하지만 정작 다른 이들은 태연했다.

전 체다카 길드원 출신들.

Satisfy가 출시되기 전부터 온갖 게임을 섭렵했던 그들은 유적지의 추종자들이 더 강할 거라는 사실을 쉽게 예측하고 있었으니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유라와 크리스, 그리고 유페미나와 카츠는 순전히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 동요하지 않았고.

‘나만 불편해?’

극검이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끼는 동안에도 라우엘과 바사라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밀림 너머에 무엇이 있느냐가 궁금하시겠지만 그건 아직 저희도 모르겠네요.”

“그보다 의문인 건 ‘어떻게든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불확실한 의견에 대해서입니다. 300명의 기사와 귀하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힘을 합쳐도 밀림을 쉽게 돌파할 거라는 확신이 없는 겁니까?”

“그래요.”

“왜죠? 밀림을 돌파하기 어려웠던 문제는 함정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드 전하께서 함정을 해결해주시면 문제점이 사라지는 것이니 일이 수월해져야 정상 아닙니까?”

“함정은 가장 큰 문제점일 뿐이고 그 외 또 다른 문제점들이 있어요.”

“그게 뭡니까?”

라우엘이 따박따박 질문했다.

소국의 귀족이 제국의 공작 앞에서 이렇게 말이 많은 경우는 또 처음이다.

하지만 바사라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일시적으로나마 협력 관계를 맺게 된 이상 상대를 존중하는 게 당연했고, 또한 애초에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예정이었으니까.

“추종자들이 각자 익히고 있는 비급의 내용이 달라요. 저마다 다른 형태의 무기를 다루며 어떤 추종자는 호신강기를 둘러서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어떤 추종자는 신묘한 경공술을 이용해서 정신을 현혹하죠.”

말의 요지는 간단했다.

추종자는 여럿이 모일수록 더 강한 전투력을 발휘한다는 것.

기사 여덟이 1명의 추종자를 격퇴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8대1의 구도가 나왔을 경우의 이야기였다.

“추종자가 10명이고 기사가 80명일 경우에는 기사들이 무조건 패배합니다. 저와 그렌할 공, 그리고 모르이즈 공이라 할지라도 한 번에 10명 이상의 추종자를 상대하게 되면 힘들 거예요.”

함정이 있을 때는 5명을 상대하기도 벅찼지만 그나마 나아진 것이다.

라우엘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행군 중에 다수의 추종자와 조우할 경우에는 패퇴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기겠군요.”

“맞아요. 추종자는 기본적으로 혼자 배회하지만 전투가 발생하면 근처에 있던 추종자들이 금방 몰려오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퇴각해야하는 일이 자주 발생할 거예요. 그리고 추종자들은 몬스터처럼 죽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부활해요.”

“이런.....”

퇴각을 반복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야 어느 세월에 밀림을 돌파하게 될지 모른다.

‘너무 시간을 끌면 베리드가 걱정인데.’

베리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군단을 소환하며 세를 키우는 중이다. 결국 우리가 레이드할 예정인 녀석을 점차 강해지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

“시간을 끌어선 안 좋습니다. 혹시 원군은 없습니까?”

“총 다섯 대의 함선이 보름 전에 갈레스트로부터 출항했어요.”

“보름 전....?”

“사고가 생긴 거겠지요.”

“.....”

결국 원군은 도착할 것이다.

첫 번째 원군이 설사 불상사를 당했다고 해도 제국은 두 번째, 세 번째 원군을 계속해서 새롭게 파견할 테니까.

하지만 그때는 이미 시간이 지체된 후다.

‘경우에 따라서는 유적지 탐사와 베리드 레이드의 순서를 바꿔야할 수도 있겠군. 그렇게 되면 우리가 없는 동안 제국이 유적지 보상을 독점할 수도 있고. 최악이군.’

이때까지는 천재 라우엘도 쉽게 유추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국의 원군이 도착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누구 때문인지....

설마 ‘그’가 그 정도로 열심히 활약하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활약이 트롤링으로 변질 될 가능성이 높아서 문제였지만.

***

2시간 후.

라우엘과 바사라를 주축으로 진행 된 회의가 끝났다.

충분한 정보가 교환됐고 향후 계획과 지휘 체계 등이 완성됐다.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출발합시다.”

회의 내내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

칠공작들 앞에서 팬티 만드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멀뚱멀뚱 앉아 이야기만 듣고 있었더니 좀이 쑤신다.

의욕적으로 나서는 그리드의 모습에 스컹크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이제 거사를 진행하시는 건가.’

그리드는 열쇠 조각을 모으지 못했다.

칠공작들을 무슨 수로 속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함정을 해제할 수단이 없다.

그리드가 칠공작들을 밀림으로 유인한 후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처리할지, 스컹크는 상상만으로도 두렵고 무서웠다. 그간 정이 든 칠공작들이 안타까워 도와줘야하는 건 아닌가 고민도 되었다.

스컹크가 망설이는 동안 그리드 일행과 칠공작들은 출정할 채비를 마쳤다.

“갑시다.”

“....네.”

당연히 스컹크도 함께 출정했다.

유적지의 비밀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그가 탐사에서 열외 되는 건 말이 안 됐으니까.

“.....”

스컹크의 표정이 어둡다.

그는 어느새 밀림 앞에 도착해 있었다.

온갖 함정 때문에 동물이 살지 못하는 밀림.

적막하고 불길하다.

두근. 두근. 두근.

스컹크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리드 일행이 칠공작들을 어떤 식으로 덮칠지 걱정되는 한편 순수한 호기심도 생긴다.

스아앗-

그리드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인벤토리 속으로 그의 손이 스며들었다.

‘지금이라도 말려야.... 아니, 그랬다가는 그리드님과 템빨단원들이 역으로 당해 죽게 된다. 아아.... 공작님들, 위험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던 스컹크가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외면을 택한 것이다.

그리드가 인벤토리에서 검을 뽑는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한데.

딸칵.

그리드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아이템은 무기가 아닌 열쇠였다. 그의 만능 열쇠가 나무에 설치 된 함정을 해제해버렸다.

“....?”

갑자기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놀라 눈을 뜬 스컹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딸칵! 딸칵! 딸칵!

그리드는 눈에 보이는 나무마다 다가가서 열쇠를 꽂아 돌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 의해서 밀림의 함정들이 낱낱이 해제되기 시작했다.

“뭐, 뭣....”

앞선 대화에서 그리드는 열쇠 조각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열쇠도 여기서 구한 게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었다는 황당한 답변을 내놓았었다.

그렇다.

그리드가 말하는 열쇠란 유적지에서 구할 수 있는 열쇠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한데 효력을 발휘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자, 잠시만...! 도, 도대체 그 열쇠는 뭡니까!”

“이거요? 만능 열쇠요.”

“....?!”

스컹크가 뒤늦게 상기했다.

그리드의 이명은 템빨왕.

그가 지존이 된 이유는 다른 특출한 재능들 때문이 아니다.

“테, 템빨....”

그래, 템빨이다.

그리드는 세계 최고의 템빨러였다.

“음?”

스컹크의 격한 반응에 의아해하던 그리드가 별안간 칼을 뽑았다.

저벅.

살기어린 춤사위가 펼쳐진다.

“극살(極殺).”

푸욱-!

넝쿨에 은신한 채 그리드에게 접근해온 추종자.

높은 통찰력 스탯과 도살귀의 안대의 능력으로 녀석을 간파한 그리드의 습격이었다.

2융합 검무인지라 검기가 크게 소모되지 않았고 이어지는 평타로 그나마 소모됐던 검기 중 일부가 회복됐다.

쏴아아아아-

추종자가 잿빛으로 산화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0초.

“얘네, 기본적으로 혼자 다닌다고 했지? 그냥 보이는 족족 죽이면 될 것 같은데?”

갈구노스의 사원에서 출몰하는 추종자들은 정예 몬스터로 분류되는 반면 유적지의 추종자들은 일반 몬스터로 분류된다.

유적지의 추종자들이 훨씬 더 강할지는 몰라도 생명력은 낮았기 때문에 한 방에 죽일 수만 있다면 사냥하기 도리어 편했다.

어디까지나 그리드의 의견이다.

“.....”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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