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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94화 (889/1,794)

템빨 48권 - 19화

집결지에 다시 모인 십공신들이 전전긍긍했다.

“왜 이렇게 늦어?”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연락이 안 되니까 답답하네.”

약속 시간이 15분 지났다.

한데 그리드가 돌아오질 않는다.

물론, 그리드는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하다.

우리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일 사건이 그리드에게는 작은 말썽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친구로서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괜찮을 거야. 라우엘의 말대로 해안가는 안전했잖아.”

지슈카가 동료들을 안심시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도 불안한 눈치다.

무신의 유적지는 아직 미지의 영역.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분위기 속에서.

“....!?”

“....!”

라우엘이 흠칫 놀랐고, 바로 그의 뒤를 이어서 페이커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들의 발달한 기감에 괴물 같은 기척이 무려 3개나 감지 됐다.

일말의 숨김없이 발산하는 존재감.

마치 스스로를 과시하는 듯하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포효하는 것 같다.

이어서.

“응...?”

지슈카의 ‘눈’이 거대한 바위와 짐승을 포착했다.

아니, 바위와 짐승이 아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둘 다 짐승이었다.

“모두 전투 준비를.”

라우엘이 명령했다.

페이커는 이미 그림자 속으로 은신한 상태였다.

상황이 심상찮음을 눈치 챈 십공신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쥐었다.

복제 스킬들을 아끼고자, 항해 내내 단 한 번도 참전하지 않았던 유페미나 또한 오브의 마력을 활성화시켰다.

모두는 곧.

[시대의 강자를 목격하였습니다!]

[압도당합니다.]

[움직일 수 없으며 모든 능력치가 소폭 하락합니다.]

끔찍한 알림창과 대면하였다.

쿠웅! 쿠웅!

모래사장에 커다란 발자국이 새겨진다.

쌍두하마와 샤벨 타이거의 발자국이었다.

쌍두하마의 집채 같은 몸은 온통 근육으로 똘똘 뭉쳐서 마치 산이 움직이는 모양새였고, 샤벨 타이거의 송곳니는 칼처럼 길고 날카로워 사람을 꼬챙이처럼 꿰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

십공신들이 석상처럼 굳었다. 그들은 마른 침조차 삼키지 못한 채 짐승들의 위를 올려보았다.

3명의 남녀가 보였다.

샤벨 타이거의 등 위에는 반항적인 인상의 사내와 금관을 쓴 아름다운 여성이 앉아있었고, 쌍두하마 위에는 고요한 눈빛의 중년인이 앉아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맹수왕 모르이즈, 금관 바사라, 불사왕 그렌할로 표기되었으며 황금색으로 번쩍번쩍 빛났다.

라우엘이 침음했다.

“칠공작....”

이것이 바로 진정한 절대자의 위용.

라우엘과 십공신들은 그렌할과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그의 고요한 눈동자 안에 잠재 된 힘이 폭풍의 전야를 연상시켰기에 두려웠다.

언젠간 반드시 넘어서야할 적.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감히 대적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절망적이다.

“상태이상에서 풀리는 즉시 배를 타고 도망치세요.”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유라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 또한 전설.

전대와 비교하면 아직 미약하나, 그 어떤 강대한 적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굴복하지 않는다.

츠화하학-!

옥빛의 마력이 전자회로처럼 흐르는 순백의 갑옷이 소환되면서 유라의 가녀린 몸을 감쌌다.

지옥에서 히든 피스를 얻고 획득한 직업 전용 아이템, <악마 포식자>였다.

아름다운 외관과 달리 흉악한 이름을 지닌 그 갑옷은 아직 유니크 등급에 불과했지만 성능만큼은 어지간한 레전드리 등급의 갑옷을 초월했다.

철컥!

파그마제(製) 알렉스의 마법공학총검이 검으로 변한다.

완벽한 전투태세.

그리드가 이미 칠공작들에게 당했다고 판단한 유라는 무척 동요하고 있었으나, 오직 자신만이 동료들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았다. 침착하려 노력하며 시간을 벌 결의를 다졌다.

모르이즈가 이죽거렸다.

“도망치긴 어딜 도망쳐.”

제국의 공작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경박한 말투.

힐끗, 모르이즈의 시선이 그렌할에게 향한다.

정확히는 그렌할의 등 뒤였다.

그의 시선을 쫓아 눈을 돌린 십공신들이 경악했다.

그렌할의 등 뒤에 그리드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드의 안색이 창백했다.

“빌어먹을 새끼들이!”

도끼눈을 치켜 뜬 지슈카가 욕설을 토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활을 쏘고 싶었지만 여전히 손 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종합 상태이상 저항률은 무려 3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었지만 상태이상 회복 속도가 생각보다 더뎠다.

“감히 내 남자를 포로로 잡아!?”

“잠....!”

그리드가 뭐라고 외칠 틈도, 내가 왜 네 남자냐는 의문을 느낄 틈도 없었다.

타앗-!

지슈카 이상으로 분노한 유라가 이미 도약하고 있었다. 날 듯이 뛰어오른 그녀가 쌍두하마 위에 앉아있는 그렌할을 향해서 칼을 찔렀다.

쩌엉-!

그렌할은 굳이 방패를 꺼내지도 않았다.

건틀렛을 세워서 유라의 공격을 막아낸 후, 그대로 손목을 회전시켜서 유라의 칼날을 낚아챘다.

“....!”

유라의 입이 악물렸다.

항거할 수 없는 악력을 느꼈을 때는 이미, 그녀의 몸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터엉!

그대로 내던져진 유라가 모래사장에 처박혔다.

절망적인 힘의 차이.

유라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요란하게 흔들린다.

하지만 금세 혼란을 수습한 그녀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오직 그리드를 구하기 위해서 지옥 도약을 펼치려는 순간이었다.

“자, 잠깐! 진정! 진정해봐!”

그리드가 쌍두하마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포로가 된 것치고는 몸이 자유로워 보였다. 창백했던 안색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보니 상처 하나 없다.

“어휴, 정신없어 혼났네.”

그리드가 투덜거린다.

쌍두하마의 승차감이 최악인지라, 녀석의 등에 타고 달려오는 내내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을 느꼈던 까닭이다.

그냥 걸어가겠다는데 왜 굳이 사람을 뒤에 태워서는....

그렌할에게 대놓고 따지지는 못하고 속으로 핀잔을 준 그리드가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동료들에게 소개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들은 제국의 공작들이다. 유적지를 탐사하는 동안 우리의 동료가 되어줄 사람들이지.”

“뭐?”

“네?”

십공신들이 귀를 의심했다.

그리드와 함께하는 동안 놀란 일이 셀 수 없이 많다지만, 이번 충격이 가장 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기에 적국의 공작들을 아군으로 회유했단 말인가?

눈을 동그랗게 뜬 라우엘이 중얼거렸다.

“인간 자석인가....”

피아로, 아스모펠, 블란드, 스틱세이, 동대륙의 백성들, 그리고 메르세데스에 이어서 칠공작에 이르기까지.

어디 갔다만 하면 사람을 주워오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은 묵묵히 박수를 쳐주었다.

***

“그런 일이....”

도그우먼이 겪은 일을 소상히 풀어놓자 스컹크의 눈이 반짝였다.

무신의 추종자들이 해안가에 출몰하기 시작했고, 식수를 구하러 간 칠공작들은 감감무소식인 상황.

영 불안했는데 오러 마스터라는 은거기인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심지어 먼저 나서서 도그우먼 일행을 도와줬단다.

‘정의감이 넘치는 분이로군. 최악의 경우에는 그분께 의지하도록 해야겠어.’

무력이 없이는 무신의 유적지를 탐사할 수도, 적해를 건널 수도 없다.

혹 칠공작들이 잘못될 경우 스컹크 탐험대는 그대로 유적지에 갇힌 채 죽을 날만 기다려야했다.

하지만 오러 마스터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일말의 희망이 생긴다. 우리의 탐사력이 필요할 오러 마스터에게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일 테고.

‘그러나 그건 역시 최악의 경우에 선택할 일. 일단은 공작들께서 무사히 돌아오시리라 믿자.’

스컹크는 복잡한 생각을 접어두었다.

열쇠 조각들의 위치를 찾아내는 일에만 몰두해도 부족할 판에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걱정할 겨를은 없었다.

‘머지않았어.’

상급 고고학 스킬과 해독 스킬로도 풀 수 없는 단서들.

너무 먼 과거의 유적들은 마치 해답 없는 문제와 같았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인벤토리 한쪽에 고이 모셔두고 있던 옛 고서들을 일일이 참고하고 대조한 끝에 스컹크는 조금씩 해답을 찾아갔다.

무려 수십 일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해서 얻은 성과.

‘피 나는 노력을 했다.’는 표현이 조금도 과장되지 않은 노력 끝에 열쇠 조각의 행방에 다가서고 있었다.

아직은 일보 직전이라는 표현에 무리가 있었지만, 삼보 직전이라는 표현쯤은 써도 무방할 정도였다.

한창 해독에 몰두하고 있을 때.

“칠공작들이 돌아왔대!!”

환한 미소를 꽃피운 도그우먼이 헐레벌떡 달려와 외쳤다.

내심 걱정하고 있던 스컹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를 뛰쳐나갔다.

와아아아아아아!!

병사들의 함성소리가 사방을 울리고 있었다.

그들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식수가 보였다.

스컹크가 칠공작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걱정을 끼쳤나보군.”

“공작님의 무위를 알고 있으나 밀림이 워낙 위험하지 않습니까. 함정들이 공작님들의 발목을 붙잡을까 염려하였습니다.”

“함정이라면 이미 해결됐네.”

“....?”

두서없이 튀어나온 말에 스컹크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한 귀로 흘렸다.

그렌할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귀인께서 이미 열쇠를 구하셨더군.”

“....?”

여전히 알 수 없는 말.

와닿지가 않는다.

그렌할이 말하는 ‘함정’과 ‘열쇠’가 자신이 생각하는 ‘함정’과 ‘열쇠’를 뜻하는 게 맞는지 의심이 생길 지경이다.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멀뚱멀뚱 있는 스컹크에게 그렌할이 한 사람을 소개시켜주었다.

“템빨왕 전하시네.”

“....!?”

스컹크가 드디어 제대로 반응했다.

그렌할의 소개와 함께 등장한 흑발의 사내와 익숙한 면면들을 확인한 그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우리, 구면이지요?”

“그, 그리드 님....!”

함정이 해결됐다.

열쇠를 구했다.

그렌할 공작의 터무니없는 말들이 이제야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그리드의 손을 덥썩 붙잡은 스컹크가 솔직하게 감탄했다.

“이곳에 가장 먼저 도착한 저조차도 아직 단 하나의 열쇠 조각을 얻지 못했는데, 그리드 님께서는 이미 열쇠를 완성하셨다니 정말 놀랍군요. 과연 대단하십니다. 엄청난 실력의 탐사조직을 거느리고 계신가 봅니다.”

검의 무덤 사건에서 알게 됐다.

그리드의 눈과 귀가 대륙 전역에 깔려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황 상, 그리드가 거느린 인재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은거기인으로 알려져 온 저 오러 마스터조차 지금 이 순간 그리드의 곁에 있지 않은가.

‘휴렌트님의 일행이 템빨단이었을 줄이야... 이미 많은 탐험가 랭커들이 그리드님께 고용 된 상태일 수도.’

나 혼자서는 열쇠 조각들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지만, 나와 비등한 실력자 여럿이 힘을 합쳤다면 이미 열쇠를 완성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유능한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누구일지 궁금하기는 하군.’

스컹크가 조심히 청했다.

“혹시 그분들을 소개시켜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분들이요?”

“열쇠 조각을 모아오신 다른 탐험가 분들 말입니다.”

“탐험가 동료는 없는데....?”

“....그럼 열쇠는 어떻게?”

“열쇠는 원래 있었는데요.”

“....?”

대화가 좀 이상한데?

의아해하던 스컹크가 문득 헉! 하고 놀랐다.

생각해 보니 제국과 템빨국은 전쟁 중 아닌가?

그래, 공작들과 그리드는 적대관계다.

한데 지금 그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드는 열쇠라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눈치였다.

정확히 알았다면 ‘원래 가지고 있었다.’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을 리 없다.

스컹크는 정말이지 뜨악하고 말았다.

‘어떤 수법을 사용해서 공작들을 속이고 접근한 거구나!’

도대체 무슨 책략을 부렸기에 공작들이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걸까?

내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수 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정녕... 정녕 무섭도록 영리하고 치밀한 사람이구나...!’

초롱초롱!

그리드를 바라보는 스컹크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그것도 나보다 젊은 사람에게 진심어린 존경을 느끼는 날이 올 줄이야.

신선하다. 충격적이다. 흥분된다.

이날.

“그리드님은 취미가 뭡니까? 게임 안 하실 때는 대체적으로 무슨 일을 즐기시죠? 생일은? 혈액형은요? 가족 관계는?”

탐구심 강한 스컹크가 그리드 곁에 찰싹 붙어서는 질문공세를 쏟아냈다.

그리드라는 위인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이 사람 사교성 미쳤네.’

그리드가 당황하는 반면 라우엘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인간 자석!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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