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8권 - 18화
딸칵.
[열쇠가 꼭 들어맞습니다.]
[효과가 발생합니다.]
“오오...!”
거목에 있는 작은 열쇠구멍.
만능열쇠를 꽂아 돌려보니 경쾌한 효과음과 함께 알림창이 떠올랐다.
효과 발생!
그리드는 상상했다.
나무가 반으로 쪼개지며 그 안에 숨겨진 보물이 나타나는 장면을.
라우엘이 추측하기로 ‘궁극의 스킬북’일 가능성이 높은 <무신의 비급>을 손에 넣는 장면 말이다.
한데.
“....?”
나무는 미동도 않았다.
알림창이 어떤 효과가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과 달리 실질적으로 벌어진 일은 없었다.
“뭐야? 왜 이래?”
잠시 당황하던 그리드가 주변을 다시 살폈다.
온갖 종류의 식물들과 나무들이 보였고 개중 몇 개의 나무에 똑같은 열쇠구멍들이 있었다.
‘많은 만큼 꽝도 있는 건가? 더 열어보자.’
그리드가 20미터 옆에 떨어져있는 거목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함정에 빠졌습니다!]
황당한 일을 겪었다.
지면 위로 튀어나와 있는 나무뿌리를 밟는 순간 땅이 푹 꺼져버리는 게 아닌가?
쿠당탕탕!
[10,2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10미터 깊이의 땅굴.
바닥에 온갖 암기들이 설치 된 그 끔찍한 함정에 추락한 그리드가 목구멍에 끓어오른 피를 뱉어내며 중얼거렸다.
“....싸우다가 빠졌으면 죽을 뻔했네.”
이런 곳에 함정이라니?
플라이를 전개해서 땅굴을 빠져나온 그리드가 생각해본다.
‘제국군이 파놓은 건가?’
제국은 유적을 독식하고 싶을 것이다.
템빨단도 능력만 됐다면 당연히 그랬을 테니까.
먼저 이곳에 도착한 제국이 후발주자들을 방해할 목적으로 함정을 설치해놨을 가능성이 높다.
‘제국은 역시 제국이군. 함정을 이렇게 티 안 나게 설치하는 것도 엄청난 재준데.’
스탯이 오르고 경험이 쌓일수록 함정에 쉽게 빠지지 않는다.
특히 통찰력 스탯이 높은 그리드는 어지간한 함정은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자연과 완전히 동화된 것처럼 보이는, 이렇게 완벽한 함정은 생각도 못해봤고 직접 겪어보니 엄청 위협적이었다.
“악!”
혹시 또 다른 함정이 있을까, 플라이 상태를 유지해서 이동하던 그리드가 비명을 질렀다.
살랑거리는 나뭇잎사귀에 어깨가 닿자마자 나뭇잎사귀가 칼날로 변한 까닭이다.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은 그리드가 물약을 꺼내 마시며 혀를 내둘렀다.
“와, 무슨 함정 수준이....”
이건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서 발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쯤 되면 거의 권능 아닌가?
함정 설치자가 누구인지 꼭 알고 싶다.
섭외할 수만 있다면 대박일 테니.
딸칵.
고생 끝에 두 번째 거목 앞에 도착한 그리드가 다시 만능 열쇠를 꽂았다.
이번에도 경쾌한 효과음과 함께 ‘효과 발생’이라는 알림창이 떠올랐지만 보물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또 꽝이야?”
이쯤 되니 오기가 생긴다.
집결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음을 확인한 그리드가 다음 나무로 이동했다. 당연히 열쇠구멍이 있는 나무였고 이번에도 만능 열쇠가 제대로 맞물렸다.
그리고 또 아무 일도 없었다.
다음 나무도, 그 다음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도중에 몇 번이나 함정에 빠져서 물약만 낭비한 그리드가 머리 위의 노에를 노려보며 말했다.
“열쇠 꽂아도 아무 것도 안 주는데?? 어떻게 된 거냐?”
“그걸 왜 나한테 따지냐옹?”
노에는 기분이 무척 좋아보였다.
하늘에서는 따뜻한 햇살이 떨어지고 선선한 바람이 털을 포근하게 쓰다듬어주었으니 배를 내밀고 뒹굴 거렸다.
자신의 머리를 침대 삼은 돼지 고양이 때문에 목이 뻐근해진 그리드가 투덜거렸다.
“하여간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우레석을 먹고 진화한 노에.
사기적인 스킬을 개화했으나 존재감은 예전만 못하다.
아직 그리드가 많이 약했을 때는 노에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그리드가 너무 강해져서 노에의 비중도 떨어진 것이다.
노에가 다시 눈에 띄는 활약을 하기 위해서는 골렘 침공전 때의 최종진화 골렘처럼 엄~청나게 강하면서도 영혼 섭취에는 저항 못하는, 그런 좀 특이한 케이스의 강적이 나타나야할 터인데.... 글쎄? 그런 적이 과연 흔할까?
‘애초에 그런 강적이 나오는 일은 없기를 바라고.’
차라리 노에가 활약할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리드가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노에를 아끼는 이유. 그건 노에의 전투력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냥 노에가 좋다.’─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까닭이다.
‘그래, 넌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 있어라. 가끔 잡일이나 하면서.’
설마 멤피스에게도 수명이 있는 건 아니겠지...?
설령 있더라도 나보다는 길겠지?
최근, 어째서인지 다시 검게 변해가는 노에의 털.
그르릉, 그르릉 거리며 꼬리를 살랑거리는 녀석의 털을 한 번 쓰다듬어준 그리드가 다음 나무로 이동해서 열쇠를 꽂았다.
이번엔 부디 당첨이길 바라며.
하지만 역시 또 꽝이다.
효과가 발생했다는 알림창이 떠올랐으나 그게 도대체 무슨 효과인지는 알 도리가 없....
“....어?”
한숨 쉬며 주변을 살펴보던 그리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나온 길에 자신을 괴롭혔던 함정들 중 일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함정 해제?’
드디어 그리드는 열쇠구멍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상적인 생각이 가능해졌다.
여전히 밀림 곳곳에 존재하는 ‘열쇠 나무’들을 확인한 그가 합당한 추론을 세웠다.
‘제아무리 제국이라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백 개의 함정을 설치했다는 건 불가능해.’
이 함정들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다.
어쩌면, 함정을 해제하는 일이야말로 유적지의 핵심 공략법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만능 열쇠를 보유한 나는 제국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뜻.
‘와.... 이건 진짜 필요할 때마다 한 건씩 해주네.’
그 옛날.
단지 ‘필요해서’ 만들었던 만능 열쇠.
이건 진짜 보면 볼수록 말도 안 되는 사기 아이템이다.
오히려 현재 시점의 그리드는 창조할 수 없을 것이다.
옛날과 비교해서 무척 신중해진 그리드는 창조 아이템을 구상할 때 많은 부분을 고려하였으며, 그 과정이 오히려 상상력에 제약을 주는 경우가 발생했으니까.
‘지금이었으면 이런 아이템을 만들 발상조차 못했겠지. 이런 사기 아이템은 당연히 못 만들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발상 자체가 차단됐을 거야.’
때로는 단순해질 필요가 있을 듯하다.
작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다.
....!
밀림 안쪽에서 들려오던 온갖 파열음이 어느 기점부터 안 들린다 싶었는데.
타탓! 타타탓!!
누군가 수풀을 헤치며 달려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템빨왕....!”
거지꼴의 남녀 3명이 튀어나왔다.
[시대의 강자를 발견하였습니다!]
[영웅왕의 투지가 끓어오르기 시작합니다!]
“....!!”
그렌할, 모르이즈, 바사라.
순식간에 타오르는 투기에 휩싸인 그리드가 그들 세 사람을 알아봤다.
황제의 부름을 받아 제국을 방문했던 당시 함께 오찬에 참석했던 공작들이다.
바사라는 오찬 내내 그리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아름다워서 기억에 남았고, 모르이즈는 건들거리는 폼이 다른 공작들과 달라 기억에 남았으며, 그렌할은 검공 리미트, 창성 레이첼과 나란히 최고의 레벨을 자랑하고 있었기에 기억에 남았다.
아니, 설사 별다른 특징이 없었더라도 똑똑히 기억했을 것이다. 제국의 공작이라는 거물들을 기억 못할 리 없다.
‘이런 XX!’
엿 됐다.
밀림에 들어가지 말라는 라우엘의 주의를 어긴 죄다.
스캉-!
죽음을 직감한 그리드가 다급히 검을 뽑아 쥐었고.
“야! 우리가 너한테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딱히 안 고맙거든?”
모르이즈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
내게 도움을 받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가 이내 눈치 챘다.
자신이 함정을 해제했기 때문에 이들이 어떤 위기를 모면했음을.
‘그래서 나를 공격하지 않았던 거구나.’
칠공작 셋이 함께인 상황이다.
이들이 그리드를 죽일 작정이었다면 등장과 동시에 공격했을 테고 그리드는 벌써 불사를 잃었을 것이다.
한데 그리드는 멀쩡했고 공작들은 어떠한 적의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드는 세 사람의 성격을 파악했다.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들이군.’
공작들 입장에서 그리드는 적군의 왕.
보는 즉시 사살하거나 구속함이 옳다.
그들에게 그리드와의 만남은 큰 공을 세우고 전쟁을 끝내는 영웅이 될 기회였다.
한데 이들은 단지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 큰 기회를 발로 차버리고 있었다.
‘내가 어지간히 큰 도움이 됐나본데?’
기회다.
이를 빌미로 빠져나가야한다.
판단한 그리드가 최대한 침착하고자 노력하며 말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 그래도 겸상했던 사이이니 모르는 척 할 수 없었소.”
젠장, 태연한척 하려고 노력했는데 목소리가 떨린다.
솔직히 무섭다.
나를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괴물들.
자칫 일이 꼬였다가는 살해당하고 적해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남은 동료들을 지켜줄 수 없게 된다는 점이 가장 두렵다.
“그런 인간이 리갈을 죽였어?”
그리드의 말을 모르이즈가 바로 쏘아붙였다.
그리드가 뭐라고 대꾸할 필요도 없었다.
그렌할이 대신 나서주었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벌어진 일일세.”
괜한 일로 비난하지 말라는 뜻.
“...흥.”
모르이즈도 납득한 눈치이다.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딴청을 부렸다.
거대한 쌍두하마에서 내린 그렌할이 그리드에게 다가와 살짝 목례했다.
그리드는 그 행동의 의미를 몰랐으나 모르이즈와 바사라는 속으로 엄청 놀랐다.
그렌할이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춘답시고 쌍두하마에서 내리는 경우는 황제와 황자들을 알현할 때를 제외하면 없었기 때문이다.
황비 마리조차도 그렌할을 쌍두하마에서 내리게 만들지 못한다.
“고맙소. 전하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소. 하지만 당연히 순수한 호의는 아니겠지? 전하께는 우리를 도와야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게요. 그렇지 않소?”
‘없는데?’
없는 사정도 만들어야할 상황이다.
그리드가 대꾸할 말을 찾느라 궁리하고 있자니 그렌할이 혼자서 북과 장구를 쳤다.
“전하께서 거느리고 있는 전력만으로는 무신의 추종자들을 감당할 수 없었을 테지. 그래서 우리와 협력하는 그림을 그린 걸 테고.”
“.....”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탁월한 계획이시오. 전하께서는 열쇠를 완성했으니 열쇠가 필요한 우리 입장에서도 협력 제안이 무척 매력적이오. 상황을 이런 식으로 조율하다니.... 과연 나라를 일군 걸물답게 보통내기가 아니군. 폐하께서 인정하실만하오. 그동안 전하를 우습게 본 내가 한심해질 지경이군.”
그리드 입장에서는 황당한 궤변을 지껄이는 그렌할.
“확실히.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식견과 과감한 결단력이 여간내기가 아니네요.”
한 술 더 떠서 바사라가 동의한다.
모르이즈도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렌할이 그리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국 공작의 권한으로 제안하겠소. 이곳에서만큼은 전쟁을 잊고 동맹을 맺도록 합시다. 우리는 무력을 빌려드릴 테니 전하께서는 열쇠를 빌려주시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곳을 무사히 탐사할 수 있을 것이오.”
“.....”
일을 멋대로 진행해도 되나?
우선 라우엘에게 상담해야하는 거 아닌가?
그리드는 망설였으나, 잠시뿐이다.
이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국과 적대하면서 이곳을 탐사하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
그 정도 판단은 가능했기에.
“알겠소. 잘 해봅시다.”
덥썩.
그리드와 그렌할의 커다란 손이 힘차게 맞잡혔다.
“...흐앙.”
“....??”
“....??”
그렌할이 갑자기 콧소리를 흘리자 모르이즈와 바사라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험험.”
황급히 손을 빼낸 그리드가 헛기침했다.
***
S.A그룹 본사.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전개가....”
회의실에 모인 임직원들이 모니터 속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
본래 제국은 광룡 네바르탄의 폭주로 멸망할 예정이었다.
그것이 Satisfy의 기본 시나리오 중 하나다.
한데 제3차 국가대항전 결승전 내용 때문에 시나리오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제국이 존속에 성공했고, 템빨국과 전쟁을 시작하였으며, 이때 발생한 무수한 인과 중 하나로 인해서 스컹크는 무신의 유적지를 발견해버렸다.
만약 스컹크와 칠공작들이 갈레스트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현재 시점의 스컹크는 결코 적해를 항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무신의 유적지가 발견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한데 나비효과 때문에 무신의 유적지가 예정보다 훨씬 일찍 등장해버렸고 템빨국의 주요 전력들이 대륙을 떠나게 되었다.
Satisfy 운영진은 무척 난감했다.
사하란 제국과도 멀리 떨어진 땅에 강림한 대악마 베리드.
멋대로 활개치는 녀석을 레이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최상위 플레이어들의 협력이 필요한데 그리드 일행이 없으니 최악의 상황이 된 것이다.
운영진은 수많은 인명을 학살하고 지옥문을 열어 ‘군단’을 소환하게 될 베리드에 의해서 플레이어들이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거라 보았다.
그간 노력해서 일군 모든 것을 잃고 학을 뗀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접을 가능성이 높다고 계산했다.
무신의 유적지에서 시간만 낭비하고 귀환하게 될 그리드 일행조차도 군단을 소환한 베리드를 감당하지 못하리라 보았다.
그래, 시간 낭비.
그리드 일행의 현재 수준으로는 무신의 유적지를 정상적으로 탐사하는 게 불가능했다.
한데.... 한데....!!
“도대체 저 열쇠는 어디서 난 거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열쇠 조각들을 모았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
어디서 미친 열쇠를 들고 나타난 그리드는 ‘열쇠 나무’들을 손쉽게 해제해버렸다.
그리고 하필 우연히 칠공작들을 구해서 그들을 우군으로 만들었다.
“,,,,이러다가 혹시 유적지를 클리어하는 거 아닙니까?”
급기야 임원 중 하나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전개만 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헛.... 허헛....”
임철호 회장은 웃고만 있었다.
설마 그리드가 예전에 만들어놨던 열쇠 하나를 이용해서 칠공작들을 회유할 줄이야....
이건 정말 진심으로 감탄했다.
몇 수 앞이나 내다본 그리드에게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회장님.”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윤상민 운영이사가 임철호 회장에게 질문했다.
“치킨이랑 맥주 시킬까요?”
“음.”
“역시 반반이십니까?”
“음.”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두 마리 시키겠습니다.”
핸드폰을 꺼낸 윤상민 이사가 잠시 회의실을 나가려하자.
“윤 이사,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흥분한 임원들이 손가락질을 해댔다.
“여기 사람이 몇 명인데 2마리야?”
“.....”
그렇다.
이제는 다른 임원들 또한 그리드의 행보를 기대하며 즐기고 있었다.
여태껏 대부분의 일을 ‘무력’으로 해결해왔던 그리드가 무력으로는 감당 못할 상황에 직면하자 ‘지혜’로서 타개해나가는 모습.
정말이지 경이로운 볼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