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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92화 (887/1,794)

템빨 48권 - 17화

10년 이상 이어진 여정 끝에.

“…….”

드디어 목적을 달성한 브누아 황자는 묘한 탈력감을 느꼈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진실이.

어쩌면 거짓이길 바랐던 걸 수도 있다.

대악마 베리드가 쥐여 준 온갖 물증들이 야속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황자 전하! 황자 전하!!”

오래전 떠났던 제국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들려오는 부름에, 브누아 황자는 자칫 고개를 돌릴 뻔했다.

로브를 꾹 눌러쓴 그가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앙상하게 마른 몸과 똑바른 걸음걸이.

낡은 옷차림과 긴 수염.

마치 순례자 같은 모습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에게 꼭 한 번씩 인사를 건넸다.

그가 인류의 역적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하지만 모두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전하!”

기어코 달려서 따라잡은 사내가 브누아 황자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착용자에게 ‘절대 죽지 않는다.’는 전제를 붙여 버리는 마갑(魔鉀)의 주인.

첸슬러였다.

“첸슬러 경인가.”

지금의 내 몰골을 보고 어찌 나를 알아보았나 했다.

하지만 다섯 기둥쯤 되면 알아볼 만하다.

현재 나의 경지로는 적기를 완전히 갈무리할 수 없으니, 다섯 기둥의 기감을 피하지 못한다.

“송구하오나, 이번 대악마 강림 의식을 진행했다는 제사장의 행적을 쫓아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흐흐흐, 제사장이라. 레베카교인들이 나를 그리 표현하던가.”

“네. 전하의 정체를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이런 몰골이니 당연하겠지. 아, 착각하지 마라. 나는 제국을 위해서 정체를 숨긴 게 아니니까. 야탄교는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있어. 세상은 언제라도 알게 될 거다. 대악마를 소환한 인류의 역적이 바로 제국의 황자라는 사실을.”

“어찌 그런…….”

“왜? 레베카교가, 온 세상이 제국을 지탄할까 겁나나?”

“저는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 없습니다. 다만 폐하께서는 근심하실 것입니다.”

“경은 참 특이해.”

“……?”

“다른 기둥들과 달리 폐하께 진정으로 충성하지 않는가.”

“다른 기둥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베인 경은 저보다 더 폐하를…….”

“글쎄. 뭐, 그건 그렇고. 폐하께서는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알고 계셨던 거군.”

“폐하께서 모르시는 일은 없으니까요.”

“…뭐?”

브누아 황자가 망치에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토록 아끼던 부인이 병사(病死)했다고 믿는 눈 뜬 장님이 세상에 모르는 일이 없다고?

“큭……! 큭큭큭!! 크하하하하!!”

나는 과연 각오가 되었는가.

비난을 감수하고 온갖 패악을 저지를 수 있는가.

내심 두려워 사그라졌던 브누아 황자의 살의가 다시금 증폭됐다. 두 번 다시는 사그라지지 않을 기세로 더 크게, 더 맹렬하게.

“경은 정녕 그렇게 믿나? 과연 폐하께서 모든 일을 알고 계실까? 고작 나 하나 찾는 데도 10년이 넘게 걸렸는데?”

“전하의 수색은 은밀히 해야만 했기 때문에 시일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기야, 제 자식이 대악마를 소환하려는 미치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간 난처하셨을 테니. 은밀할 수밖에 없었겠지.”

“말씀을 삼가십시오.”

“뭐, 됐다. 일단 황실로 돌아가도록 하자. 안 그래도 제국으로 귀환하던 길이다.”

***

“끄응…….”

무신의 추종자와 사투를 벌인 휴렌트.

그는 모든 궁극기를 소모하고 말았다.

잡몹 하나 잡겠다고 전력을 다한 것이다.

어이가 없다.

‘이곳의 수준이 높을 거라고 듣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심하군. 고작 잡몹 따위가 이렇게 강하다니. 아니, 내가 너무 약한 거겠지.’

죽도록 노력해서 발전해 봤자 대단한 상대가 너무 많다.

다시 최고가 되고 싶다는, 무의식중에 남아 있는 열망이 나를 괴롭게 만든다.

Satisfy의 세계관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진지하게 게임 접을까 싶다.

푸욱-!

허탈하게 웃으며 마지막 일격을 꽂아 넣는 휴렌트.

“……?”

추종자가 잿빛으로 산화하자 그가 잠시 멍해졌다.

추종자에게 얻은 경험치가 거의 보스 몬스터를 사냥한 것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바다 괴물이 주는 경험치보다 2배 이상 많았을 정도다.

‘내가 약한 것도 맞지만 이놈이 강한 것도 맞네.’

이런 무서운 곳에서 내가 도대체 뭘 어째야 하는 거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휴렌트가 무신의 추종자가 떨어뜨린 낡은 비급 조각을 품에 챙겼다.

도그우먼 일행은 넋이 나가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투를 지켜본 그들은 휴렌트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었다.

“오러 마스터…….”

구시대 최강자 중 하나.

그리드에게 단 5초 만에 패배하는 수모를 겪은 후 현역에서 은퇴했다고 들었다.

한데 이곳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과거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해진 상태로.

‘칼을 갈아 왔던 거구나.’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운다는 게임계의 격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듯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도그우먼 일행이 휴렌트에게 선망의 시선을 보냈다.

분명, 휴렌트는 칠공작보다 한참 약했다.

공격력, 방어력, 생명력, 변칙성, 속도 모든 면에서 칠공작이 추종자를 압도하였으니.

칠공작이 추종자와 일대일로 싸울 경우 칠공작은 수월하게 승리했다.

반면 휴렌트는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추종자를 쓰러뜨렸다. 자칫하면 졌을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휴렌트가 추종자를 해치우는 데 소요한 시간이 단 2분도 안 된다는 점이다.

칠공작도 3분 이상 걸려서 해치우는 몬스터를 거의 2배 가까이 빨리 잡았다.

‘이게 바로 진정한 오러의 힘…….’

휴렌트는 은거기인이다.

소속 세력이 있을 가능성은 무척 낮다.

이곳에도 혼자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당장도 혼자가 아닌가?

내려지는 결론은 하나뿐.

‘반드시 동료로 섭외해야 해!’

휴렌트의 합류는 스컹크 탐험대에게도, 칠공작들에게도 큰 힘이 될 터.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쯤 저희는 모두 적해 바깥에 있었겠죠.”

휴렌트에게 다가선 도그우먼이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휴렌트 님.”

“…으음.”

도그우먼이 자신의 정체를 간파했지만 휴렌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강한 추종자와 싸우면서 온갖 스킬을 사용했으니까.

이래 봬도 옛날에는 유명 인사였으니, 자신의 스킬을 사람들이 알아볼 가능성은 무척 높았다.

한숨 쉰 휴렌트가 시스템 설정에서 소속 길드를 비공개로 바꾼 후 밀짚모자를 벗었다.

짧은 회색 머리카락과 함께, 완숙한 외모를 뽐내는 중년인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의 정체를 재차 확인하고 흥분한 도그우먼이 상기돼서 말했다.

“저희는 스컹크 탐험대에 소속된 탐험가들입니다. 현재 칠공작을 포함한 제국군과 함께 무신의 유적지를 탐사하고 있어요.”

‘칠공작들과 함께?’

“혼자이신 듯한데, 저희와 함께하심이 어떨까요? 저희에게는 선배님의 전투력이, 선배님께는 저희의 탐사력이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칠공작들과 친분을 쌓을 기회이기도 하고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흠.”

낯 뜨겁게 선배는 무슨.

뺨을 긁적이며 잠시 고민해 본 휴렌트가 질문했다.

“근처에 진지가 있는 거요?”

“근처는 아니고, 약 6킬로미터 동쪽에 진지가 있어요. 저희는 여기에 어떤 단서를 찾으러 잠시 외출한 거고요.”

“호위도 없이?”

“제국군 병사들이 호위해 줬어요. 하지만 선배님께서 오시기 전에 추종자에게 살해당하고 잿빛으로 사라졌죠.”

“그랬군. 근데 그 단서라는 건 뭐요?”

“…….”

자꾸 뭔가를 캐내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도그우먼은 다소 불쾌할 뻔했으나, 이내 당연한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이 동료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 이상, 저쪽에게는 정보를 요구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일지 아닐지 확인하는 절차인 셈이다.

“밀림의 함정을 돌파할 수 있는 단서요.”

“밀림의 함정?”

“아직 밀림에는 가 보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과연 경험자답게 현명한 선택이세요.”

도그우먼의 설명이 이어졌다.

밀림 도처에 온갖 함정이 설치되어 있으며, 함정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열쇠 조각을 모아야 한다는 사실까지 전해 줬다.

‘이 정보들을 라우엘에게 알려 주면 기뻐하겠군.’

역시 선의는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법이다.

무신의 유적지를 발견한 위대한 탐험가의 정체가 스컹크이며, 현재 스컹크 탐험대가 제국군과 함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밀림의 함정과 파훼법.

많은 정보를 얻은 휴렌트는 기분이 썩 좋았다.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그리드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걱정했는데, 밥값은 한 것 같아 안도감이 생겼다.

“이것저것 알려 줘서 고맙소. 그리고 미안하지만 함께하지는 못할 것 같군.”

“네? 하지만 혼자서는 터무니없이 위험……. 아? 혹시 일행이 있으신 건가요?”

“그렇소.”

“이런…….”

도그우먼이 난처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괜히 너무 많은 이야기를 떠벌렸다 싶어 후회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저쪽도 자연히 알게 될 사실들이었어.’

휴렌트는 생명의 은인.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았다 생각하는 편이 낫다.

마음을 정리하고 빙그레 웃은 도그우먼이 휴렌트에게 악수를 건넸다.

“동료분들과 부디 좋은 모험을 하시길 바랄게요.”

“동료라…….”

휴렌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스터와의 일전 이후, 얼떨결에 템빨단에 가입하긴 했으나 여전히 소속감은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그간 자신의 편의를 봐준 그리드에게 감사한 마음은 있었지만 템빨단원이라는 자각이 좀처럼 생기질 않았다.

이곳까지 함께 온 그리드와 십공신들을 동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딱히 싫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

휴렌트에게는 연륜이 있다.

사회에서 만난 인연과 진정한 우정과 신뢰를 쌓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다.

한데 지난 열흘 동안 지켜본 템빨단원들은 서로에게 깊은 우정과 신뢰를 느끼는 눈치였다.

타인에게 진실 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

템빨단원들의 성정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쁘지 않군.”

그들의 동료가 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아니, 혼잣말이오.”

휴렌트가 도그우먼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똘망똘망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건승하시오.”

“아……! 네! 선배님도요! 영광이었습니다!”

휴렌트의 깊은 시선에 매료된 도그우먼이 부동자세로 답한다.

휴렌트는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거물이었다. 실로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받고 있었다.

***

서쪽 해안가.

“생각한 거랑 너무 다른데.”

어깨 위에 노에를 앉힌 채, 하늘에 올라 근방을 살피는 그리드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무신의 유적지.

얼마나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근심하는 한편 기대도 했건만, 예상과 달리 너무 잠잠했으니 실망감이 생길 정도다.

“…쟤들은 살판났군.”

그리드의 발아래 지상.

템빨골들은 바위등갑게를 때려잡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다.

바위등갑게의 레벨은 250 수준.

심지어 선공 몬스터도 아니다.

주는 보상이 미미한 까닭에, 그리드 입장에서는 거들떠볼 가치조차 없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템빨골들의 사정은 달랐다.

250레벨이나 되면서 전투력은 약한 몬스터.

템빨골들에게는 달콤한 꿀과 같다.

그렇기에 마치 필생의 라이벌이라도 만난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등갑게를 후려치는 것이었다. 원체 단단한 등갑게가 꼼짝도 안 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무기를 휘둘러 댔다.

템빨골들 스스로가 성장을 갈망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얘들에게도 템빨이 필요해. 제작 능력을 극대화시켜 주는 건 역시 필수야.’

지난 몇 달 동안 고민 중이지만, 아이템 창조 2개를 템빨골들에게 투자하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점차 강해진다.

꾸준히 성장하고 진화하는 템빨골들이 강해지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결코 손해가 아니었으니까.

“음……?”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절대자의 자세.

허공에서 팔짱을 낀 채 세상을 오시하던 그리드가 문득 밀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철과 철이 부딪치는 공명음과 파공성이 아득히 들려오고 있었다.

‘제국군과 추종자들이 싸우고 있는 건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적의 전력을 파악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그리드는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밀림 안으로 들어갈까 고민했다.

하지만 길게 이어지지 않는 고민이었다.

‘칠공작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위험해.’

자칫하다가는 칠공작과 추종자들에게 협공을 당하는 수가 있다. 그럼 무조건 죽게 되고 적해 바깥으로 추방당한다.

그리드는 천공왕 리갈과의 전투를 떠올렸다.

‘녀석을 상대로는 한쪽 눈을 감고 싸우는 게 불가능했어.’

현재 그리드는 도살귀의 안대를 착용 중이었으나, 안대만으로는 거세안의 효과를 잠재울 수 없어 한쪽 눈을 감고 있는 상태다.

핸디캡을 안고 있는 셈이다.

바다 괴물 같은, 어지간한 적을 상대로는 한쪽 눈을 감고도 싸워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칠공작을 상대로는 아니다.

반쪽짜리 시야로 그들과 싸웠다가는 필패다.

반드시 두 눈을 뜨고 싸워야 했고, 이 경우 마나가 빠르게 고갈되기 때문에 마법을 거의 사용할 수 없다.

리갈과의 전투 때처럼 파그마의 검무와 십만대적검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뜻.

‘안 그래도 라우엘이 몇 번이나 주의를 줬으니.’

아직은 밀림 쪽에 관심 갖지 말자.

호기심을 애써 억누른 그리드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마침 바위등갑게를 해치우고 게딱지를 얻은 템빨골들이 하이파이브 중이었다.

“조금만 더 둘러보고 집결지로 돌아가자. 응?”

스탯빨 덕분에 그리드는 눈이 무척 좋다.

<매의 눈> 계열 스킬은 없었지만 궁수가 아닌 플레이어 중에서 그리드보다 눈이 좋은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그의 시야에 요상한 무엇이 포착됐다.

밀림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나무들 중 일부에 열쇠 구멍 같은 표식이 있는 것이었다.

아니, 표식이 아니다.

진짜로 열쇠 구멍이다.

“왜 나무에 열쇠 구멍이 있냐?”

“이 노에 님의 식견으로 봤을 때는 뻔하다옹.”

“뻔해? 뭔데?”

“열라고 있는 거 아니겠냐옹?”

“단순하기는…….”

근데 정답 같다.

‘선물이라도 들어 있나?’

그리드가 예전에 창조했던 <만능 열쇠>를 꺼냈다.

번헨 열도에서 사용한 이후 오랜만에 꺼내는 물건이다.

한편 밀림 외곽.

“미치겠군.”

칠공작들은 오직 앞만 보고 달리는 중이었다.

그들의 값비싼 갑옷이 군데군데 파손돼 있었고, 얼굴은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상태다.

늘 기품을 잃지 않는 바사라조차도 비뚤어진 금관을 눈치채지 못한 채 도망치기 바빴다.

무려 20명의 추종자들이 그들을 바짝 뒤쫓고 있었기에.

“제길!”

또다시 함정에 빠져 발목에 큰 상처를 입은 모르이즈가 욕설을 지껄였다.

그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 추종자들은 함정의 제약 없이 날뛰고 있었다.

“이건 너무 불합리하잖아!”

눈으로도, 지식으로도, 기감으로도 감지할 수 없게끔 완벽히 설치된 함정들.

어떤 함정은 넝쿨과, 어떤 함정은 나무 잎사귀와, 또 어떤 함정은 흙과 완전히 일체되어 있었으니 함정인지 아닌지 파악하기가 요원하다.

가끔 운 좋게 파악하더라도 함정의 숫자가 워낙 많아 일일이 해제하고 이동하는 것도 시간상 불가능했다.

한데 그 많은 함정들이 무신의 추종자에게는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주인을 알아본다는 듯이.

이런 장소에서 추종자들과 싸우는 건 자살행위다.

츠칵-!

화살 하나가 귓불을 스쳐 갔다.

따끔한 통증을 느낀 모르이즈가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등을 돌려 활 쏜 놈을 박살 내고 싶었으나, 그는 참았다.

식수를 운반해야 하니까.

힘들게 발견한 호수에서 확보한 식수가 가득 들어 있는 마법 주머니.

일단 이것부터 병사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이런.”

몇 걸음 앞서가던 그렌할이 갑자기 제자리에 멈췄다.

덩달아 걸음을 멈춘 바사라와 모르이즈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회전하는 톱니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가시넝쿨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우회해야겠는데.”

그럼 따라잡힌다.

주춤거리는 바사라와 모르이즈에게.

“내가 시간을 벌겠네.”

자신의 마법 주머니를 안겨 준 그렌할이 추격자들을 마주 보며 나섰다.

“그렌할 공! 아직 포기하기는 이릅니다!”

“아직 젊은 자네들과 달리 나는 자식 농사를 충분히 잘 지어 놔서 말일세. 설령 내가 죽더라도 우리 가문은 끄떡없을 거야. 폐하를 잘 보필할 테지.”

그렌할은 한 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를 말려 봤자 시간만 낭비하는 셈이었기에, 바사라와 모르이즈는 그대로 떠나려 했다.

한데 그때.

키이이이이잉…….

맹렬히 회전하던 수백, 수천 개의 톱니들이 갑자기 일제히 멈춰 버렸다.

이어서 자꾸 그물처럼 변하던 꽃들도 시들어 사라졌고, 독무를 뿜어 대던 잎사귀들이 바닥에 맥없이 떨어졌다.

“……?”

갑자기 함정이 멈추자 당황한 칠공작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가, 이내 동시에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넝쿨 사이로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열쇠 꽂아도 아무것도 안 주는데??”

거리가 거리인지라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칠공작들의 청력으로도 목소리가 희미하게 간신히 들리는 수준이다.

그리고 칠공작들은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템빨왕?”

작적금우(昨敵今友).

관계가 변해 간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어, 세상의 판도를 뒤바꿀 정도의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진정으로 값진 승리.

그것은 바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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