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8권 - 16화
무신의 유적지를 수호하는 추종자들.
그들은 어떤 비급을 습득했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전투 방식을 구사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어떤 비급을 익혔든, 하나같이 제국군의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강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활동 범위가 매우 좁았다.
밀림 내부 순찰에만 집중할 뿐, 외곽에는 잘 나오지 않았으며 해안가에는 접근조차 안 했다.
덕분에 제국군 병사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한데 어느 날 문제가 생겼다.
“3일 내에 식수가 떨어질 것 같습니다…….”
군함에 실어 왔던 식수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해안가에서 식수를 구하기란 힘든 일이다.
밀림 안을 뒤져서 호수나 계곡 등을 찾아야 했다.
“흐음…….”
그렌할, 모르이즈, 바사라 3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원군이 충분한 식수를 가져오는 중일 테지만 도착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
적해의 위험성을 고려해 봤을 때, 원군이 3일 내에 도착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통신이 불가능한 상태인지라 확인도 불가하다.
“우리가 직접 나서서 식수를 구해 오는 수밖에 없겠군.”
밀림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칠공작들에게도 꽤 큰 부담이었다.
5개의 비급을 익힌 무신의 추종자 여섯이 뭉치면 칠공작을 압박할 수 있기에?
물론 그것도 큰 위협이다.
칠공작 삼인방이라고 하나 수십 명의 추종자들에게 포위당할 경우 답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위험은 따로 있다.
바로 함정이다.
칠공작들조차 좌시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함정들.
열쇠 조각을 모두 모으기 전까지는 결코 해제할 수 없는 그것들을 주의하면서 추종자들까지 상대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갑시다.”
5천 명의 병사들을 책임지고 있는 몸이다.
그것도 각자의 가문에서 데려온 사병들.
내 영지와 가문의 부흥에 일조해 온 백성들이 목말라 죽는 꼴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일국의 귀족이기 이전에 영지의 주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이고 자존심이었다.
“저, 전하.”
병사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들 또한 눈이 있고 머리가 있는 바.
공작들이 우리를 위해서 무리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감격과 죄책감, 그리고 혹여 일이 잘못됐을 경우의 불안까지 동시에 느끼는 병사들을 둘러본 모르이즈가 쯧 혀를 찼다.
“우리가 너희들한테 걱정받을 정도로 몰락한 건 아닐 텐데? 추종자 놈들이 좀 세서 못 볼 꼴을 몇 번 보여 주긴 했다만, 그래도 그런 반응은 아니지.”
“시정하겠습니다!”
병사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자신감 넘치는 모르이즈의 모습에 자신들 역시 상황을 낙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공작님들은 아직 여유가 있구나 싶었다.
하지만.
“…….”
기사들의 낯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칠공작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을 곁에서 모셔 온 기사들이 모를 리 없다.
상반되는 분위기 속에서.
“다녀오겠다. 우리가 없는 동안 스컹크 경과 막사를 잘 지키도록.”
“충!”
“충!”
각자의 마음이야 어찌 됐든, 기사들과 병사들은 힘차게 대답했다.
***
[무신의 유적지에 입장하셨습니다.]
[신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경고! 적해에는 부활 포인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망 시 적해 외부로 추방됩니다.]
“예쁘네.”
반짝반짝 빛나는 사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햇살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금백색 모래사장이 에메랄드를 통째로 녹여 놓은 듯한 맑은 바다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족히 10층 높이는 될 군함에서 사뿐히 뛰어내린 그리드와 십공신들이 눈앞에 펼쳐진 풍광을 잠시 넋 놓고 감상했다.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대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그들은 온갖 감정을 느꼈다.
휴렌트만 빼고.
‘속이 울렁거리는군.’
함께하는 이들의 면면이 너무 화려하다.
아직도 모르겠다.
자격도 없는 내가 왜 이들과 함께하게 됐는지.
‘자기들 보고 배우라 이건가?’
열흘간의 항해 동안 템빨단원들은 놀라운 모습들을 보여 줬다.
카츠는 무려 ‘노말 등급’의 무기로 바다 괴물과 싸워 이겼고, 레가스는 실전 감각을 유지하고 싶다는 미친 소리를 지껄이더니 자신이 바다 괴물과 싸우는 동안 동료들에게 PK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료들의 뒤치기를 회피하면서 바다 괴물을 묵사발로 만드는 레가스의 모습에 몇 번이나 혀를 내둘렀는지 모른다.
라우엘은 부채질 몇 번으로 해일을 일으키더니 날치 떼를 분산시켰으며, 크리스는 문어와 차원이 다른 생명력을 자랑하는 개복치를 힘으로 때려 죽였다.
심지어 그리드는 고양이랑 해골 병사들을 렙업 시켜야 한다며 그 작고 귀여운 녀석들을 바다 괴물들과 싸우게 만들었다. 녀석들이 반 죽을 때까지 잠자코 지켜보다가 필요할 때만 나서서 교육시키는 모습이 악마 그 자체였다.
유페미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손가락만 빨고 있는데 동료들이 경험치를 나눠 주질 않나…….
“…….”
돌이켜 생각해 보니 더더욱 황당하다. 내가 대체 뭘 봤는지 모르겠다.
지난 열흘간의 항해 동안 목격했던 모든 일들을 누구에게 말해 봤자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게 분명하다.
‘확실해. 자기들을 보고 배우라는 거다.’
새 시대의 월드 클래스들.
그들을 보고 배워라.
그리드의 의도가 분명했다.
구시대에는 나름 한가락 했던 내 잠재력에 기대를 걸었을 테지.
‘내가 다시 성장해서 자신의 힘이 되어 주길 바라는 거군.’
하지만 어쩌나.
내가 놀고먹기만 해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아닌데.
‘…이래 봬도 이미 최선을 다해 왔다.’
피아로라는 기연을 만난 덕분에 유례없는 성장 속도를 달성했다.
한데 고작 이 모양이다.
4차 국대전에서 그리드에게 끔살 당한 하스터와 호각을 이루는 수준.
노력한 보람도 없이, 예전과 비교해서 나아진 게 하나 없다.
‘내게 기대를 걸은 건 실수야.’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씁쓸히 웃는 휴렌트의 귓가로 라우엘의 음성이 들려왔다.
“밀림 안쪽에는 수상한 기척이 난무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 해안가 주변은 고요하군요. 무신의 추종자들은 무술을 사용하는 만큼 보법을 중시할 터. 아무래도 발이 푹푹 꺼지는 모래사장에서의 전투가 꺼려질 테지요. 이곳은 안전할 것 같습니다.”
라우엘의 1차 직업은 기공사다. 기감이 극도로 발달한 그는 생물의 기척을 읽는 데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그가 해안가를 안전지대로 선포한 이상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일단 밀림에는 발을 들이지 말고 해안가 주변을 탐색하도록 하죠. 진지를 구축하기에 적절한 장소를 물색해야 합니다. 이곳 어딘가에 있을 제국군 진영과 최대한 먼 장소여야겠죠? 자, 모두 흩어져서 주변을 정찰해 주십시오. 2시간 후에 다시 이곳에서 만나기로 하고요.”
“그래.”
그리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지존답게 담대한 그는 이런 사소한(?) 일쯤 라우엘에게 믿고 맡기는 듯 보였다.
“도중에 제국군 만나면 죽인다?”
카츠의 무식한 말에 라우엘이 고개를 저었다.
“제국과 마찰이 발생하지 않게끔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행동해 주십시오. 이쪽은 숫자가 적으니 제국군에게 발각돼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요.”
“흠, 알았다. 은밀하게 움직여야겠군.”
카츠가 순순히 수긍했다.
이어서 그리드와 십공신 전원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누군가는 혼자서, 누군가는 둘씩 짝 지어서 이동했다.
해안가에서 몬스터가 출몰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음.
목적은 어디까지나 탐색.
단체로 몰려 다녀 봤자 비효율적이다.
“같이 가실래요?”
홀로 덩그러니 남은 휴렌트에게 라우엘이 다가왔다.
제1차 국대전에서 함께 짝을 이뤘던 두 사람.
서로가 친숙하다.
휴렌트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신경 써 줄 거 없어. 혼자 가마.”
“네. 약속된 시간에 이곳에서 다시 뵙죠.”
“그래…….”
휴렌트가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잔잔한 파도를 감상하며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던 그가 문득 제자리에 섰다.
저 멀리.
“어, 어째서 이곳에 추종자가……!”
일단의 무리가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10명쯤 되었는데 전원 플레이어였다. 무장 상태를 보아 비전투 직업군 같았다.
‘제국 소속은 아니군. 우리처럼 월드 메시지를 보고 항해해 온 소규모 탐사대쯤 되는 건가.’
적대 표시가 발생하지 않자 안도한 휴렌트가 기척을 숨긴 채 상황을 지켜봤다.
도그우먼이라는, 별 웃기지도 않는 아이디의 여자가 동료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나하고 재규어 둘이서 시간을 벌 테니까 모두 빨리 도망쳐. 그리고 대장한테 추종자들의 활동 범위가 확대된 것 같다는 사실을 꼭 전하고.”
‘저 녀석이 무신의 추종자로군.’
낡은 도복을 걸치고 있는 근육질의 사내.
플레이어들의 앞길을 막고 선 녀석의 머리 위에는 <5개의 비급을 익힌 무신의 추종자>라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흰색이다.
일반 몬스터라는 뜻.
‘갈구냐씨인가 뭔가 하는 곳에 출몰하는 추종자는 정예 몬스터라고 했지?’
휴렌트도 많은 정보를 공유받았다.
무신의 추종자라는 인간형 몬스터가 존재하며, 갈구노스의 사원에서 출몰하는 그 녀석은 무척 강하다고 들었다. 십공신 둘이 협공해야 쓰러뜨릴 수준이라고 했으니 말 다 했다. 정말로 무시무시할 것이다.
‘하지만 저놈은 일반 몬스터다. 폰과 레가스가 말했던 추종자하고는 다르겠지.’
애초에 라우엘은 해안가가 안전하다고 했다.
저 5개 어쩌구 추종자는 위험한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흐음…….’
휴렌트는 일단 잠자코 있었다.
최대한 은밀하게 행동하라는 라우엘의 주의가 있었으니 쓸데없이 나설 생각이 없었다.
생면부지 남이 위험에 처했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근데.
“꺄악!”
“도, 도그우먼!”
“도망치라고, 바보들아!”
끽해야 나무 방패나 휘두르는 주제에 동료들을 위해 희생하는 이들의 모습이 꽤 가상하다.
추종자의 발차기 한 방에 빈사 상태에 빠진 주제에.
정말이지 더럽게 약해 빠진 주제에 끝까지 발악한다.
‘…조금만 도와주는 건 상관없지 않을까?’
휴렌트 또한 약자.
그는 이제 약자의 서러움을 이해하고 있다.
같은 약자의 고통을 보고 외면하기가 영 불편했다.
결국, 고민 끝에.
“누군지 안 들키면 되지, 뭐.”
피아로에게 선물 받은 소중한 밀짚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이봐.”
전투 현장에 난입해 버린다.
“……?”
“……?”
무신의 추종자와 도그우먼 일행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정체불명의 인물.
그에게는 조금의 긴장감도 엿보이질 않았다.
모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태도다.
“누, 누구세요?”
벌써 제국 외 세력이 무신의 유적지에 도착했다니?
예상보다 너무 빠르다.
경계하며 묻는 도그우먼에게.
“농사짓는 사람.”
짤막하게 답해 준 휴렌트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무신의 추종자가 즉각 반응했다.
땅을 박차고 돌진해서 휴렌트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오러 실드를 전개해서 막아 낸 휴렌트가 아연실색했다.
‘생각보다 센데?’
정말 한숨만 나온다.
이제는 하다하다 일반 잡몹한테 위기감을 느끼다니.
‘여기 수준이 높을 거라고 듣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잡몹 아닌가?
‘자존심 상하네.’
투쾅-!
퍼퍼펑!!
추종자의 발차기와 주먹 세례가 휴렌트의 전 방위를 점령하고 쇄도했다.
오러 실드의 데미지 경감률로는 감당할 수 없는 파괴력이 깃든 공격들이었기에.
스파앗-!
오러를 체내로 운용, 순간적으로 이동 속도를 증폭시킨 휴렌트가 일단 자리에서 벗어났다.
“…와.”
도그우먼 일행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모래사장에 발이 자꾸 꺼지는 탓인지, 무신의 추종자는 밀림에서 만났을 때와 비교해서 다소 약해진 모습이었지만 말 그대로 약간일 뿐이다.
무신의 추종자는 괴물.
칠공작의 기사들조차도 그들의 무술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았던가.
한데 난데없이 나타난 정체불명의 사내가 추종자와 그럴듯하게 싸우는 것이다.
순간적이나마 칠공작과 비견되는 속도로 움직인 모습이 특히 압권이었다.
어마어마한 고수다.
필시 최상위 하이 랭커일 것이다.
도그우먼 일당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그때.
퍼어어엉-!
뒤늦게 휴렌트를 따라잡은 무신의 추종자가 회전하며 무릎을 올려 찼다.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휴렌트는 상태 이상 기절에 걸릴 뻔했지만 높은 상태 이상 저항률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궁극기를 사용했다.
[오러 임팩트를 전개합니다.]
[2초 내에 오러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연상하십시오. 연상하는 이미지에 작은 오류라도 있을 시 스킬의 발동에 실패합니다.]
2초의 간극.
무신의 추종자를 상대로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빠각-!
추종자의 팔꿈치가 휴렌트의 심장에 꽂힌다.
쿨럭, 피를 토하는 휴렌트.
이를 악문 그가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비.”
쏴아아아아아아아-
기적과도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오직 추종자의 머리 위에만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크아아아아악!
추종자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인간형 몬스터의 한계.
생명력 수치가 낮다는 그 치명적인 한계가 <검성 후보>이자 <오러 마스터>이며 <기적의 5인방> 중 하나인 휴렌트에게 공략당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