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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90화 (885/1,794)

템빨 48권 - 15화

적해에 들어선 순간부터 귓속말 등의 교신 시스템이 금지되고 텔레포트 종류의 마법 또한 사용이 차단됐다.

그러나 템빨단원들은 베리드의 출현을 인지하고 있었다.

[대륙 어딘가에서 22위 대악마 베리드가 출현하였습니다……!]

월드 메시지 덕분이다.

대악마의 강함을 익히 아는 그리드와 십공신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대악마가 템빨국을 침략했다가는 끝장이다.

당장 귀환하는 것이 옳다.

조급하고 부정적인 의견들이 속출했다.

라우엘이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의식이 시작됐을 무렵부터 데미안 님과 이야기를 끝내 놨습니다.”

데미안은 말했다.

대악마 강림을 저지하지 못할 경우, 대악마를 템빨국과 최대한 먼 곳으로 유도하겠다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레베카교와 야탄교의 격전지부터가 템빨국과 가장 먼 땅이었기에.

항상 템빨국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데미안.

그는 정말이지 든든한 우군이었다.

‘하지만 강림 의식 저지에 실패할 줄은 몰랐는데.’

이번 대악마 강림 의식은 벨리알 때와 달랐다.

벨리알 강림 의식은 은밀하게 진행됐던 반면 베리드 강림 의식은 도중에 노출됐다.

실제로 레베카교는 의식 현장을 덮쳤다.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라우엘은 데미안과 레베카교가 대악마 강림을 막을 것으로 보았다.

레베카교는 야탄교의 야망을 저지하는 세력.

강림 의식을 막는 수단이야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실패했다고……? 대악마 강림 의식은 일단 발동한 이상 막을 수가 없는 건가?’

라우엘이 큰 의문에 휩싸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레베카교는 무슨 수로 야탄교를 억압해 올 수 있던 걸까?

두 종교의 무력을 비교해 봤을 때 야탄교 쪽이 월등히 강할뿐더러 레베카교는 대악마 강림 의식을 막을 수단조차 없다.

야탄교가 레베카교에게 꿀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한데 역사상 야탄교는 레베카교에게 꾸준히 토벌당해 왔다. 레베카교의 시선을 피해서 은밀히 활동했다.

‘대륙의 모든 국가가 레베카교를 지지하고 야탄교를 적대한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아무래도 레베카 교단 내에 숨겨진 힘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합당한 추리다.

그래야만 여태까지의 균형을 수긍할 수 있다.

‘언제 한 번 데미안 님께 자세히 여쭤봐야겠군. 그건 그렇고.’

복잡한 생각을 잠시 봉인한 라우엘이 다시 해양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력이 들끓는 바다에 출몰한 온갖 괴수들이 그리드와 십공신들에게 토벌당하고 있었다.

‘유적지를 향해 가는 항로 자체도 보상이었군.’

바다 괴물들이 주는 보상이 상당히 좋다.

전쟁에서 수차례 사망했던 십공신들이 잃었던 경험치를 상당수 복구했을 정도다.

온갖 특이한 아이템도 많이 얻었다. 좋다, 나쁘다고 단정 짓기 어려운 종류의 아이템들이었지만 희귀성 측면에서는 가치가 매우 높을 것으로 추정됐다.

‘그리드 님께서는 398레벨을 달성하셨고……. 앞으로는 적해도 사냥터의 일부가 되겠군.’

적해를 사냥터로 삼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군함을 구매해 준 카츠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배가 아닌 이상에야 자연재해가 난무하는 적해를 항해하는 일은 불가능했으니까.

“문어들 계속 보다 보니까 정들어서 못 죽이겠어. 반트너 형제들 같아.”

“…….”

맨들맨들 문어 머리를 착용 중인 반트너.

그의 원래 성격이었다면 욱했을 발언이다.

하지만 발언자가 하필이면 지슈카였기 때문에 찍소리도 못했다.

유라까지 거들었다.

“그러게요.”

유라의 성정을 고려해 봤을 때 놀리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지슈카의 말에 공감하고 맞장구쳤을 뿐이었다.

하여.

“…….”

반트너는 더욱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이가 좋아졌네.’

그리드는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 항해의 가장 큰 수확이라면 유라와 동료들의 관계.

모두와 어색했던 유라가 짧지 않은 여정 동안 동료들과 편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중이다.

특히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지슈카와도 많은 공감대를 형성한 눈치였다.

“이럴 때 보면 그리드가 연상이라는 게 실감나지 않아?”

문어, 복어, 개복치 등의 대형 괴수들보다 압도적으로 큰 고래를 간신히 사냥한 후.

나란히 앉아 휴식을 취하는 유라와 지슈카가 수다를 떨었다.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공감대가 있었으니 대화가 멈추질 않았다.

“영우 씨는 간혹 욱하는 경향이 있어도 괜히 다른 사람을 놀리거나 하지는 않죠.”

“그러게 말이야. 내가 반트너 놀릴 때마다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는 것 봐. 저거 완전히 애들끼리 잘 논다~ 라는 반응이잖아. 아… 이거 완전히 점수 깎였겠네.”

안 그래도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인식되고자 노력 중인데, 애처럼 보여서 낭패다. 망했다. 이젠 친구도 아니라 여동생처럼 여겨질까 봐 걱정이다.

“빌어먹을 반트너……. 왜 웃겨 가지고.”

“내가 언제?”

“너랑 문어랑 같이 있으니까 웃기다구.”

“…….”

끝까지 타박을 주는 지슈카와 울상을 짓는 반트너.

잠자코 있던 유라가 몇 번의 고민 끝에 말했다.

사실, 하고 싶지 않은 말이다.

지슈카에게 용기를 줘 봤자 자신에게 불리했으니까.

하지만 정정당당하기 위해서, 유라는 고백했다.

“영우 씨가 친구처럼 여기는 건 당신이 아니라 저예요. 당신을 볼 때의 영우 씨 눈빛은 저를 볼 때와 많이 다르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기죽지 마세요.”

“맞아. 가슴만 보기는 하지.”

진지하게 한 말이, 반트너가 끼어들자 우습게 됐다.

늘 침착하고 온화한 유라가 이를 악물 정도였다.

“반트너 씨, 저랑 대련 한번 하실래요?”

“…미안해.”

싸워 봤자 진다.

상대는 국대전 PvP 결승 진출자.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고전적인 이름의 백색 거인.

플레이어와는 차원이 다른 운동 능력과 생명력을 보유한 <마장기>에 탑승한 지발을 상대로 유라는 치열하게 싸웠다.

쉽게 패배할 거라고 여겼던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소 상반됐던 경기 내용.

유라는 강했다.

템빨단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반트너보다 몇 수나 위인 것이다.

헛기침한 반트너가 화제를 돌렸다.

“근데 말이야. 대악마를 남이 잡으면 어쩌지?”

템빨단 외에도 강한 길드는 많다.

물론 여러 명의 네임드 NPC를 보유하고 있는 템빨단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아레스 군단과 옛 7대 길드들, 그리고 7대 길드가 몰락한 틈을 노려 세를 확장해 온 신흥 세력들.

그들이 단일 세력만으로는 대악마 레이드에 실패할지 몰라도 합동할 경우에는 또 모른다.

“그리드, 메르세데스, 피아로 세 사람만으로 곱등이인가 뭔가 하는 대악마급 몬스터 레이드했었잖아. 하이 랭커 수백 명이 뭉치면 대악마 하나 레이드하는 게 대수겠어? 기껏 오랜만에 뜬 대악마를 다른 애들한테 넘겨주는 꼴이라 아쉽네.”

반트너가 근심하자 몇 명의 십공신들이 동감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단호했다.

“레이드 못해.”

일단, 곱등이를 대악마와 비교하는 전제부터가 잘못됐다.

곱등이의 육체 능력이 대악마와 비등한 건 사실이었으나 스킬이나 인공지능의 수준은 대악마와 비교해서 미개할 정도였으니까.

더군다나.

“메르세데스하고 피아로를 하이 랭커들하고 비교하는 건 좀 아니지.”

“…아.”

민망해진 반트너가 머리를 긁적였다.

당장 그리드만 해도 수백 명의 하이 랭커를 홀로 학살하지 않았던가. 한데 메르세데스와 피아로는 그리드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초강자다.

그들 셋이 곱등이를 잡았다고 해서 하이 랭커 수백 명이 대악마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라우엘이 웃었다.

“이참에 사람들에게도 알게 해 줘야죠.”

템빨단이 벨리알을 레이드했을 당시, 대중들은 벨리알을 독식한 템빨단을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들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구원했었단 사실을.”

대악마 레이드는 축복 따위가 아니었다.

우리 또한 사활을 걸고 이겨 낸 고난이었다.

죽음을 각오했던 피아로의 뒷모습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며칠 후.

“곧 도착이외다!”

선장이 소리쳐 왔다.

저 멀리, 예상보다는 큰 섬이 보였다.

놀랍게도 섬 근처의 하늘만 맑았다.

열흘간의 항해 중에 처음으로 조우하는 맑은 하늘이었다.

적해는 언제나 마력의 잔흔이 넘실거렸고, 짙은 안개와 폭풍우가 쉬지 않고 찾아왔었으니.

[무신의 유적지를 발견하였습니다.]

“드디어 도착인가…….”

“해안가를 제외하면 전부 밀림인가? 개활지가 적겠어. 대검술을 사용하기 까다롭겠군.”

“경험상 무신의 추종자들은 무척 가볍고 빠르게 움직였어. 밀림에서 싸워 봤자 불리할 테니까 해안가를 잘 이용해야 할 거야.”

우리는 이곳에서 비급을 얻을 수 있을까?

더 강해지기를 열망해 온 십공신들의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다.

‘상황에 따라서 제국과의 관계가 호전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라우엘은 정치적인 부분을 고려했다.

한편 그리드는.

‘교만인가?’

무신의 죄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고 있었다.

그리드가 얻었던 칠악성 퀘스트는 무신과 관련이 없었으나, 순수한 호기심이 생기는 건 막지 못했다.

무신은 최강의 신.

7대 죄악 중에서도 궁극의 죄라는 교만이 아닐까 싶었다.

‘마주치면 엿 될 것 같은데……. 뭐, 그럴 일은 없겠지.’

명색이 신이다.

어디 동네 개도 아니고, 가는 곳마다 마주칠 리 있겠는가?

***

“오랜만에 불타오르네.”

“오기를 자극하네요.”

“그러게 말일세.”

그렌할, 모르이즈, 바사라.

그들은 지난 보름 동안 개고생을 해 왔다.

추종자들의 추적으로부터 스컹크를 보호하고, 스컹크 탐사대원들이 발견한 비석과 벽화 등을 함께 풀이하고, 불안감이 커져 가는 병사들을 격려하고, 바다 괴물을 사냥해서 식량을 확보하는 등.

유적지의 수준이 너무 높다 보니, 중요한 일부터 시작해서 잡일에 이르기까지 칠공작들은 모두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칠공작들은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리어 기꺼이 고난을 반겼다.

편안한 일상에서는 겪어 볼 수 없었던 경험들이 그들의 권태감을 지우고,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제가 많이 부족하여… 송구합니다.”

칠공작들 덕분에 목숨을 구한 횟수가 몇 번인지 셀 수조차 없다.

보름 동안 칠공작들과 많은 정이 들은 스컹크는 그들에게 미안했다.

자신의 고고학 스킬과 해독(解讀) 스킬 레벨로는 유적지의 수수께끼를 풀기가 힘들었으니까.

첫날 탐사에서 ‘열쇠’가 필요하다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 정작 열쇠를 얻는 방법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스컹크는 자신의 무능 탓에 칠공작들이 더 큰 고생을 하고 있다고 자책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매달려야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 솔직히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본격적인 탐사를 위해서는 우선 밀림을 돌파해야 한다.

하지만 밀림에는 무신의 추종자뿐만 아니라 수천수만 가지의 함정이 설치된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상 진입이 불가능했다.

함정을 해제할 수 있는 열쇠.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한데 열쇠를 언제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괘념치 말게. 본국에서 여러 분야의 학자와 탐험가들을 함께 보낸다고 하였으니 그들이 자네에게 큰 힘이 될 걸세.”

“말씀만 들어도 든든하군요. 알겠습니다. 힘내겠습니다.”

그렌할의 말을 듣고 한결 마음이 편해진 스컹크가 드디어 얼굴을 풀었다.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스컹크가 타인의 도움을 반길 정도로 작금의 상황이 나쁘다는 뜻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

“어……?”

이틀 전 발견한 벽화의 내용을 꼼꼼히 관찰하며 풀이하던 스컹크가 문득 벼락에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벽화 안에 그려진 책자에 고정됐다.

여태껏 발견한 모든 벽화에 존재하는 책자.

스컹크는 그것이 무신의 비급을 상징한다고 해석했었다.

무신의 유적지에 있는 벽화에 비급이 그려져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보니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듯하다.

‘벽화마다 책자의 규격이 다르게 표현된 이유는 각기 다른 비급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스컹크의 뇌리에 열쇠 구멍의 모양이 스쳐 간다.

여태껏 발견한 7개 벽화에 그려진 책자들을 교차시켜 본다.

열쇠 구멍의 모양과 딱 들어맞았다.

‘열쇠는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벽화들은 열쇠 조각이 있는 장소들을 알려 주는 힌트였다.

‘좋았어.’

스컹크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벽화의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되었으니 해석 작업이 한결 수월해지리라는 희망이 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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