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885화 (880/1,794)

템빨 48권 - 10화

천년 제국을 노리는,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사하란 제국이 고작 7명의 영웅만을 배출했을 리 만무하다.

제국 역사에는 수많은 영웅이 존재했고 그중 12명이 공작위를 수여 받았다.

본래 제국에는 12개의 공작 가문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세월이란 무서운 법.

대물림 될수록 타락하거나 쇠약해가는 가문이 있었고 불운하게 대를 잇지 못한 가문들이 있었다.

무려 5개의 공작 가문이 자연히, 혹은 역적이 되어서 사라졌다.

현재 제국에 존재하는 7개의 공작가문 중 개국공신의 계보를 이은 가문이 단 2개밖에 남지 않은 이유다.

“피아로...?”

수십 년 전 제국의 기둥.

당시 유일했던 검호.

명문 중의 명문.

황제의 벗.

그리고 배반자.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가.”

풀어진 옷섶을 여미며, 디워스는 눈앞의 농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 코, 입.

모두 옛날과 같다.

다부진 풍채도 여전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눈가에 생긴 주름.

그리고 태산 같던 기세가 사라졌다는 점.

세월의 풍파를 엿볼 수 있었지만 기(氣)는 느낄 수 없다.

이제 늙어가는 그의 기운을 감지하고자 노력해봤자 바람, 모래, 나무 등의 자연에 깃든 기와 차이점이 없어 분간이 안 된다.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도 같은.

기억 속 피아로와 눈앞 농인의 차이점을 구분하고자 애쓰던 디워스가 이내 현실을 받아들였다.

“맞군.”

같다.

동일인이다.

농인은 피아로다.

“역시. 당신이 죽었을 리 없지.”

피아로가 적기사단을 이끌었던 시절.

적기사단이야말로 제국 무력의 상징이라며 모든 제국신민이 떠받들었다.

디워스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피아로가 싫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을 배신한 그를 처단하겠다며 황실이 추격대를 파견했을 때도, 피아로가 붙잡힐 리 없다며 콧방귀 뀌었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디워스였다.

“너무 오랜 세월 소식이 없어 속세를 떠났으리라고 여겼지, 설마 템빨국에 의탁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불헌 듯, 폐하께서 피아로가 살아있음을 알면 기뻐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께서는 피아로를 원망하고 증오하는 한편 여전히 그리워하셨으니.

문득 의문이 떠오른다.

‘폐하께서 과연 이 사실을 몰랐을까?’

황후의 죽음과 피아로의 배신으로 늘 수심에 잠겨있던 황제.

그는 언젠가부터 다시 밝아졌다. 총기를 다시 되찾았다.

전설이 된 기사 메르세데스를 추방한 시점부터였다.

‘기껏 전설이 된 메르세데스를 추방하신 이유가...’

피아로가 살아있음을 알고, 메르세데스에게 그를 보호해달라는 명령을 따로 내렸던 거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황제는 메르세데스가 템빨왕을 섬기게 되었음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황제의 정보력은 칠공작 이상이니까.

하지만 황제는 메르세데스에게 아무런 제지를 가하지 않았으며 이번 템빨국 정복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템빨왕이 마안족을 거뒀다는 사실을 듣고 분개하는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뒤늦게 전쟁을 선포했을 뿐.

칠공작들에게는 참전을 강요하지 않았을 정도다.

이번 전쟁에 레이첼은 참가조차 하지 않은 이유다.

‘그래, 폐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

피아로가 살아있었음을.

‘그리고 피아로의 배신을 용서하신 거야.’

아니면 레이첼, 그렌할, 모르이즈의 주장처럼 피아로의 배신은 사실 누명이었던 것일 수도 있고.

그리 가정해야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진다.

“흐음....”

힐끔, 디워스가 성벽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사막에 포진한 수십만의 아군 병사들이 이쪽을 올려보고 있었다.

수천의 포병대는 대포와 투석기를 장전하느라 여전히 고생 중이다.

‘저들이 피아로의 생존을 알게 된다면....’

큰 동요를 금치 못할 터.

혼란이 군기를 약화시킬 것이다.

‘피아로 한 명 때문에 제국과 템빨국의 관계가 호전 될 가능성은?’

당연히 없다.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애초에 피아로가 제국을 용서할 리 없다.

자신의 가족들을 모조리 참살한 제국을.

‘그리고 제국을 대륙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템빨국을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제국의 천년대계에 위해가 된다.’

그러니.

디워스는 판단했다.

지금 당장 피아로를 죽여야한다고.

그것만이 혼란을 잠재우는 길이며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국이 다시금 대륙의 주인으로 우뚝 서는 길이다.

“피아로, 너는 알고 있겠지? 나는 예전부터 너를 싫어했다. 나보다 명백히 잘난 그대를 볼 때마다 자존감이 깎여나갔거든. 하지만 다 옛일이고 이제는 추억이다. 지금의 나는 네게 아무런 악감정이 없다.”

하니, 이건 진심이다.

“옛정을 생각해서 고통 없이 죽여주마.”

단칼에 베어주리라.

다짐한 디워스가 술병을 들이켰다.

그는 서두르고 있었다.

금관 바사라를 제외한 다른 공작들.

피아로의 가족들이 처형당할 당시.

그들은 피아로가 누명을 쓴 것이 분명하다며, 당장 처형을 멈춰달라는 탄원을 올렸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피아로를 해치지 않으면 일이 복잡하게 꼬일 여지가 컸다.

‘다른 공작들이 스컹큰가 뭔가 하는 놈을 쫓아가서 다행이지.’

갈레스트에서 우연히 만난 탐험가.

그는 제국에서도 주시하고 있던 인재였다.

칠공작들은 적해를 건널 예정이라는 스컹크의 말에 눈을 빛내며 그를 쫓아갔다.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잊어서가 아니라, 템빨국을 그만큼 얕보고 있다는 뜻이다.

쿠오오오오오-!

디워스의 마력이 들끓으면서 술 냄새가 진동한다.

디워스는 옛 기세를 잃은 피아로를 순식간에 없앨 각오였다.

‘부디 고통 없이 죽고 생에 겪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라.’

미워했지만 존경했던.

옛 영웅에게 디워스가 자비를 내린다.

거지같은 행색과 어울리지 않는, 찬란한 휘광을 내뿜는 명도를 뽑아 피아로를 노리고 휘둘렀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예전과 달리 어떤 기세도 느껴지지 않는 피아로.

약해진 줄 알았던 그가.

쩌어엉-!

호미로 쉽게 자신의 일격을 막아내었기에.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성격은 여전하군. 요즘에도 술에 취하면 병사들을 해치고 그러는가?”

쯧쯧, 혀를 차며 말하는 피아로의 주변 공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바람, 공기, 땅, 모래, 잡초 하나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모든 자연이 기(氣)를 상실하고 스러져갔다.

원인은 피아로에게 있었다.

모든 자연이 그에게 자신의 기를 나눠주고 있었다.

“설마, 이건.”

황급히 검을 뒤로 빼는 디워스의 손끝이 떨렸다.

<자연경>이라는 경지를 그 또한 들어봤기에.

“자연경의 초입....!”

약해진 줄 알았던 피아로가 사실은 예전보다 더 강해진 것이다.

검술이라는 형(形)이 농술로 변화되긴 했지만 그것은 퇴화가 아니라 도리어 진화에 가까웠다.

“무상농법.”

자연이 모든 기운을 상실하자 급기야 무중력 상태가 된 공간 안에서, 두둥실 떠오른 피아로가 호미를 머리 위로 추켜세우는 순간.

“잠깐.”

그리드가 나타나 피아로를 멈췄다.

“피아로, 그리고 메르세데스. 너희는 투석기를 부셔줘.”

Satisfy에서는 무기와 무기가, 혹은 마법과 스킬이 충돌하면서 서로의 위력을 상쇄시키는 장면이 종종 연출된다.

가상현실게임의 특이점이라 할 수 있다.

무기, 스킬, 마법 모두 형체를 지니고 있으니 그것에 반응만 할 수 있다면 똑같은 공격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물론, 서로 충돌하는 2개의 힘 중 한쪽의 힘이 일방적으로 강하다면 상쇄가 불가능했지만.

어쨌든 날아오는 공격에 공격을 충돌시켜서 방어를 시도해볼 수는 있다.

그렇기에 고수와 고수의 싸움에서 서로간의 병장기가 계속 맞부딪치는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 예외가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바로 초대형병기의 공격이다.

크기부터 차원이 다르게 커서 막중한 무게가 실리는 형태의 공격.

그것은 평범한 무기나 스킬, 마법으로 상쇄시킬 수 없었다.

시스템은 훨씬 더 큰 무게와 면적을 지닌 공격을 ‘일방적으로 강한 힘’으로 판정하기 때문.

그렇다.

제국의 투석기가 바위를 쏘는 순간 레이단은 위험에 빠질 것이다.

템빨국에는 날아오는 바위를 막을 수단이 없었고 성벽을 고스란히 내어줘야만 했다.

이미 템빨포로 시도한 것처럼 투석기 자체를 부수는 시도가 가장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천하의 그리드라고 해도 수십 만 대군의 중심부에 배치 된 투석기를 부술 재간이 없었다.

십만대적검이나 날아오르라를 이용한 원거리 요격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일반적인 무기는 공성병기와 반대로 건축물, 시설물에 약한 위력을 발휘했으니까.

“그러니까 너희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거야.”

피아로와 메르세데스의 곁으로 다가선 그리드가 그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절대로 죽지 말고.”

크레이슐러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그리드는 자신의 기사들을 결코 사지로 내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리드는 초월의 격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다. 기사들을 품에 싸고 도는 일은 도리어 그들의 성장에 해악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니.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올 거라고 믿을게.”

차라리 믿고 의지하리라.

“명심하겠나이다.”

우리를 향한 전하의 신뢰가 더욱 깊어졌음에.

감격한 피아로와 메르세데스는 기사의 예를 갖춘 후 곧장 적진으로 뛰어들 채비를 갖췄다.

그에 앞서서.

“이걸.”

그리드는 메르세데스에게 열망의 무아검을, 피아로에게는 란스티어의 망토를 건네주었다.

“받을 수 없나이다!”

“저도 못 받아요.”

피아로가 기겁을 했고 메르세데스 또한 난색을 표했다.

그리드가 가장 애용하는 검과 그리드의 안전을 지켜주는 망토를 그들이 받을 리 만무했다.

그리드의 곁에는 쥬드, 놀, 카심을 비롯한 템빨단원들이 함께였지만 취공 디워스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걱정하는 그들 앞에서.

철컥!

<땡기미>에 <신을 겨누는 칼날>을 부착시킨 그리드가 웃어보였다. 그리고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를 탕탕 두드리더니 말했다.

“나한텐 아직 좋은 무기 많아.”

그리드가 신을 겨누는 검이 아닌 열망의 무아검을 애용해온 이유는 당연히 <검은 불꽃>의 폭발이 유용했기 때문이다.

열망의 무아검은 적에게 데미지를 쉬지 않고 누적시킬 수 있었으니 신을 겨누는 검보다 데미지 기댓값이 높았다.

심지어 열망의 무아검은 +4 강화에 성공한 상태였기 때문에 신을 겨누는 검보다 공격력이 낮지도 않았다.

그렇다.

현재 시점에서는 열망의 무아검이 신을 겨누는 검보다 좋다.

하지만 그리드가 굳이 메르세데스에게 쥐어준 이유는 열망의 무아검이 ‘학살’에 특화된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수십 만 대군을 상대로 열망의 무아검을 휘두르는 메르세데스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무섭다.

또한.

‘칠공작을 상대할 때는 신을 겨누는 검이 더 낫기도 하고.’

그리드는 신을 겨누는 검의 옵션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신, 천사, 대악마, 보스 몬스터, 네임드 NPC 등의 초월적인 존재에게 50퍼센트의 추가 데미지.

표기된 것과 같이 시스템은 보스 몬스터, 네임드 NPC 이상을 초월자로 인식하였다.

네임드 NPC인 취공 디워스에 한해서만큼은 신을 겨누는 검이 열망의 무아검보다 더 강했다.

초월자가 아닌 대상의 생명력을 일격에 80퍼센트 앗아가는 <약자 멸시> 스킬은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그 점을 감안해도 마찬가지다.

꽈드득!

그리드와 기사들이 대화하는 동안 멍한 표정으로 있던 취공 디워스가 이를 갈았다.

“그대. 템빨왕이여. 소국의 왕에 불과한 네가 감히 제국의 공작인 나를 상대하겠다고? 헛소리 집어치우고 꺼져라!”

디워스는 그새 더 취해있었다.

이제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릴 정도였다.

“피아로! 메르세데스! 너희들을 보내줄 수 없다!”

전 영웅과 새시대의 영웅.

피아로와 메르세데스가 제국군 진영에 나타나는 순간 제국군 병사들은 큰 혼란을 느낄 것이다. 제대로 싸우지 못할 수도 있었다.

콰앙!!

디워스가 피아로에게 몸을 날리는 순간이었다.

펄럭-!

제국군 진영으로부터 퇴각 명령을 뜻하는 주황색 깃발들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뭐?”

퇴각이라고?

기껏 적진 앞에 당도한 이때?

심지어 내게는 아무 언질도 없이?

황당해서 말문을 닫는 디워스의 귓가로.

쩌렁쩌렁!!

마력이 깃든 풀바즈 후작의 외침이 들려왔다.

“디워스 공! 전군 퇴각하라는 황명입니다!!”

“황명이라고?!”

“황명?”

취공 디워스는 물론이고 그리드와 템빨단원들도 깜짝 놀랐다.

어째서 이제와 퇴각한단 말인가?

그 이유를, 이내 모두가 알게 되었다.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위대한 탐험가가 적해에서 새로운 섬을 발견하였습니다.]

[새로운 섬의 이름은 <무신의 유적지>입니다.]

“....!!”

디워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황제의 퇴각 명령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유적 탐사...!”

심지어 무신의 유적을 탐사하는 일이다.

반드시 선점해서 유물을 챙겨야했다.

타닷!

성벽에서 뛰어내리는 디워스.

피아로와 메르세데스가 그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만취한 디워스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변칙적이었다. 놓치고 말았다.

한편 그리드는 디워스를 신경 쓰지 않았다.

라우엘의 귓속말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유적의 가치. 심지어 아직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은 유적의 가치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우리도 반드시 탐사대를 파견해야 해요.

황제가 혹했을 정도다.

손가락만 빨고 있어선 안 된다.

라우엘의 판단이었고 그리드의 뜻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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