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8권 - 8화
“이거 왜 이래?”
레이단 성에 도착한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길드원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향해 보니, 한쪽 성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성벽과 500미터의 거리를 두고 서있던 가옥 몇 채도 주저앉은 상태다.
템빨국의 재정 중 상당수가 성벽 강화에 사용됐다는 점을 감안해봤을 때, 보기에 썩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레이단 성벽 레벨 MAX 아니었어? 제국에서 신형 대포라도 개발한 거야?”
30미터 두께의 성벽에 생긴 깔끔한 구멍.
이건 템빨포로도 만들 수 없는 결과다.
일점에 집약 된 위력을 느낀 그리드가 긴장해서 묻자 크리스가 답했다.
“취공 디워스가 쏜 마력의 잔재다.”
“칠공작! 놈이 벌써 코앞까지 진군했나!”
“아니, 아직이다. 이곳과 제국군 진영의 거리는 약 11킬로미터. 디워스가 그곳에서 쏜 마력이 여기까지 날아온 거다.”
“....엉?”
디워스가 발포한 마력은 거리라는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노라고 크리스는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드는 황당했지만 그의 말에 일체의 과장도 없음을 알았다.
칠공작의 힘을 상기한 크리스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렸기 때문이며, 그리드 본인 또한 칠공작의 힘을 직접 체험해봤기에.
‘가장 약했던 리갈조차도 나 혼자서는 무찌를 수 없었다.’
다른 칠공작들의 실력은 상상만으로도 괴롭다.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말문을 닫자.
“빠, 빨리 수리해놓겠습니다.”
눈치를 살피고 있던 3명의 중년인이 허겁지겁 도구를 챙겨 무너진 성벽으로 달려갔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템빨단 2에 소속 된 기술직 동료이거니 하고 넘겼다.
하지만.
“잠시만요.”
그리드는 그들을 굳이 불러 세웠다.
“건축카 랭킹 15위 델런 님과 29위 쉘님, 그리고 42위 델런트님.”
“....?”
“세분 다 저보다 한참 연상이신데 굳이 경어를 사용하실 필요 없습니다. 같은 동료잖아요? 편하게 대해주세요. 저도 형처럼, 삼촌처럼 편하게 대하겠습니다. 아, 델런트님 손녀 분은 얼마 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면서요? 축하드리고요.”
“.....”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템빨단원 수백 명이 깜짝 놀랐다.
길드원과 서슴없이 지내는 그리드의 인품을 보고?
아니다.
인재를 갈망하는 길드 마스터는 널리고 널렸다.
길드원들과 가족처럼 지내려고 노력하는 마스터는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수백 명을 넘어 1천 명에 이르는 길드원을 일일이 기억하는 마스터는 드물 것이다.
얼굴과 직업, 이름 같은 표면적인 정보는 몰라도 나이와 가정사 등의 상세 정보까지.
주위가 적막해지자 그리드는 뺨을 긁적였다.
“개인사까지 언급하는 건 아니었나....”
공부를 너무 과하게 한 듯싶다.
아니, 공부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 앞에서 개인의 정보를 읊은 것이 문제다.
눈치가 없어서 발생한 일이다.
공부한 티를 내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다.
사회성 부족한 아웃사이더의 비애라는 거겠지.
씁쓸하게 미소 짓는 그리드의 손을.
덥썩!
델런트가 맞잡았다.
“고, 고맙네! 손녀에게 오늘 일을 말해주면 뛸 듯이 기뻐할 게야! 우리 손녀가 그리드 전하의 팬이거든!!”
그리드를 바라보는 델런트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환갑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순수했고 정열적이었다.
취공 디워스의 실력을 목도하고 위축돼 있던 레이단의 공기가 순식간에 환기된다.
“이야, 그리드 대단하네. 평소에 가장 바쁜 사람이 길드원들을 일일이 신경 쓰고 있었다니.”
“역시 갓리드야! 내가 인정하는 사내답군! 하하핫! 어서 대한애국협회에도 가입하라고! 가입비 50퍼센트 할인해줄게!”
“....”
그리드는 민망해졌다.
라우엘의 조언이 없었다면, 자신은 아직도 길드원들에 대해서 잘 몰랐을 것이다.
그저 당연히 내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 자신은 단지 필요에 의해서 길드원들을 공부했을 뿐이다.
한데 다들 오해하고 선망어린 시선을 보내온다.
‘양심에 찔리는군....’
조금 더 일찍 신경 써주지 못했다는 점도 미안하고.
괴로워하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의 귓속말이 날아왔다.
-전하의 마음이 진실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공부해봤자 천 명이나 되는 길드원들의 면면을 그 짧은 시간 내에 기억하지 못했겠죠. 저 같은 천재였다면 모를까. 후훗.
-....
-대단하시다고요. 칭찬 받고 존경 받아 마땅해요. 당당하셔도 좋습니다.
마침.
“빨리빨리 옮겨!”
저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석재를 잔뜩 짊어진 그들 역시 템빨단 2군에 속한 길드원들이었다.
클래스는 광부.
그리드가 도착하기 전, 크리스의 명령을 받아 성벽 보수 재료를 구해오는 길이다.
“앗! 그, 그리드 님!”
달려오는 광부 중 가장 선두에 있던 20대 중반의 사내가 화들짝 놀랐다.
성벽을 채 보수하기도 전에 그리드가 도착했으니 그는 크리스에게 미안했다.
직장 상사에게 갈굼 당하는 부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는 자신의 채광 속도가 너무 늦었음을 한탄했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석재를 구하고 싶어서 욕심을 부리다가 망했어... 그리드 님이 오시기 전에 성벽 보수를 끝내 놨어야하는데!’
움츠려드는 사내의 곁으로.
저벅저벅.
그리드가 다가왔다.
그리고 사내가 짊어지고 있는 석재들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최상품의 석재들이군. 구해오느라 고생 많았겠어. 라이언.”
“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젊은 광부의 아이디는 돌체였다.
하지만 그가 종종 라이언이라 불리는 이유는 숫사자의 갈기를 닮은, 비죽비죽 솟은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물론 돌체의 별명을 아는 사람은 돌체의 지인들뿐이다.
광부라는 직업은 사람들의 조명을 받지 못했으니 라이언이라는 별명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한데 그리드는 돌체의 별명을 알고 있었다.
돌체는 감격했다.
그리드가 평소 자신을 지켜봐왔다는 뜻이기에.
“저, 저! 앞으로는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템빨단에 가입하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 템빨단이라는 초거대 길드와 그리드의 아이템 제작능력을 등에 업고 비상하고 싶은 이들.
둘째, 그리드라는 지존에게 동경심을 품은 이들.
돌체는 후자였다.
그는 자신의 동경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었다는 사실만으로 감동이었다. 그리드와 이렇게 나란히 서서 이야기할 수 있단 사실이 꿈만 같고 행복했다.
“그리드가 혹시 나도 알고 있을까? 난 한낱 제빵사에 불과한데....”
“당연히 알 것 같은데. 네가 만드는 빵에는 미약하나마 버프가 붙잖아. 근데 나는 모를 것 같다.”
“아니. 내가 볼 때는 그리드가 우리 전부를 알고 있을 것 같아. 평소에도 늘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여왔던 게 분명해.”
“매일 싸우러 다니고 아이템 제작하느라 가장 바쁠 텐데도 말이지....”
분위기가 훈훈해진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라우엘은 빙긋 웃었고, 그런 라우엘을 그리드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라우엘을 비롯한 이 자리의 모든 동료들.
자신에게 축복이라 믿으며.
앞으로 이들에게 더욱 더 잘하리라 다짐하며.
“그만 떠들고 성벽 보수를 서두르자. 4군 창단식 준비하려면 시간 없어.”
손뼉을 친 토반이 감격에 젖어있는 분위기를 날려버렸다.
그는 전반적으로 감정적인 템빨단원들과 달리 냉정한 구석이 있었다. 그가 있었기에 템빨단이 진행해온 사업들이 빠르게 진척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최고의 탱커 중 한 명이었으니 그리드는 토반이 좋았다.
아주 옛날에 자신에게 저지른 잘못 따위 이미 잊은 지 오래다. 대가야 그때 바로 받기도 했고.
다만.
‘토반이 내게 칼을 겨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이가 토반을 싫어하게 됐지....’
유페미나도 마찬가지다.
본래 후로이는 유페미나를 좋아했으나, 함께하는 세월이 길어지다 보니 그녀가 그리드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알게 되고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아그너스와 교류한다는 사실을 알고 대놓고 적의를 표출한다고 들었다.
과잉 충성의 발로다.
‘내가 잘 조율해야겠지.’
후로이의 마음이 기쁘기도, 골치 아프기도 하다.
혹시 잡음이 생기지 않게끔 중심을 잡아줄 필요가 있다.
그리드가 생각할 때였다.
“오러 마스터!”
“휴, 휴렌트다!!”
“휴렌트가 우리 길드에 가입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손에 호미를 쥔 사내가 있었다. 바지 밑단을 말아 올린 모습과 장화에 말라붙어있는 흙을 보니 영락없이 밭일을 하다 온 꼴이다.
“불러서 오긴 했다만....”
그리드를 마주보고 선 휴렌트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현역에서 은퇴하고 3년이 지난 입장.
조용한 삶에 익숙해진 그는 사람들의 관심이 어색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리드.
내가 에트날 왕국의 앞잡이가 되어 템빨국을 침략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거둬준 사람이다.(그리드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심지어 피아로라는 일생일대의 은인을 곁에 붙여주었다.(이것도 그리드는 몰랐던 일이지만)
그 포용력에 존경심을 느낀 휴렌트는 그리드를 리더로 인정해가고 있었고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레이단에서 새로운 길드 창단식이 있을 테니 참석해 달라는 그리드의 요청을 듣자마자 이곳까지 달려왔다.
“.....”
지슈카, 폰, 레가스 등.
호승심 강하기로 유명한 템빨단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느끼면서도 딱히 의식하진 않는다.
어차피 자신은 약골.
저들의 호승심에 응할 자격조차 없으니 의식할 필요가 없다.
“자리를 빛내줘서 고맙다.”
그리드가 악수를 건네 오자 맞잡은 휴렌트가 중얼거렸다.
“빛내기는 무슨.... 민폐나 안 끼치면 다행이겠다.”
그동안 그리드는 휴렌트에게 일체의 개입도 하지 않았다.
휴렌트는 그저 행정관 라빗과 농부 피아로의 명령대로 밭일과 수련에만 열중해왔을 뿐이다.
한데 오늘 레이단으로 소집 명령을 받은 것이다.
소집 명목은 템빨단 4군의 창설을 축하해주자는 것이었지만 글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을 터다.
굳이 전쟁 중인 레이단에서 새로운 길드를 만들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리드는 대규모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 결국 나도 싸우게 되겠지.’
걱정이다.
그리드에게 일초지적을 당한 이후 몇 년 동안 활약하지 못한 내가.
나 같이 약한 놈이 전쟁에서 도움이나 될까 싶다.
특히 상대는 제국.
서대륙 최강의 국가다.
병사들이야 몇 명 해치울 수 있을지 몰라도 기사급 적을 만날 경우 단칼에 베여 죽지 않을까?
‘또 한 번 호되게 망신을 당하겠군...’
한숨 쉬는 휴렌트.
구석에 모인 100명의 플레이어들이 그를 선망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오러 마스터도 템빨단원이었다니!’
‘휴렌트가 그리드에게 쉽게 당한 전력이 있긴 하지만 그전까지는 최강자 중 하나였지.’
‘미국인들은 아직도 휴렌트를 기다리고 있다고.’
‘몇 년 동안 은거하면서 더욱 수련을 쌓았을 테니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있을 거야.’
100명의 플레이어는 오늘 창단식의 주인공들이다.
라우엘이 직접 섭외한 포병 랭커들.
템빨단원들의 화려한 면면과 비교가 안 되는, 비교적 평범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리드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100인의 포병들은 그리드가 굳이 자신들에게 인사를 건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뭔가 사정이 있어서 포병대를 창설하는 듯한데, 딱히 기대감은 없을 게 분명했기 때문.
포병이라는 직업이 워낙 쓰레기에다가 자신들의 레벨은 고작 200도 안 되지 않은가.
우리 따위에게 지존이 인사를 건네는 것도 웃기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만나서 반가워요.”
포병들에게 다가온 그리드가 활짝 웃으며 인사해왔다.
화들짝 놀란 포병들이 가지각색으로 반응했다.
누군가는 완전히 얼어붙었고, 누군가는 눈 둘 곳을 몰랐으며, 누군가는 발을 굴렀고, 또 누군가는 고개를 조아렸다.
하나 같이 자신감 없는 모습들이다.
그리드는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안타까웠다.
그가 멍하니 서있는 미녀에게 악수를 건넸다.
정의상실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포병 랭킹 1위 정의상실님을 우리 템빨단에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군요.”
“여, 영광이라니, 가당치도 않아요! 저야말로 영광이고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그리드가 건넨 손을 두 손으로 맞잡는 정의상실.
사실 그리드는 그녀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정의 상실.
아이디부터가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그리드는 그녀가 과거의 자신처럼 음울하고 음흉하여 사고를 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고문관으로 찍은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뒤에서 예의주시하며 관리할 생각이다.
좋은 동료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직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많고 정의도 살아있다는 사실을 템빨단에서 깨닫게 되실 겁니다. 앞으로는 우리와 함께 행복을 찾아가셨으면 좋겠군요.”
“....?”
싱긋 웃는 그리드의 말에 많은 템빨단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극검을 비롯한 한국인 템빨단원들은 알아들은 눈치였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인들에게야 정의상실의 아이디가 ‘정의상실’ 그대로 표기되고 있었지만 다른 국적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정 의상실’이라고 표기되고 있었으니까.
의상실.
boutique.
그렇다.
정의상실의 아이디는 정의 상실이 아니라 정 의상실이었다.
“.....”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고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그리드가 헛기침 했다.
“조크입니다, 조크.”
“아, 네....”
내내 굳어있던 정의상실이 풋,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국인인 그녀는 그리드가 진짜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귀여우시네요.”
자신도 모르게 감상을 뱉은 정의상실은.
찌릿!
“....히끅!?”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봐오는 유라와 지슈카, 그리고 루비의 살기 때문에 질색해야만 했다.
섹시여고생.
아이디만 여고생이고 이제는 여대생인 예림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인기 많은 남자가 더 매력적인 법이지.”
벌써 몇 년째 그리드를 노리고 있는 예림이다.
그녀는 사냥감의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르기를 기다리는 맹수와 같았다.
같은 시각.
레베카교와 야탄교, 그리고 발할라의 군대가 뒤엉켜 싸우는 전쟁터에 불온한 마기가 집결되고 있었다.
전쟁 중에 죽은 모든 사람들이 ‘제물’이 되어주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기필코.”
<가미긴>이 강림하기를.
검게 물든 하늘을 올려보면서, 제국의 3황자 브누아는 간절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