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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82화 (877/1,794)

템빨 48권 - 7화

좋은 스킬일수록 잠재력이 높다. 그리고 잠재력이 높은 스킬일수록 응용 난이도가 어렵다.

스킬의 모든 잠재력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역량의 문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스킬이 종종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가 <초감각>이다.

다가올 위기와 대상의 행동 패턴을 예측하는 스킬.

누군가가 이미 사용한 스킬의 타깃이 되었을 때, 자신이 상대방을 타깃으로 지정하였을 때, 혹은 누군가와 조우하는 순간이나 특정 장소에서 이동 시 등등.

온갖 조건 하에 기능을 발휘하는 그것은 무조건 ‘시스템의 보조’를 받는다.

시스템이 예측하는 사항을 알림창, 혹은 음성으로 사용자에게 인식시켜주는 방식이다.

제아무리 천재라 한들 실시간으로 마구 떠오르는 정보의 범람을 고스란히 감당하긴 힘들다. 걷잡을 수 없이 떠오르는 알림창이나 음성의 안내를 맨정신으로 허용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하여 제약이 생긴 것이다.

검호급 플레이어의 초감각은 지속 시간이 수초에 불과하며, 검성 크라우젤의 초감각은 스탯화 되어 상당수 기능이 제한됐다. 그리고 스탯이 오를 때마다 기능의 제한이 조금씩 풀리면서 플레이어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었다.

<란스티어의 술법>에 속하는 <그림자 술법> 또한 마찬가지다.

지정한 그림자를 무기, 혹은 병사로 일으켜서 부분적으로 컨트롤해야 하는 그 최상위 스킬은 플레이어가 일으킬 수 있는 무기와 병사의 숫자에 제한을 둠으로써 플레이어의 부담을 줄였다.

카심에게 란스티어의 술법을 사사하고 그림자 술법의 스킬 레벨이 3에 등극한 페이커가 일으킬 수 있는 병사의 숫자는 고작 6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카심은 달랐다.

메르세데스가 초감각의 상위 버전인 <혜안>을 완전하게 다룰 수 있는 것처럼 카심 또한 그림자 술법을 완전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림자의 왕>이라는 ‘설정’을 지닌 네임드급 NPC의 위용이라는 것이다.

쿠콰콰콰콰콰쾅-!

수십 만 그림자 대군이 전장을 난도질한다.

자신의 발밑에서, 혹은 등 뒤에서 솟아난 새카만 병사들에게 제국군 병사들은 배를 찔리고 등을 베였다.

‘다수 소환 시 위력 약화’라는 그림자 술법의 기본 특성은 카심에게도 적용되는지라, 그림자 병사들에게 치명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은 제국군 병사는 지극히 드물었으나.

“으.... 으아아....”

제국군의 사기는 완전히 매몰되었다.

갑자기 솟아난 수십 만 대군의 모습은 어떠한 자연재해보다도 경악스러운 것이었으니까.

다만, 한 사람.

병사들이 뒷걸음치자 자연히 만들어진 무대의 중심에 선 취공 디워스만큼은 태연했다. 아니, 그는 도리어 즐겁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가 어둠 속에 숨어있는 카심의 모습을 정확히 포착하며 말했다.

“네가 바로 흑묘족의 생존자였구나.”

콰작!

디워스가 손에 쥐고 있던 놀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쿨럭, 피를 토하는 놀.

그는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체내에 흡수 된 정체불명의 알코올이 그의 마력과 장기들이 제기능을 못하게끔 방해했다.

텅!

기사들이 있는 방향으로 놀을 걷어차 치운 디워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령부에 책사들이 없어 오합지졸이 되었던데 너의 소행이었군. 제법 머리를 굴렸어. 하지만 이제와 흥분해서 일을 그르치다니 아쉽게 됐군. 너는 내 손에 죽을 것이고 제국에의 복수를 이루지 못할....”

“방금 그 말 취소해라.”

연신 떠드는 디워스의 말을 카심이 중간에 잘랐다.

은신의 의미가 사라지자 모습을 드러낸 그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디워스가 머리를 긁적인다.

“무슨 말?”

“흑묘족이라는 말을 취소하라고!!”

흑묘족.

제국이 네로족을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이다.

네로족의 피부가 검으며 행동은 은밀하고 날쌔 ‘검은 고양이’ 같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었다.

딱히 비하의 의도는 없었다.

하찮은 존재들을 굳이 수고스럽게 비하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저 부르기 편해 쓰는 말일 뿐이다.

“우리는 흑묘족이 아니라 네로족이다!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었다!!”

한데 제국이 짓밟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오로지 나만이 살아남았다.

쩌렁쩌렁!

카심의 외침이 전장을 흔든다.

물결치는 제국군 병사들 사이로부터.

슈슉! 슈슈슉!!

그림자 병사들이 던지는 병장기가 디워스에게 쇄도했다.

디워스가 손을 휘저었다.

“하찮은.”

꽈광-! 꽈과과광!!

독주의 향을 물씬 풍기는 마력의 보호막이 끊임없이 날아오는 그림자 무기들을 모조리 파쇄시킨다. 흩어진 그림자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대사하란 제국의 공작을 상대하는데 그림자의 개수를 여기까지 늘려?”

디워스는 카심을 모른다.

하지만 그림자의 왕은 알고 있었다.

온 대륙을 아우르는 제국의 정보력은 그림자의 왕이 전대 란스티어의 제자이며 그림자 술법을 주무기로 삼는다는 사실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림자는 분산될수록 흐려지는 법. 제국의 공작을 시해하고 제국에 복수할 작정이라면 모든 그림자를 한 점으로 모아 내 심장을 노렸어야지. 이렇게 말이다.”

키이잉-!

카심을 겨냥하는 디워스의 손가락 끝에 마력이 응축된다.

제국군 기사들에게 붙잡혀 포박당한 놀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고작 인간 따위가 저런 힘을....!”

피이이잇----

사막이 갈라진다.

직선으로 뻗어나간 마력이 카심의 심장을 꿰뚫고도 멈추지 않고 날아가 사막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폭음이 없었기에.

털썩!

카심이 무릎을 꿇었다.

맥없이 쓰러지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실 끊어진 인형과 같았다.

“카심!!”

카심이 등장과 함께 보여준 위용을 보고 희망을 품었던 크리스.

뒤늦게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그가 폭군의 길을 전개했다.

부디 카심이 살아있기를 바라며, 잠시나마 디워스의 시선을 끌고 카심과 놀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줄 각오였다.

제국군을 헤치고 나아가 디워스에게 돌진하는 그의 목덜미를.

덥썩!

병사들 틈에서 튀어나온 어떤 손이 붙잡아 세웠다.

이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께선 죽지 않았다.”

제국에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카심.

복수심만으로 갓난아기의 곁을 몇 년이나 지켰던 그가 쉽게 냉정을 잃을 리 만무하다.

그림자 대군을 일으킨 카심의 분노는 연기였다.

네로족에 생존자가 있음을 알린 것은 희생이었다.

디워스의 관심을 끌고, 어둠속으로부터 드러낸 자신의 모습이 가짜임을 들키지 않기 위한.

목적은.

푸화하학!!

“....!?”

놀의 구출이다.

놀을 포박하고 있는 기사들 틈에서 나타난 카심의 단도가 몇 번의 휘광을 발하자 기사들이 쓰러졌다.

“놈을 잡아라!”

대노한 기사들이 카심에게 반격했다. 마법사들도 지원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어쌔신 중 최고의 실력자라는 카심을 평범한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저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카심은 놀을 품에 안고도 남들보다 빨랐다. 네로족의 특성과 결합 된 그림자 술법은 일반적인 그림자 술법보다 은밀했다.

“사라졌다?!”

훌쩍 뛰어가더니 귀신처럼 사라져버린 카심.

놀을 구출해서 누군가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버린 그의 기척은, 천하의 칠공작 디워스도 감지하기 힘든 것이었다.

“당했군.”

조금 전 마력의 방출 탓에 술에서 깬 디워스가 한숨 쉰다.

취기가 사라지자 흥까지 잃은 그가 뒷일을 풀바즈 후작에게 떠넘겼다.

“잡을 수 있는 놈들이라도 잡든가 하시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풀바즈 후작의 시선이 어물쩍거리고 있는 크리스에게 향했다.

또한 그는 크리스를 붙잡아 세웠던 ‘어떤 손’의 주인의 기척까지 놓치지 않고 감지하는 중이었다.

“레이단의 사령관 크리스. 인질로서의 가치는 충분하겠지.”

철컥!

후작이 검을 뽑자, 그의 좌우로 도열하고 있던 네 명의 백작들 또한 일제히 검을 뽑았다.

하나하나가 크리스 이상의 실력자였다.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통솔하는 수뇌부다웠다.

애초에 수십 만 대군의 포위망을 뚫을 도리도 없다.

‘인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질이 됐다가는 아군의 발목을 붙잡는 수가 있다.

시간 낭비도 커질 것이다.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편이 낫다.

카심과 놀은 무사히 탈출한 것 같으니, 미련을 가질 이유는 없다.

판단한 크리스가 모든 방어구를 해제했다.

적들이 자신을 생포할 틈을 죽지 않고 다음 공격에 순순히 죽을 의도였다.

물론 사령관의 죽음은 아군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킬 테지만 인질이 되는 것보단 나았다.

그때.

쏴아아아아아아-

바람이 불어왔다.

제국군 병사들을 홍해처럼 갈라지게 만드는 돌풍이자 후작과 백작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바람을 이리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마법사는 크리스가 아는 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제드노스!”

템빨단의 초창기 멤버.

전 체다카 출신이자 바람술사 랭킹 1위인 제드노스가 크리스에게 귓속말을 보내왔다.

-앞으로 3초도 유지 못한다! 이틈에 어서 도망쳐!

기적은 쉽게 행해지지 않는다.

수십만 대군 중 극히 일부의 발만을 묶었을 뿐이지만 제드노스는 모든 마나를 쥐어짰다.

백작 중 하나가 검 끝에 오러를 모으고 있었다.

벌써 기세를 잃어가는 바람의 장벽은 곧 산산조각 날 운명이었다.

-알았다!

동료가 위험을 무릅쓰고 도우러 왔는데 순순히 죽어줄 수는 없다.

날아오는 화살의 비를 피하며 다시 빠르게 방어구를 착용한 크리스가 뒤로 내달렸다.

병사들의 시선이 분산되었다 싶더니, 곳곳에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슈카와 유라가 화살과 총탄으로 엄호해주었고 폰과 레가스, 극검이 적진을 헤집었으며 반트너와 토반이 광역 도발 스킬을 전개했다. 지르칸과 라엘라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 또한 최선을 다해서 퇴로를 확보 중이었다.

“크리스! 이쪽으로!”

“어서 도망치세요!!”

“...하여튼 하나 같이 미련하다니까.”

대검을 횡으로 휘둘러서 적군을 썰어버린 크리스가 너털웃음 쳤다.

사막 곳곳의 오아시스에 포진해 있던 템빨단원들.

로테이션으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체력의 안배와 최대의 효율을 추구해온 그들 전원이 전장에 난입한 상태다.

크리스가 놀을 구하려고 했던 것처럼, 그들 또한 크리스를 구하려하고 있었다.

본인의 목숨이 아깝다는 생각은 못하고 있겠지.

본인보다 동료의 목숨이 더 소중하다고 믿을 테니까.

이게 다 그리드 때문이다.

이들 모두 그리드를 보고 배웠다.

콰아아앙-!!

열려있는 퇴로로 돌진하는 크리스의 등에 마법이 적중했다.

강력한 파괴력에 크리스의 몸이 휘청거리자 드러난 빈틈을 제국군은 놓치지 않았다.

꽈광! 꽈과과과광!!

간극 없이 쏟아지는 마법이 크리스의 생명력을 빠르게 앗아간다.

생포하라는 후작의 명령이 없었다면, 이미 크리스는 죽었을 것이다.

지척까지 다가온 백작들의 기척을 느낀 크리스가 사력을 다해서 소리쳤다.

“나는 포기하고 모두 도망쳐!!”

“아니.”

“....?”

크리스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그림자가 말했다.

“사령관은 죽어선 안 된다.”

푸화학-!

그림자가 솟구치며 흑발이 나부낀다.

“페이커...!”

콰작!

크리스에게 손을 뻗고 있던 백작 중 하나의 몸이 고꾸라졌다. 그를 박차고 뛰어오른 페이커가 측면의 다른 백작을 무릎으로 올려 찬 후 단도를 꽂아 넣었다.

신속에 연계되는 파괴적인 체술.

오직 그리드만이 알고 있는, 생전 도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어림없다!”

쓰러졌던 백작들이 다시 벌떡 일어났다. 총 4명의 백작이 동시에 페이커에게 칼을 꽂았다.

채챙-!

페이커는 한 명의 칼을 피하고,

푸욱-!

한 명의 복부에 단도를 찔러 넣은 대가로.

푹푹!!

자신의 몸이 난자당했다.

페이커의 피가 허공을 수놓는 광경은 크리스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페이커는 크리스도 한 수 접어두는 강자였기에.

“페, 페이커!”

“가라.”

페이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6명의 그림자 병사를 소환하더니 크리스를 둘러싸 보호하게끔 만들었다.

병사들을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정신이 분산될 수밖에 없는 바.

페이커의 본신이 약해진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템빨국을 보위하는 그림자.

빛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며, 아무도 나를 모른다. 나의 죽음은 전세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월식.”

페이커가 어둠과 불완전하게 동화되었다.

6명의 그림자 병사를 제어하느라 그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백작들은 페이커의 기척을 놓치지 않았고, 페이커는 계속 베이고 찔리면서도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다음에는.... 다음에는 내가 너를 지키겠다!!”

맹세하며, 그림자 병사들의 호위를 받은 크리스는 간신히 적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어느새 한곳에 집결한 템빨단원들이 그를 부축했다.

한데 풀바즈 후작이 크리스의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상황이군.”

적장들을 일망타진할 기회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이한 풀바즈 후작이 궁극기를 전개하려다가 멈췄다.

“꺼져라!!”

카심의 도움을 받아 그림자 속에 숨었던 놀이 나타나 후작을 위협한 까닭이다.

대부분의 취기를 몰아낸 놀의 상태를 읽은 풀바즈 후작이 조용히 검을 거뒀다. 그는 그대로 도망치는 템빨단원들의 추적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리고 디워스를 원망했다.

‘디워스 공이 끝까지 싸워주었다면 적들을 몰살시킬 수 있었을 터인데.’

취하지 않은 디워스는 나태하다.

어떤 특정한 상황이 아닌 이상 열정을 보이는 법이 없다.

젊은 귀족들을 겁쟁이라 비난하였던 디워스 본인부터가 당당할 입장이 아닌 것이다.

암담한 사실은, 칠공작 대부분이 디워스와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너무 오랜 번영을 겪은 제국은 위에서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한숨 쉰 풀바즈 후작이 전군에 명령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

“우와아아!!”

며칠만의 휴식 명령인가.

오늘만큼은 놀과 템빨단원들의 침략이 없을 거라 판단하는 후작의 명령에 병사들이 환호했다.

이날 새벽.

레이단 성 상공에서 강한 마력의 파동이 감지됐다.

“메스 텔레포트?”

막사 밖으로 뛰쳐나온 풀바즈 후작이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의 곁으로 바게트 백작이 다가왔다.

“적에게도 원군이 도착했나보군요.”

교전 중에 템빨국의 젊은 어쌔신에게 중상을 입었다더니 말끔하게 호전 된 모습이다.

“걱정했는데 쾌차해서 다행이구려.”

“각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입니다.”

대답하는 백작의 몸에서 닭똥 냄새가 났다.

전장에서 땀을 많이 흘렸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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