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8권 - 3화
Satisfy가 오픈 6년을 맞이했다.
공식적인 기록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 클로즈 베타 기간을 포함한 6년이기 때문이다.
클로즈 베타에 선택 됐던 특정 소수의 유저들에게만 특별한 의미가 되는, 그런 어느 날.
[북쪽 끝의 동굴을 발견하였습니다!]
드디어.
[서대륙의 모든 지역 탐사에 성공하셨습니다!]
탐험가 랭킹 1위 스컹크가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다.
수많은 도전자 중 단 한 사람도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입니다!]
[업적 보상으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칭호를 획득하였습니다!]
[플레이어 최초로 <완전한 지도>를 얻었습니다!]
[<완전한 지도>의 보상으로 당신의 <최상급 나침판>이 <진리의 나침판>으로 승급합니다!]
[새로운 지도 완성 속도가 영구적으로 10퍼센트 상승합니다!]
[앞으로 모든 <지역>마다 1개씩의 묘목을 심을 수 있습니다. 묘목이 성장해서 나무가 될 경우 당신의 눈과 귀가 되어줄 것입니다. 파괴당하는 묘목, 나무는 영구히 복구 불가.]
[★역사에 없던 전설이 태동하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열흘 동안 스킬 경험치, 캐릭터 경험치, 퀘스트 획득률이 80퍼센트 상승합니다!]
“아... 아아....”
지난 노고가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살짝 주름진 스컹크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긴 시간 동안 오직 한 길만을 걸어온 끝에 목적을 달성하고 합당한 보상까지 받았으니 감회가 새롭고 감격은 컸다.
“축하해. 검의 무덤에서 입었던 손해를 모두 복구하고도 남을만한 보상이네.”
도그우먼의 축하 인사였다.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받은 스컹크가 미소 지었다.
“그때의 일을 손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우리는 충분한 경험과 지식을 쌓았고 그리드라는 거물에게 호의를 얻었으니까.”
“과연 그리드가 우리에게 좋은 감정을 품을까? 일반적인 전투 클래스 유저들도 우리들을 돈독 올랐다고 조롱하는데, 그리드는 생산직 플레이어임과 동시에 일선에서 싸우는 전사잖아? 우리에게는 왜 그러지 못하냐면서 도리어 더 우습게 볼 수도.”
“아니, 내 생각은 달라. 그리드 본인이 생산직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할 거야. 실제로 템빨국에서 가장 좋은 대우를 받는 직업군은 대장장이라는 소문이고.”
“뭐, 사실 논할 거리도 아니지. 진리의 나침판과 완전한 지도를 얻은 것으로 모자라 전설의 자격까지 얻으신 우리 스컹크 님을 그 누가 함부로 대하겠어? 앞으로 모든 플레이어가 속내는 어쩔지 몰라도 당신 앞에서는 굽실거릴걸? 당연히 그리드도 마찬가지일 테고.”
“.....”
확실히, 맞는 말이다.
서대륙의 모든 지형을 속속들이 꿰고 온갖 히든 피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스컹크의 가치는 천문학적이었다.
야망을 지닌 자는 스컹크를 동료로 회유하고 싶어 안달일 것이다.
스컹크 본인 또한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글쎄.... 사람들의 태도가 변한다고 해서 딱히 달갑진 않을 것 같군.”
스컹크가 Satisfy를 시작한 이유는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더 큰 세상에 숨겨진 온갖 비밀들을 파헤치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어서였을 뿐이다. 동시에 돈까지 벌 수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딱 거기까지.
자유를 사랑하는 스컹크는 누군가에게 귀속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향후 계획은 단 하나뿐.
새로운 탐험이다.
펄럭.
스컹크가 완전한 지도를 펼쳤다.
서대륙의 모든 지형이 담겨있는 지도.
이것은 정녕 완전한 지도일까?
아니다.
공교롭게도 완전하지 않다.
세상은 서대륙이 전부가 아니니까.
적해와 동대륙.
모든 게 베일에 싸인 그곳들은 천하의 스컹크에게도 아직 미지의 땅이었다.
물론 동대륙은 몇 번 다녀왔다지만 초입일 뿐이다.
심지어 지금은 초국의 병사들이 서대륙 출신들을 배척하고 있어서 동대륙 탐사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작년, 동대륙을 다시 찾았을 때 최초의 도시 판게아는 텅텅 비어있었고 그때부터 초국의 병사들은 서대륙인을 지극히 경계했다.
‘적해.’
동대륙을 갈 수 없는 지금.
스컹크는 고서에서도 다루지 못하는 미지의 해양으로 시선을 돌렸다.
‘적해를 탐사한다.’
세계 제일의 탐험가가 눈을 빛냈다.
결정한 이상 행동은 빠르다.
“갈레스트로 가자.”
“갈레스트? 제국?”
“응.”
갈레스트는 제국 최대 규모의 항구 도시이다.
최신식 화포를 무장한, 서대륙 최고의 함선들을 대여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이기도 했다. 적해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갈레스트에 들러야했다.
하지만 도그우먼의 반응은 썩 좋지 못했다.
“거기 지금 전쟁터라던데. 수인족 왕이 깽판을 치고 있대.”
이종족의 왕은 네임드 NPC로 분류된다.
서대륙 곳곳을 탐사하며 여러 이종족을 만나온 스컹크의 동료들은 수인족 왕의 무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가 깽판을 놓고 있는 갈레스트로 향했다가는 전쟁에 휩쓸려서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염려하는 동료들에게 스컹크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국의 전력을 몰라서 그래? 천하의 수인족 왕이라도 진즉에 제압당했거나 도주했을 거야.”
갈레스트의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스컹크의 확신이었다.
“당장 갈레스트로 출발하자.”
***
“살짝 다릅니다. 이런 식으로 설계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아니요. 각도를 조금 더 아래로....”
“아하. 알았어.”
백호검 창조 이후 최초다.
누군가와 함께 새로운 아이템을 창조하는 경험.
템빨국 최고의 대장장이들과 둘러선 그리드는 신식 대포의 설계도를 신중히 그려나갔다.
지지대에 바퀴가 달린 견인포이자 포탄을 총구 뒤쪽으로 밀어 넣는 후미장전식포(이하 후장포). 그리고 저각, 고각 모두 사격이 가능한 곡사포.
새로운 병기의 기본적인 특징이었다.
병사들이 직접 끌고 다닐 수 있어 기동성이 좋고 전장식 대포에 비해 장전속도가 월등히 빠르며 포격 위치를 유연하게 잡아 활용도가 높다─ 등등.
특히 동대륙 출신 대장장이들이 새로운 병기의 장점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후장식 대포의 가장 큰 장점은 포신이나 총열의 길이가 재장전 속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포신을 길게 만들어서 위력과 정확도, 사정거리를 극대화할 수 있죠.”
뭐라고 자꾸 떠든다.
“그, 그렇군. 그럼 포신 길이를 이만큼 더 늘리면 되는 거야?”
“아니요. 그만큼이나 늘리면 무게가 너무 나가게 됩니다.”
“흑철로 만들 거잖아? 흑철은 강철보다 가벼우니까 문제될 거 없지 않나?”
“흑철인 점을 감안해도 길이가 너무 깁니다. 이 길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지지대와 바퀴의 면적을 키워야하는데 그럼 대포 하나당 포병을 5명씩은 배치해야할 겁니다.”
“차라리 흑철 대신 푸른 오리하르콘을 쓸까? 그럼 무게 문제가 해결 될 텐데.”
“푸른 오리하르콘은 수량이 너무 한정적일뿐더러 도리어 가벼워서 문제입니다. 발포할 때마다 포신이 흔들려서 지지대를 강화해야하고 그럼 또 필연적으로 바퀴도 커져야하니 푸른 오리하르콘을 쓴다고 해서 해결 될 문제가 아니죠.”
“...결국 포신 길이는 여기까지만 늘리라 이건가?”
“네.”
대장장이들의 설명을 듣고 그들의 경험과 지식에 의존해서 설계도를 그려나가는 그리드.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장장이들의 설계 의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노력.
딱 거기까지다.
현재 그리드는 본인이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지만 설계도의 과학적, 기술적 원리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드가 실질적으로 개입하는 부분은 디자인에 한정 됐다.
대장장이들이 백날 떠들어봤자 그리드는 모르는 분야이니만큼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문제는 없었다.
잘못 된 것도 아니다.
세상에 어느 플레이어가 모든 지식을 습득하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 스킬은 친절했다.
그리드가 이해하지 못해서 설계도에 서술하지 못하는 원리들을 모두 시스템이 대신 이해하고 분석해서 설계도에 서술했다.
그리드가 실패작을 창조했을 때와 같은 현상이다.
하지만 실패작 창조 당시와 지금은 비교가 안 된다.
지금은 시스템뿐만 아니라 최고의 대장장이들이 함께 그리드를 보좌해주고 있었으니까.
새로운 대포는 실패작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난 퀄리티의 결전병기로 완성 될 가능성이 높았다.
“포병들의 안전도 보장해주는 편이 좋겠는데. 포구 위쪽으로 작은 벽을 세워주는 건 어때?”
“오오.”
“과연 훌륭하십니다!”
현재 그리드를 보좌 중인 대장장이들은 모두 대포의 성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그리드는 인명까지 신경 썼다.
병사들이 대포를 쏘다가 애 먼 화살이나 마법에 죽을 수도 있다고 가정한 그리드는 포구 위로 방패를 덧씌웠다.
그러자 설계도 속 대포의 모습은 한층 멋져졌다.
처음에는 2개의 바퀴 사이에 포신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디자인이었던 반면 이제는 포신 위로 사각형의 벽이 생겨 안정감과 중후한 멋이 생겼다.
물론 무게가 늘어났다는 단점도 덩달아 생겼지만 문제 될 정도의 무게는 아니었다.
어차피 대포를 끌고 다닐 사람은 그리드가 아니라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상관없었고.
‘노동의 대가로 목숨을 건질 가능성이 높아졌으니 좋은 거지.’
“멋지군. 제국에서 사용하는 대포들과 비교해서 연사속도와 명중률이 월등히 뛰어나겠어. 위력과 사정거리는 글쎄... 직접 봐야 알겠지만.”
그리드가 공유해준 설계도의 상세 정보를 읽어 본 판미르가 감탄했다. 대장장이 랭킹 1위의 안목은 과연 대단해서 신식 대포의 위력을 꽤 정확하게 가늠했다.
그가 물었다.
“그래서 이름은 정했나? 앞으로 템빨국의 위세를 대륙 전역에 떨쳐줄 이 신식 대포의 이름말일세.”
“정했습니다.”
“오오!”
판미르의 기대감이 고조됐다.
대장장이들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그리드는 진중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템빨포입니다.”
“역시....”
판미르는 어이가 없었다.
템빨포라는 이름이 못나서가 아니라 도리어 귀에 붙었기 때문이다.
템빨단, 템빨국 소속이 돼서 그런지 몰라도 이름 앞에 템빨이 붙어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질 않았다.
“도리어 평범하고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로군.”
너털웃음 흘린 판미르가 중얼거리자.
“밋밋하다고요? 그럼 앞에 슈퍼 울트라 같은 거 붙여요?”
“...그러지 마시게.”
판미르가 정색했다.
슈퍼 울트라 템빨포는 결코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그리드는 템빨포로 만족해야했다.
그날 밤.
“이제 됐겠지?”
“네, 완벽합니다.”
드디어 설계도가 완성 됐다.
최초에는 공백이었던 설계도에 흑색 포신을 가진 대포의 모습이 꽉꽉 들어찼다. 곳곳에 나열 된 공식과 전문용어가 설계도의 가치를 높여주는 느낌이다.
“좋아.”
활짝 웃은 그리드가 설계도 하단의 완료 버튼을 누르자.
[아이템 창조를 완료하셨습니다.]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과 전설의 대장장이가 머리를 맞대고 탄생 시킨 걸작입니다!]
[창조 아이템의 등급이 한 등급 높아집니다!]
“....!!”
놀라운 알림창과 함께 설계도의 상세 정보가 그리드의 시야에 떠올랐다.
<도안:템빨포>
등급:유니크~전설
“....!!”
그리드와 대장장이들이 템빨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양산이 가능할 것’이었다.
빠르고 쉽게 제작할 수 있게끔 규격을 표준화시켰고 쓰이는 재료도 비교적 평범한 것들로 구성했다.
하여 템빨포의 등급 자체는 낮을 것으로 판단했다.
최대 등급은 전설이되 최소 등급은 레어~에픽부터 시작할 것으로 보았다.
아이템 등급을 결정 짓는 요인 중 하나가 사용 재료의 질이라는 점을 감안해봤을 때 충분히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한데 완성 된 템빨포는 유니크 등급부터 보장 받았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최고의 결과였다.
“좋았어!!”
“감축드립니다, 전하!!”
그리드와 대장장이들의 환호성이 대장간을 가득 메웠다. 헐벗은 사내들이 나이와 신분을 잊고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그들의 머릿속에 밝은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