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8권 - 2화
“와, 정말이지 무시무시하구만.”
“요구한 것보다 43초를 더 버텨주었네요.”
2분 23초.
적진 한가운데 난입한 놀이 날뛴 시간이다.
최소 수십 개에서 최대 수천 개의 공격이 매번 동시에 놀을 공격했지만 그는 죽지 않고 버텼다.
안 그래도 뛰어난 탱킹 능력과 회복 능력을 보유한 그에게 생명력 회복 효과 상승, 받는 피해 경감, 다수의 적 상대 시 추가 방어력, 어두운 장소에서 물리방어력과 마법저항력 상승 등의 옵션을 지닌 <강한 신뢰의 발할라>까지 쥐어졌으니 좀비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탱커가 광역 마법으로 흡혈까지 해대니까 거의 불사신이네.”
놀의 방어력과 회복력은 압도적, 독보적인 수준을 넘어서 사기적이었다.
아직 3차 전직도 못한 일반 병사들의 공격력으로는 그에게 유효타를 먹이지 못했다.
물론 25만 제국군 중에는 3차 전직 정예병과 기사들, 4차 전직 귀족들이 대거 존재했으나 그들은 대부분 선두에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진형 중앙에 난입한 놀에게 즉각 대처하지 못했고 그 틈에 놀은 거침없이 적들을 살육한 것이었다.
직계 뱀파이어에게 붙는 ‘재앙’이라는 수식언은 일체의 과장도 없음을, 놀은 확실하게 증명했다.
그리고 동시에 무력(武力)이라는 개념의 한계를 증명하기도 했다.
놀이 날뛴 2분 23초라는 시간.
단신으로 25만과 싸웠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화장실 한 번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보다 짧다.
그토록 강한 놀조차도 찰나밖에 활약하지 못한 셈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놀이 해치운 적의 숫자가 무려 2천 단위기는 했지만 25만 중 2천은 티끌에 불과하기도 했고.
그렇다.
일신의 무력에는 명백히 한계가 있다.
“.....”
페이커와 카심이 적의 요인들을 암살할 수 있게끔 시간을 벌어준 놀.
그의 치열하면서도 처절한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유페미나는 강한 영감을 받았다.
자신이 지닌 <복제>의 힘을 그녀는 다시 한 번 돌이켜보았다.
여태껏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대단위 마법을 복제해서 적을 최대한 많이 학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온 그녀였으나 이번만큼은 달라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이번에는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아.’
아무리 많은 대단위 마법을 복제해서 사용해도 그녀 혼자서 처치할 수 있는 적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마법 방어에도 철저히 대비 중인 수십 만 대군을 상대로 온전한 힘을 발휘할 자신도 없었다.
‘무력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필요해.’
전쟁에서 가장 주요한 힘.
무력과는 다른 능력.
과연 무엇일까.
내가 이 힘을 어떻게 활용해야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을까?
그리드와 동료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얻어온 유페미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자신을 믿어주는 동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이제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된 템빨단과 템빨국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는 쉬지 않고 궁리했다.
그 끝에.
“...후로이.”
유페미나는 한 명의 사내를 떠올렸다.
오직 그리드의 등만을 바라보며, 오직 그리드를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웅변가.
좋게 말하면 충신이요, 나쁘게 말하면 간신배의 전형인 그는 매번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활약해왔다.
지난 한 달 동안 레이단의 병사들이 제국군을 상대로 좌절하지 않고 싸워올 수 있었던 이유 또한 후로이의 말솜씨에 있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웅변가 랭킹 1위에게 있어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일쯤이야 우스울 정도로 쉬운 것이었으니까.
“저기요. 후로이 님?”
“뭐지?”
어느 오아시스의 나무 위.
지하로 숨은 놀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몰라 우왕좌왕 중인 사막의 제국군을 망원경으로 훔쳐보던 후로이가 고개를 돌려온다.
그의 어깨에 앉아있는 암탉 한 마리가 심히 거슬렸지만, 유페미나는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후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상당히 어색하다.
그리드에게만 전념하는 후로이는 보통 동료들과 달리 살가운 구석이 없었다. 평소에 대화도 자주 나누지 않았고 이렇게 단 둘이 마주보고 선 경험은 거의 없었을 정도다.
특히 내가 아그너스와 엮이기 시작한 후부터는 눈엣가시를 보는 듯한 눈빛을 보내와서 더 불편하다.
간신히 어색함을 떨쳐낸 유페미나가 입을 열었다.
“혹시, 변장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들어봤다. 뛰어난 화장술 스킬과 성형 스킬로 대상을 감쪽같이 변장시킨다는 히든 클래스.”
“저는 2년 전 그자에 대한 소문을 처음 접했을 때 큰 흥미를 느꼈어요. 그래서 신원을 조사해놨죠.”
“아그너스의 뒤를 캐고 접근했던 것처럼?”
“...후훗.”
이 남자, 역시 불편하네.
어색하게 웃는 유페미나의 얇은 눈썹이 구겨졌다.
하지만 트윈테일 금발 미소녀가 성난 표정을 지어봤자 귀여울 뿐이다.
유페미나는 그리드가 두려워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으나, 도리어 그렇기에 후로이는 유페미나가 마음에 안 들었다.
나의 주군께서.
템빨단과 템빨국의 주인이신 그리드 님께서 두려움을 느끼는 동료라니.
유페미나의 인성이 덜 됐다고밖에 해석이 안 된다.
‘옛날에는 주군께 죄도 저질렀고 말이지....’
물론 옛날 일일 뿐이다.
유페미나는 템빨단에 가입한 이후 엄청난 공을 셀 수 없이 세워왔다.
그래도 후로이는 유페미나가 싫었다. 정말 너무너무 싫었다.
그리드가 혐오하는 아그너스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 특히 짜증났다.
속으로 혀를 찬 후로이가 유페미나를 재촉했다.
“그래서. 변장사가 뭐 어쨌다는 건데?”
유페미나도 후로이와 길게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치미는 짜증을 간신히 억누른 그녀가 즉각 설명했다.
“변장 스킬을 복제해올게요. 그리고 당신을 제국군의 요인으로 변장시켜드릴 테니까 적진에 잠입해서 적군을 선동하고 와해시켜주세요.”
“...라우엘의 계략인가?”
“아니요. 저 혼자 떠올린 계획이고 이 계획에는 반드시 당신의 협조가 필요해요. 당신이 협조해준다고 하면 그때 가서 라우엘 님에게도 설명하고 허락을 받도록 하죠.”
“흠.”
선동과 날조. 욕설과 부모님 안부. 분란과 와해.
모두 후로이의 주특기였다.
하지만 제국은 후로이를 이미 파악해놓고 있었다. 전쟁 중에 후로이가 뭐라고 떠들 기회조차 안 줬다. 그래서 후로이는 크게 활약하지 못하고 후방에서 아군을 격려해주는 수준에 만족해야했다.
그러나 변장 스킬이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주둥이를 놀릴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다.
“좋은 계획 같은데.”
“그렇죠? 다만 문제는 변장의 유지 기간이 최대 3일이라는 점이에요. 3일 후부터는 골격이 원상태로 복구돼서 변장이 풀린다고 해요. 혹시라도 3일 내에 화장이 지워졌다가는 변장의 디테일이 떨어져서 변장이 발각 될 확률도 높아지고요.”
“3일....”
과연 3일 내에 날조, 선동, 분란을 조장할 수 있을까?
무려 25만 대군을 상대로?
그건 웅변가 랭킹 1위가 아니라 전설의 웅변가가 출동해도 불가능한 일 아닌가?
후로이가 짐짓 당황하는 표정을 짓자 유페미나가 싱글 웃었다.
“못 하겠어요? 그럼 포기하고요. 능력이 안 된다는데 뭐 어쩌겠어요?”
“....뭣.”
짜증난다.
순간 욱해서 부모님 안부를 여쭤볼 뻔했다.
웅변가의 <욕설>과 <독설> 스킬은 전부 ‘언어’로써 발현되는 것.
이미 너무 많은 부모님 안부를 물어온 후로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님 안부가 입에 붙고 말았다.
습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위험한 현상이었다.
일상생활에서 부모님 안부를 물었다가 고소당하고 법정에 서는 일이 생길 수도....
“....으음.”
이러다가는 극검처럼 인터넷에 악플다는 게 취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후로이는 그리드에게 새삼 큰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그토록 강한 힘과 손재주를 통제하고 중도를 걷는 그리드가 역사에 두 번 다시는 없을 선인처럼 느껴졌다.
“.....”
주군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자.
주군을 닮는 것을 목표로 하자.
다짐하며, 평정심을 되찾은 후로이가 한층 맑아진 눈빛으로 유페미나에게 대답했다.
“....해내보이겠다. 단, 너의 변장술이 완벽하다는 전제 하에.”
“좋은 대답이네요. 그럼 저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변장 스킬을 복제해오도록 할게요. 그동안 당신은 페이커 님께 부탁해서 대상 요인의 특징과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도록 하세요.”
“그래.”
두 사람이 오래간만에 의기투합했다.
커다란 위기가 새로운 동료애를 싹 틔우려하고 있었다.
***
교황을 상징하는 백색 의복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찬란하게 빛나던 성검은 빛을 잃고 마모되었다.
야탄의 종들에게 둘러싸인 교황 데미안은 죽어가고 있었다.
악(惡)을 모조리 소멸시켰다는 최초의 교황과는 지극히 대비되는, 무력한 모습이다.
“바보 아니에요?”
흑마법사 랭킹 1위 로제.
야탄의 종의 자격으로 <제4차 종교전쟁>에 참전한 그녀가 데미안을 조롱했다. 아니, 조롱이라기보다는 황당하다는 반응에 가까웠다.
“3인의 레베카의 딸을 제외하면 큰 전력이 없는 레베카교 따위가 우리 야탄교에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오다니요? 여태까지처럼 레베카의 딸을 이용해서 게릴라전이나 벌일 것이지 왜 스스로 자기 명줄을 깎아요? 당신, 이번 패전의 책임을 물어서 교황직을 박탈당할 거라고요?”
로제는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레베카교와 야탄교의 전면전은 처음부터 승산이 없었고 패전의 책임은 교황 데미안이 물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누가 봐도 이번 전쟁은 어리석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후회하지 않았다.
“다시 한 달 전으로 돌아가게 될지라도, 나는 그대들과의 전면 전쟁을 또 다시 선포할 것이오.”
그리드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까.
어차피 이 교황이라는 자리는 그리드가 내려준 것.
그리드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다시 내려놓을 수 있다.
“대단하네. 당신이 제국의 지원 요청을 거절할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요.”
로제는 지난 한 달 동안의 전쟁을 회상해보았다.
데미안은 처음부터 이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집중하며, 이 전쟁을 오래 이끌고 나가기 위해서 발악했다.
고작 NPC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모습만 20번은 목격한 것 같다.
“당신, 이번 전쟁에서 최소 10번은 죽었죠? 타인을 위해서 거기까지 희생한다는 건 너무 이상한 거 아닌가요?”
“....아니.”
데미안이 성검을 고쳐 쥐었다.
막 회복 된 소량의 마력으로 힐을 써서 회복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찢어져 펄럭이는 의복이 시야를 방해하자 아예 벗어버린 그가 미약한 빛을 뿜어내는 성검을 로제에게 겨눴다.
“결코 이상하지 않소.”
그리드와 만났던 그날들을 데미안은 잊지 못한다.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자신.
거대한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소외받았던 자신이 그리드와의 만남으로 주역에 올라섰다.
새롭게 바뀐 세상의 풍경은 아름답고 찬란한 것이었다.
죽어가던 이사벨이 다시 건강하게 살아났을 때 느꼈던 감동은 여전히 가슴 깊숙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오직 그리드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지난날의 영광과 행복.
이제 다시 그리드를 위해서 내려놓는다 해도 아깝지 않다.
다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제는 이사벨 쨩을 가까이서 볼 수 없겠네.’
교단에서 쫓겨나 레베카의 딸들과도 만날 수 없게 된다는 점.
그것이 아쉽고 두려울 뿐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그리드와 그의 동료들이 수 년 동안 공들여 세운 템빨국이 짓밟히는 꼴을 외면할 수는 없잖은가.
“그런가요. 저로써는 야탄의 종의 지위를 버렸던 유라와 교황의 지위를 버리려는 당신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요.”
그리드라는 사람이 대체 뭐기에 이들은 이렇게까지.
쏴아아아아-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로제가 벨리알의 지팡이 끝에 마력을 응집시켰다.
그녀는 교황 데미안을 살해하고 얻게 될 업적을 벌써부터 기대하며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데미안 살해에 실패했다.
불청객의 난입이 있었다.
꾸와아아아앙-!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
신성한 종교전쟁에 난입한 괴한은 야탄교의 흑마법사들을 순식간에 도륙하고 로제의 곁까지 도달했다.
콰작-!
묵직한 일격이 로제의 허리를 꺾는다.
“커억! 쿨럭, 쿨럭!!”
마법의 캐스팅이 취소됐다.
분노와 고통으로 충혈 된 로제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웬 놈이냐!”
팔짱을 낀 채 교황의 최후를 감상할 계획이었던 다른 야탄의 종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들을 헤치고 나아가 데미안의 곁에 선 불청객이 답했다.
“오아시스라고 합니다.”
두둥-!
두두둥-!!
뒤이어 전장을 울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야탄의 종들이 고개를 돌려보자 언덕 위로 수만의 대군이 보였다.
보통 말보다 배는 큰 적마에 중년인이 앉아있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서글서글한 인상.
데미안은 물론이고 야탄의 종들조차도 그 거물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발할라의 왕!”
군신 아레스.
그가 데미안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어, 우리도 레베카교랑 잘 지내보고 싶어서 말이야.”
“하.... 하하하....”
데미안은 웃고 말았다.
사실 그는 슬펐었다.
이사벨과 작별하고 싶지 않았다.
두려웠다.
그간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고 다시 또 세계로부터 소외 될 생각에 끔찍했었다.
자신을 오아시스라고 소개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데미안 당신의 기사들을 꼼꼼히 읽어왔습니다. 당신의 지난 삶에 깊이 공감하였고 존경해왔습니다.”
과거의 데미안과 같았던.
그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인 오아시스.
<무패왕의 후예>가 지닌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괴로워했던 그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망설임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며, 두려움을 이겨낸 그는 무신 아레스의 도움을 받아 꾸준히 성장해왔다. 그 또한 세계의 주역이 될 자격을 갖춰가고 있었다.
“일만대적검.”
같은 시각,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
“서대륙은 아직까지도 후장포가 개발되지 않았단 말이오? 후장포라는 것은 탄알을 포신의 뒤쪽에서 장전하도록 만든 것으로 포구 속도를 크게 향상....”
“동대륙의 강선 기술을 접목시키도록 합시다. 기존 서대륙 대포들의 명중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명중률을 자랑하게 될 것이오.”
“화포의 구경을 표준화하는 게 좋소. 광룡철로 포탄을 만들면 관리만 어려워질 게요.”
동대륙 출신 대장장이들과 서대륙 출신 대장장이들이 새로운 대포의 설계를 놓고 끊임없이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사공을 통제할 왕이 함께 있으면 하등 문제가 없다.
공백의 설계도를 펼쳐놓은 그리드는 대장장이들의 의견을 때때로 조율하고 때때로 걸러 들으며 자신의 양분으로 삼았다.
속사정을 모르는 각국 언론사들은 그리드의 공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드, 주인공 은퇴.>
<그리드 없이 전쟁하는 템빨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