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8권
=======================================
템빨 48권 - 1화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레이단은 템빨국의 대문이라 할 수 있다.
템빨국은 제국의 레이단 진격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무장한 정예 병력과 템빨단 최상위 랭커들이 제국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 탓에 제국군은 자그마치 한 달 동안이나 사막에 발이 묶였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사막에서 매일 같이 전투를 치르며, 저 먼 곳에 우뚝 선 레이단 성이 사실은 신기루가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제국군은 지쳐갔다.
제국군의 사기가 처음만 못해진 어느 날이었다.
“적군이 전선을 뒤로 물렸습니다!”
“허!”
희소식이 날아왔다.
사막.
제국의 병사들에게는 낯설고 험난한 지형.
그곳에서의 전투를 유도해왔던 템빨국이 군대를 뒤로 물렸다는 소식이었다.
“이제 방해 없이 사막을 돌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레이단 성까지 쾌속 진군하시죠!”
제국군 사령부 막사.
희소식에 들뜬 귀족들이 흥분해서 진언했다.
하지만 제국군 사령관 풀바즈 후작은 그들의 외침을 무시했다. 그리고 참모진에게 조언을 구했다.
“사막에 익숙한 템빨군에게 있어서 사막은 무척 유리한 지형이었소. 굳이 사막을 버리고 전선을 뒤로 물렸다? 함정일 가능성은 없겠소?”
“당연히 함정을 준비해놨을 것입니다.”
“자이언트 웜의 출현 빈도가 높은 지형으로 우리를 유도할 가능성이 높지요.”
“오아시스마다 독을 풀어놓았을 겁니다.”
“굴곡진 경사를 활용한 복병의 배치에도 주의해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막을 횡단해야합니다. 사막을 넘지 못하면 레이단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충분히 주의하여 진군한다면 함정에 큰 피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참모들의 의견은 일맥상통했다.
함정은 뻔히 준비되어 있을 것이나 행군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들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진격하셔야 합니다. 템빨군이 전선을 물린 이유는 지쳤기 때문일 테니까요.”
“맞습니다. 지금이 바로 적기입니다.”
기회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한다.
참모들은 주장했고 풀바즈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제국군이야 하루가 멀다하고 원군이 도착하고 있었으니 병사들의 피로도가 적었지만, 템빨군은 사정이 다르다. 그들의 숫자는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계속되는 전투에 우리보다 지쳤을 수밖에 없다.
승기를 엿볼 때가 왔다.
“전군에 진군 명령을.”
“예!”
“알겠습니다!”
무려 25만의 대군.
지속되는 전쟁 속에서 벌써 수만의 병력이 소모되었으나 제국군의 규모는 도리어 커져있었다.
8만 병력이 전부인 레이단은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이 없었다.
“우와아아아아아!!”
지휘관들이 병영 곳곳에서 선전 활동을 벌이자 제국군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그들은 그대로 사막에 발을 들였다.
발이 푹푹 꺼지는 뜨거운 모래 위.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곳에 진을 치고 있던 템빨군의 모습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제국군은 거침없이 진격했다.
머나먼 곳에 보이는 레이단 성의 높은 첨탑을 이글거리는 시야에 담은 채 계속,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큐에에에에엑!!
물론 진군이 쉽지는 않았다.
사막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자이언트 웜이 제국군의 진형을 무너뜨렸고 수백 명의 병사들이 잡아먹혔다. 오아시스마다 독이 풀어져있는 탓에 자체적으로 식수를 공급할 수 없어 보급부대를 기다려야하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했다.
행군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레베카교가 새삼 원망스럽군.”
풀바즈 후작이 혀를 찼다.
제국이 지난 수백 년 동안 레베카교를 후원하고 존중해온 이유가 무엇인가?
최고신 레베카를 향한 존경심도 존경심이지만, 그보다는 레베카교의 신성력이 탐났기 때문이다.
저주를 ‘정화’하고 상처 입은 자들을 ‘치유’하는 레베카교 사제들의 신성력은 무엇보다도 전시에 가장 큰 힘이 되었다.
당장 이번 전쟁만 봐도 사제들이 있었다면 사상자가 대폭 줄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베카교는 야탄교와의 전쟁을 핑계로 제국의 사제 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당대 교황 데미안은 템빨왕 그리드가 앉힌 인물이었으니 당연한 태도였다.
‘파스칼의 실패가 이런 식으로 영향을 주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제국이 레베카교를 점거하지 못한 것은 최악의 실책이다.
황제폐하께서 너무 안일하셨다.
황후 아리아떼의 죽음과 피아로의 배신이 황제의 총기를 빼앗았고 제국을 약화시켰다.
“뭔가 이상합니다.”
“....?”
한탄하며 군대의 선두에서 행군을 이끌던 풀바즈 후작이 자리에 멈췄다.
부관과 참모들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모든 척후로부터 연락이 끊겼습니다.”
“....!”
밤이 찾아왔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사막의 모래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행군의 속도를 높여야했다.
한데 이 타이밍에 불길한 보고라니?
“전군에게 휴식을 주고 새로운 척후대를 파견하라.”
“예!”
부관이 신속히 선별한 100기의 기병이 즉각 말을 달렸다.
그들은 본대의 이동경로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미리 파악하고 보고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한데, 보고는 도착하지 않았다.
새롭게 파견한 척후병 100명 또한 유령처럼 사라졌다.
“전투에 대비하라!”
뭔가 이상한 낌새를 읽은 풀바즈 후작이 명령하자 25만의 대군이 진형을 갖췄다.
차가운 사막의 밤.
수축되는 근육을 느낀 병사들의 긴장감이 고조된다. 무기를 고쳐 쥔 그들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하지만 사막은 고요했다.
적군이 다가오는 기척은 조금도 감지되지 않았다. 짐승이나 몬스터의 울음소리조차 없었다.
“.....”
팽팽하게 당겨지는 실일수록 금방 끊어지게 마련.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자 병사들의 긴장감이 빠르게 흩어졌다.
순간.
콰릉-!
“....!?”
진형의 중심부에서 폭음이 울렸다.
지축이 흔들리며 사막의 모래들이 진동했다.
깜짝 놀란 풀바즈 후작과 제국군 전원이 폭음의 발생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린 아이?”
13살쯤 되었을까.
지하로부터 솟구쳐 올라온 절세미모의 소년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오만한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오래간만에 포식하겠구나.”
“....!”
미소 짓는 소년의 입가에 삐져나온 어금니를 목격한 풀바츠 후작이 경악했다.
초월적인 미모와 길고 뾰족한 어금니.
인간을 가축처럼 보는 눈빛.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뱀파이어....!”
지옥에서 추방당한 일족.
그들의 터전이 레이단 지하에 있음은 제국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뱀파이어 일족은 악신 야탄에게 강력한 저주를 받았다.
바로 나태의 저주다.
그들은 잠에서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하물며 지상까지 올라오는 경우는 지난 역사를 통틀어 봐도 거의 없었다.
한데 저 소년 뱀파이어는 뭐지?
무슨 수로 나태의 저주를 극복하고 지상까지 행차했다는 말인가?
풀바즈 후작이 불길함에 휩싸이는 사이,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신속하게 병사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방패까지 무장한 중갑보병대가 뱀파이어 소년을 둘러싸며 압박했고 창병들의 창과 궁병들의 화살이 소년을 겨냥했다.
제아무리 뱀파이어라고 해봤자 고작 한 마리.
설령 진혈족 뱀파이어라고 해도 25만의 제국군 앞에서는 개미 새끼나 다름이 없었다.
“죽여라! 주제도 모르고 인간의 땅을 밟은 마족에게 제국의 이름으로 응징을 가하라!!”
지휘관들은 침착했고 병사들은 용기백배했다.
그들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창을 찔렀고 활을 쏘았다.
모든 방위로부터 쇄도해오는 수백 개의 병장기.
뱀파이어 소년은 그대로 꼬챙이처럼 찔려 죽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도리어 웃었다.
그것은 조소. 아니, 실소에 가까웠다.
“개돼지 새끼들이.”
콰르르르르릉!!
소년으로부터 마력이 폭사했다.
짙은 밤의 어둠을 지우는 혈빛의 마력이었다.
사막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뻗어 나온 그것이 쇄도해오는 화살과 창을 모조리 부식시켰고 이어서 제국군을 덮쳤다.
“크아아아아악!!”
“히, 히익!!”
병사들의 비명이 영원할 것처럼 메아리쳤다.
대단위 혈마법이 제국군 병사들의 갑옷과 살을 흉포하게 뜯어냈고 이어서 만개하는 핏줄기들을 모조리 흡수하며 더욱 더 범위를 넓혀갔다.
“무, 무슨!”
미라처럼 바짝 말라 죽어가는 병사들의 모습에 지휘관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수 년 동안 공들여 훈련시킨 병사들이 무기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처참히 죽어갔으니 그들은 허망했고 두려웠다.
귀족 중 일부가 소리쳤다.
“저, 저건 진혈족 따위가 아니다...!”
“....?”
따위?
진혈족 뱀파이어는 시조 베리아체의 직계들이 직접 창조한 최강의 전사들 아닌가?
그들을 따위라고 표현하다니?
“....!”
다소 이질적인 표현에 의아함을 느끼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직계.
아주 오래 전 역사에서 ‘인류 최대의 재앙’으로 서술되었던 <마리로즈>가 제국군의 뇌리를 스쳤다.
“설마!!”
곳곳에서 경악성이 터졌고.
“당신, 당신은 누구요?”
풀바즈 후작은 포효하듯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나?”
물결치는 은발을 쓸어 넘긴 뱀파이어 소년이 답해주었다.
“백작이다.”
“백작....!”
자신들을 오등작으로 구분하는 뱀파이어는 채 10명도 안 된다.
바로 직계들이었다.
그래, 눈앞의 소년은 마리로즈와 동급의 존재.
바로 인류의 재앙이었다.
저 괴물은 대체 무슨 수로 나태의 저주를 극복한 것인가?
왜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나타나 우리의 행군을 방해한다는 말인가?
온갖 의문과 혼란, 그리고 분노에 휩싸인 풀바즈 후작의 몸이 파르르, 떨릴 때였다.
“템빨왕의 백작, 놀이다.”
“....!”
“....?!”
뱀파이어 소년은 자신을 마저 소개했고, 풀바즈 후작과 제국군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템빨왕의 백작이라니?
해석하기 힘든 말이다.
소란이 한창 격해질 때였다.
“후, 후작 각하!”
연이어 황당한 보고가 들려왔다.
“제2기병대 지휘관 델루아 자작이 암습을 받고 전사하였습니다!”
“제1전차대의 지휘관 콜리나 백작이 암습을 받고 전사하였습니다!”
“2군 사령관의 참모진 3명이 암습을 받고 전사하였습니다!”
“양동이었다고!?”
***
직계 뱀파이어의 등장으로 제국군은 혼란에 빠졌고 샤이 일당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무려 열흘 동안 제국군 병사로 잠복해 있던 그들은 드디어 기회를 찾아 제국군의 참모들을 암살했다.
정말 엄청난 난이도의 암살이었다.
열흘이라는 기간 동안 적진에 잠입해 있으면서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던가.
정말 별짓을 다했다. 몇 번이나 큰 위기를 겪었다.
병력 배치도를 외우느라 머리털이 다 뽑혀나갈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긴장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결국 해냈네.”
“휴, 그러게. 이렇게 보람찬 암살은 오랜만이야.”
“스킬 경험치 엄청나게 올랐어.”
“....쩝.”
여전히 제국군 병사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는 샤이 일당.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기뻐하던 그들이 이내 허무함을 느꼈다.
그리드 때문에 이게 뭔 개고생인가 싶었다.
죽을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리드 욕을 해댔었는데, 아무래도 그리드의 수명이 20년은 늘어났을 것 같아서 그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델루아 자작님과 콜리나 백작님께서 암살을 당하셨대!”
극도의 혼란 탓에 제국군 수뇌부는 병사들의 입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귀족들이 암살을 당했다는 소식이 불길처럼 번져나갔고 병사들의 동요는 커졌다.
“엥?”
샤이 일당 또한 당황했다.
델루아 자작과 콜리나 백작은 그들이 암습한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의 실력으로는 암살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었다.
“....페이커의 소행인가?”
“페이커 말고는 없겠지.”
“무시무시하네....”
“거봐. 템빨단 최고의 괴물은 그리드가 아니라 페이커라니까? 페이커가 템빨단의 적이었으면 그리드도 몇 번은 암살당했을 걸?”
“.....”
샤이 일당은 그리드의 의뢰를 받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드의 의뢰를 거부했다가 척살령을 당했다면?
진짜로 게임 접게 됐을 것이다.
***
라인하르트의 대장간.
그리드는 오래간만에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곁에는 동대륙 출신의 대장장이들과 판미르가 함께였다.
새로운 아이템을 창조할 때 그들의 조언을 얻으려는 의도였다.
[어떤 아이템을 창조하시겠습니까?]
“대포.”
그렇다.
그리드는 최강의 공성병기를 창조하고 대량으로 생산하여 템빨국 전역에 배치할 계획이었다.
제국과의 전쟁에서 무조건 승리할 각오다.
국가대항전에서 <전장을 겨누는 대포>를 창조했던 경험이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