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7권 - 21화
검성에게 있어서 검이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신체의 일부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자신과 검을 따로 놓고 구분하지 않는 것. 심기체(心技體)와 검이 합일(合一)의 경지를 이룬 자야말로 검성이었다.
“베고자하는 의지가 벤다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
검을 뽑아 겨눠오는 당대의 검성을 보면서, 레이첼은 말했다.
“검성 뮐러는 발검의 과정조차 생략하고 적을 베었다고 하지. 하지만 그대는 검을 뽑고도 나를 베지 못했군.”
“....”
못했다.
일체의 왜곡 없이 정확한 표현이다.
레이첼을 보자마자 적으로 인식한 크라우젤은 분명히 레이첼을 베고자 검을 뽑았다.
하지만 공격할 틈이 없었다.
어느덧 5레벨에 이른 크라우젤의 <초감각>이 그녀를 베는 순간 위험에 빠질 것임을 경고해왔다. 풀 버프 상태의 그리드를 마주했을 때보다 더 큰 경고였다.
하여 베지 못했다.
“검성이라는 자가 나보다 못하구나.”
팔짱을 끼고 서있던 레이첼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드래곤의 아가리에서 발출되는 화염을 형상화한, 어지럽게 굴곡진 붉은 창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동시에.
푸욱-!
[8,01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크라우젤의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레이첼의 창이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인식조차 할 수 없는 빠르기의 찌르기였다.
아니, 빠르다는 표현이 과연 옳은 것일까?
레이첼은 정녕 창을 휘두른 건가?
창이 움직이는 모습은커녕 작은 풍압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키리누스 밑에서 온갖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민첩성이 2천 6백에 도달한 크라우젤.
그는 자신의 동체시력과 초감각으로도 인지할 수 없는 인력(人力)이 존재할 리 없음을 상기했다.
최근에 얻은 칭호 <창의 극의를 엿본 자> 덕분에 창에 입는 피해를 15퍼센트 경감 적용 받는다고는 하나, 레벨이 500에 근접할 초네임드급 NPC의 공격을 허용한 것치고 받은 피해량도 적었다.
이것은, 뭔가 다른 형태의 공격이다.
즉각적으로 눈치 채고 확신한 크라우젤은 동요를 지웠다.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무시하고, 레이첼을 주시한 채 부동심을 유지했다.
그러자 보였다.
레이첼의 주변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무형의 기운이.
색과 소리가 없는 그것들은 분명히 창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스파앗-!
그중 하나가 날아와 크라우젤을 찌른다.
크라우젤은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실체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푸슈슈슉.
크라우젤의 가슴에 꽂힌 무형의 창이 김빠지는 소리를 흘리며 소멸했다.
크라우젤은 상처를 입지 않았다.
“....!”
레이첼의 눈에 이채가 떠오른다.
피식.
키리누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크라우젤은 알림창과 마주하고 있었다.
[히든피스 발생!]
[<검성>의 직업 효과로 <의지 발현>을 인식하고 무력화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특수 스탯 <의지>가 개방됩니다.]
[새로운 스킬 <의지 발현>을 습득하였습니다.]
<의지>
현실을 왜곡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의지입니다.
*이 능력치에는 능력치 포인트를 분배할 수 없습니다.
<의지 발현>Lv.1
성인(聖人)만이 다룰 수 있는 무형지기입니다.
견고한 의지의 표명으로 현실을 왜곡시킵니다.
*현재 레벨에서는 적을 공격하는 용도의 의지만을 발현할 수 있습니다.
*현재 레벨에서는 무기 장착 시에만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의지의 형태는 착용 중인 무기의 생김새와 같습니다.
*의지 발현이 입히는 피해량은 의지 스탯에 근력 스탯을 더한 수치와 동일하며, 대상의 방어력이나 저항력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의지>스탯을 보유하고 있는 대상은 이 공격을 무시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1분
“...?”
상상해보지 못한 형태의 스탯과 스킬.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크라우젤이 의지 발현을 전개해보았다.
고오오오-
현재 착용 중인 백호검의 형태를 쏙 빼닮은 무형의 검 4자루가 크라우젤의 주변에 떠올랐다. 4자루인 이유는 지금 막 개방 된 의지 스탯이 4여서 그런 것 같았다.
스팟-!
의지 발현은 컨트롤 기반의 스킬이 아니라 인식 기반의 오토 스킬이었다.
크라우젤이 레이첼에게 ‘공격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자마자 4자루의 검이 날아가 그녀를 덮쳤다.
쩌저정-!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하다.
무형의 검들이 레이첼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레이첼의 의지와 충돌하더니 유리조각처럼 산산이 조각나 흩어져 사라졌다.
레이첼이 중얼거렸다.
“...실시간으로 성장했다고?”
이곳에 도착해 크라우젤을 목격한 레이첼은 크라우젤과 키리누스의 관계를 즉각 눈치 챘다. 그리고 분노했다.
그녀는 피아로를 떠올렸다.
나의 동경.
그는 검성의 경지를 이루고자 검의 길을 걸었으나 끝내 좌절하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정작 검의 극의를 엿본 당대의 검성은 창을 배우고 있었다.
레이첼은 크라우젤의 기만이 거슬렸다.
피아로의 일생을 부정하는 듯한 태도인지라 불쾌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기만이 아니었다.
당대의 검성은 이를 데 없는 천재.
나를 비롯한 수많은 제국의 무인들이 동경했던 피아로조차 넘어서는, 독보적인 기재였다.
그런 자가 제국의 공작인 내게 검을 겨눴음은 훗날의 큰 위협을 알리는 전조.
“살려둬서는 안 되겠군.”
노란 싹은 미리 밟아둬야 한다.
그게 제국의 방식이다.
레이첼이 살의를 품기 시작하자.
“진정한 위협은 방치해온 주제에 엄한 자에게 횡포로다.”
자신의 등 뒤로 크라우젤을 숨긴 키리누스가 앞으로 나섰다.
“진정한 위협?”
레이첼이 알아듣지 못하자 키리누스는 한숨을 쉬었다.
“직접 겪어보시게. 그것이 제국의 업보일 테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 무엇이 제국을 위협할지라도 제국은 천년만년 영원하다는 사실이다.”
“쯧.”
키리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황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흉이 지금 이 순간에도 제국을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렁이가 영원을 논하고 앉았으니 한심하고 답답했다.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분을 푸는 좋은 방법이지. 덤비시게. 그대가 나를 찾아온 이유야 뻔히 알고 있으니 내 응해주도록 하지.”
대륙 제일 창이라는 칭호가 타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하르켄의 후손이 용납하고 싶을 리 없다.
레이첼의 마음을 훤히 꿰뚫은 키리누스가 도발하자 레이첼은 즉각 응했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구나. 사실 나는 그대가 승부를 피할까봐 노심초사 했었거든.”
“.....”
볼품없는 나무 단창을 비스듬히 거머쥐는 키리누스와 화염처럼 솟구치는 붉은 장창을 똑바로 세우는 레이첼.
당대 최고의 강자들이 서로를 노려본 채 투기를 내뿜자 새들이 숲을 떠났다. 하늘 가득 새들이 날아올랐다.
곧 다가올 재앙을 미리 감지한 것이다.
꽈르르르르릉-!
두 자루의 창이 격돌했다.
천둥치는 듯한 굉음이 폭사하며 일대의 지면을 날려버렸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
크라우젤과 레이첼의 기사들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레이첼의 기사들은 감히 주인에게 검을 겨눴던 크라우젤에게 살심을 품었고, 크라우젤은 그들의 태도를 기꺼워했다.
“짖을 시간에 덤벼라.”
“괘씸한 놈이!”
투쾅-!
도약한 크라우젤과 30인의 기사들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레이첼의 기사들.
적기사단의 20번대 기사들과 동등한 실력을 지닌 그들은 어스름 창병대의 백인장, 천인장이기도 했다. 어스름 창병대가 명성만큼의 무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들 30인의 통솔이 반드시 필요했다.
채챙! 채채채채챙!!
쾌속의 이기어검과 의지 발현이라는 이름의 무형지기, 그리고 초감각을 극한까지 활용하는 크라우젤의 실력은 30인의 기사들을 잠시나마 압도했다.
그리고 크라우젤은 승부처를 읽는 통찰력이 탁월한 인물이다.
“우주 검.”
서걱-!
전투 초반.
아직 힘을 안배하고 있던 기사들의 몸이 맥없이 양단됐다.
“너희들은 살아갈 수 없다.”
선언하는 크라우젤이 백호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드가 만든 검이 검성의 의지를 실천하고 있었다.
***
“....?”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
바이란을 수습하고 돌아온 그리드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먼 하늘 너머를 돌아보았다.
두근, 두근, 두근.
이유는 모른다.
그저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전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와 퍼뜩 정신이 든다.
시선을 돌려 보자, 메르세데스의 얼굴이 있었다.
걱정하는 눈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리드가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의 접속 제한 시간이 고작 2분밖에 안 남았다.
아쉽게도 아이린의 얼굴은 보지 못할 듯하다.
“메르세데스, 나는 잠시 쉬고 올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 왕비와 왕자를 잘 부탁해.”
“네.”
“시녀들에게 쥬드 밥 좀 잘 챙겨주라고 전해주고.”
“후훗, 알겠습니다.”
그리드가 등에 업고 있는 쥬드의 얼굴을 확인한 메르세데스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드가 없는 동안 홀로 고군분투하여 바이란을 지킨 영웅.
쥬드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정신을 차리더니 밥을 먹고 다시 잠들었다. 근데 잠꼬대로 아직도 밥을 찾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주군의 등에 업혀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상상조차 못할 테지.
그리드를 훔쳐보는 메르세데스의 눈빛에 존경심과 호감이 가득하다.
***
“으으, 피곤해.”
로그아웃한 영우는 그대로 침대에 뻗고 싶었다.
제국과의 전쟁은 그의 체력과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둘째 주 금요일이다.
유라와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다.
이는 영우의 제안으로 시작 된 일정이었다.
국가대항전 이후, 유라의 고백을 기약 없이 미룰 수 없었던 영우는 유라에게 제안했다.
서로를 좀 더 알아갈 시간을 갖자고.
2주에 한 번씩 만나 데이트를 해보자고.
그건 유라를 위한 제안이었다.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착각일 수도 있으니, 감정을 재확인할 수 있게끔 기회를 주려는 의도였다.
영우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유라처럼 예쁘고 잘나고 착하고 똑똑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한때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착각해서 사귀다가 결혼이라도 했다가는 큰일이다.
콩깍지가 벗겨진 유라가 내게 질려서 바람을 피울 수도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간통죄가 폐지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배우자의 외도는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아니, 또 결혼부터 생각하고 앉았네.’
첫사랑 아영이와 오래간만에 재회했던 날.
마음이 앞서 연애하자는 말도 건너뛰고 청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독한 흑역사다.
“으아아아아악!!!”
쪽팔린 기억은 괴로운 법!
머리를 감다 말고 비명을 내지르는 영우의 모습이 넓은 욕실을 처량하게 장식했다.
***
“영화, 보러 가실래요?”
“그, 그럴까?”
유라는 오늘도 예뻤다.
게임에서 갑옷을 입고 있는 유라의 모습도 아름답고 멋졌지만, 역시 현실에서의 사복 차림 유라가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하늘하늘 거리는 원피스가 어쩜 저리도 잘 어울릴까.
‘치마가 조금 짧은 것 같기도.... 험험.’
초행길인지라 십삼이의 자동주행기능에 의지한 영우.
십삼이가 달리는 내내 힐끔힐끔 유라를 훔쳐보던 그가 영화관 주차장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유라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다가 흠칫 놀랐다.
‘염병?’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영화관에 온 경험은 처음이었다.
‘영화표는 어떻게 사는 거지?’
팝콘이랑 음료는 어떻게 주문하고?
자리는? 맨 앞자리가 화면이 잘 보여서 좋으려나?
단체로 관람하는 만큼 영화 보다가 오줌 마렵다고 일시정지도 못할 텐데, 오줌 마려우면 어떻게 하지?
Satisfy 출시 이후 영화 사업은 꾸준히 침체되어왔다.
영화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때로는 더 음침하고 잔인한 세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Satisfy가 존재하는 마당에 누가 영화를 보겠는가?
그래, 영화 사업의 침체기는 Satisfy 출시 이후에 시작됐다.
그리고 Satisfy는 영우가 대학생일 때 출시됐다.
영우가 영화관에 한 번도 와보지 못한 이유는 Satisfy와 관련이 없다.
“.....”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자 침울해진 영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띵동-
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영우는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영화관 이용 방법’을 검색해봐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서오십시오, 유라 님, 영우 님.”
“....?”
금수저 유라는 영화관 전체를 대여해버렸으니까.
영우는 굳이 평범하게 표를 끊고 팝콘을 살 필요가 없었다.
영화관 직원들이 알아서 편의를 봐주었다.
두 사람은 텅텅 빈 초호화 프리미엄관에 들어가 원하는 자리에 앉으면 그만이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어안이 벙벙해진 영우가 멍하니 있자 유라가 물어왔다.
영우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아니? 그냥 너무 좋아.”
진심이다.
영우는 아싸인 자신과 금수저인 유라가 은근히 상성이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평범한 상식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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