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7권 - 20화
이벨린을 비롯한 바이란의 템빨단원들은 단 한 명의 적도 사살하지 못했다.
높은 고도의 상공에서부터 일방적인 공격을 가해오는 공군을 요격할 수단이 요원했을 뿐더러, 운 좋게 공격에 성공할지라도 중무장하고 있는 그리폰과 비룡의 방어력을 꿰뚫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들은 바이란을 지키지 못했다.
처참하게 짓밟혔다.
하지만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끝까지 버티고 또 버티며 백성들을 보호했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마법의 폭격을 백성들을 대신해서 얻어맞고, 목숨을 잃고도 다시 부활해서 적군의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모든 정보를 라우엘에게 전달했다.
덕분에 라우엘은 제국 공군의 전력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다.
한데 기껏 보내온 원군이 그리드 한 사람이었다.
바이란의 템빨단원들은 황당하고 화가 났다.
제아무리 그리드가 강하다고 해도 천공왕 리갈을 포함한 5천 공군을 어찌 혼자 감당하겠는가?
템빨단 최고의 궁사들과 마법사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할 탱커들을 다수 파견해도 부족할 판국에 그리드 한 명이라니?
라우엘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매번 그리드에게만 큰 짐을 지어주는 것 같아서 보기에 안 좋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국, 그 모든 원인이 자신들의 무능함에 있음을 깨닫고 자괴감을 느꼈다.
애초에 우리가 강했으면 바이란이 점령당했을 일도, 그리드가 모든 짐을 떠안을 일도 없었을 터인데....
템빨단원들은 라우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질책해야함을 알았다. 차마 그리드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 사이.
퍼펑-! 퍼퍼퍼퍼퍼펑!!
“....!”
그리드는 단신으로 공군을 박살냈다.
자신 역시 피칠갑을 하고서 리갈을 난도질했다.
지상에 맥없이 추락하고도, 고통에 찬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그는 동료들과 백성들을 등지고 섰다. 이들 모두를 내가 지키겠노라는 의지를 창공의 리갈에게 천명했다.
“....”
급기야 원군으로 도착한 피아로와 메르세데스가 모든 적군을 해치우고 나서야.
“미안하다.”
그리드 곁으로 다가간 템빨단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여전히 그리드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항상 아무런 도움도 못 돼서 미안해.”
한이 깃든 한 마디.
분해서 치를 떠는 그들을 그리드가 멀뚱멀뚱 바라본다.
“뭐라는 거야? 너희가 없었으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텐데.”
“.....”
“너희가 공군의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으면 나도 더 힘들었을 거고.”
“.....”
“너희는 충분히 잘 해줬어. 고맙다.”
가식 따위가 아닌 진심이다.
그리드는 죽음을 불사하고 싸워준 동료들에게 감동했고 감사했다. 비교적 멀쩡한 백성들의 모습에 안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들지 못하는 동료들에게 그리드가 말을 덧붙였다.
“지금 버스 타는 게 영 거슬리면, 나중에 비행기 태워줘서 갚던가.”
“우리가 무슨 수로.”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그리드는 이제 확신하고 있다.
The Gap is Closing.
노말 클래스 전직자와 히든 클래스 전직자 간의 격차가 좁혀질 거라던 임철호 회장의 말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초월자.
노말 클래스 전직자들 또한 많은 업적을 쌓을수록, 또한 많은 레벨을 올릴수록 격을 쌓아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존재로 거듭날 테니까.
‘반드시 그래야 돼.’
바이란을 지키고자 싸운 25인의 템빨단원들.
그들이 템빨단 내에서야 중위~중상위 전력이라고 분류되고 있지 20억 유저 기준으로는 어떤가?
평범한 사람에게는 까마득하게 느껴질 하이랭커들이다.
한데 그들이 제국의 1개 부대에게 어린아이처럼 농락당했다.
이건 밸런스가 너무 안 맞는다.
제국, 악마, 양반.
앞으로 점점 더 강해질 적들을 상대로 플레이어들이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될 경우,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의욕은 차츰 떨어질 것이고 게임은 망해갈 것이다.
S.A그룹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사태를 예견한 임철호 회장은 이미 처음부터 초월자 시스템을 안배해놨으리라.
‘그리고 상대하는 적이 강하고 좌절을 많이 겪는 사람일수록 더 빠르게 초월자가 되어가겠지.’
첫 번째 초월자 플레이어는 반드시 템빨단에서 나올 것이다.
그리드는 믿어 의심치 않았고, 자신의 생각을 동료들에게 밝혔다.
그러자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있던 템빨단원들이 그리드에게 물었다.
“억울하지 않아?”
“뭐가?”
“너는 기껏 힘들게 전설로 전직해서 평범한 플레이어들하고 격차를 벌려놨잖아. 근데 다시 격차가 좁혀지면 억울하고 분하지 않겠어?”
“글쎄다.”
피식 웃은 그리드가 하늘을 올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었지만 달 하나만 못했다.
<금룡갑>
*3초 내에 같은 대상에게 공격을 받으면 피해량을 5퍼센트씩 감소시킵니다. 최대 30퍼센트.
<거인족 소궁>
*시위를 당길 때마다 <거인족의 용력>을 느낍니다.
아이템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 때문에 특수한 옵션을 간직하고 있는 갑옷과 활.
큰 흥미를 느낀 그리드는 앞으로 당분간 대장간에 머물러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금룡갑과 거인족 소궁을 해체해서 그 특성을 주입한 새로운 아이템을 제작하고 싶었다.
메르세데스가 다소 아쉬운 보고를 해왔다.
“957마리의 그리폰과 26마리의 비룡을 생포하는데 성공했습니다만, 길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너무 강하단다.
하기야, 이름 있는 명마들조차도 주인을 쉽게 바꾸지 않으니 말보다 훨씬 상위종이라 할 수 있는 그리폰과 비룡은 오죽하겠는가.
템빨단원들이 아쉬움에 탄식하는 그때.
“괜찮아. 냥멍이한테 맡겨보자.”
그리드는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
창성 레이첼.
제국의 개국공신이자 초대 전설의 창술사였던 드하켈의 후손인 그녀는 고귀한 존재이다.
칠공작 중에서도 타고난 혈통과 재능이 우수하여 누구도 그녀를 쉽게 대하지 못했다.
단 한 명.
소꿉친구였던 리갈만이 오직 그녀를 편하게, 정감 있게 대할 수 있었다.
어쩌면, 특별한 존재였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충격이 더 컸다.
“...리갈이 죽었다고?”
레이첼은 이른 아침부터 날아온 한 통의 소식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재능이 뛰어났던 형이 단명한 까닭에 공작위를 잇게 된 리갈.
세간에는 행운아로 알려진 그가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레이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국의 칠공작이라는 지위에 걸맞는 사내가 되고자, 죽은 형에게 미안하지 않고자 매일 밤낮 없이 단련하고 백성들을 돌봐왔던 리갈의 미래는 분명히 밝았어야만 했다. 그는 그간의 노력에 보답 받아야 옳은 남자였다.
한데 죽었단다.
고작 10년도 채 되지 않는 역사를 지닌 소국과의 전쟁에서.
“아침부터 웃기지도 않는 농을 듣는구나.”
속이 매스껍다. 머리가 어지럽다.
올해 나이가 마흔이라고 믿기지 않게도 젊고 아름다운 레이첼은,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긴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웨이브 진 금발이 어지럽게 흐트러지며 햇살 아래 반짝였다.
입을 굳게 다문 부관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사실이냐?”
불편한 침묵을 참지 못한 레이첼이 다시 묻자.
“예, 불행하게도....”
부관은 다시 한 번 현실을 읊었다.
“공군은?”
“전멸이라고 합니다.”
“.....”
레이첼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녀가 먼저 떠올린 사람은 리갈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올해 9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
안 그래도 일찍 어미를 여의어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가 이제 정녕 외톨이가 되었다. 겔더 가문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공군까지 손에 쥐지 못한 그 철없는 어린 아이를 탐욕스러운 가신들이 과연 제대로 이끌어줄까?
그럴 리 없다.
제국을 대표하는 7개 가문 중 하나가 완전히 박살났다고 봐도 옳다.
“한심한 녀석. 그러게 빨리 결혼해서 애 좀 빨리 낳으라니까.”
레이첼은 알고 있다.
젊은 시절의 리갈이 자신을 마음에 품고 혼사를 미뤘다는 사실을.
하지만 지엄한 국법은 공작가문 간의 혼사를 금하고 있었고 레이첼은 리갈의 마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애타는 시선을 보내오던 젊은 시절의 리갈이 떠올라 마음이 괜히 더 쓰다.
“출정하실 것입니까?”
부관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어스름 창병대.
레이첼이 직접 선별하고 육성한 최정예 군대는 언제라도 전쟁에 뛰어들 각오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레이첼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제국의 공작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하던 일이 먼저다.”
망토를 걸친 레이첼이 막사를 나섰다.
그녀가 나타나자 하나 같이 창을 쥔 기사 30명이 도열하여 길을 만들어주었다.
기사 한 명이 보고했다.
“척후병의 보고에 따르면 어젯밤 귀환했다고 합니다.”
“상대가 기인임을 잊어선 안 된다. 그에게 예절을 강요하지 말고 그의 언행에 일일이 불쾌해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예!”
대륙 제일 창 키리누스.
그를 찾는데 몇 년이 걸렸다.
그를 만나고자 이 먼 곳까지 직접 행차했다.
레이첼은 알고 싶었다.
자신이 정녕 그보다 못한 것인지.
자신이 그보다 못하기에 전설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해답을 찾아야만 했다.
***
키리누스의 오두막.
키리누스는 자신이 1년 가까이 가르쳐온 청년의 발전에 흥미를 보였다.
“이기어검술에 란나찰의 묘리를 담았구나.”
밖으로 밀고, 안으로 휘감고, 앞으로 찌르고.
창술의 기본이자 정수라 할 수 있는 동작들이 허공을 부유하는 8자루의 검에 담겨있었다.
날아가 벤다.
라는, 꽤나 단조로운 면이 있던 이기어검술이 한층 진화한 순간이었다.
몇 개의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한 끝에 진화한 스킬이 크라우젤은 썩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웠다.
한데 키리누스는 도리어 실망하는 눈치였다.
“아직도 본질을 꿰뚫지 못했군.”
“본질이라 하심은...?”
“적과 싸우는 것은 검이 아니라 너다.”
“....”
크라우젤은 바로 알아들었다.
이기어검술이 잡스러울 이유는 없다고, 키리누스는 조언하고 있었다.
크라우젤은 검이라는 무기의 본질을 상기했다.
대상을 벤다.
베기 위해서는 빠르고 정확해야한다.
크라우젤이 여태껏 ‘여러 자루의 검’을 연동해놓고 필요할 때마다 몇 자루씩이고 꺼내 쓰던 이기어검술에 단 한 자루의 검만을 연동시켰다.
그러자.
스파앗-!
전에 없던 속도로, 검은 빠르게 날아가 바위를 베어버렸다.
그것은 인간이 피할 수 있는 영역의 속도가 아니었다.
<이기어검술>Lv2.
기와 의지를 검과 연동하여 수족처럼 다룰 수 있습니다. 이기어검술의 공격력은 무기 공격력에 비례합니다.
연동 가능한 검의 개수:최대 10자루
현재 연동해놓은 검:<진(眞)백아도>
검성으로 전직하고 처음 이 스킬을 얻었을 당시.
크라우젤은 그리드의 <갓 핸드>를 떠올렸었다.
그리드가 갓 핸드를 다루는 것처럼, 자신 역시 여러 자루의 검을 운용하여 보다 능동적인 전투를 펼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래서 항상 많은 검을 연동시켜놓고 때에 맞게 꺼내서 운용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함정이었다.
많은 검을 다루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단 한 자루의 검이라도 집중해서 휘두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고 위력적이었다.
스킬 설명에는 표기되지 않는 ‘공격 속도’가 연동시킨 검의 숫자가 적을수록 빨라졌고 그것은 크라우젤의 집중력과 비례했다.
“아.”
깨달음을 얻은 크라우젤이 그리드와의 격전들을 돌이켜보았다.
도리어 이기어검술을 얻기 전이 훨씬 더 유리한 전투를 펼쳤었다.
그리드의 갓 핸드를 무조건 피하고자 노력하며, 오로지 살념만을 담은 한 자루 검을 휘둘렀을 때.
크라우젤은 그때야말로 비로소 그리드에게 위협을 줬었다.
‘이기어검술은 전투를 보조하는 스킬이 아니다.’
일반적인 공격 스킬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응용하는 편이 훨씬 더 위력적이리라.
알게 된 크라우젤은 자신이 한층 더 발전했음을 자각했다.
단지 뮐러가 닦아놓은 길을 걸었을 뿐이라면 얻지 못했을 배움을 얻은 기분이었다. 키리누스를 찾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과 생각을 교환하며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상대.
‘스승’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칸을 대하던 그리드의 모습을 떠올리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창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키리누스는 나오라!”
다짜고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나 소리쳤다.
“....?”
고개를 돌려 본 크라우젤이 레이첼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 어떤 플레이어보다 뛰어난 정보력을 지닌 크라우젤이 제국의 칠공작을 모를 리 없다.
의외의 사실은, 레이첼 또한 크라우젤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대의 검성은 제국에서도 유명인이었다.
“그대가 왜 이곳에?”
레이첼이 묻자.
“친구의 위기를 외면하지 말라는 계시인가보군.”
크라우젤은 알 수 없는 답을 내놓았다.
고오오오-
검성의 기도가 레이첼의 기사들을 압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