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7권 - 19화
불사왕 그렌할, 맹수왕 모르이즈, 취공(醉公) 디워스, 금관(金冠) 바사라.
각자의 영지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 그들 칠공작은 제국 전역의 항구 도시를 순방하며 수인족들을 몰아냈다.
전투는 없었다.
그들이 등장하는 족족 수인족 군대가 도망친 까닭이다.
칠공작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천하의 우리를 상대로 덤빌 바보는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다고 여겼으니까.
“다들 강녕하셨소? 몇 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이는구려.”
칠공작 4인의 최종 도착지는 갈레스트였다.
갈레스트는 제국의 경제를 책임지는 최대 규모의 항구도시다. 바로 이틀 전까지만 해도 수인족 왕 맥스옹 때문에 배 한척 출항하지 못하고 마비 상태에 있었다.
맥스옹은 바다의 역신과도 같아서, 갈레스트의 병력은 감히 그에게 저항하지 못했다.
한데 그 무시무시한 맥스옹조차도 칠공작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망친 것이다.
맹수왕 모르이즈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수인족 왕을 길들일 기회라고 여겼는데 그대로 줄행랑을 치다니. 이종족이 미개한 줄은 알았지만 명색이 왕조차도 명예가 없을 줄은 몰랐소.”
“짐승들의 왕 또한 짐승. 명예가 있을 리 만무하지.”
“어찌됐든 해로가 열렸으니 된 거 아닌가? 우리도 어서 레이단의 후방으로 이동하자고.”
“당장 출항할 수 있는 함선이 없소. 수인족 왕이 배를 모조리 부셔놓았다는군.”
“짐승 주제에 머리를 굴렸네? 이거 난처한데.”
“딱히 서두를 필요가 있겠소? 리갈 공께서 이미 바이란을 점령했다 하니 느긋하게 움직여도 될 것이오.”
“또? 리갈 녀석은 항상 빠르군.”
“겔더 가문의 공군은 제국의 자랑 아니겠소.”
부친이 서거하자 공작위를 물려받은 리갈.
그는 지난 17년 동안 총 39회의 전쟁에 참전했다.
그가 직접 이끄는 공군은 항상 첫 번째로 공을 세웠고 무조건 승리했다.
심지어 100퍼센트의 생환률을 자랑했다.
39회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었다는 뜻이다.
타국의 대공 시설을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높은 고도에서 일방적으로 적을 사살하는 공군의 위엄을 고스란히 알려주는 기록이다.
“배가 준비될 때까지 술잔이나 기울입시다. 어차피 리갈 공께서 다 끝내놓을 것 같은데.”
취공 디워스가 제안하자 다른 공작들이 흔쾌히 동의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유희에 불과했다.
제국의 승리는 당연한 것이기에 불안이 없었고, 자격지심 탓에 공 쌓기에 집착하는 리갈과 달리 초조함도 없었다.
***
밤하늘에 흩날리는 푸른빛의 꽃잎, 그리고 이어지는 검은 폭염(爆炎)의 향연.
폭죽과 홀로그램으로 연출되는 현대 사회의 축제 광경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관이다.
사람들은 침음했다.
저 진귀한 광경이 곧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자 상실감을 느꼈다.
‘차라리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게 될 정도로, 꽃잎과 폭염의 난무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 발원지가 오직 한 명의 플레이어라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드...!』
템빨국의 절망적인 상황을 담담하게 중계하고 있던 각국의 해설진이 고성을 내질렀다. 그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제4회 국가대항전이 끝나고 4달이 채 안 된 지금.
그리드의 무력은 또 한 차원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해설진의 지식과 재주로는 작금의 그리드를 풀이할 수 없었다.
그저 보는 것을 말로 옮기는 게 한계다.
『그, 그리드가 등장해서 사용한 스킬들이 하늘을 수놓고 있습니다...!』
『고, 공군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바이란의 수천 병력을 일방적으로 농락했던 그리폰들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천공왕 리갈이....! 피를 뿜습니다!!』
“연살화극.”
푸욱-! 푹푹푹!!
불과 1초.
1초 동안 7회의 살(殺)이 발동되어 리갈의 가슴을 연속으로 꿰뚫는다.
동시에, 극(極)의 기운이 맺힌 화(花)의 검기 10개가 허공에 자동 생성되면서 리갈을 난도질했다.
<최후통첩>을 반격 당하고 큰 데미지를 입은 리갈은 연속되는 공격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연살화극(聯殺花極)>
4개의 검무를 하나의 경지로 승화시켰습니다.
대상에게 물리 공격력 1,850퍼센트의 피해를 입히는 살(殺)을 1초 동안 7회 시전하고 공격을 적중시킬 때마다 대상을 <무장해제> 시킵니다. 또한 출혈과 절망 효과를 유발합니다.
대상에게 <표식>이 있을 시, 표식 하나당 대상의 방어력을 65퍼센트 무시하고 물리 공격력의 961퍼센트+마법 공격력의 10퍼센트 피해를 입히는 검기 2개를 소환, 무조건 적중시킵니다.
스킬 사용 조건:도검류 무기 장착
스킬 검기 소모:4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시간
그리드가 연과 살의 조합을 여전히 고평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한 화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동시에 증명해주는 스킬이다.
기존의 궁극기였던 연살파극(聯殺派極).
여신의 호의 덕분에 터득할 수 있었던 그것은 ‘공격력이 300퍼센트 약화 된 살을 7회 연속으로 시전하고 파와 극의 효과를 유발하는 것.’으로 다소 불완전했다면, 새로운 궁극기 연살화극은 ‘모든 효과가 보존되는 살을 1초 동안 7회 날린 후 표식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으로 완벽한 형태였다.
가장 큰 강점은 비교적 빠른 쿨타임과 시전 속도의 대폭 상향이다.
연살파극의 쿨타임은 3시간이었던 반면 연살화극의 쿨타임은 1시간이었다.
또한, 7회의 살을 시전하는 1초 동안 화극의 검기가 자연 발화되었으니 연살파극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심지어 공격력도 더 강하다.
굳이 5개의 표식을 남기지 않아도 연살화극이 연살파극보다 강했다.
공격 내내 <무장 해제> 효과가 유지되어 대상은 아이템 효과를 받을 수가 없었으니까.
[대상에게 1,250,9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1,199,32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1,301,01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열망의 무아검>의 옵션 효과로 ‘검은 불꽃’이....]
[대상에게 699,0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678,3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730,950의 피해를....]
[대상에게 총 16,409,2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
궁극의 살의가 담긴 찌르기 7회와 극의 기운이 담긴 10송이 꽃잎에 난자당하는 리갈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자신이 쏜 최후통첩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았을 때보다 배는 더 강력하게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아찔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후우. 후우. 후우.”
빠르고 강력한 공격은 시전자에게도 부담이다.
연살화극의 시전이 끝남과 동시에 급속도로 하락한 스태미나를 느낀 그리드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코앞에서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 리갈의 생명력 게이지는 20퍼센트를 약간 초과하고 있었다.
‘그냥 죽일 생각이었는데.’
정말이지 더럽게 단단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머릿속에 그렸던, 가장 강력하게 연계되는 콤보 중 하나를 모조리 적중시켰는데도 멀쩡할 거라고는 상상 못했다.
심지어 리갈은 다른 칠공작들과 비교해서 레벨도 낮지 않던가.
제국에서 칠공작과 대면했을 때 리갈은 다른 칠공작들보다 못했다. 특히 창성 레이첼, 검공 리미트와 비교해서는 레벨이 수십이나 낮았다.
대공 시설을 무시하는 최강의 공군을 거느리고 있는 대신 그 본인의 무위가 낮게 책정된 것이 분명했다.
한데.
“알렌티카!!”
최약체가 이 정도다.
리갈이 거대 비룡의 이름을 외치는 순간, 그의 생명력 게이지가 보라색으로 변하더니 생명력이 60퍼센트 이상으로 회복됐다.
자세히 보니 비룡의 생명력 게이지는 사라져있었다.
동기화다.
리갈의 생명력과 알렌티카의 생명력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보스 몹이냐!’
네임드 NPC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가?
‘인간형’이라는 한계에서 오는 낮은 생명력이다.
한데 리갈은 비룡과의 교감을 통해서 약점을 극복하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마냥 페이즈가 존재했다.
‘이게 칠공작...’
예상 이상이다.
검호가 된 순간, 다섯 기둥은 몰라도 칠공작쯤은 1대1로 비벼볼만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판이었다.
떨리는 그리드의 시선에.
콰앙-!
굉음을 터뜨리며 쏘아지는 거살(巨虄)의 모습이 투영된다.
리갈의 궁술은 지슈카의 궁술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로 들을 수 없는 지슈카의 화살과 달리, 리갈의 화살은 발산개세의 기세를 담고 표적을 압도했다.
푸욱-!!
[14,5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강력한 충격으로 경직 효과에 걸립니다.]
[저항하였습니다.]
근거리에서 쏘아진 화살은, 아팠다.
멀리서 맞았을 때보다 훨씬 더 아팠다.
생명력이 30퍼센트가량 남게 된 그리드의 신형이 맥없이 무너졌고 리갈은 활의 시위를 다시 당겼다.
그는 그리드가 저항할 틈도 없이 끝장을 낼 요량이었다.
두려웠으니까.
고작 소국의 왕이라고 무시하며 여유를 품기에는 그리드가 너무 강했다.
콰앙-!
리갈이 또 한 발의 화살을 쏘았고 그것은 신호가 되었다.
슈슈슈슈슈슈슈슉!!
퍼펑! 퍼퍼퍼퍼퍼퍼퍼퍼펑!!
리갈의 등 뒤로 포진하고 있는 수천 공군 역시 저마다 그리드를 조준하고 화살과 마법을 쏘았다.
『아...!』
각국 방송사의 해설진이 침음했다.
하늘을 가득 매울 정도의 대규모 폭격.
그것이 오직 그리드 한 명을 덮쳤으니 그리드의 죽음은 필연처럼 보였다.
이제 불사를 잃게 될 그리드는 도주로를 찾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 가리라.
굳이 해설진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현재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수천 만 명의 시청자들은 충분히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지상에 포박당해 있는 템빨국 병사들과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대장이, 왕이 죽는다.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한 그들이 절규했다.
단 한 사람.
힘껏 뒤로 몸을 날린 그리드만이 입가에 미소를 그릴 뿐.
“기다렸잖아.”
개인의 무위보다 군대의 장으로써 높은 격을 이룬 인물, 천공왕 리갈.
그와 싸우면서 그리드가 가장 기다린 부분은 리갈의 호령이었다.
수천의 공군이.
나의 영토와 백성들을 짓밟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저 빌어먹을 놈들이 일제히 나를 공격해주기를, 그리드는 원하고 또 바랐다.
“벨리알의 힘. 조롱하고 유린하는 여왕.”
스파앗-!
그리드가 2명으로 나뉜다.
그 위로.
푸욱-!
리갈의 화살이 꽂혔고.
스파앗-!
그리드는 3명, 4명이 되었다.
<티라멧의 힘>의 효과로 생명력을 다시 30퍼센트까지 회복하는 그의 몸 주변으로 주황색 보호막이 생성됐다. <최초의 왕> 칭호 효과였다.
하지만 조금도 든든하지 않다.
아직도 셀 수 없이 많은 화살과 마법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으며, 그 모든 것이 그리드에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리갈이 또 한 번 활을 쏘았다.
순간.
“화회(花回).”
4명의 그리드가 차례대로, 각자 최대한 많은 화살과 마법을 주시하며 짧은 검무를 추었다.
크레이슐러와 싸웠던 파그마는 홀로 수백 개의 섬광을 눈으로 읽고 <표적>으로 인식하여 모조리 반격했다지만.
퍼펑-!
퍼퍼퍼퍼퍼펑!!
그리드로써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그리드는 크레이슐러가 쏜 섬광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느린 화살과 마법들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공격을 혼자서 보고, 표적으로 인식할 재주가 없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파그마와 비교해서 지각능력과 순발력이 너무 달렸다.
그렇기에 암흑의 룬을 개방해서 벨리알의 힘을 빌리고 분신과 시야를 공유한 것이다.
4개로 나뉜 시야를 모조리 이용해서 날아오는 수천 발의 화살과 마법 중 지극히 일부나마 표적으로 삼고 회(回)의 묘리를 담은 꽃잎 수백 개를 허공에 소환했다.
빙글빙글.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을, 지극히 미세한 회전.
그리드를 중심에 두고 생성 된 푸른 검기의 꽃잎 수백 개가.
퍼펑-!
퍼퍼퍼퍼퍼펑!!
그리드를 향해서 날아온 수천 발의 화살과 마법 중 일부와 충돌하더니 역으로 돌려보냈다.
“....!”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현상!
자신들이 쏜 화살과 마법이 되돌아오는 광경과 조우한 공군들이 석상처럼 굳었고.
퍼엉-!
퍼퍼퍼퍼퍼퍼퍼퍼펑!!
하늘이, 세계가 격동했다.
미처 반격하지 못한 화살에 꿰뚫리고 마법에 휩쓸린 그리드가 지상으로 추락해 곤두박질치는 사이, 되돌아온 화살과 마법에 휩쓸린 공군 중 수백 명은 그대로 잿빛으로 산화했다.
상황을 중계 중인 수십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흔들리며 시청자들의 두통을 유발하였다.
-.....
어느덧 억 단위로 오른 시청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창공 높은 곳에서 홀로 수천의 적군과 대치한 그리드.
자신에게 쏟아지는 집중포화 중 일부를 되돌려 놓는 그의 모습은, 이미 충분히 인외(人外)의 영역에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힘을 가늠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저 감탄하고, 경악하고, 전율할 뿐이다.
[전설은 쉽게 죽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최소치로 고정되어....]
5초 불사.
지상에 떨어져 뻗은 그리드의 시야에 최후의 알림창이 떠오른다.
‘제길... 화회를 3번밖에 못 썼네.’
분신과 분신을 옮겨 다니며 스킬을 쓴다는 건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마지막 분신에게 들어가서 4번째 화회를 쓰려는 순간 이미 적들의 공격이 쇄도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적에게 기대만큼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라고, 자평한 그리드는 본인에게 실망했으나 당한 사람 입장은 전혀 달랐다.
창공의 리갈은 제국 귀족의 상징과도 같은 흰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놈...! 네놈이...!!”
대겔더 가문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해온 그리폰과 비룡, 그리고 병사들.
천금을 줘도 바꾸지 않을 그들을 잃어본 경험이 있던가?
없다.
리갈은 자신의 부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모습을 오늘 처음 보았다.
그것도 무려 1천에 육박하는 숫자가....
“너의....! 너의 목만으로는 안 된다!! 이곳의 모두를 멸하리라!!”
극도로 분노한 리갈이 시위에 다섯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먹였다. 그리고 모든 마력을 화살에 쏟아 부었다.
그는 지상에 大자로 누워있는 템빨왕과 애타게 그를 부르는 바이란의 주민들을 모조리 한꺼번에 소멸시킬 각오였다.
그때, 상처 입은 그리드의 쇠 긁는 듯한 목소리가 귓전으로 날아와 스며들었다.
“기사 소환.”
“....!?”
붉게 달아올랐던 리갈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새하얘졌다.
그는 기껏 화살에 쏟아 부었던 마력을 다시 회수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템빨왕의 부름에 응하여 나타난 2인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거대하여, 그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을 비축해야한다는 판단이 반사적으로 내려졌다.
“이게, 이게 무슨....”
그리드의 좌우에 나타난 2인의 기사를 목도한 리갈의 두 눈이 떨린다.
황제폐하께서 메르세데스를 내치셨고 그녀가 그리드의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상상조차 못했다.
저자가 템빨왕의 기사라고?
저자가 살아있었다고?
“피, 피아로 경.”
떨리는 음성으로 이름을 불러보자.
“오랜만이오. 금룡갑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부친께서는 서거하셨는가.”
공교롭게도, 응답이 들려왔다.
헛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리갈은 귀신에 홀린 심정이었다.
완전히 넋을 잃은 그에게 피아로가 작별을 고했다.
“회포는 나중에. 지옥에서 만나면 나눕시다.”
쿠오오오오오오-!
800미터 상공에 떠있는 리갈.
그의 머리 위로 달빛마저 삼키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시선을 올려보자 황당하게도 절구가 보였다.
“큭!”
이건 위험하다.
안 그래도 그리드에게 입은 상처가 커서 치명상이 될 여지가 있다.
혼란을 이기는 죽음의 공포.
급히 냉정을 찾은 리갈이 알렌티카의 고삐를 틀었다.
절구질의 범위로부터 벗어날 요량이었다.
알렌티카의 고속 비행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노림수였다.
하지만.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은익을 펼치고 날아온 메르세데스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네놈! 메르세데스!! 추악한 배신자여!!”
모든 왕국의 대공 방어 시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겔더가의 공군.
그들은 최강을 자처하건만, 어째서 그 옛날 <루반나 전쟁>에서는 활약하지 못했던 것일까?
이유야 간단하다.
초월적인 강자를 상대로는 그들이 무력했기 때문이다.
당장 그리드가 그랬던 것처럼, 하늘과 땅에 구애 받지 않는 강자들은 단신으로 공군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수백 년 전 겔더가의 공군은 무패왕 마드라에게 처참히 짓밟혔다.
전설의 기사 메르세데스 앞에서도 비행이라는 이점은 무의미한 것이다.
서걱-!
휘몰아치는 은빛의 검기가 알렌티카과 리갈을 동시에 베어버렸다.
그리드의 검술만큼 파괴적이면서도 훨씬 더 빠르고 정교한 검술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 연계됐다.
쿠와아아아아앙-!
균형을 잃는 리갈의 머리 위로 절구가 떨어졌다.
수천의 공군 중 태반이 그 압박에 휩쓸려 잿빛으로 산화했다.
“리갈 전하!!”
바론 백작을 비롯한 생존자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절구에 짓눌려 그대로 땅에 추락한 리갈을 쫓아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리드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차라리 도망쳤더라면.
충의도 없는 놈들이라며 욕하고 거침없이 학살할 수 있었을 터인데.
“전하! 전하!!”
리갈의 병사들은 충절의 상징과도 같았다.
곧 자신들이 죽을 것을 뻔히 알고도 리갈을 부축하고 호위했다.
무의미한 희생이었다.
“쿨럭, 쿨럭....”
전설의 농부와 전설의 기사에게 협공을 당한 리갈은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끝과 죽음을 상징하는 회색의 빛이 그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피, 피아로 경. 부디. 부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리갈은 말을 끝내 잇지 못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그의 애타는 시선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들만큼은 그들의 조국으로, 그들의 가족 곁으로 무사히 돌려보내주기를, 그는 간절히 청하고 있었다.
피아로 당신이 이들의 영웅이었음을 부디 잊지 말아달라는 바람을 품은 채.
“어찌할까요?”
표정이 굳은 피아로를 대신해서 메르세데스가 물어온다.
공포와 혼란, 그리고 분노와 살의가 깃든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공군 잔당을 돌아본 그리드가 명했다.
“모두 죽여라. 그리폰과 비룡은 최대한 포획하고.”
“네.”
이들을 살려둘 생각이었다면 무패왕의 검술을 쓰지도 않았고 피아로를 소환하지도 않았다.
후환을 남겨선 안 된다.
애초에, 전쟁은 소꿉놀이가 아니다.
이쪽 또한 나의 모든 것을, 내 소중한 이들의 목숨을 걸고 있다.
또한.
“.....”
그리드는 처참히 무너진 칸의 동상을 보았다.
슬픈 표정을 짓는 그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사하란 제국의 공작 ‘천공왕 리갈’을 해치웠습니다.]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위대한 업적입니다.]
[대륙 전역에 명성이 오릅니다. 2천의 명성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겔더 공작가문의 보구 <금룡갑>을 얻었습니다.]
[겔더 공작가문의 보구 <거인족 소궁>을 얻었습니다.]
[당신의 기사 ‘쥬드’가 강적과의 승부를 경험하고 <한계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스탯 한계치가 상승합니다.]
[특별한 기연을 얻은 당신은 <전설>과 <초월자>, 그리고 <격>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칭호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업적 시스템>이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기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당신의 기사 ‘쥬드’가 <충절의 기사>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당신의 기사 ‘쥬드’가 <꺼지지 않는 불씨>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당신의 기사 ‘쥬드’가 <전장의 기적>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당신의 기사 ‘메르세데스’가 <칠공작 살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당신의 기사 ‘피아로’가 <칠공작 살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피아로, 미안하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공손히 허리를 숙이는 피아로.
묵묵히 선 메르세데스.
어느새 일어나 밥을 찾는 쥬드.
‘격’을 쌓아가기 시작한 세 명의 기사와 함께, 그리드는 바이란의 백성들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