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7권 - 16화
“그자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이곳은 대륙의 근간을 뒤흔든 거물이 둘씩이나 잠들어있던 장소다. 이곳만큼 특별한 장소는 대륙 전체를 뒤져 봐도 몇 개 없을 게 뻔했다.
그렇기에, 그리드는 집착했다.
자신보다 앞서 이곳을 방문했다는 사람.
그자가 누구인지 그리드는 꼭 알고 싶었다.
‘평범한 사람은 마리로즈의 사기를 감당할 수 없다. 첫 번째 방문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전설에 준하는 존재였을 터.
그의 정체가 무엇이며, 이곳을 방문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 숨겨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이익이 될 공산이 크다.
정보는 곧 힘이니까.
이는 노련한 플레이어로써의 계산이었고, 다행히 크레이슐러는 협조적이었다.
-놈은 뮐러였다.
“뮐러? 아, 뮐러요? 검성 뮐러?”
-그래.
“그렇ㄱ.... 네?”
고개를 끄덕이던 그리드가 벼락에 맞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굳었다.
검성 뮐러.
최강의 인간.
그는 전대도 아닌 ‘역대’ 모든 전설 중에서 가장 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엮인 스토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자 그리드는 가슴이 벅찼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잠깐? 뮐러는 파그마 이전 시대의 사람이었다. 한데 그가 이곳에 방문했다고? 이곳이 존재하기 전에 뮐러는 죽었어야 정상 아닌가?’
검성 뮐러의 정확한 생몰일(生沒日)은 기록에 없다.
하지만 공식 역사에 기록 된 뮐러의 활동 시기는 최초의 교황의 활동 시기와 겹쳤다.
지금으로부터 약 320년~400년 전 시대에 활동한 그는 대악마들을 봉인하고 비탄의 시대를 끝낸 주역이었으며, 대략 250년 전쯤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게 몇 년 전이었죠?”
의문에 휩싸인 그리드가 질문하자.
-160년 전쯤?
크레이슐러가 충격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파그마가 한창 활동했던 시기잖아? 아!’
그리드는 눈치 챘다.
‘뮐러 또한 파그마처럼 수백 년을 살았던 거다!’
돌이켜 보면, 누군가는 뮐러가 150년 전에 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당연히 왜곡 된 정보인 줄 알았지만, 수백 년을 살았던 파그마를 참고해서 생각해 보니 뮐러 또한 ‘모종의 수법’으로 장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 그 사실을 파그마는 몰랐던 거야.’
파그마는 뮐러가 죽은 줄 알고 있었다.
만약 뮐러가 살아있음을 알았다면, 세계를 지킨답시고 악마와 계약하기보다 뮐러와 협력하는 방법을 선택했을 테니까.
-이야기해줬으니까 됐지? 난 잔다. 마리로즈 없는 세상에 깨어있어 봤자 외로울 뿐이고.
“자, 잠깐만요! 160년 전의 뮐러가 이곳을 찾아왔던 이유가 뭐죠? 그리고 그는 도대체 언제 죽은 겁니까?”
-그놈 참 말 많네. 지는 뭐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뭐가 그리 원하는 게 많아? 파그마는 관짝이라도 만들어줬지, 자네는 도대체 뭔가? 염치가 없어?
“....!”
그리드가 뜨끔했다.
크레이슐러가 자신에게 호의적일 이유가 어디에도 없음을 상기한 것이다.
-잔다. 안녕.
“자, 잠시...!”
크레이슐러가 이대로 떠나서는 안 된다.
뒷이야기를 들어야한다.
그 일념으로, 그리드는 되는대로 소리쳤다.
“저는 마리로즈가 있는 장소를 압니다!”
크레이슐러의 반응은 의외로 심드렁했다.
-나도 알아. 뱀파이어의 도시 어딘가에 있겠지. 근데 뭐? 데려오기라도 하게? 데려올 수는 있고?
“.....”
-감당하지 못할 말은 함부로 뱉지 마라. 그러다가 큰 화를 겪을 수 있으니.
“....죄송합니다.”
-흐음... 빛의 여신과 삼교에 공덕을 쌓은 자네에게는 조금 더 친절을 베풀어도 상관없으려나. 좋다. 간절해 보이니 마저 이야기해주마. 자네는 아모락트라는 놈을 알고 있나?
“대악마 아닙니까? 야탄의 첫 번째 종이기도 하고.”
-잘 알고 있군.
분쟁의 대악마, 아모락트.
그리드는 그의 영혼의 편린과 만났던 경험이 있다.
브라함에게 처음으로 육체를 빌려줬을 때, 브라함은 아모락트를 찾아가 <파브라늄>에 야탄의 축복을 받았다.
영혼의 작은 편린만으로 자신을 티끌로 전락시켰던 그 무시무시한 존재를, 그리드는 잊지 못한다.
-놈이 마리로즈를 두려워했다.
“네...?”
마리로즈가 대악마의 두려움을 살 정도로 강했다고?
-베리아체의 대악마 자격을 박탈하고 뱀파이어 일족을 인계로 추방시킨 아홉 악마 중 하나가 바로 아모락트다. 야탄교 때문에 인계에서 직접 활동해야 하는 녀석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게 뻔한 베리아체가 위험요소였지.
“....!”
그리드는 브라함과 아모락트가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벌써 수 년 전의 일이지만, 워낙 인상 깊었던 만남인지라 어렴풋이 대화를 기억할 수 있었다.
“내가 널 찾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군.”
[물론이다. 브라함 네가 필멸자의 신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여러 신의 축복이 필요할 터이니.]
“내게 야탄의 축복을 내려줄 건가?”
[그렇다.]
“큭큭큭, 야탄 또한 마리로즈는 꽤나 거슬리나보군.”
[야탄 신께서는 마리로즈와 관계없이 너를 총애하신다. 그 점을 항시 상기하라.]
악신 야탄이 마리로즈를 거슬려한다.
브라함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악신조차 신경 쓰는 상대.
일개 대악마가 그녀를 두려워한다고 해서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마리로즈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구나. 아모락트와 야탄이 브라함에게 힘을 실어줬던 이유는 브라함이 그녀를 견제해주길 바라서였던 거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그리드가 고양됐다.
자신이 세계관에 밀접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크레이슐러의 설명이 이어졌다.
-하여, 아모락트는 뮐러를 이용했다. 놈은 권모술수에 능하거든. 마리로즈를 완전히 멸하지 않으면 그녀가 대악마들과 협력하여 인간을 멸할 것이다, 라는 소문이 진즉에 은퇴해서 칩거하고 있던 뮐러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지. 당시 뱀파이어는 본교의 주적(主敵)이었기 때문에 뮐러는 뱀파이어를 상대할 기회가 없었고, 뱀파이어라는 종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어. 그래서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고 이곳까지 찾아왔다.
“마리로즈를 완전히 멸하기 위해서였군요.”
-응. 근데 그냥 돌아갔어. 내가 잘~ 설명해서 돌려보냈거든.
“저기.... 교황 성하. 뮐러는 어떻게 그때까지 살아있었던 거죠? 그 또한 타인의 수명을 빼앗거나 악마와 계약했던 겁니까?”
-자네는 전설이라는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가보군. 믿기지 않을 만큼 위대해서 ‘전설’이 될 정도의 ‘위업’을 쌓고 또 쌓아 올려 ‘격’을 이룬 존재가 바로 전설이다. 전설은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고 회자되는 한 쉽게 죽지 않아.
“....!”
그리드의 뇌리에 한 가지 알림창이 스쳤다.
[전설은 쉽게 죽지 않습니다.]
<불사>스킬의 탄생 배경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한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하지만 칸은... 제가 아는 어떤 위대한 대장장이는 전설이 되고도 수명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전설이 되자마자 죽었다고요. 그리고 다른 전설들도 파그마를 제외하면 수백 년씩이나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쉬지 않고 회자될만한 위업을 쌓지 못했던 게지. 더군다나 대장장이 같은 생산직은 위업의 혜택을 얻기 어렵다.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작품’을 논하는데 집중하지 정작 그 작품을 만든 사람에게는 관심이 덜하거든. 이해하기 쉽게 또 다른 예를 들어줄까? 무패왕이라고 불리던 사내가 있었다. 그는 역대 최강자라는 검성 뮐러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무력의 소유자였고 실제로 단 한 번의 전투에서도 패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활동 영역은 자신의 조국에 국한되어 있었어.
“....?”
-그의 위업은 자국민들에게만 회자될 뿐, 대륙 전역에서는 회자되지 않았다. 유명세가 약했다는 뜻이고 전설로써의 격도 떨어졌다는 뜻이야. 그는 사하란 제국의 손에 죽었지만, 만약 제국에게 죽지 않았어도 그리 장수하지는 못했을 거다.
“아....”
그리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자신이 전설이 되자마자 불사의 혜택을 얻은 것은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고, 이 세계의 진정한 주민들은 사정이 다르다는 거다.
‘이거....’
그리드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피아로와 메르세데스였다.
그리드는 그들이 혹 위험에 처할까 두려워서 전투에 참여시키는 일을 자제해왔으나, 이제 보니 그건 썩 현명한 처세가 아니었다.
‘그들을 오래 살리기 위해서는 도리어 많은 전투에 참여시키고 위업을 쌓게 만들어야 옳아.’
특히 메르세데스가 문제다.
피아로야 ‘농업’으로 일정량의 위업을 쌓을 수 있다 쳐도 메르세데스는 기사다. 그녀가 위업을 쌓기 위해서는 전장에 있어야했다.
“그런데 파그마도 전설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던 걸까요? 그는 뮐러가 죽었다고 믿었던 눈치인데요.”
-개념은 이해하고 있었어도 뮐러의 죽음을 의심하진 못했겠지. 그 어떤 전설도 뮐러처럼 많은 위업을 쌓지 못했으며, 뮐러처럼 오래 살았던 선례가 없다. 뮐러가 설마 수백 년이나 살아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나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상상 못했는데.
“뮐러는 아직도 살아있을까요?”
-아니.
크레이슐러는 단언했다.
-그는 죽었다. 세상은 계속해서 변해왔고 또 새로운 일들을 끊임없이 겪어왔으니까. 사람들은 언제까지고 과거의 인물만 찬양하기보다 새로운 인물에 관심을 돌렸고 뮐러가 회자되는 횟수도 차츰 줄어들었겠지.
“.....”
그리드는 소름이 돋았다.
‘잊혀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이라는 공식이 유난히 잔인하게 다가왔다.
뮐러가 고독 속에 죽어갔을 모습이 상상됐다.
크레이슐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그리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 챈 기색이었다.
-하하, 회자되는 횟수가 줄었다고 해서 완전히 잊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지금 우리만 해도 뮐러를 회자하고 있지 않은가? 자네는 살면서 뮐러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지? 족히 수십, 수백 번은 들었을 것이다. 그래, 뮐러는 완전히 잊히지도 않았고 고독 속에 죽어가지도 않았어. 1분, 1초도 쉬지 않고 회자되어 죽지 못했던 시절이 도리어 이상했던 거다. 뮐러는 살아있던 시절이 더욱 더 외롭고 괴로웠을 터. 생을 마감할 때야말로 비로소 행복했을 것이다.
크레이슐러의 목소리는 뮐러의 이야기를 하는 내내 온화했다.
크레이슐러조차도 뮐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존중하는 눈치였다.
뮐러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기분이 좋아진 건지, 크레이슐러는 어울리지 않게도 그리드를 위로해주기까지 했다.
-자네가 말한 위대한 대장장이. 칸이라고 했던가?
“네... 맞습니다.”
2대 교황 크레이슐러가 칸의 이름을 입에 담다니.
왠지 모를 감격을 느낀 그리드가 벅찬 마음으로 답하자, 크레이슐러는 인자하게 말해주었다.
-수명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말은 즉 천수를 누렸다는 뜻일 터. 떠나야할 때 떠난 것은 그에게 큰 축복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뮐러처럼 오래 살게 되었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기이하고 고독했겠나?
“...성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칸은 마지막 순간에 행복했을 거예요.”
전설이 되었고, 내 품 안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오래 전 헤어진 가족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래, 그는 만족했을 것이다.
행복했을 것이다.
‘칸. 보고 있죠? 크레이슐러 님이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당신 정말 출세했네요. 기분 좋겠어요.’
크레이슐러 덕분에 마음의 위안을 얻은 그리드가 따뜻한 미소를 그렸다.
동시에.
[크레이슐러와의 호감도가 10 올랐습니다.]
의외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네놈이 개념이 없는 것 같기는 한데 천성은 착한 것 같군. 조금 마음에 들어.
크레이슐러가 직접 좋은(?) 평가까지 내려주었다.
그리드는 기뻤다.
크레이슐러가 비록 관짝 신세가 됐기는 해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가 아닌가.
그와 친분을 쌓고 호감까지 얻었으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럼 이제 진짜 잔다.
그대로 작별을 고하는 크레이슐러에게, 그리드는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려다가 문득 또 떠오르는 의문이 있어서 질문을 던졌다.
“전설이 아닌데도.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쉬지 않고 회자될 정도의 위업을 쌓지 못한 존재인데도 수백 년을 사는 인간은 뭐죠? 애초에 인간이 아닌 걸까요?”
-그놈 진짜 귀찮네.
크레이슐러는 투덜거리면서도 설명해주었다.
-인간이 아니거나, 초월자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초월자!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는 초월자에 가까웠다.
“초월자라는 건 정확히 뭡니까? 전설과 뭐가 다른 거죠?”
-전설과 초월자 둘 다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는 재능과 능력을 지녔다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전설은 위업을 쌓아 격을 이룬 존재이고, 초월자는 그저 자기 자신의 단련에 집중하는 구도자이다. 무엇을 단련하고 연구했느냐에 따라서 긴 수명을 얻을 수도 있지.
“전설이 초월자보다 위라고 볼 수는 없는 겁니까?”
-단순히 능력의 고하를 논하는 것이라면 대체적으로 전설보다 초월자가 상격이다. 전설은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이 일, 저 일 해결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반면 초월자들은 오직 자기 발전에만 시간을 할애하니까. 물론 전설의 ‘경험’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되는 경우도 있어서 초월자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전설도 많았고 대표적인 예가 뮐러야.
“....초월자들은 대게 이기적이겠군요?”
-글쎄다? 세계의 평화, 혹은 발전을 위해서 싸우지 않았다고 해서 그걸 꼭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시 알아? 눈에 띄지 않게 좋은 일 종종 하고 있을지? 뭐, 나사가 하나씩 빠져있기는 하겠지만.
“나사가 빠졌다?”
-자신의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일은 대부분 외면하니까.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의욕이 없거나 쉽게 포기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나도 마리로즈 아니었으면 2대 교황 자리 안 받았어.
“.....”
마안족 도시에서, 어째서 그랜드마스터는 순순히 물러났던 것일까?
그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또한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초월자 지크프렉터.
제국에 충성심이 있을 리 없는 그가 어째서 제국 황실을 섬기는 거지?
‘너의 목적이 뭐냐?’
영 찝찝하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뒤늦게 길드 채팅창을 보았다.
느낌표가 떠올라 있었다.
공지가 있다는 뜻.
“....!”
공지 내용을 확인한 그리드가 두 눈을 부릅떴다.
***
“이것은 누구의 동상이지?”
채 반나절도 안 돼서 바이란을 점령한 천공왕 리갈.
광장에 세워져있는 커다란 동상 앞에 선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풍채 좋은 노인의 동상이었다.
눈동자는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으나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노인.
손에는 망치를 쥐고 있다.
“전하께서 묻지 않느냐!”
퍼억!
아무도 대답이 없자, 리갈의 병사들이 호통을 치더니 포로들을 마구잡이로 폭행하기 시작했다.
포로들이란, 전투에서 패배하고 붙잡힌 템빨국 병사들이다.
바이란을 지켜야한다는 본분을 지키지 못한 채 포로가 되는 수모까지 겪게 된 그들이 이를 꽉 물었다.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적장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간신 짓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리갈이 조소했다.
“별 의미 없는 동상인가? 역사 없는 나라답게 위인이 없어 허구의 인물이라도 내세운 건가?”
“그 손. 치워. 라.”
리갈이 동상을 툭툭 치며 조롱하자 포로 하나가 으르렁거렸다.
포승줄로는 안 돼서 쇠사슬로 묶어놓은 템빨국 기사였다.
이름이 쥬드라고 했던가.
맷집이 얼마나 좋은지, 놈 하나 사로잡는 일이 이번 전투에서 가장 힘든 과제였을 정도다.
“흐음.”
헝클어진 은색의 머리카락.
피처럼 붉은 눈.
공군의 제복을 입고 화려한 외모를 뽐내는 리갈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는 쥬드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자네의 청을 들어주면, 자네 또한 내 청을 받들어 내 부하가 되어줄 텐가?”
리갈은 쥬드가 탐났다.
뛰어난 육체능력을 지닌 반면 지능은 천치처럼 낮은 기사.
곁에 두기에 딱 좋은 인재 아닌가?
무슨 짓을 시켜도 주인을 물지 않을, 충견의 재목이다.
쥬드가 고개를 저었다.
“쥬드의. 주인은 오직. 템빨왕 전하. 한 분.”
거봐.
맞잖아.
“내가 더 좋은 대접을 해주겠네. 템빨왕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그대에게 주겠네.”
템빨왕보다 좋은 대접을 해준다는 건 불가능하다.
쥬드가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그리드의 노력과 관심 덕분이었다.
그리드가 재능을 발견하고 거두어주지 않았다면.
그리드가 쥬드의 특성에 적합한 아이템을 친히 제작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쥬드는 없었다.
쥬드는 오직 그리드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드 없는 쥬드는 앙꼬 없는 찐빵이오, 잔액 없는 계좌다.
하지만 리갈은 사정을 알지 못한다.
사하란 제국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재력과 권력을 지닌 자신이라면 템빨왕보다야 해줄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다고 믿었다.
템빨단원 하나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주제 파악 못하기는.”
큰 목소리로 외치는 청년의 이름, 이벨린이었다.
레이단에 가있는 지슈카를 대신해서 바이란을 책임진 그는 전투 내내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결국 포로의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목숨을 바쳐서 적군을 베고, 죽었다가 부활해 또 다시 싸웠는데도 바이란을 빼앗겼다.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멋대로 바이란의 땅을 짓밟고 선 리갈을 저주했다.
“너 따위가 그리드님보다 더 많은 걸 준다고? 네 목을 잘라 바쳐도 그건 불가능....”
이벨린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성큼 다가온 리갈이 이벨린의 목을 날려버린 까닭이었다.
흑백으로 변해버린 이벨린의 시야에 끔찍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사망하였습니다.]
[35.6퍼센트의 경험치를 잃었습니다.]
[전쟁 페널티로 10퍼센트의 경험치를 추가로 잃었습니다.]
[당신을 살해한 인물이 <불멸자를 노리는 독> 효과를 적용 중입니다. 10퍼센트의 경험치를 추가로 잃었습니다.]
[24시간 내에 2번 사망하여 접속 제한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전쟁 페널티는 충분히 예상했고 납득했다.
전쟁에서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으니 경험치를 손실해도 불합리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멸자를 노리는 독은 예상치 못한 최악의 독이었다.
총 20퍼센트의 경험치를 추가 손실.
지옥 같다.
‘위험해. 이건 진짜로 위험해. 다들 조심해야....’
쏴아아-
잿빛으로 산화하는 이벨린.
템빨단원들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고, 템빨국 병사들과 백성들은 겁에 질렸다.
쥬드가 포효했다.
“죽인다!”
철컹! 철컹철컹!!
의미 없는 발악이다.
쥬드가 몸부림쳐봤자 그를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이 더욱 옥죄일 뿐이다.
그 모습을 외면한 리갈이 직접 동상의 안내문을 읽었다.
<전설의 대장장이, 칸의 동상>
일생을 바쳐 무수히 많은 무구를 창조하고 템빨국을 무장시킨 위대한 대장장이.
나의 스승이자, 친구이며, 가족이었던 그를 기린다.
-템빨왕 그리드-
“호오? 이자가 바로 소문의....”
제국의 정보력은 우수하다.
그리드의 최측근이었던 칸을 모를 리 없다.
‘국장(國葬)까지 치러줬을 정도이니 나라 곳곳에 동상을 세웠어도 이상하지 않지.’
템빨국 왕과 백성들에게 칸이라는 인물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그 사실을 뻔히 알기에, 리갈은 명했다.
“동상을 부수고 강에 버려라.”
“안 돼! 하지마! 안 된다!!”
철컹철컹!!
쥬드가 더욱 더 날뛰기 시작했다.
쇠사슬에 쓸리는 피부들이 붉게 까져나가 피가 철철 흘렀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이제는 병사들과 백성들조차도 두려움 대신 분노를 느끼며 몸부림쳤다.
누군가는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리갈은 명령을 회수하지 않았다.
쿠르르릉....!
무너지는 동상을 등지고 선 리갈이 말했다.
“제국은 너희를 철저히 재구성할 것이다. 템빨국의 상징을 모조리 불태우고 너희의 정신을 짓밟을 것이다. 힘없는 국가의 백성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며 힘의 순리에 순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