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7권 - 14화
<영웅왕>의 고유 자원 <투기>는 오직 전투를 통해서만 축적된다.
무패왕의 검술을 사용한답시고 투기를 소모하는 행위는 그리드에게 큰 압박이었다.
기껏 쌓은 투기가 흩어지며 능력치가 하락할 때마다 위험이 너무 컸다.
하여, 그리드는 검호의 자원 <검기>를 애타게 원해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검기...!’
과거의 파그마가 검기를 활용하는 모습을 목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드는 직감했다.
‘검기가 해방된다!’
여태까지 그리드가 배워온 ‘파그마의 스킬’들은 모두 계기가 있어야 습득이 가능했었다.
파그마의 기서와 벽화, 퀘스트, 명예의 전당 등의 온갖 히든 피스들.
그리드는 파그마가 남겨놓은 그 안배들을 직접 마주하는 순간마다 비로소 파그마의 스킬을 습득할 수 있었다.
반면 <검호 파그마의 검무>는?
여신의 축복을 이용해서 강제 진화시킨 스킬이다.
파그마가 남겨놓은 지식이나 힌트를 통해서 배운 게 아니었다.
반쪽짜리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그리드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파그마의 전투를 목격함으로써 <검호 파그마>를 이해하고 자신 또한 진정한 <검호>로 거듭나리라는 기대감을 품었다.
한데.
“허허, 이 천인공노할 놈을 보게.”
그리드의 예상과 달리,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다.
크레이슐러가 한 발 물러났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네한테 검을 들이밀어? 얌마, 내 올해 세수가 110세야, 110세. 칼 휘두르다가 혈압 올라서 죽는 수가 있다고. 에잉, 고얀 놈 같으니라고. 자네는 도리라는 걸 모르는구만.”
“.....”
검까지 뽑아 쥔 파그마만 민망해지는 반응이었다.
놈과 자네라는 지칭을 오고가는, 크레이슐러의 특이한 화법을 잠자코 듣고 있던 파그마가 대꾸했다.
“어차피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입장이라면, 오늘 죽으셔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뭐, 뭣?”
“성하께서 죽음을 각오하고 저를 단련시켜주십시오.”
“허! 이런 파렴치한 놈을 보았나! 스튜 끓여 먹다가 간이 안 맞아서 예의를 같이 넣고 끓여 먹은 건가! 내 살다 살다 자네처럼 철면피에 되먹지 못한 놈은 처음 보는군!”
“성하, 지금의 평화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최초의 교황에 이어서 성하까지 별세하시면 지옥을 억제하는 힘이 사라집니다. 비탄의 시대처럼 야탄교의 기세가 오를 것이고 악마들은 두려움 없이 날뛰게 될 겁니다.”
“그걸 아는 놈이 본교의 삼신기를 봉인했다고?”
“그건 친구의 부탁이었으니까요.”
“친구의 부탁? 허허, 허울 좋은 망언이로다. 자네 같이 정신 나간 놈이 친구를 운운해? 의리의 의자도 모를 거면서 개뿔.”
“제가, 강해지면 됩니다.”
“....?”
“레베카교와 프렌스가 나설 것도 없이, 제가 강해져서 세계를 지킬 것입니다. 그럴 각오였기에 프렌스의 부탁을 들어준 겁니다. 하오니 협조해주십시오.”
파그마가 검을 고쳐 쥐었다.
크레이슐러는 혀를 찼다.
“혼자서 세계의 평화를 지키겠다고? 타락한 신의 후예답게 오만방자하군. 쯧, 하여튼 양반 놈들이란.”
“저는 양반의 역사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저 자신을 신의 후예라고 생각해본 적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써, 인간의 도리로써 사람들을 구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당장 노인네를 죽이겠다고? 그게 정녕 인간의 도리인가?”
“....당신 한 명의 희생이 수천만의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 올바른 도리이자 정의입니다.”
“큭, 큭큭큭! 지독히도 오만하고 이기적인 놈이로다!”
크레이슐러의 분노가 그와 동화되어 있는 그리드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크레이슐러는 파그마에게 혐오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인간의 관점에서 봤을 때 자네는 어긋나있다. 자네 스스로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비난을 감수할 각오는 이미 되어있습니다.”
“닥쳐라! 네놈의 사상은 자네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숭고한 것이 아니야!! 그걸 모른다고? 그걸 모른다면 그건 네놈이 양반이기 때문이다!! 자네는 인간을 대변할 입장이 못 돼!!”
“양반과 인간의 다른 점이 뭡니까? 양반이 다소 오래 살고 더 큰 힘을 타고났다고는 하나 결국 인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이 저마다 다른 것도 인간과 똑같고, 악을 혐오하는 것 또한 인간과 같으며, 생김새 또한 인간과 같습니다. 피차 똑같은 인간입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니 서로를 위해야하며, 그렇기에 저는 인간을 위해서 싸울 것입니다.”
“미친 놈. 자네는 미쳤다. 하기야, 미친놈이 자기가 미친 걸 어찌 알겠어. 오냐, 좋다. 자네는 차라리 여기서 죽어라. 이대로 살려두기에는 무척 위험해 보이니.”
퍼어엉-!
그것은, 차라리 기적에 가까웠다.
크레이슐러의 신앙은 하해와 같았고, 무한한 신성력이 생성되었으며, 그 신성력은 크레이슐러의 의지에 따라서 권능을 행사했다.
콰콰콰쾅!!
수십, 수백 개의 궤도로부터 쏟아지는 빛의 작살.
순식간에 생로를 잃은 파그마는 그대로 사지가 꿰뚫려 죽을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파그마는 이미 2개의 검무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현재 그리드가 크레이슐러의 동체시력을 갖고 있기에 읽을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화회(花回).”
‘....!’
그리드가 경악했다.
꽃의 잎사귀가 흐트러지듯이 만개한 검기의 꽃잎 수백 개가 각자 회(回)의 묘리를 담고 있었다.
파그마를 향해서 꽂혔던 빛의 작살 전부가 크레이슐러에게 되돌아왔다.
스아아아-!
빛의 장벽을 세워 작살들을 흡수해버린 크레이슐러가 솔직하게 감탄했다.
“그것 참 신묘한 검술이다. 네놈이 뮐러와 무패왕 다음이로구나.”
“저는 검술로 그들과 비할 바가 못 됩니다. 그렇기에 발전해야합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
“...큭큭, 부정하지 않는가...”
이자는 위험하다.
살려둬서는 안 된다.
크레이슐러의 직감이 그리 말했다.
눈앞의 왜곡 된 사내를 죽이는 일이 자신의 마지막 사명이라고, 그는 믿게 될 정도였다.
“선대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지. 지금이 난세가 아니었다면 나를 후임으로 정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의 무재(武才)가 너무 뛰어나 약자를 헤아리지 못한다고 늘 아쉬워하셨어. 하지만 자네는 나보다 더하다. 자네는 그 누구에게도 공감하지 못한다. 자신의 목적과 수단을 위해서 희생당하는 이들이 어떤 고통을 겪을지라도 자네는 무감각할 게야. 과연 처음부터 그랬던 건지, 아니면 그렇게 변해온 건지 내 모르겠다만, 네놈은 이미 충분히 악하다.”
쏴아아아아아-!
크레이슐러의 육신을 12색(色)의 빛이 감쌌다.
벽에 걸려있던 검과 갑옷에도 5색의 빛에 감싸이더니 크레이슐러에게 날아와 장착됐다.
자기 자신과 무구에 17가지가 넘는 버프를 적용시킨 것이다.
콰앙!
너무나도 강력한 기운이 지면을 박살내고 건물을 뒤흔든다.
끓어오르다 못해 넘치는 크레이슐러의 힘을 그리드는 적나라하게 느꼈다.
‘초월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광경인지, 그리드는 알 수 있게 되었다.
-!
멈춰버린 시간.
오직 빛의 굴절만이 진행되는 세상 속에서, 크레이슐러는 허공에 멈춰있는 파편들을 돌파하며 전진했다.
그와 파그마의 거리가 좁혀졌을 때, 파그마의 눈은 단 한 번의 깜빡임조차 없었다.
콰착!!
빛을 뒤따라 쏘아지는 검.
그것이 파그마의 어깨를 세 번이나 꿰뚫고 나서야 뒤늦게 소리가 발생했고 선혈이 튀어 올랐다.
그리드는 높이 솟구치는 핏줄기가 무수히 많은 ‘방울’로 구성되었음을 보았다.
‘그걸 피했어?’
그리드가 마른 침을 삼켰다.
문자 그대로 섬광처럼 쏘아진 교황의 검을 파그마는 분명히 피했다. 본래 심장이 꿰뚫렸어야했는데 한쪽 어깨를 내어주는 정도로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
이를 악 무는 파그마의 육체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대장장이의 분노는 그리드도 알고 있는 버프였지만 다른 4가지 버프는 생소했다. 파그마의 아이템에 귀속 된 스킬일 수도, 파그마 고유의 스킬일 수도 있었다.
-!
허공에서 검이 계속 맞부딪쳤지만 소리는 없다.
현재 세상은 마치 일시 정지 된 영화 같았다.
파그마가 어깨에서 흘린 핏물은 여전히 수천 개의 방울로 쪼개진 채 허공에 멈춰있었다.
그 기이한 광경을 배경으로, 오직 파그마와 크레이슐러만이 움직이며 공방을 교환한다.
쩌어어엉-!
쩌저저저저저저정!!
앞선 충돌 때 발생했던 소리가 이제야 들려온다.
그 간극 속에서 파그마와 크레이슐러는 이미 또 수십 회의 공방을 나눴다.
“초살화(超殺花).”
“초연살파극(超聯殺派極).”
“연회극(聯回極).”
“연살회극참(聯殺回極斬).”
“연살화(聯殺花).”
“초극살참(超極殺斬).”
검무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파그마는 다인슬레프와 발할라의 작품성에 경탄하며 예를 표했다네. 그리고 그 어떤 영웅도 다루지 못했던 다인슬레프와 혼연일체가 되어 검무를 선보였다고 해. 그 아름다움은 가히 파격적이었고, 기세는 하늘을 꿰뚫어 천둥번개를 불러일으켰다고 하지.”
칸의 조상 알바티노가 표현했다는 파그마의 검무가 떠오른다.
천지개벽을 일으켰다는 검무.
여태껏 그리드는 그것이 과장인 줄 알았다.
자신이 직접 배운 파그마의 검무와 알바티노가 표현했던 파그마의 검무 사이에 너무 큰 괴리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보니 아니었다.
이것이 진정한 파그마의 검무였다.
“쿨럭...!”
진즉에 상처투성이가 된 파그마는 꿋꿋이 버티는 반면, 단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한 크레이슐러는 당장 쓰러질 것처럼 크게 휘청거렸다.
즉시 힐을 써서 상처를 회복했지만, 마침 17가지 버프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런 썩을.”
전 교황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상소리가 크레이슐러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그는 심지어 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아, 몰라! 안 해! 관둘란다!”
“허억.... 허억.... 허억....”
파그마는 뭐라고 대꾸할 기운조차 없어보였다.
극한에 이른 마법과 검술을 상대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크레이슐러가 무구를 벗어던졌다.
“힘들어. 몸이 무거워.”
“허억.... 허억....”
“네놈 죽이려다가 내가 죽겠다. 제기랄. 늙으니까 서럽네.”
“허억... 헉.... 감사... 감사합니다....”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파그마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손끝이 떨리는 게 보인다.
“성하의 가르침 덕분에... 더 많은 검무를 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쯧.”
탐탁찮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는 크레이슐러.
그는 지금도 고민 중이었다.
파그마는 위험하니 죽여야한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저런 무재를 해치기 싫다고 생각했다.
결국 크레이슐러는 도피를 택했다.
‘어차피 난 곧 죽을 테니 이 뒤의 운명은 남겨진 자들이 감당해야지.’
에라, 모르겠다.
난 그냥 쉬련다.
그 생각이 끝이었다.
크레이슐러의 의식은 그대로 끊겼다.
죽음이었다.
지금 무리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던 크레이슐러의 엄살은, 일말의 과장도 없었던 것이다.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시야 속에서.
“편히 가십시오. 당신의 영혼은 신목의 관에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하는 파그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드는 현실로 돌아왔다.
[과거 체험이 끝났습니다!]
[당신은 <검호 파그마의 검무>를 목도하고 제대로 이해하였습니다!]
[칭호 <검호>를 얻었습니다.]
[칭호 효과로 새로운 자원 <검기>가 개방됩니다.]
[칭호 효과로 소드 마스터리 관련 스킬의 효과가 소폭 상승합니다.]
[<검호 파그마의 검무> 정보가 갱신됩니다.]
[검무의 융합이 비교적 자유로워집니다.]
[검무를 사용할 때 소모되는 자원이 마나에서 검기로 변경됩니다.]
[모든 검무의 위력이 강화되는 대신 레벨이 1로 초기화되었습니다. 모든 검무의 최대 레벨은 3입니다. 단, 융합 검무의 레벨은 1로 고정.]
[새로운 검무 <화(花)>를 습득하였습니다.]
“....”
관 속에서 조용히 눈을 뜬 그리드.
여운에 잠겨있는 그의 귓가로 크레이슐러의 음성이 들려왔다.
-딱히 별거 없지? 내가 아는 파그마는 그게 전부다. 그냥 좀 미친놈에다가 노인 살인범에다가 거짓말쟁이라는 정도?
“아, 네....”
따질 부분이 너무 많아서 도리어 외면하게 된다.
절레절레 고개를 지은 그리드가 관에서 일어났다.
그는 강해진 자신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