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7권 - 13화
칠악(七惡)이 신을 배반하고 백성들을 현혹하나니.
신앙이 쇠락하여 지상에 악마들이 올랐다.
비탄의 시대.
전쟁과 기아에 고통 받은 백성들은 신을 원망하였고.
이를 가엾이 여긴 한 성자는 고행의 길에 나섰다.
레베카교 탄생 설화의 서막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자가 바로 최초의 교황이었다.
고행의 길을 마친 성자에게 빛의 성검이 내려졌으니.
성검의 힘으로 악마를 물리친 성자는 감격하며 여신의 찬가를 불렀다.
정의로운 영웅들이 찬가에 이끌렸고,
여신의 석상과 신전을 세웠다.
성자는 영웅들에게 추대 받아 교황이 되었나니
교황은 영웅 위라.
설화의 종장.
전반적인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최초의 교황은 무척 각별한 존재다.
악마들을 멸하고 신앙을 다시 세운 그는 ‘인류 전체를 구원’한 위인.
다른 어떤 전설들과 비교해도 격이 높다.
레베카 교인들은 그를 신과 동급의 존재로 추앙했다.
그처럼 대단한 사람이 자신의 후임으로 아무나 지목했겠는가?
단연코 아니다.
최초의 교황은 자신보다 뛰어난 인재를 찾아 자신의 후임으로 앉혔고 그게 바로 2대 교황 크레이슐러였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은 관짝에 들어가다 못해 관짝 그 자체가 된 인물이었지만, 굳이 밉보여서 좋을 상대가 아닌 것이다.
“거짓말이라뇨?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그리드는 크레이슐러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노력했다.
“제가 이곳에 왔을 때부터 관님 아니, 교황 성하께서는 텅텅 비어 있었다고요. 마리로즈는 이미 없었어요. 정말입니다.”
-이거 참으로 고얀 놈이로군.
“네?”
-신목(神木)의 관에 봉인 된 나의 자아는 이곳에 침입자가 들어올 때 깨어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깨어난 것은 이로써 두 번째지.
“....?”
-첫 번째로 깨어났을 때만 해도 마리로즈는 여전히 내 안에 잠들어있었어. 한데 지금은 없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그래서요오?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고? 파그마의 후계 주제에 순진한척 구는 꼴이 가증스럽구나. 자네가 마리로즈를 풀어준 게 아니면 누가 풀어줬겠느냐, 이 말이다.
터엉-!
관짝이 혼자서 점프를 뛰었다.
어처구니없는 광경!
혀를 내두른 그리드가 쇄도해오는 관을 피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관이 무슨 란스티어의 술법을 전개한 페이커마냥 빨랐다.
[33,78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컥! 미, 미친....!”
도대체 이게 무슨 개떡 같은 경우지?
불쾌한 건 둘째 치고 너무 아프다. 1, 2대만 더 맞았다가는 골로 가게 생겼다.
당황하는 그리드의 귓가로, 크레이슐러의 아쉬움 깃든 음성이 들려왔다.
-그걸 살아? 이거야 원. 내가 여기까지 약해졌을 줄은 몰랐군. 제아무리 신목이라도 인계에서는 한계가 생기는 건가.
“뭐,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해는 대화로 푸시죠.”
-오해? 오해에~?
‘이, 이 인간(?) 이거.’
그리드는 직감했다.
크레이슐러는 역대 최강의 교황이라고 추앙 받으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치고 성격이 개차반이었다.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냥 도망치자.’
이 이상 엮였다가는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게 그리드의 판단이었다. 그는 크레이슐러에게 파그마의 정보를 듣고 싶었고 광물도 캐고 싶었지만 죄다 포기하리라 결정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관짝한테 죽는 건 싫었으니까!
“신속한 몸놀림! 흑화!”
그리드가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서 스킬을 사용함과 동시에.
-...흠, 뭐. 오해가 맞는 거 같기는 하군.
크레이슐러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 발 물러났다.
1초만 더 빨리 태도를 바꿔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쿠우우웅-!
“....!?”
그것은 스킬이나 마법의 개념을 초월한, 보다 상위의 권능이자 본능이었다.
쏴아아아아!!
크레이슐러라는 ‘존재’가 사악한 기운을 부정한다.
그리드의 흑화가 해제되었고, 아지랑이 같이 피어오르던 마기는 햇살 아래 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흑화가 강제로 해제되었습니다!]
[지고의 신성력이 당신의 마기를 부정합니다!]
[육체에 심한 반동이 생깁니다!]
[2,265,32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최소치로 고정....]
“쿨럭! 쿨럭, 쿨럭!!”
이게 무슨?
강한 충격에 주저앉은 그리드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구멍이란 구멍에서 죄다 피를 쏟아내며 몸을 떨었다.
크레이슐러가 황당해했다.
-내 앞에서 마기를 내뿜어? 자네, 자살할 생각이었나? 깜짝 놀랐네.
“허억... 허억...”
이럴 줄 알고 스킬 썼겠냐?
뭐라 대꾸 못하고 연신 피를 토하는 그리드에게 크레이슐러가 다가왔다.
텅 빈 관이 공중을 부유하는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뭐, 살았으니 됐나. 전설의 격이 이래서 좋다니까. 하여튼 바퀴벌레야, 바퀴벌레.
“끄으윽.... 방금 무엇을 하신 겁니까?”
-아무 것도 안 했네. 단지 ‘교황’이라는 나의 존재감이 자네의 사악한 기운을 감지하고 소멸시킨 것일 뿐.
“.....”
-그리 괴물 보듯이 할 것 없어. 마리로즈에게는 교황의 존재감도 통하지 않았으니까. 어휴, 내가 걔를 어떻게 잡아다가 봉인 했는데....
“.....”
-이제 보니 신목의 수명이 생각보다 짧았던 게 문제 같군. 자네가 마리로즈를 봉인에서 풀어준 게 아니라 신목의 관이 약화돼서 마리로즈 스스로 봉인에서 깨어난 것이 정황상 맞는 것 같아.
사실이다.
그리드가 마리로즈를 자극했던 것은 맞지만, 그리드가 마리로즈의 봉인을 풀어줬다는 건 어폐가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깨어났고 스스로 이곳을 떠났다.
그리드는 단지 그녀에게 피 냄새를 맡게 해주었을 뿐이다.
‘...결국 내가 원인 제공자이긴 하지만.’
그걸 굳이 설명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물약을 복용하며 몸을 일으킨 그리드가 크레이슐러에게 질문했다.
“마리로즈를 봉인할 때 함께 사망하셨던 겁니까?”
-아니? 마리로즈를 봉인하고 수십 년 동안 잘 먹고 잘 살다가 한참 뒤에 죽었는데? 내가 한 110살까지 살았던가?
“....그럼 직접 관이 되시기 전에는 어떤 방법으로 마리로즈를 봉인하셨던 건지...?”
-그야 당연히 내 신성력으로 봉인했지. 근데 3대 놈은 단명했고 4대와 5대는 신성력이 약해서 마리로즈의 마기를 감당하지 못하더군. 내가 죽으면 마리로즈가 깨어나게 될 것 같았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죽어 관이 되었다. 내 자아를 신목의 관에 쑤셔 박은 게지.
“그때 도움을 준 것이 파그마입니까?”
-그래. 그 개떡 같은 새... 녀석이 나를 속였어.
“....?”
-잠들어 있어도 감각은 유지돼서 내 안에 있는 마리로즈를 영원히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하더니, 빌어먹을 헛소리였지.
“....?”
-잠들어있는 동안은 감각도 사라지더라고. 그래서 그녀의 채취를 못 느꼈어. 후우.... 다시 깨어나 그녀를 느낄 수 있기를 얼마나 고대해왔는데....
“.....”
어딘지 핀트가 나간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다.
자신의 뺨을 때려서 정신을 북돋은 그리드가 대화의 방향을 바로잡았다.
“파그마에 대해서 알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리고 이 동굴의 첫 번째 침입자가 누구인지도 좀....”
-말해주면 자네는 뭘 해줄 건데? 마리로즈를 다시 잡아다 주기라도 할 거야?
“.....”
나보고 마리로즈를 잡아오라고?
어처구니없어서 대답 못하는 그리드에게 크레이슐러는 허허 웃어보였다.
-자네는 파그마와 달리 귀여운 구석이 있군. 반응이 아주 솔직해서 나쁘지 않아. 좋아. 이것도 인연이니 질문에 대답해주겠네. 자네가 빛의 여신의 축복과 삼(三)교의 축복을 받은 것을 보아하니 본교에 큰 도움을 준 것 같기도 하고.
과연 2대 교황.
그리드에게 깃들어 있는 여신의 축복과 파브라늄에 깃들어 있는 레베카교, 쥬다르교, 도미니언교의 축복을 바로 간파해버린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볼 일이야.’
뿌린 대로 거둔다는 성어(成語)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기대하는 그리드에게 크레이슐러가 말했다.
-내 품에 눕도록 하게.
“....관에 누우라고요?”
-백 번 말로 듣는 것보다야 한 번 보는 게 낫지 않겠어? 자네에게 내 옛 기억을 보여주려고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관에 누우라니?
활짝 열린 빈 관을 마주보고 선 그리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죽어서나 누울 자리에 산 채로 누우려니 찝찝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인 후 관에 누웠다.
그러자.
[신목관(神木棺)이 당신을 받아들였습니다.]
[지고의 신성력이 지극히 소량이나마 당신에게 스며듭니다.]
[빛의 상급 정령이 기분 좋게 반응합니다.]
[빛의 상급 정령의 빛이 조금 더 밝아진 느낌입니다.]
[어둠 속성 저항력이 영구적으로 5퍼센트 상승하였습니다.]
[앞으로 기본 공격 시, 매우 낮은 확률로 성 속성 공격력이 5퍼센트 추가됩니다.]
[크레이슐러와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
기대하지 못했던 혜택들!
기뻐하는 그리드의 시야가 뒤집어지더니 그대로 검게 변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도포를 걸친 장발의 사내가 서있었다.
신라시대 벽화 속 화랑을 보는 듯한, 눈매가 길게 찢어진 아름다운 사내였다.
‘파그마...!’
그리드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발성이 불가능했다.
[과거의 크레이슐러에게 빙의 된 상태입니다.]
[크레이슐러의 시각으로 과거를 체험 중입니다.]
[당신은 관찰자 상태입니다. 과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말 못하는 그리드를 대신해서 크레이슐러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신목으로 관을 짤 수 있다고?”
과거 속 크레이슐러의 목소리는 그리드가 현실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달랐다. 훨씬 늙고 갈라진 음성이었다.
말년의 크레이슐러였으리라.
“신목의 무서움을 모르는 건 아니고?”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세계수의 가지를 이미 여러 번 다뤄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 경험이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합니다.”
대답하는 파그마의 표정은 자신감이 넘쳤다.
턱을 괴고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크레이슐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5대가 추천해준 자이니만큼 내 한 번 자네를 믿어보도록 하지.”
허락이 떨어지자 파그마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너무 강한 나머지 독이 된 신목의 신성력을 억누르며 관을 짜는 그의 동작은 신중하고 섬세하되 느리지 않았다.
그리드가 감탄했다.
‘솜씨 하나는 대단하구나.’
단지 지식만으로 내게 기술을 전달해준 사람답다.
거대한 나무가 하나의 관으로 화해가는 과정이 아름다워 보일 지경이다.
[신목관(神木棺)의 제작법을 획득하였습니다.]
[신목(神木)을 다루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
쓸모 있는 배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뜻밖의 이득이다.
그리드가 기뻐하는 사이 과거 속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고 파그마는 아름다운 순백의 관을 완성시켰다.
크레이슐러가 감탄했다.
“아름답군. 마리로즈와 아주 잘 어울리겠어.”
“교황 성하.”
“그 호칭은 관두라니까? 은퇴한지가 언젠데 교황은 개뿔.”
“제가 성하의 바람을 이루어드렸으니 두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당돌한 놈이로군. 좋다. 말해보라.”
“그동안 성하께서 전설들의 장례를 치러주셨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그들이 묻힌 장소를 알고 싶습니다.”
“그건 왜?”
“저 또한 그들의 넋을 기려주고 싶기에.”
‘....!’
그리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설들의 무덤을 파헤치려는 파그마의 의도를 뻔히 알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닌 신세로 수백 년 동안 고통 받게 될 무패왕과 전설들의 가여운 모습이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아니, 아니다. 이건 비약이야.’
이때의 파그마는 바알의 계약자가 아니다.
시신을 언데드로 만드는 재주가 그에게는 아직 없었다.
파그마의 의도는 스스로 밝힌 대로 순수한 것일 터다.
자신의 피부 위로 돋아난 소름을 털어내면서, 그리드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파그마의 처연한 표정이 영 찝찝했다.
그는 이미 미래를 예견하고 대비하는 중인 것 같았다.
“또한.”
파그마가 검을 뽑아 쥐었다. 동양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장검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제가 강해질 수 있도록 한 수 가르침을 주시지요.”
고오오오.....
무패왕의 검술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습득해야할 자원.
바로 <검기>가 파그마의 검 끝에 맺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