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7권 - 12화
사람들은 템빨국의 전쟁 상황을 심각하게 인지하지 않았다.
제국의 병력이 템빨국의 수백 배에 이른다고?
“그래봤자 무슨 의미가 있는데?”
어차피 늘 그랬듯이, 그리드가 나서서 적들을 도륙하고 승승장구할 게 뻔하다.
사람들은 당연시 여겼고, 전문가들 또한 딱히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여태껏 그리드와 템빨단이 보여준 모습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늘 상식을 초월하는 힘과 방법으로 위기를 넘겨온 그들이니만큼 제국의 위협 또한 머잖아 넘길 거라고 보았다.
하지만 실상은 회의적이다.
템빨국의 상황은 풍전등화나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해로를 차단한 수인족 때문에 잠시 발이 묶인 칠공작의 군대, 영원의 탑의 마법사들, 마장기단, 적기사단, 다섯 기둥 등.
제국은 아직 진짜 전력을 꺼내지도 않고 있었다.
반면 템빨국은 제국이 쉬지 않고 파견하는 병력을 막아내기 위해서 이미 많은 전력을 투입한 실정이다.
그리드는 초조했다. 자꾸 안 좋은 결과가 떠올라 불안했다.
기업들과 거래를 하고 악연마저 인맥으로 활용하는 등, 그리드가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이유는 예상되는 결과를 바꾸기 위한 노력, 그 이상의 발악이었다.
이곳에 찾아온 이유 또한 같은 맥락이다.
[어떤 사기(邪氣)의 잔재가 당신의 마력을 혼탁하게 만듭니다. 일부 마법과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항하였습니다.]
괴물의 아가리처럼 보이는, 불길하고 새카만 입구.
바로 저 동굴 안에 마리로즈가 갇혀있었다.
2대 교황 크레이슐러와 레베카의 딸들에 의해 봉인 되었던 뱀파이어 공작.
시조 베리아체조차 초월했다는 궁극의 뱀파이어를, 다름 아닌 그리드가 봉인에서 풀어버렸다.
‘말락서스의 망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
의도치 않게, 우연히 벌어졌던 사건.
그리드는 그 사건과 <혈왕 후보>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혈왕 후보>
모든 직계의 왕이 될 자격을 쟁취하고 후보에 올랐습니다.
일반 뱀파이어에게 높은 위압감을 줍니다. 당신을 적대하게 되는 일반 뱀파이어의 모든 능력치가 15퍼센트 하락합니다.
진혈족 뱀파이어에게 혼란을 줍니다. 당신을 적대하게 되는 진혈족 뱀파이어의 모든 능력치가 8퍼센트 하락합니다.
직계 뱀파이어에게 경계심을 줍니다. 당신을 마주하게 되는 직계 뱀파이어는 나태의 저주로부터 일시적으로 각성합니다.
총 4명의 직계를 봉인하자 <혈왕의 자격> 칭호가 <혈왕 후보>로 승격했다.
그리고 직계 뱀파이어가 나태의 저주로부터 각성할 정도의 경계심을 주는 효과가 추가됐는데, 여기서 말하는 경계심이 마리로즈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었다.
‘놀은 기뻤다고 했다.’
혈왕 후보 그리드와 대면했을 때, 놀은 ‘만사가 귀찮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더니 의욕이 용솟음쳤다고 했다.
인간 주제에 직계에게 덤비는 그리드를 향해서 무시무시한 분노와 살의를 품게 되었고, 바로 그것이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게 된 ‘감정’이었다고 한다.
놀은 그날의 사건을 이렇게 표현했다.
“감정을 느끼자 비로소 살아있다는 실감이 났다. 나태의 저주에 빠져 낭비했던 지난 시간이 아쉬워졌고, 나를 분노케 해서 저주마저 잊게 해준 네게 감사함마저 느꼈다.”
그리드가 혈왕 후보 효과에 기대를 거는 이유다.
‘만약 마리로즈도 놀처럼....’
이미 내 덕분에 봉인으로부터 풀려난 그녀가 또 내 덕분에 나태의 저주로부터 해방된다면?
이를 계기로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 순간 내게 호감까지는 아니더라도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까?
물론, 지극히 낙관적인 생각이기는 하다.
마리로즈를 자극했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정이 정 여의치 않아질 경우 그리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와 접촉할 계획이었다.
인계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 중 하나.
그녀를 우군으로 얻었을 때 발생할 이득은, 그리드의 목숨 값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대했으니까.
‘한 번쯤 도전해 봐도 좋을 도박이지.’
그리고 그리드는 도박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이곳을 찾아왔다.
저벅저벅.
샤이를 돌려보낸 그리드가 홀로 동굴에 입장했다.
그는 손에 곡괭이를 꺼내 쥐고 있었다.
‘브라함이 말했다. 마리로즈의 사기는 시조 베리아체에게 유전 된 것으로 엄청 강한 성질을 지녔다고.’
실제로 경험해봐서 알고 있다.
지금 당장만 봐도, 마리로즈가 이곳을 떠난 것이 벌써 15~17년 전인데 사기의 잔재가 남아있을 정도다.
그리드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마리로즈를 수백 년이나 봉인해놨던 이 동굴에는 짙은 사기가 배어있을 테고....’
당연한 공식으로, 동굴에는 광물이 있다.
그렇다.
그리드는 마리로즈의 사기가 짙게 배인 광물이 존재할 가능성을 떠올리고 이를 캐낼 계획이었다.
광물의 성능에 기대를 거는 것은 아니다.
‘마리로즈의 사기가 배인 광물은 등급이 무척 낮을 거야. 사기에 부식되지 않았기를 바라야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을 거다.’
동굴 근처의 땅이 모두 썩어있었을 정도이니, 동굴 안에서 마리로즈의 사기에 직접적으로 노출 된 광물들은 썩다 못해 먼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가 그 광물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언젠가 마리로즈를 만났을 때 그녀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말락서스의 망토에 배인 피 냄새에 무척 민감하게 반응했었다.’
수백 년의 봉인에서 깨어났을 정도!
‘그녀의 사기가 배인 아이템을 걸치고 있으면 바로 알아보고 가상하게 여겨줄 수도 있어.’
이런 방법을 떠올리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감탄이 나올 정도다.
자신이 매우 아주 가끔씩은 비상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안력을 돋은 그리드는 새카만 동굴 곳곳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혹 캘만한 광물이 있는지 관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굴 초입에는 가루를 날리는 석재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동굴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기(邪氣)의 잔재가 당신의 마력을 혼탁하게 만듭니다. 모든 마법과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어떤 사기(邪氣)의 잔재가 당신의 체력과 정신력을 갉아먹습니다. 상태이상 ‘쇠약’과 ‘혼란’에 걸립니다.]
[저항하였습니다.]
깊은 곳에 다다를수록 사기의 농도가 짙어지면서 육체에 부담을 주었다.
그리드야 모두 저항할 수 있었지만, 이곳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을 샤이 일당은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녀석들은 이 안쪽으로 들어올 엄두도 못 냈겠군.’
마리로즈의 봉인처는 더럽혀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그리드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전설’이 지니는 사기성에 새삼 다시 감탄하고, 감사함을 느낀 그는 어느덧 동굴의 가장 안쪽에 도착해 있었다.
‘의외로 크군.’
바깥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규모가 엄청 큰 동굴이었다.
길이 하나밖에 없는데도 여기까지 도착하는데 40분을 걸었을 정도다.
‘수백 년 동안 이곳에 잠들어 있던 건가.’
그리드는 공동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순백의 관이었다.
저곳에 홀로 잠들어있었을 마리로즈의 아름다운 모습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아....”
그저 상상해봤을 뿐인데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놀라운 아름다움. 신비할 지경이다.
상념에서 깨어나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공동의 벽면을 유심히 관찰했다.
광물을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광물이 이미 사기에 부식 된 상태였고 공동이 꽤 넓다 보니 찾는데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렸다.
‘아, 이건 효율이 너무 나쁘다.’
사기의 잔재만 없었다면 당장 마이너를 불렀을 텐데....
광물 탐지기 녀석, 새로운 광물을 발견하지 못한지도 무척 오래고 요즘 영 활약이 없다.
‘그렇다고 애가 놀고 있는 건 아니지만...’
벌써 몇 년 째, 마이너는 쉬는 날도 없이 도서관에 강제 출근 중이다. 그리고 광물과 지리에 관련 된 서적을 모조리 섭렵하고 지식을 넓혔다.
그리드는 순전히 마이너를 위해서 <도서관>의 건물 레벨을 올리기도 했다. 도서관은 레벨이 오를수록 취급하는 장서의 종류도 다양해졌으니까.
‘마이너의 광물 탐지 능력은 꾸준히 발전하고 있어.’
단, 마이너가 활약하기 위해서는 템빨국의 영토가 넓어져야할 필요가 있었다.
마이너의 활동 범위가 커질수록 새로운 광물을 찾아낼 가능성도 커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전쟁에서 질 수 없다.
‘땅을 늘려도 모자랄 판에 뺏기면 안 되지. 절대로 안 뺏겨.’
템빨국은 그리드와 그의 동료들이 세운 나라다. 템빨국의 모든 것에 그들의 노력과 열정이 담겨있었다.
이제 와서 남에게 빼앗긴다고?
용납할 수 없다.
빼앗길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
그러니까 마리로즈에게 의지할 계획까지 세운 것이다.
“아...!”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으며 주변을 살피던 그리드가 드디어 목적을 이뤘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 새카만 구석에, 어둠보다 더 검은 사기에 물든 어떤 광물의 원석이 있었다.
“이거다!”
따앙-! 따앙! 따앙!
그리드가 채광을 시작했다.
곡괭이를 다루는 그의 솜씨는 조금도 녹슬지 않았고 여전히 굉장했다. 광부들이 울고 갈 모습이었다.
한데....
[채광에 실패하였습니다.]
[채광에 실패하였습니다.]
[채광에 실패....]
[지속적인 채광 실패로 원석이 손상 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
마리로즈의 사기를 견딘 광물답다고 할까.
이렇게 독한 광물은 그리드도 난생 처음 봤다.
땅에 깊숙이 박혀있는 원석은 그리드의 솜씨로도 채광이 쉽지가 않았다.
‘아, 어쩌지?’
앞으로 1~2번만 더 채광에 실패해도 원석이 손상 되고 광물의 가치가 크게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리드는 마이너를 위험에 빠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데려와야 하는 건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필요한 건 마기의 잔재지 광물 그 자체가 아니니까.’
애초에, 사기를 머금고 약해진 광물에 성능을 기대할 리 없다.
앞서 말했듯이 광물 자체는 허접해도 된다.
채광에 계속 실패해서 손상 되고 등급이 떨어져도 문제가 아닌 것이다.
괜한 오기를 버린 그리드가 다시 채광을 시작했다.
그리고 의외로 채광은 실패 없이 한 번에 성공했다.
[채광에 성공하였습니다.]
[<정체불명의 철광석>을 얻었습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대상 아이템의 정보가 갱신 됩니다.]
띠링~
<사악한 기운이 깃든 철광석>
사악한 기운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스며든 철광석입니다.
취급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죽는 수가 있습니다.
무게:5
[숨겨진 기능이 존재하는 아이템입니다!]
<초월자의 힘이 깃든 철광석>
죽음에 예속되지 않는 존재의 힘이 깃든 철광석입니다.
철광석에 깃든 사기(邪氣)를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사기의 뒤에 숨겨진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템 제작 재료로 사용 시 스탯 추가 옵션 발생.
단, 사기로 인해 온갖 제약이 생길 가능성이 큼.
무게:5
“허....”
그놈의 사기 때문에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말이다.
“...허허헛.”
더 없나?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에 불을 켠 그리드.
그가 동굴 전체를 다시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관’이 말했다.
-혹시 자네가 마리로즈를 깨운 것인가?
“....?”
소스라치게 놀란 그리드가 잠시 할 말을 잃자, 관이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2대 교황 크레이슐러라고 하네.
“....?”
설마 이것도 파그마의 짓?
‘미친놈인가?’
아니, 아니다.
파그마가 5대 교황 프렌스의 자아를 검에 가둬두긴 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5대 교황 프렌스가 자신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2대 교황과 파그마 사이에 접점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더 부담 없이 다뤘을 수도 있겠구나.’
난처한 표정을 짓는 그리드에게, 관이 재차 물었다.
-자네가 마리로즈를 깨운 게 맞는가? 내 안에 잠들어있어야 할 그녀를 어째서 깨운 것인가?
“아니요, 아닙니다. 제가 여기에 왔을 때부터 관님은 텅텅 비어계셨습니다.”
그리드는 당연히 부정했다.
괜히 진실을 밝혔다가 어떤 취급을 당할지 몰라서였다.
그리드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1대 교황과 2대 교황.
지금의 레베카교를 있게 만든 그들은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존재.
초월자의 자아를 속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대는 거짓말을 하는군.
콰르르릉!
관이 날아와, 그리드를 때렸다.
“억....?”
관에 얻어맞다니?
살다 보니 별 일을 다 겪는다.
그리드는 황당하고 억울했다.
이를 악 무는 그에게, 똑바로 선 순백의 관이 콧방귀를 뀌었다.
-파그마에게 기술을 배우면서 거짓말까지 함께 배웠나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