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7권 - 10화
지난 두 달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하란 제국과의 휴전 협정 기간이 끝난 템빨국은 곧바로 발할라와 동맹을 맺었다. 안 그래도 제국과 휴전 협정을 맺고 거칠 것이 없어진 발할라는 주변국을 침략해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제국은 뒤통수가 얼얼했다.
발할라와 템빨국.
백룡의 눈 사건으로 적대 관계가 된 줄 알았더니 역으로 동맹을 맺을 줄이야?
템빨국이 발할라를 견제하는 패가 될 것이고, 발할라는 우리와 함께 템빨국을 압박할 것이다, 라고 예측했던 상황이 완전히 뒤틀려 버렸다.
애써 발할라를 외면할 수밖에 없게 된 제국은 템빨국에게 집중했다. 아주 집요하게 템빨국을 압박했다.
이를 악 문 템빨국은 내실 다지기에 나섰다.
발할라에 대량의 무기를 수출하여 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자금을 융통했고 제4회 국대전에 참가했다가 동~금 메달 보상을 받았던 템빨단원 수십 명은 그리드 덕분에 새로운 템빨을 얻었다.
한편 지옥에서 돌아온 데빌 슬레이어 유라는 <정령왕>과 계약했다.
최초의 업적이자 두 번 다시 있기 힘든 위업으로 월드 메시지의 주인공이 된 그녀는 마왕 토벌전 당시의 그리드와 비견되는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부럽다....”
대부분이 하급 정령과 계약했던 템빨단원들은 정령왕의 위용을 보고 경탄했다. 유라를 진심으로 축하했지만 부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유라는 큰 의욕을 얻었다.
‘이걸로 조금은....’
나 또한 조금은 ‘전설’이라는 자리에 어울려지지 않았을까.
앞으로 계속 될 제국과의 전쟁에서 활약할 여지가 생겼음에 기쁠 뿐이다.
그리고.
“가식으로 덧칠 된 빛의 여신을 세상에서 지우리라!”
“닥쳐라! 악의 무리들이여!”
레베카교와 야탄교의 전쟁이 심화되어갔다.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 대륙 각지에 세력을 분산시켜 놓았던 야탄교가 세력을 하나로 집중시켜서 레베카교에게 본격적으로 저항했다.
한곳에 뭉친 야탄의 종들과 레베카의 딸들이 신위를 겨루자 천지가 개벽하며 몇 개나 되는 왕국이 피해를 입고 말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템빨국은 일말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는 점이다.
교황청이 템빨국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천운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물론 천운은 아니었다.
레베카교와 야탄교의 전쟁에 템빨국이 휩쓸리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데미안의 노력 덕분이었다.
데미안은 한술 더 떠서 제국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싸우는 본교를 대륙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제국이 외면할 리 없다고 믿습니다.”
“....”
레베카교의 병력 지원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황제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병력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기, 제국에서 크라우젤이 목격됐다.
제4회 국대전 이후 은밀한 행보를 걸어온 그가 목격 된 장소는 공교롭게도 제국 황후 아리아떼의 묘비였다.
온갖 추측이 난무할만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크라우젤이 제국 산하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저곳에 거악(巨惡)이 산다.”
대륙제일창 키리누스.
크라우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그는 황후 아리아떼의 죽음과 얽힌 진실을 밝히며 황궁을 가리켰다.
템빨국 왕국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황궁.
그중에서도 황비 마리가 기거하는 화려한 궁전을 그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었다.
“반드시 없애야할 악이다. 그녀를 없애지 않으면 이 대륙에 미래는 없어.”
“....”
크라우젤은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리드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목표 중 하나가 황비 마리를 처단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드, 너는 그때부터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던 건가?’
아직 한참이나 미약했을 무렵부터 그토록 큰 짐을 어깨에 짊어진 채 싸워왔다니, 하여튼 대단한 남자다.
***
『다음 뉴스입니다. 폴드 왕국이 최근 급격한 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템빨국의 속국으로 유명한 폴드 왕국.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고 토양의 질이 나빠 가난하기 짝이 없던 그 최약소국이 대량의 빈민을 구제하고 농업시설과 군사시설을 확장시켰다.
템빨국의 자본과 인력이 투입 된 결과였다.
점차 발전하기 시작한 인프라의 혜택을 누리게 된 폴드 왕국 소속 플레이어들은 템빨국에 자연스러운 호감을 품게 되었고, 백성들은 템빨국에게 진정어린 감사를 느꼈다.
폴드 왕실이 직접 나서서 템빨국을 찬양했다.
“그리드 전하께서 내리신 자비가 헛되지 않게끔 우리가 노력해야할 것이다! 나태하지 마라! 만족하지 마라! 우리 폴드 왕국은 더욱 더 강성해져 템빨국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와아아아!!”
폴드 왕국은 일종의 멀티 기지였다.
템빨국이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산업시설과 인력을 옮겨서 발전시키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자원을 채집할 수 있는, 정말로 든든한 세력이었다.
***
칠공작이 이끄는 7개 군단.
사하란 제국 최강의 군단들이 전국 각지의 항구 도시로 파견 됐다.
수인족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제국의 항구 도시들을 침략한 수인족들이 제국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제국이 토벌대를 파견할 때마다 얄밉게 바다 속으로 도주해버렸다.
추적이 힘들다고 판단한 제국은 항구 도시마다 군대를 항시 집결시켜 놓을 수밖에 없었다.
***
[마안족 왕과의 호감도가 1 올랐습니다.]
“휴... 드디어 5다.”
“축하해. 천천히 노력하다보면 언젠간 100 찍겠지.”
“그래... 몇 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안족 왕과 호감도를 쌓으려고 노력 중인 템빨단원들의 계획은 크게 수정됐다.
단기적인 프로젝트가 아닌 장기적인 프로젝트로 인식하고 초조함을 버렸다.
단 한 명.
“크크큭, 오늘도 이 나를 상대해주셔야겠습니다.”
라우엘만이 포기를 못하고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마안족 왕을 찾아갔다.
마안족 왕은 그가 썩 싫지 않은 눈치였다.
아니,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에게 호감을 품어가고 있는 눈치였다.
지난 두 달 동안 템빨단원들에게 치이다 보니 발생한 변화였다.
한치 앞도 못 본 채 혼자 고립되어 있던 시절과 비교하면.... 그는 인간과의 교류가 무척 즐겁고 유익하게 느껴졌다.
마안족 왕의 이런 마음은 마안족 전체에게 영향을 주었다.
마안족들은 더욱 적극적인 태도로 훈련에 임했고 템빨국 특수부대 <데스티니 가디언즈>는 점점 더 체계를 잡아갔다.
한편 뱀파이어의 도시를 노리는 침략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템빨단이 수 년 동안 애용해온 던전.
자신들 또한 그곳을 이용할 수만 있으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은 플레이어들이 레이단의 사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템빨단의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뱀파이어 도시에 입장할 수 있었다.
한데 그 도시가 항상 ‘7번’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침입자들이 경험한 것은 최고의 사냥터가 아니라 최악의 지옥이었다.
[뱀파이어 백작 ‘놀’이 출현하였습니다!]
“하찮은 놈들이 감히 어딜.”
“히익!!”
“사, 사람 살려...!”
귀족급 뱀파이어의 힘은 소문 이상이었다.
대부분의 공격력을 무력화시키는 갑옷을 무장한 소년 뱀파이어에게 침략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참살 당했다.
그들을 제물 삼은 놀은 빠르게 성장했다.
템빨단의 의도대로였다.
뱀파이어의 도시 입구를 지키는 템빨단의 정예 병력이 유난히 7번 도시의 경계에만 빈틈을 만들어놓은 이유는 놀을 성장시키기 위함이었으니까.
***
“레이단의 영주 크리스! 오늘이야말로 기필코 네놈의 목을 따주마!!”
템빨국과 제국의 경계.
사막도시 레이단에서는 지속적인 국지전이 발생 중이었다.
초반에는 흑기사단이 주축이 된 제국의 기마대가 레이단의 영토를 일방적으로 침략하는 형태였는데, 어찌된 게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피해를 입는 쪽은 제국군이었다.
사막이라는 지형에 완전히 적응하고 있는 레이단의 강병들과 사막이 낯선 제국군의 전투였으니 당연했다.
양군이 정면에서 충돌할 때마다 제국군만 일방적인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템빨국을 침략하려면 반드시 레이단을 점령해야하는 제국 입장에서는 굉장히 골치가 아팠다.
“고작 그 따위 실력으로 내 목을 따겠다고?”
더군다나 레이단의 영주이자 템빨국의 공작인 크리스의 무력이 너무 출중했다. 전 자이언트 길드원들을 대동하고 전장을 휩쓰는 그를 흑기사 수준에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고, 고작 소국의 공작 따위가...!”
벌써 수백의 동료를 잃은 흑기사들의 분노와 증오가 극에 달했다.
그들은 크리스가 전장에 나타날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크리스 입장에서는 좋은 양분이었다.
“템빨왕 그리드는 응당 배척해야할 이족과 결탁하여 인류를 위협하고 있으니 재앙의 소치라 할 수 있다. 짐은 오직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재앙을 잠재우겠노라.”
2달 전 황제의 선언으로부터 비롯된 관계.
템빨국과 사하란 제국의 공식적인 관계는 이제 ‘적’이다.
두 국가 간의 무력충돌은 일시적인 해프닝이 아니라 공식적인 전쟁으로 기록되기 시작했고 ‘전쟁 시스템’이 활성화 되면서 플레이어들의 경험치 획득률을 상승시켰다.
그렇다.
이제 템빨단은 전쟁을 통해서도 사냥하는 것처럼 성장할 수 있었다. 적군을 베어 넘길 때마다 몬스터를 잡을 때처럼 순도 높은 경험치를 획득했다.
당연히 누려야할 시스템이다.
만약 전쟁 시스템이 없었다면, 템빨단원들은 전쟁 내내 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지쳐가는 트라우마에 빠졌을 것이다.
S.A그룹은 플레이어의 입장을 제대로 헤아리고 있었다.
“크리스으으!!”
앞선 전쟁에서 크리스에게 한쪽 팔을 잃었던 흑기사단의 부단장이 포효하며 덤벼왔다.
그의 레벨은 385.
흑기사단이 적기사단의 하위 조직이라고 하지만, 부단장급쯤 되면 적기사와 비견되는 실력자다.
하지만 크리스를 위협하기에는 부족했다.
전 통합랭킹 1위.
재능과 노력, 그리고 경험으로 실력을 쌓아올린 그를 억압하기 위해서는 최소 4차 전직자가 나서야할 것이었다.
서걱-!
[사령관 ‘크리스’가 적장의 목을 베었습니다!]
[아군의 사기가 상승합니다!]
“우와아아아아!!”
레이단.
제국과 국경을 맞댄 도시답게 템빨국의 정예들이 모인 그곳이 나날이 강성해져갔다.
***
『세상에 명차는 많죠. 하지만 저를 만족 시킨 차는 오직 대진 자동차밖에 없습니다.』
신영우-그리드-를 간판 모델로 세운 대진 자동차 광고가 온갖 매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신영우의 바쁜 일정을 배려해준 대진 그룹은 국대전이 끝나고 3달이 지나서야 그를 모델로 세운 CF를 제작한 것이었다.
“영우 씨는 일반적인 모델이나 배우와 다른 느낌의 아우라를 지니고 있어요. 뭐랄까.... 어느 유럽 국가의 왕족들처럼 기품이 느껴진다고 할까? 하하.”
“그럴 리가요. 칭찬이 너무 과하시군요.”
“아니, 아니요. 이거 과장이 아니라 순수한 진심을 말하는 건데....”
광고의 완성도가 유난히 높다 싶더니, 총 198개국에 송출 될 광고라고 한다.
대진 자동차 본사 로비의 커피숍.
핫 초코를 기울이며, 한쪽 스크린에서 쉬지 않고 재생되는 광고를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영우에게 새로운 소식이 전달됐다.
“아, 그리고 신차 개발이 조만간 완료될 예정입니다. 물건이 아주 잘 뽑혔어요.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신영우의 터무니없는 기자회견 때문에 계획에도 없던 신차 개발을 해야만 했던 대진 자동차 사장.
현재 영우와 나란히 마주보고 앉은 사내의 정체가 바로 대진 자동차 사장이었다.
본래 그는 영우를 자신의 사무실에서 맞이할 계획이었지만, 문득 ‘나, 그리드랑 같이 커피 먹는 사람이야.’라고 직원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져서 접견 장소를 바꾼 상태였다.
효과는 컸다.
로비를 오가던 수많은 직원들이 자리에 멈춰 선 채 커피숍을 들여다봤다.
“와, 갓리드가 우리 회사 로비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실물 대박. Satisfy에서 캐릭 만들 때 보정 효과 아예 안 넣었던 거야? 비율이 거의 모델급이네?”
“비율이나 생김새를 떠나서 뭔가 포스가 남달라. 평범한 사람 같지가 않아.”
“맞아. 우리 사장님도 범상치 않은 인상인데 그리드 앞에 있으니까 엑스트라 1 같잖아.”
“아, 사장님이었어?”
“....나도 이제 알아봤다.”
로비 곳곳에 모인 직원들의 웅성거림이 대진 자동차 사장의 귀에 콕콕 꽂혔다.
자신을 ‘엑스트라’라느니, ‘오징어’라느니, ‘병풍’이라느니 하는 말들도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우와 나란히 마주보고 앉은 자신이 얼마나 크게 출세한 사람인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고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오늘 일찍 퇴근해서 아들이랑 손자한테 자랑해야지.’
흥분해서 콧김을 팍팍 내뿜은 사장이 영우에게 용건을 밝혔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그 갓제너럴시스를 말이죠.”
“갓제너럴시스?”
영우는 순간 알아듣지 못했다.
기자회견장에서 대충 생각해 말했던 홍보 멘트 중 일부에 불과했던 가짜 신차의 이름은, 굳이 영우의 기억 속에 남을 정도로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뒤늦게 기억을 끄집어낸 영우가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제가 매일 밤마다 잠 못 들고 기대 중인 그 신차 말이죠? 이름을 설마 갓제너럴시스 그대로 쓰실 줄 몰라서 순간 못 알아들었네요.”
“하하, 영우 씨가 친히 지어주신 이름인데 안 쓸 순 없죠. 그래서 그 차 말입니다만, 오직 영우 씨를 위해서 딱 1대만 생산하기로 했었지 않습니까.”
“그랬죠.”
“한데 회장님께서 6대를 제작하면 어떠시겠냐고...”
“6대요?”
“네, 영우 씨 부모님께 2대, 영우 씨 동생분께 1대, 영우 씨에게 1대, 유라 양과 회장님께 각각 1대.”
“뭘 굳이....”
우리 가족 모두에게 공짜 차가 생길 기회.
얼핏 들으면 혹할만한 이야기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공짜가 아니다.
세금이 발생한다.
제작 원가가 8억 원에 육박한다고 하던데, 그 초고가 차량을 총 4대나 받게 될 경우 나라에 내야할 세금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차라리 세금 낼 돈으로 부모님께 더 좋은 브랜드의 차량을 사드리고 세희에게는 내가 타던 십삼이를 물려주는 편이 좋다.
영우의 난처한 표정을 목격한 사장이 영우의 마음을 다르게 오해했다.
“아... 딱히 양측 가족 간의 관계를 과시할 의도는 아니고... 그... 순수한 기념으로다가....”
‘아...’
영우가 회장의 의도를 뒤늦게 눈치 챘다.
그리드와 내 손녀가 커플 카 탄다.
심지어 그리드 가족과 나도 같은 차를 탄다.
이 차가 증명하듯이 우리는 특별한 관계다.
....라고, 회장은 팍팍 티를 내고 싶은 것이다.
“흐음.”
뭐, 그 정도 생색은 낼 수 있게끔 해줘도 좋지 않을까?
단, 이쪽의 요구를 들어줬을 때의 이야기다.
한참을 고민하는 척, 사장을 초조하게 만든 영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