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7권 - 9화
[당신의 모든 이로운 효과가 차단당합니다!]
[적용 중이던 버프가 모조리 해제됩니다!]
전투 중도 아닌데 안대를 착용하고 나타난 그리드.
데미안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무기력감에 빠졌다.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감각. 모든 게 허무해졌다.
그렇다.
버프야말로 대표적인 이로운 효과였고 거세안 앞에서 안전할 수 없었다.
‘확률’에 따른다는 전제가 붙기는 했지만, 거세안은 분명히 최상급의 마안이었다.
데미안의 속사정을 알게 된 그리드가 경악했다.
‘이미 발동한 버프까지 지워버린다고?’
이로운 효과와 버프의 상관관계를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이미 발동한 버프까지 삭제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뿐이다.
‘대단하군....’
마안 발동 시 소모되는 500의 마나.
마안을 통제할 수 없는 도살귀의 안대.
사실, 그리드는 이 2가지 애로사항 때문에 무척 실망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는 실망감이 충분히 해소됐다. 아니, 도리어 자신이 얼마나 큰 행운을 얻었는가를 깨닫고 들떴다.
전율에 휩싸이는 그에게 뚜렷한 목적의식이 부여됐다.
‘충분한 에테르 다이아몬드를 확보한다.’
원래부터 탐이 났던 제작재료.
마안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참에 반드시 확보하는 편이 좋다.
얻는 방법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탈리마에 있다는 엘리테르 광산.
바로 그곳이 에테르 다이아몬드가 잠들어 있는 천혜의 보고였다. 크라우젤이 직접 알려준 정보이니만큼 신뢰성은 100퍼센트다. 그곳에 가서 에테르 다이아몬드를 채집하면 된다.
최악의 금지(禁地)라는 사실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대악마의 손...’
그것도 제12위 대악마의 손.
크라우젤의 제보에 따르면 33위 대악마 벨리알보다 그 손 하나가 더 강력한 눈치였다.
‘반드시 레이드 해야 돼.’
성장에 박차를 가할 필요성이 생겼다.
용의 축복과 깨달음 효과, 그리고 경험치 상승 물약을 등에 업고 사냥에 매진해온 그리드의 현재 레벨은 무려 389.
하지만 아직 한참 부족했다.
399레벨을 달성하고 20만 대적검을 습득할 것.
400레벨을 달성하고 모든 스탯의 4차 각성을 맞이할 것.
에테르 광산에 도전하기에 앞서서 그리드가 이뤄야할 최소 조건이었다.
‘그리고 템빨단 전체의 전력 상승도 꾀해야겠지.’
그리드가 연무장에 모여 있는 동료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제4회 국가대항전이 끝나고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건만, 동료들의 무장 상태는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명씩 차근차근히 아이템을 만들어 줘야겠네. 그러면서 마안도 얻게 해주고.’
데미안이 대련을 중도 포기하자 소란스러운 와중에 라우엘은 간식을 앞에 둔 강아지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꼬리가 있었으면 쉬지 않고 흔들었을 기세다.
‘라우엘만 눈치 챈 건가.’
역시 똑똑한 녀석.
피식 웃은 그리드가 안대를 벗었다.
그러자 붉은 홍채와 검은 태양을 닮은 동공이 드러났다.
얼굴을 붉히는 그리드의 주둥이에서 반사적으로 대사가 튀어나왔다.
“짐은 너희들의 안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거세안>이 발동합니다. 대상의 이로운 효과를 차단합니다.]
[시야에 보이는 대상이 너무 많습니다.]
[마나가 부족합니다. 마안의 효력이 특정 몇 명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마안!”
그리드가 새롭게 얻은 힘이 무엇인지, 드디어 정확히 알게 된 동료들이 경악했고 라우엘은 환호했다.
라우엘은 심지어 눈물까지 글썽였다.
“마안족 왕입니까...! 그에게 마안을 이식하는 능력이 있는 겁니까?!”
라우엘이 그리드의 갑옷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는 자신이 세운 가정이 옳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마음이 간절했다.
다행히도 그리드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바로 눈치 채다니 대단하네. 응, 맞아.”
“역시....!”
눈!
나도 드디어 눈을 얻는구나!
평생의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라우엘이 감격했다. 그가 그리드의 두 손을 힘차게 붙잡았다.
“제가 전하 덕분에 삽니다! 전하께서 계시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오버하기는.”
눈물까지 흘릴 기세인 라우엘에게 핀잔을 준 그리드가 동료들에게 설명했다.
“마안족 왕과 호감도를 100퍼센트 쌓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해. 그럼 반드시 마안을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마안이라는 개념은 말이지....”
그리드는 흐지부지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마안족 왕이라는 인물의 특성과 그의 마음을 공략했던 경험담, 그리고 마안을 획득하는 과정과 종류, 마안의 장점과 단점 등을 동료들에게 소상히 전달했다.
일체의 왜곡도 없었다.
그리드의 시기심은 타인 혹은 경쟁자에게만 적용되는 것.
동료를 대할 때의 그는 오직 자애로 똘똘 뭉친다.
설령 그 동료가 자신보다 더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일지라도 개의치 않았다.
“감사합니다!”
“고마워, 그리드!”
그리드의 설명을 꼼꼼히 들은 라우엘이 그리드를 와락 껴안았고, 다른 동료들 또한 그리드의 곁으로 달려와 그에게 애정과 감사를 표했다.
반면.
“데미안?”
“.....”
교황 데미안은 어색한 표정으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리드가 그에게 다가 서자, 데미안이 황급히 두 손을 저었다.
“그, 그리드 님의 업적을 가로 챌 생각은 없습니다.”
“내 업적을 가로 채다니?”
“마안을 얻는 방법이요. 그리드 님께서 힘들게 알아낸 사실을 템빨단원도 아닌 제가 써먹고 혜택을 누릴 수는 없죠.”
“뭔 소리야? 너도 우리의 동료이고 친구인데 왜 혼자만 쏙 빠지려고 그래?”
“....”
“나는 데미안 너도 꼭 마안을 얻었으면 좋겠어. 단, 앞서 말했듯이 마안을 시야 제약 없이 활용하기 위해서는 에테르 다이아몬드가 반드시 필요해. 그러니까 대악마의 손을 레이드할 때 함께 가자. 네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크니까.”
“과, 과찬이십니다.”
“일단 대장간으로 가자. 올해 국대전 보상도 제작 재료로 받았지? 새 아이템부터 만들자.”
“....”
“무기랑 방어구, 어느 쪽이 좋아? 요즘 쓰는 성검이라는 무기가 많이 특별해 보이던데. 역시 무기보다는 방어구가 아쉬운 입장인가?”
“네... 네, 맞습니다. 무기는 굳이 교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데미안의 왼쪽 손이 밝은 빛에 뒤덮였다. 불꽃처럼 일렁이는 빛이었다. 반대쪽 손으로 그 빛을 거머쥔 데미안이 그대로 뽑아냈다.
그러자.
쏴아아아아....
눈부신 백색의 광검(光劍)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성검 소환>의 위용이다.
[플레이어 ‘데미안’이 당신에게 아이템 정보를 공유합니다.]
<데미안의 성검>
등급:에픽(성장형)
공격력:1,450(+175) 마법공격력:1,090(+81)
*착용자의 근력 10퍼센트를 무기 공격력으로 적용.
*착용자의 지력 10퍼센트를 무기 마법공격력으로 적용.
*성 속성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 30퍼센트 감소.
*성 속성 스킬 자원 소모량 40퍼센트 감소.
*검술 스킬의 위력 20퍼센트 증가.
*공격 속도 10퍼센트 증가.
*사악한 존재에게 추가 데미지 30퍼센트.
*공격 시, 매우 낮은 확률로 무작위 버프 생성.
★신화 등급까지 성장 가능.
★등급 성장 속도 매우 느림.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빛의 여신에게 인정받은 데미안에게 하늘이 하사한 검입니다. 데미안과 함께 성장해나갈 이 검은 악을 처단하는 상징이 될 것입니다.
사용 조건:데미안
무게:0
“와....”
그리드가 진정으로 감탄했다.
스킬로 소환하는 무기.
빛의 성검은 무한한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독보적인 화려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조차도 탐이 나는 무기였다.
아니, 그리드이기 때문에 탐날 수밖에 없는 무기라는 표현이 정확했다.
착용자의 능력치 일부를 무기 성능으로 치환하는 옵션.
막대한 스탯을 보유하고 있는 그리드와의 궁합은 가히 환상적이다.
“처음부터 에픽 등급으로 시작한 거야?”
“아니요, 레어였습니다. 바로 어제서야 에픽 등급으로 성장한 거예요. 그래서 아직 강화도 못했죠.”
“레어 등급일 때는 스탯 치환률이 10퍼센트 미만이었지?”
“네, 맞습니다. 8퍼센트였어요.”
“앞으로 등급이 오를 때마다 치환률도 오르겠네.... 최초의 성검 같은 상징적인 무기와 달리 다른 옵션도 죄다 실용적이고 평생 무기로 삼아도 좋겠어.”
“정말입니까? 다행입니다. 그리드 님께서 그렇게 평가하실 정도면 안심하고 쭉 써도 되겠네요.”
데미안이 싱글벙글 웃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템빨왕 그리드가 ‘평생 무기’라고 평가할 정도였으니 성검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커졌다.
그리드는 그가 안쓰러웠다.
‘최소 전설 등급은 만들어야 평생 무기라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의 위력이 나올 텐데....’
성장형 아이템의 성장 속도가 얼마나 느린지는 누구보다 그리드가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등급 성장 속도 매우 느림’이라는 옵션이 붙어있는 데미안의 성검의 성장 속도는 얼마나 느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데미안에게 부탁했다.
“미안한데, 그 검 한 번만 착용해볼 수 없을까?”
데미안의 성검은 스킬을 기반으로 소환된 것.
심지어 데미안 본인의 마력 혹은 신성력으로 구현된 검이다.
그것을 내가 사용할 수 있을까?
‘모든 아이템 착용 가능’이라는 고유 특성이 과연 어디까지 적용되는지 실험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넵.”
세상 어떤 보물로도 대체할 수 없을 아이템.
그것을 빌려달라는 황당무계한 요청에도 데미안은 일말의 거부감이나 의문을 표출하지 않았다. 곧바로 성검을 그리드에게 양도했다.
[<데미안의 성검>을 착용하였습니다.]
[스킬을 기반으로 소환 된 아이템입니다. 본래의 주인이 스킬을 회수할 경우 아이템 소유권을 잃습니다.]
“아...”
광검을 손에 쥔 그리드가 경악했다.
설마 이것까지 착용할 수 있을 줄이야.
‘파그마는 진짜 엄청난 괴물이었구나.’
<파그마의 후예>가 지닌 특성이 파그마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드의 장점과 강점은 당연히 파그마의 것이었다.
생전의 파그마가 얼마나 굉장한 인물이었을지, 새삼 절실히 실감할 수 있게 된 그리드가 데미안에게 성검을 돌려주었다. 데미안 덕분에 직업 특성의 사기성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던 그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필요한 방어구 목록 말해봐. 바로 대장간으로 가자.”
“그... 요즘 사냥하느라 바쁘신 것 같던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너한테 며칠 투자하는 게 아까울 것 같아? 괜찮아.”
데미안이 늘 그리드에게 감사하듯이 그리드 또한 늘 데미안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데미안에게 시간을 얼마나 투자할지라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미안하기도 하고.’
거세안에 버프를 삭제 당한 데미안이 느꼈을 충격과 공포는 무척 클 것이었다. 자신 때문에 대련까지 중도 포기한 데미안을 그리드는 위로해주고 싶었다.
“이것과 이것입니다.”
대장간으로 이동한 두 사람.
데미안이 그리드에게 건넨 금메달 보상은 현무의 숨결과 백호의 숨결이었다.
아무래도 공격력보다는 방어력이 더 중요한 데미안답게 물과 땅의 속성을 선택한 것이었다.
‘마침 잘 됐다.’
현무의 숨결을 미리 제련해볼 수 있는 기회다.
회심의 미소를 그린 그리드가 광룡의 모루와 망치를 꺼냈다.
***
“으아아아악! 호감도 안 올라! 절대 안 올라!!”
“선물 공세도 안 먹히고 대화는 안 통하고, 정말 환장하겠네.”
마안족 왕과의 호감도를 올려라!
그것은 템빨단원들의 새로운 지상과제였다.
하지만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리드야 ‘쉽게 인정받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고 명성이 워낙 높아 네임드 NPC들과도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네임드 NPC가 상종조차 해주질 않았다.
물론 마안족 왕은 템빨단원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지만 은근히 중2병에다가 가슴 속 깊이 상처를 품은 존재였기 때문에 성격이 꽤 까다로웠다.
최근 보름 동안 마안족 왕의 호감을 얻은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크크큭... 윤회의 상징이라고 하더니 과연 쉬운 상대가 아니로군...”
천하의 라우엘조차도 마안족 왕의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보름 동안 올린 호감도 수치는 고작 1. 거의 안면 튼 수준에 불과했다.
나도 어서 마안을 얻고 ‘진정한 나’로 거듭나고 싶다.
오직 그 일념 하나로 마안족 왕의 주변을 배회하다가 허탕만 치고 돌아온 라우엘이 깊은 한숨을 내쉴 때였다.
“재, 재상 님.”
젊은 기사 로이먼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녀의 본명은 카린.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여전히 들키지 않았다고 착각하는 남장 여자다.
<서부의 신성>이라는 칭호를 지닌 그녀는 벌써 몇 년 째 피아로 아래서 수학하며 템빨국의 유망주로 거듭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라우엘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로이먼의 이런 다급한 태도는 평소에 보기 힘든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놀라운 보고가 들려왔다.
“바, 발할라의 왕이 방문했습니다.”
“군신 아레스가...?”
템빨국과 교류를 끊을 기세였던 그가 다짜고짜 왜?
라우엘이 곧바로 응접실로 향했다.
찻잔을 기울이고 있던 아레스가 앉은 채로 손을 흔들었다.
“여, 동맹 맺을래?”
“이미 우리 템빨국을 배신하고 그 덕분에 제국과 휴전 협정을 맺지 않으셨습니까? 한데 이제와서 동맹이라고요?”
“배신? 무슨 배신?”
“백룡의 눈을 제국에 넘기지 않았습니까?”
“백룡의 눈을 제국에 넘길 테니까 충분히 대비하라고 미리 간접적으로 알려줬잖아? 그래서 너희도 일을 잘 해결할 수 있었던 거고.”
“그게 그렇게 포장이 됩니까?”
“그게 무슨 포장이야? 진실이지. 내가 정말로 템빨국을 배신하려고 했다면 백룡의 눈의 존재여부 자체를 너희에게 알리지 않았겠지.”
“....훌륭한 화법이로군요. 그것도 새로운 책사에게 배우신 겁니까?”
“응.”
“....”
아레스의 새로운 책사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깨달은 라우엘은 밝은 미래를 엿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