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862화 (857/1,794)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운영자 들으라고 지껄인 대량의 욕설이었다. 그 모든 욕설을 활자로 나열할 경우 원고지 1천장을 빼곡하게 채울 수준이다. 종이책 2권이 훌쩍 넘을 분량이었다.

‘서, 설마, 욕설안 같은 게 생기는 건 아니겠지?’

이런 빌어먹을!

스킬 쓸 때마다 욕설안! 을 외쳐야 한다고?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도 성능은 좋을 것 같군.’

전성기(?) 시절의 그리드는 후로이조차 한 수 접어뒀었던 욕설의 달인이다.

그나마 후로이는 반어법을 사용해서 상대방 부모님의 안부라도 여쭤봤지, 그리드는 그런 것도 없었다. 진짜배기 쌍욕만 한도 끝도 없이 토해내는 게 가능했다. 그리드가 욕설안을 갖게 될 경우 적들의 멘탈은 금세 초토화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좀 아니지.’

아무리 성능이 좋아봤자 이미지가 폭락해서야 역효과다. 욕설안을 얻었다가는 템빨단과 템빨국 전체에 악영향을 줄 공산이 컸다.

‘욕설안 만큼은 절대로 안 돼.’

[현재 진행률 54%...]

게임 플레이 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일까?

아니면 게임 내에서 겪은 사건과 사고가 너무 많았기 때문일까?

시스템이 그리드의 행적과 패턴을 분석하는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더 더뎠다.

그리드에게는 도리어 잘 된 일이었다. 그리드는 공백의 시간 동안 정신을 수습하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말이 씨가 되듯이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긍정적인 생각만 하자, 긍정적인 생각.’

나는 불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수천, 수만 개의 아이템을 제작해오는 동안 항상 불과 함께였다.

점화안 같은 걸 얻어도 상성이 무척 좋을 것이다.

‘파그마가 화공(火公)이었다고 했으니까 그 후예인 나도 화공의 자격쯤은... 윽.’

생각을 멈춘 그리드가 잠시 눈을 감았다.

분석 진행률이 80퍼센트를 초과하자 대량의 알림창이 한꺼번에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정신이 없었다.

[당신의 행적과 패턴을 토대로 당신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시도했지만 의도가 상충되는 행적이 너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행적과 패턴만으로는 당신의 본질을 재단할 수 없다고 판단, 알고리즘을 토대로 당신의 목적을 추측하고 당신의 욕망을 분석합니다.]

[당신의 목적과 욕망이 너무 많습니다!]

[당신에게 적합한 마안 목록이 매우 많습니다!]

[현재 진행률 95%... 100%.]

[당신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시스템 오류 가능성. 재확인을 위해서 당신의 업적을 상세히 검토합니다. 당신이 이룬 업적의 종류와 내용, 과정을 소상히 파악합니다.]

[....당신의 업적이 너무 많습니다!!]

[당신을 제대로 분석하고 당신에게 이식할 마안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모르페우스의 메인 서버가 개입해야 합니다.]

‘본질’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힘, <마안>.

그 특성 상, 그리드는 지독히도 현실적인 알림창의 내용들과 대면해야했다.

‘무슨 슈퍼컴퓨터가 플레이어 한 명의 데이터도 제대로 분석을 못해?’

어의를 찾게 될 정도로 어이가 없는 전개!

혀를 내두르는 그리드의 시야에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당신의 본질과 가장 밀접한 마안의 검색을 완료했습니다.]

“....!”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긴장하는 그리드.

그의 왼쪽 눈에 작은 스파크가 일었다.

파지직-!

홍채의 색이 붉게 물든다.

작은 점 같던 동공의 팔방위에 갈 지 자를 반으로 쪼개 놓은 듯한 그림자가 생겨났다.

“헉! 그, 그 눈은...!”

그리드의 눈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고 마안의 정체를 파악한 마안족 왕이 깜짝 놀랐다.

그리드도 경악하고 있었다.

[마안 이식에 성공하였습니다!]

[이기적인 탐욕으로부터 비롯된 <거세안>을 얻었습니다!]

“장난하냐!”

거세라고?

19금 게임도 아닌데?

그리드는 본능적인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꼈다.

당황한 그는 안대를 쓰는 일조차 잊었다.

그리드는 아차 싶었다.

지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상대, 마안족 왕을 고자로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은 것이다.

“짐은 너의 안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서둘러 안대를 쓰려던 그리드가 얼음처럼 굳었다.

마안이 발동하는 순간 제멋대로 튀어나온 중2병 대사에 당황한 것이 컸고, 마안족 왕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 까닭도 컸다.

‘상대가 마안족 왕이니만큼 마안으로 피해를 입히는 일은 불가능한 건가?’

아니면, 그 거세가 그 거세가 아니라던가?

마안족 왕의 멀쩡한 모습에 안도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린 그리드가 거세안의 상세 정보를 불러왔다.

<거세안>

마안의 한 종류입니다.

지켜보는 대상의 이로운 효과 중 일부를 차단합니다.

극악의 확률로 대상의 이로운 효과를 완전히 차단합니다.

단, 대상과의 거리가 12미터 이내여야 합니다.

자원 소모:마나 500.

“...!?”

그리드가 경악했다.

이로운 효과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운 효과란 쉽게 말해서 ‘운’이 작용하는 모든 현상을 뜻했다.

전투 관련으로는 치명타율, 회피율, 명중률, 방어율, 저항률, 아이템 획득률 등이 있고 비전투 관련으로는 아이템 강화 성공률, 제작 성공률, 테이밍 성공률, 퀘스트 획득률, 히든 피스 획득률, 조합이나 탐색 성공률 등이 있다.

어디까지나 당장 떠오르는 게 이 정도다.

이로운 효과에 포함되는 모든 현상은 굳이 일일이 열거하는 게 어려울 정도로 다양했다.

‘긍정적인 확률을 차단해버리는 힘...!’

이건 대박 중의 대박, 초대박이다.

자신이 강화되거나 대상을 약화시키는 등, 당장의 극적인 효과는 없을지 몰라도 변수를 원천 봉쇄해버리는.

마음만 먹으면 특정 대상에게 아주 제대로 엿을 먹이는 일도 가능했다. 예를 들어 경쟁자들이 보스 몬스터를 레이드할 때 그들을 계속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득템 확률을 꺾어버린다거나.

‘가만. 그럼 팀킬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

동료들과 함께 레이드를 돌다가 트롤이라고 손가락질 받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본 그리드.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보던 그가 얼굴을 종잇장처럼 일그러뜨렸다.

‘엄청 좋은 줄 알았더니, 단체 활동에서는 제약이 너무 크네.’

아쉽다.

아무래도 최상급 마안을 얻은 건 아닌 것 같다.

꿍얼거리고 있는 그리드의 귓가에 마안족 왕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 대체 남 잘 되는 꼴을 얼마나 못 보는 성격이면 거, 거세안을....”

“....”

마안족 왕은 마안의 생성 원리를 이해하고 있는 존재.

그 앞에 선 그리드는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저열한 질투심을 엿본 마안족 왕이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물론 괜한 걱정이었다.

마안족은 ‘필요가 없어서’ 인간을 적대하지 않을 뿐 마족인 바, 그리드의 본질을 엿본 마안족 왕은 도리어 큰 기쁨을 느꼈다.

“역시 내가 왕으로 선택한 존재답게 악마 같은 인간이로군...! 오직 내게만 관대하였던 나의 왕이여! 나는 당신의 이기심과 탐욕에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느낀다!!”

“그, 그래. 그것 참 잘 됐네.”

칭찬 같지 않은 칭찬에 삐질, 식은땀을 흘린 그리드가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그에게는 아직 남은 일정이 있었다.

라우엘의 부탁으로 아그너스를 도우려고 나섰다가 헛걸음친 데미안.

그가 라우엘과 만난 김에 템빨국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레가스가 데미안에게 대련을 신청했다며, 길드 채팅창은 이미 난리가 난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드는 즉시 서둘러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최고 실력자들의 역량을 관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으니까.

콰앙!

쩌저정!!

마침 대련이 한창이었다.

온갖 버프를 두른 데미안의 성검이 대지를 갈랐고 전광에 휩싸인 레가스의 화려한 콤보가 그의 허점을 노렸다.

콰작-!

허공에서 크게 격돌한 두 사람이 거리를 벌리고 떨어졌다.

그중에서도 하필 데미안이 그리드의 곁으로 떨어졌다.

“짐은 너의 안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네?”

그리드가 간과했던 부분.

마안의 발동 조건은 ‘마안의 소유자가 대상을 보는 것.’이다. 상대방의 눈에 마안이 안 보인다고 해도 마안의 소유자가 상대방을 볼 수만 있으면 마안은 발동하게 되어있다.

<도살귀의 안대>로 마안을 감춰봤자 마안의 시야가 자유로운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에테르는 그리드에게도 필요했다.

[<거세안>이 발동합니다.]

[대상의 모든 이로운 효과를 차단합니다!]

[이 효과는 대상을 지켜보는 동안 유지됩니다.]

“....!?”

그리드가 당황했고, 데미안은 경악했다.

그리드는 자신의 마안이 데미안의 ‘가능성’을 차단했다는 생각에 아차 싶어서 시선을 돌린 반면,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은 데미안은 석상처럼 굳었다.

빠각!

마침 벼락처럼 날아온 레가스의 발차기가 데미안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쾌속의 공격이었으나 풀 버프 상태의 데미안을 상대로는 큰 타격을 입힐 수 없는 스킬이었다. 레가스의 진짜 공격은 이다음 연계되며 콤보 데미지를 누적시키는 정권 찌르기였다.

한데.

철푸덕!

레가스의 발차기 한 방에 데미안은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마치 죽은 개구리처럼 바닥에 뻗었다.

“...!?”

그 예상치 못한 반응에 레가스의 정권 찌르기가 허공을 갈랐다.

‘이 타이밍에 속임수를?’

방금 막 풀 버프를 사용했으면서, 갑자기 약해진 것처럼 연기를 하다니?

의도가 너무 뻔하기는 해도 완벽한 연기다.

발차기 데미지가 예상보다 3배나 더 크게 들어갔으니까.

‘순간적으로 장비를 해제해서 방어력을 낮춘 건가? 버프가 풀린 척 연기하고 내 방심을 유도하려고?’

허공을 가른 주먹을 회수한 레가스가 어깨를 풀면서 머리를 굴렸다.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데미안.

허점투성이다.

지금 당장 달려가 공격하면 그대로 이길 것 같다.

하지만 천하의 교황 데미안이 저렇게 노골적인 허점을 드러낼 리 만무했다.

‘내 방심을 유도하는 거다. 이대로 덤볐다가는 내가 역으로 당하게 된다.’

너무 노골적이라서 연기라는 티가 팍팍 나기는 했지만, 오히려 한 수 앞을 더 내다보고 저러는 걸 수도 있다.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레가스가 자빠져있는 데미안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스킬의 쿨타임을 점검하며 데미안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고자 노력했다.

이런 걸 전문 용어로 셰도우 복싱이라고 한다.

하지만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한 템빨단원들은 여전히 레가스와 데미안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그리드도 있었다.

“데미안, 위험하게 뭐하는 거야! 어서 일어나서 싸워!!”

“.....”

사람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놓고서 싸우라고 응원하다니?

데미안이 울컥했다.

여전히 죽은 개구리처럼 자빠져있는 그는 자신이 그리드에게 미움을 산 게 분명하다는 확신을 품었다.

주르륵!

어떤 의미에서는 일국의 왕보다 더 큰 권위를 지닌 교황.

만인에게 존경 받는 그가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엄마한테 장난감 사달라고 졸랐다가 길거리에 버려진 다섯 살짜리 꼬마아이처럼, 혹은 거세당한 소처럼 정말 서글프게 울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드에게 미움 받았다고 생각하자 세상을 잃은 것처럼 거대한 슬픔과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