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7권 - 7화
‘가여운 어린 양(Agnus).’
광장 근처의 저택.
혼란을 틈타 그곳에 잠입한 라우엘이 광장의 사태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라우엘은 즐겁고 기뻤다.
아그너스가 가장 이상적인 반응을 보여준 까닭이다.
이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광기에 몸을 맡긴 그는 유페미나와 불렛을 공격함으로써 템빨국과 자신의 연결고리를 끊어냈다.
또한, 형장에 모인 사람들(플레이어)과 7개 왕국을 적대하리라 선언했다. 자신이 골백번 죽고 죽어도 너희들을 모조리 도륙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템빨국이 내민 구원의 손길을 거부한 아그너스는, 역설적이게도 템빨국의 잠재적인 적들을 견제해줄 최강의 패로 거듭난 것이다.
‘그리드 님과 페이커 님 다음으로 든든할 정도군요.’
미소 지은 라우엘이 유페미나와 불렛에게 퇴각하라는 귓속말을 보냈다.
불렛은 조금 더 아그너스를 설득해보고 싶은 눈치였으나 모르는 척했다.
오로지 템빨국을 위하며, 템빨국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의지나 마음 따위 우습게 짓밟는 라우엘.
누군가에게는 그 또한 악인일 것이다.
하지만 수십, 수백만의 목숨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양심이라는 개념은 사치였다.
“....피차 힘든 삶이네요.”
괜한 감상에 젖은 라우엘이 조용히 읊었다.
처참히 짓뭉개진 아그너스의 이성을 애도하며, 그는 그리드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모든 걸 제게 맡기십시오. 당신은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될 뿐입니다.
그리드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그때의 내 맹세 때문임을, 라우엘은 잊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를 손가락질 할지라도.
누군가가 나 때문에 피눈물을 흘릴지라도.
‘나는 단지 그리드 님과 템빨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플레이어들을 무분별하게 학살한 아그너스의 악행을 비난하고 나서는 단체들이 속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사건을 계기로 아그너스는 더욱 더 고립 될 것으로 보이며....』
TV에서도,
<(칼럼)템빨단의 일방적인 구애였다>
제국과의 휴전 협정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초조했던 것일까.
전력 상승을 꾀한 템빨단은 아그너스의 섭외를 시도했다.
그들이 선택한 섭외 방식은 뻔하고 흔한 클리셰, 바로 구원이었다.
단두대에 올라 선 아그너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마치 히어로처럼 뛰쳐나온 유페미나는 아그너스의 누명을 주장했다.
그리고 처참한 실패를 맛봤다.
참관인들은 유페미나가 제시한 증인의 증언을 묵살했고, 스스로의 힘으로 족쇄를 끊은 아그너스는 유페미나를 공격했다.
이빨 빠진 사자가 굶어 죽을지언정 다른 짐승의 젖을 먹지 않는 것처럼, 아그너스는 템빨단이 내민 구원의 손길을 쓸데없는 동정이라 포효하듯이 마법을 쏟아내었다.
그 성난 짐승은 장장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폭주하며....
신문에서도 온통 아그너스 이야기뿐이다.
“미친 자식!”
이른 아침.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영우가 신문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구겨버렸다.
템빨단이 망신을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게 아니다.
동료들의 호의와 마음이 짓밟혔다는 점에 대한 분노였다.
“개자식이 감히 유페미나를...! 불렛을...!”
유페미나는 랭커들의 스킬을 복제하기 위해서 대륙 곳곳을 돌아다닌다. 그녀는 직업 특성 상 늘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었다.
영우조차도 길드 최고의 전력인 그녀의 시간을 함부로 빼앗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배려해왔다.
그 귀중한 전력이 직접 아그너스를 돕고자 머나먼 글러시안 왕국까지 다녀온 것이다.
한데 아그너스는 그녀의 도움을 뿌리치다 못해 그녀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옛 동료였던 불렛조차도 처참하게 짓밟았다.
아그너스의 공격을 받고 당황하던 유페미나와 불렛의 표정이 영우의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영우는 두 사람의 호의를, 마음을 외면한 아그너스를 용서할 수 없었다.
“진짜 왜 그따위로 사는 거지?”
그놈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왠지 싫었다. 자존감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다 못해 왜곡 된 놈의 말투와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어째선지 답답하고 부아가 치밀었다.
‘옛날의 나보다 못한 놈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
찬물에 샤워를 하고 마음을 진정시킨 영우가 곧바로 Satisfy에 로그인했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
미친놈의 미친 전투력.
적진 한복판에서 홀로 싸우는 아그너스의 동영상이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다.
우선 첫 장면부터 인상적이었다.
사형 집행관의 얼굴을 마법으로 날려버리고 해골 병사로 일으킨 아그너스는, 즉각적으로 날아온 수십 발의 화살을 그 해골 병사로 막아냈다.
언데드를 소환하는 속도, 전황을 읽는 통찰력, 언데드를 컨트롤하는 솜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무려 1시간 동안의 전투 내내 아그너스는 적을 죽이고 살린 뒤 이를 방패로 삼거나 무기로 휘둘러 일대 다수의 전투를 도리어 유리하게 이끌었다.
네크로맨서가 추구할 수 있는 궁극의 영역.
아그너스는 이미 그곳에 도달해 있었다.
“수십 마리의 언데드를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컨트롤하던데 그게 인간이 가능한 일인가 싶더라. 크라우젤조차도 이기어검 몇 개 컨트롤하는 걸로 힘들어할 정도였는데....”
“그러게 말이야. 나도 보면서 믿기지 않을 정도였어. 전투 내내 최상의 판단력을 유지하는 걸 보면 집중력도 엄청나 보였고.”
“서번트 증후군 같은 거 아니야? 뇌기능에 장애가 있으면서 천재성을 타고나는 그런 거 있잖아.”
“오...? 꽤 그럴듯한 논린데?”
“근데 네크로맨서는 지배력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언데드를 부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아그너스 녀석은 앞으로 얼마나 강해질 수 있다는 거야?”
“어쩌면 그리드와 비슷한 수준까지 성장할 수도....”
왕궁 1층의 휴게실.
도란도란 모인 템빨단원들이 아그너스를 주제로 대화중이었다.
그들 또한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아그너스의 솜씨에 감탄한 상태였다.
복도를 걷다가 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엿 듣게 된 그리드는 기분이 무척 상했다.
‘그놈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마침 토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그너스가 아무리 대단해봤자 그리드한테는 안 되지. 그리드가 적들 한 방에 죽이는 동영상 보다가 아그너스가 해골 한두 마리씩 찔끔찔끔 소환하면서 싸우는 모습 보니까 답답할 지경이던데.”
“하기야... 아그너스가 얼마나 많은 언데드를 부리게 되든지 그리드가 한 방에 쓸어버릴 것 같다.”
“후후훗.”
바로 그거다. 내가 아그너스 놈보다 훨씬 낫다.
....아무리 나라도 아그너스의 언데드 군단을 한 방에 몰살시키는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뭐, 어찌됐든.
동료들의 대화 내용에 그리드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대장간으로 이동했다.
***
따앙. 따앙. 따앙.
그리드는 사냥을 하다가도 가끔씩 라인하르트로 귀환했다.
보통의 경우, 사냥 중 귀환의 이유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물약 등의 물품이 떨어지거나 아이템 내구도가 하락해서 마을로 귀환하는 일이야 부기지수였으니까.
하지만 그리드가 마을로 귀환하는 이유는 굉장히 특수했다.
막대한 흡혈 능력과 소환수들의 능력 덕분에 물약 없이도 사냥이 가능하고, 아이템 자가 수리까지 무한히 가능한 그는 정비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귀환했다.
누군가의 아이템을 수리해주기 위함이다.
그 아이템이란 당연히.
에테르 안경이 달린 투구.
마안족 왕의 ‘눈’이었다.
따앙. 따앙. 따앙.
정성을 다해서 망치질에 열중하는 그리드와 그 곁에 쭈그려 앉은 꼬마.
젖살이 포동포동 오른, 대두의 귀여운 꼬마가 눈을 감은 채 진중히 말했다.
“우주와 같은 관대함으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내 「유일」한 왕이여. 매번 당신께 민폐를 끼치고 있으니 고개를 들 낯이 없다.”
대장일에 열중하는 템빨왕의 곁에 앉아 함부로 떠들 수 있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그리드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리드가 어떤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템빨단원들 조차도 그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않았다.
즉, 지금 그리드 곁에 앉아 떠드는 대두의 꼬맹이는 무척 특별한 존재, 혹은 눈치 없는 얼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번엔 전자였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나는 네게 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게 도리어 미안해.”
꼬마의 정체는 마안족 왕.
최소 전설만이 감당할 수 있는 삼마안의 주인이다.
그리드를 아무나 쉽게 대하지 못하듯이, 마안족 왕 또한 그 누구도 쉽게 대할 수 없었다.
세계 정상급의 거물들이 대장간에 나란히 앉아 수다를 떠는 모습,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광경인 것이다.
“나의 왕이여. 당신은 기억하는가?”
귀여운 주제에, 늘 근엄하게 말하고자 노력하는 마안족 왕.
녀석이 평소보다 더 진중한 목소리로 운을 떼자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내게는 마안을 심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
올 것이 왔다!
마안족 왕과 처음 만났던 그날.
마안족 왕은 자신에게 마안을 심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노라고 밝혔었다.
그리고 바로 그 한 마디가 그리드의 맹목적인 호의를 불러일으켰다.
맞다.
그리드가 마안족 왕에게 최선을 다해서 호의를 베풀어온 이유 중에는 마안이 있었다.
마안의 힘이 탐났던 그리드는 마안족 왕과의 호감도를 최대치로 달성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기, 기억나. 왜? 혹시 나한테 마안을 심어주려고...?”
“사실 당신을 왕으로 섬기리라 다짐했던 그날부터 쭉 생각해왔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마안은 저주이기도 하다.”
“....”
그리드가 마안을 탐내면서도 크게 집착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주.
그래, 대상을 단지 보는 것만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마안의 힘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더 이상 두 눈에 담을 수 없게 된다. 자칫 실수로 동료들을 해칠 수도 있다. 늘 한쪽 눈을 봉인하고 있어야해. 그 쓸쓸함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마안을 심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마안 때문에 평생토록 고통 받아온 마안족 왕.
그는 그리드에게 마안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마안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가 그리드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안이 저주라고 해도 강한 힘인 것은 사실이었고.
“음....”
그리드는 신중하게 생각했다. 템빨골에게 아이템 창조 스킬을 2개나 소모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고민했을 때처럼 섣불리 결정하지 않았다.
한참 후.
수리를 끝낸 에테르 투구를 마안족 왕에게 건네준 그리드가 질문했다.
“마안의 종류가 총 몇 가지야? 내가 원하는 마안을 선택할 수 있을까?”
점화안, 빙결안처럼 바라보는 대상을 공격하는 마안이 있는 반면 복종안처럼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는 마안도 있었다.
그리드 본인이 마안을 선택할 수 있다면 마안 이식의 위험성이 크게 줄 것이었다.
마안족 왕이 대답했다.
“마안의 종류가 몇 가지인지는 나조차도 모른다. 또한 마안은 대상의 본질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힘이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특정 마안을 심어준다고 해봤자 무의미하다. 마안이 당신과 동화되는 순간 당신에게 적합한 힘으로 다시 개화될 테니까.”
즉.
‘랜덤이라는 뜻....?’
그리드의 골치가 더욱 더 아파졌다.
더 이상 쓸 수 있는 에테르도 없는 마당에 마안을 섣불리 심었다가는 위험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수 없으면 평소에도 계속 안대를 쓰고 다녀야 될 수도....’
그리드는 오랫동안 <도살귀의 안대>를 애용해왔다.
한쪽 시야가 가려지는 불편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
‘....지 않지?’
<도살귀의 안대>
등급:유니크
내구력:7/7
*스킬 <급소 간파> 생성.
도살귀는 한평생 고문에 시달렸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고문을 강제적으로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생명체의 급소를 파악하는 일에는 도가 텄습니다.
도살귀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이 안대에는 그 능력의 일부가 귀속되어 있습니다.
사용 조건:없음
무게:0.1
도살귀의 안대는 무척 특수한 아티팩트다.
아이템 설명에 ‘시야를 방해한다.’는 서술이 없고 도리어 ‘급소를 간파한다.’는 서술이 있다는 점이 힌트다.
도살귀의 안대는 시야를 방해하지 않았다.
늘 쓰고 다녀도 불편함이 없다는 뜻이다.
마안의 이식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마안, 줘!”
그리드가 마안족 왕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그는 자신의 행운 스탯을 믿었다.
크게 위험하지 않고 성능은 무척 좋은, 그런 종류의 마안을 얻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무럭무럭 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