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7권 - 6화
“유페미나다!”
“유페미나가 왜 아그너스를 변호하는 거지?”
“아그너스가 누명을 쓴 거라고? 진짜야?”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인파.
아그너스의 초췌한 모습을 즐겁게 감상하고 있던 그들이 일제히 유페미나를 주목했다.
7개 왕국의 참관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탄교가 진범이라고?”
“저 소녀의 정체가 뭐지?”
일전에 유페미나와 만난 경험이 있는 사냥꾼들이 참관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템빨국 백작 유페미나입니다.”
“템빨국의...?”
“흐음....”
단두대 뒤편의 단상 위.
나란히 앉아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참관인들이 영 달갑잖은 반응을 보였다.
그들 대부분이 템빨국에 반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태생부터 용납할 수 없었다.
템빨국은 기존에 존재했던 왕실을 전복시키고 세워진 나라. 대륙의 모든 귀족들이 필사적으로 수호해온 세력 체제를 무너뜨린 반역의 상징이니까.
왕족들이 그러하듯, 귀족들 또한 템빨국에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더군다나 템빨국 건국식 현장에서 대부분의 왕국이 템빨국과 척을 진 바 있다.
특히 비즈 남작이 템빨국의 일개 병사에게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바이올렛 왕국은 템빨국을 철전지 원수로 여겼다. 가우스 왕국이야 오래 전부터 템빨국과 앙숙이었고.
역시나 격한 반응이 나왔다.
“타국의 사형 집행을 방해하다니, 무례하도다! 태생이 미개한 국가답게 기본적인 법도도 모르는가!”
“살인마를 옹호하는 꼴을 보니 소름이 돋는군. 템빨국은 왕을 시해한 반역의 도당이 세운 나라이니만큼 살인마에게 관대한가 보지?”
사형 집행의 참관인 자격으로 글러시안 왕국을 방문한 척스 백작과 돌체 백작.
가우스 왕국과 바이올렛 왕국을 대표하는 그들이 템빨국을 비난하고 비하했다. 유페미나가 제시한 진실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다른 왕국의 참관인들 또한 입만 열지 않았을 뿐 반응은 비슷했다.
유페미나의 손에 붙잡혀 있는 야탄교 신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쯧, 혀를 찼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백성들의 불안과 분노를 달래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죄인이란, 징벌이 가능한 대상이여야만 했다.
야탄교처럼 징벌이 불가능한 대상이 죄인이어서야 백성들의 불안과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다.
말인 즉, 그들은 야탄교가 진범이라는 유페미나의 주장을 인정하기 싫었다. 귀찮았다. 이미 붙잡은 아그너스를 이대로 처형하면 간단히 해결 될 문제를 굳이 붙잡고 늘어질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유페미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두 백작의 비난과 조롱에도 일말의 동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조건부 최강자.
이제는 무무드의 마법마저 계승해가고 있는 그녀의 부동심은 견고한 것이었다.
“아그너스는 억울한 누명을 쓴 피해자입니다. 7개 왕국의 세공사들을 해친 진범은 야탄교에요.”
단언해보인 유페미나가 곁에 선 야탄교 신도에게 명령했다.
“진실을 밝히세요.”
“알았다.”
야탄교 신도는 순순히 응했다.
유페미나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야탄교 신도에게는 로제가 빙의되어 있었으니 태도가 고분고분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우리 야탄교가 7명의 세공사 장인을 살해하고 아그너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
“왜죠?”
“아그너스가 본교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본교는 더 이상 배신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어눌한 말투로, 야탄교 신도의 몸을 빌린 로제는 오직 진실만을 말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이 일을 끝내고 싶었다.
<빙의> 스킬을 사용하는 동안 자신의 본체는 수면 모드로 방치되어 있었으니 불안했다. 안전한 곳에 숨겨뒀다고 해도 마냥 오랫동안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7개 왕국의 참관인들 중 가장 상석에 앉은 인물.
글러시안 왕국의 백작 베오리스가 그리 물었다.
쯧, 깐깐하게 구네.
속으로 혀를 차는 로제를 대신해서 유페미나가 증거를 제시했다.
증거란 신도 그 자체였다.
펄럭.
유페미나가 신도의 로브를 벗기자 드러난 신도의 이마에는 붉은 말발굽 모양의 문신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야탄교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은 ‘제사장’을 섬기는 신도를 뜻하는 문신이었다.
이는 제사장의 마력으로 새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거짓으로 복제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이런....!”
침음을 흘린 베오리스 백작과 아크 왕국의 참관인이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부정할 수 없는 증인이 떡하니 나타났으니 일이 복잡하게 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다른 5명의 참관인들은 손으로 얼굴이 아닌 하늘을 덮었다.
“증거가 부족하군. 고작 신도 하나의 증언으로 야탄교를 진범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형의 집행을 속행하겠다.”
“....?”
황당한 판결.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술렁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술렁이는 사람들 대부분이 쾌재를 부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아그너스의 사형을 명백히 바라고 있었다.
그들 모두 아그너스에게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니다.
아그너스의 몸은 하나에 불과하다. 그 혼자서 수만 명에 이르는 피해자를 발생시킨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대중들은 그저 타인의 좌절을 기대하며 바라고 있을 뿐이다.
남. 심지어 자신보다 잘 나가는 타인의 기세가 꺾이는 일은 잠재적 경쟁자 입장에서 이득이었고, 굳이 경쟁자가 아닐지라도 즐거운 볼거리였으니까.
어그너스가 선인이었다면 또 모를까, 악인의 불행을 즐긴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지탄 받을 일은 없겠지.
“빨리 목을 베라!”
“아그너스 저놈은 죽어 마땅해!!”
누군가의 외침이 도화선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그너스의 사형 속행을 바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아그너스를 죽여라!!”
“아그너스를 죽여라!!”
“아그너스를 죽여라!!”
“....큭큭.”
역시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타고난 본성은 악(惡)이다.
수양과 배움 따위로는 억누를 수 없는, 실로 지독한 본성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그너스가 여전히 시야에 떠있는 퀘스트 창을 노려보았다.
‘더 큰 악이 되겠다.’
이 미친 세상을 편히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남들보다 더 미치면 된다.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대악마 바알의 권능으로 모든 제약이 해금됩니다.]
[스탯이 정상 수치로 복구되었습니다.]
[모든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큭큭...! 크하핫...하?”
손과 발을 구속하고 있는 수갑과 족쇄의 무게가, 몸 전체를 옥죄고 있는 쇠사슬의 힘이 가볍고 약하게 느껴진다. 지금 당장이라도 풀어헤칠 수 있을 수준이다.
하지만, 광소를 터뜨리려다 만 아그너스는 잠자코 있었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에 한 사내의 모습이 비쳤다.
불렛.
베라딘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 임모탈에 가입하고 몇 년을 이용당했던 가여운 희생양. 아니, 멍청이 중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나와 유페미나의 곁에 섰다.
그가 광기어린 대중들에게 소리쳤다.
“당신들 모두 귀를 먹었어? 아그너스 님은 범인이 아니라고!! 아까 본인이 직접 말씀하셨잖아!!”
불렛은 유페미나가 기껏 데려온 증인을 언급하지 않았다.
굳이 언급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아그너스 본인이 직접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밝혔는데.
‘끝까지 멍청한 놈이군.’
불렛의 신뢰를 읽은 아그너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놈은 어째서 나를 저토록 신뢰하는 거지?
이해가 안 된다.
나는 악에 물든 존재.
누군가에게 신뢰받을 자격이 없다.
나는 혼자다.
혼자여야만 한다.
근데.... 근데 어째서 저 녀석들은 나를...
울컥, 아그너스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솟구쳤다.
그것은 어떤 감정이었다.
무엇이라고 설명하기 힘든.
이제는 너무 낯설어 기억조차 희미한.
“저 무엄한 놈! 네놈은 누구냐!!”
“템빨국의 네크로맨서다!”
“또 템빨국인가....! 템빨국은 우리 7왕국과 적대할 마음을 단단히 굳혔나보구나!! 우리도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
참관인들은 이제 더 이상 화를 억누르지 못했다. 눈에 살기를 피어 올리더니 사냥꾼들에게 명령했다.
“감히 형의 집행을 방해하는 놈들이다! 당장 저놈들을 포박하라!”
사냥꾼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곧바로 단상에서 뛰어내리더니 유페미나와 불렛을 향해서 내달렸다.
그때였다.
“크으윽...! 크아아아아아아!!”
“....?”
온갖 혼돈이 들끓는 현장.
현장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송출 중이거나 녹화하고 있던 수백, 수천 명의 플레이어가 일제히 아그너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단두대에 구속당한 채로 발작하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붉게 충혈 된 그의 눈이 작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전 세계 시청자들의 모니터에 클로즈업 된다.
동시에.
“....!”
시청자들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아그너스의 금안에 깃든 광기를 목도했기 때문이다.
콰작!
콰자작!!
“...뭣!!”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아그너스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수갑과 족쇄, 그리고 쇠사슬이 맥없이 끊어져나가자 참관인들이 경악했다.
여태껏 신나서 떠들던 대중들도 위축되어 뒷걸음쳤다.
퍼엉!
사형 집행관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그대로 허물어진 그가, 곧바로 해골 병사가 되어 다시 일어났다.
“히, 히익....!”
세계 최강 네크로맨서의 힘에 질색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반면 사냥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선 유페미나와 볼렛을 제압한 후 아그너스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들 입장에서 아그너스는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사냥감에 불과했으니까.
유페미나와 볼렛에게 돌진 중인 그들의 뒤로.
“캬하하!! 꺼져!!”
데스나이트와 아그너스가 바짝 붙어와 칼을 휘둘렀다.
놀라운 속도에 당황한 사냥꾼들이 산개했지만, 예상했다는 듯이 리치 무무드가 마법 폭격을 가하자 그들 모두 동시에 타격을 입고 쓰러졌다.
“컥....! 쿨럭쿨럭!!”
“저놈이 저렇게 강했다고?”
당연한 말이지만, 7개 왕국이 아그너스를 사냥하기 위해서 파견했던 사냥꾼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냥꾼들.
즉, 템빨국에서 아그너스를 포획해온 그들은 이미 앞서 출발했던 사냥꾼들을 처치하는 과정에서 ‘지치고 약화 된’ 아그너스를 상대해본 것이 전부였다.
힘을 완전히 되찾은 아그너스의 실력이 그들은 낯설었다.
“빌어먹을...!”
예상치 못한 기습에 맥없이 쓰러졌던 사냥꾼들이 곧바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페미나와 불렛이 아닌 아그너스를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고 움직이려다가 멈췄다.
사냥꾼들을 외면하고 그대로 내달린 아그너스가 유페미나와 불렛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들, 죽여 버린다.”
“아, 아그너스 님?”
“죽어어어!!”
“...!?”
설마 아그너스의 공격을 받을 줄은 몰랐던 유페미나와 불렛이 선공을 허용하고 말았다. 칼에 복부를 크게 찔린 그들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쳤다.
불렛이 소리쳤다.
“우리는 당신을 돕기 위해서...!”
“닥쳐! 닥치라고!! 키햣! 캬하하하핫!!”
“....!”
대화가 통하질 않는다.
완전히 광기에 지배당한 아그너스와 그의 데스나이트, 그리고 리치는 불렛과 유페미나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콰쾅!
쿠콰콰콰콰쾅!!
예리한 검광이 거미줄처럼 펼쳐지는 동시에 파괴적인 마법이 비처럼 쏟아진다.
불렛과 유페미나의 주변에 있던 수십 명의 플레이어가 그 흉포한 폭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잿빛으로 산화했다.
심지어 아그너스의 누명을 벗겨줄 수 있는 유일한 단서, 야탄교 신도마저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가 다시 해골 병사가 돼서 부활했다.
아그너스는 정말이지 거침이 없었다. 주변이야 어찌됐든, 진심전력으로 유페미나와 불렛을 해치려했다.
“당신....”
아그너스는 정말로 광인이었단 말인가?
당황하며, 아그너스의 공세를 방어하던 유페미나가 문득 석상처럼 굳었다.
아그너스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음을 엿본 까닭이다.
불렛의 몸에, 유페미나의 몸에 상처를 입힐 때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기 참 못하네요.’
유페미나가 아그너스의 의도를 눈치 챘다.
아그너스는 템빨국이 7개 왕국과 적대하지 않게끔 자신 스스로 템빨국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
이자는 또 혼자가 되려는 거다.
이를 악 문 유페미나가 불렛에게 외쳤다.
“피하죠.”
“네? 하지만 아그너스 님은...!”
라우엘은 7개 왕국이 야탄교의 증언을 외면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여, 그들을 지탄하고 판결의 흐름을 바꿀 수단으로써 교황 데미안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잠시 후면 이곳에 데미안이 당도해 아그너스의 누명을 벗겨줄 예정이었다.
한데 이게 당최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일이 완전히 틀어졌다.
스스로 단두대에서 내려온 아그너스는 미쳐 날뛰며 자신의 입장을 더 불리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를 이대로 두고 떠나서야 돕겠다는 의도를 달성하기는커녕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키는데 공헌한 것밖에 안 됐다.
쩌어어엉-!
아그너스의 검이 불렛의 가슴을 때리는 순간 자동 소환 된 데스나이트가 불렛을 지켰다.
콰작-!
아그너스의 데스나이트가 불렛의 데스나이트를 날려버렸다. 아그너스의 검이 불렛의 목을 겨눴다.
“아그너스 님....”
“....죽어. 큭큭.”
푸욱-!
뭐라 말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문 아그너스.
그의 검이 불렛을 찔렀다. 물론 아그너스는 근력 수치가 비교적 낮았기 때문에 불렛을 일격에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털썩!
불렛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 때문이었다.
임모탈의 멸망 때처럼, 또 다시 아그너스에게 외면당한 그는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
아그너스가 불렛으로부터 눈길을 거뒀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사냥꾼들과 수백의 병사를 홀로 마주 선 그가 음침하게 웃었다.
“너희들.... 목숨 하나지? 킥, 킥킥킥!”
“....!”
사냥꾼들과 병사들, 심지어 단상 위 참관인들까지 몸서리쳤다.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아그너스에게 죽게 될 거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직감을 느끼고 있었다.
쾅-! 쿠콰콰콰콰쾅!!
광장은 전쟁터가 되었다.
광기의 살인마와 그가 이끄는 해골 군단이 NPC와 플레이어를 구분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도륙했다.
이제 그는 부정할 수 없는, 진정한 살인마가 되었다.
-아그너스 님에게 우리의 호의를 보여줬으니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더 이상 엮이지 말고 어서 템빨국으로 귀환하세요.
유페미나와 불렛의 귓가로 라우엘의 음성이 들려왔다.
라우엘은 작금의 상황이 무척 즐거운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