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856화 (851/1,794)

템빨 47권 - 3화

불렛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템빨그림자단과 스틱세이가 전투의 흔적을 분석했고 수십 명의 병사들이 구경꾼들을 통제했다.

얼굴의 절반을 쥐고 선 라우엘은 깊은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이건....’

병사들의 제지 없이 현장에 들어올 수 있었던 불렛.

무너진 여관 곳곳을 살피는 그의 안색이 차츰 어두워졌다.

악마 듀레블이 광선을 쏜 흔적을 엿봤기 때문이다.

간절한 바람과 달리,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는 분명히 아그너스가 개입돼 있었다.

‘하지만 아그너스 님이 원해서 싸웠을 리 없다.’

불렛은 믿었다.

그래서 라우엘에게 다가가 주장했다.

“누군가가 먼저 아그너스를 공격한 게 분명하다. 아그너스가 템빨국에서 의도적인 소란을 피웠을 리 없어.”

불렛은 지금쯤 감옥에 갇혀있을 아그너스를 부디 라우엘이 풀어주길 바랐다.

라우엘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장의 근거가 뭡니까? 아그너스 님은 예측불허의 광인. 더군다나 전 임모탈 길드의 수장으로써 템빨단에 원한을 품고 있죠. 그가 템빨국에 의도적인 해악을 끼쳐도 결코 이상할 일이 아닙니다만 그럴 리 없다고요?”

“아그너스는 광인이되 멍청이가 아니야. 또한 임모탈에 어떤 미련도 없어. 애초에 임모탈을 세우고 아그너스를 추대한 사람은 베라딘이고 아그너스 본인은 임모탈에 별 관심도 없었으니....”

“진상을 알아보기도 전에 우선 변호부터 하시는군요.”

“...!”

“당신, 템빨단원 맞습니까? 아그너스 님의 변호인 아니에요?”

“미, 미안하다!”

실수를 깨달은 불렛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우선 진상을 파악했어야 했다.’

간단했다.

라우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단 한 마디 질문만 던졌으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아그너스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서서 가장 기본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말았다. 아그너스의 안전을 확보하는데만 정신이 팔렸다.

‘내게 실망했겠지.’

불렛은 그리드에게 큰 호의를 받은 입장이다.

임모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았고 강시 제작법까지 얻었다.

그리드와 그의 동료들에게 전심전력으로 보답해도 부족할 판국에 그들의 적이나 다름없는 아그너스의 입장부터 헤아렸으니 얼마나 괘씸해 보일까.

고개를 들지 못하는 불렛에게 라우엘의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다음부터는 주의해주세요.”

“그래. 명심하겠다.”

사실, 라우엘은 불렛에게 화가 나지도 않았고 실망하지도 않았다.

불렛이 정에 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그리드 또한 불렛의 그런 성향이 마음에 들어서 그를 동료로 받아들인 거니까.

불렛이 이제 와서 옛 동료를 외면하는 매정한 인물이 돼서도 곤란했다.

다만, 이 속내를 굳이 밝히지 않는 이유는 불렛이 정도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땅을 보고 선 불렛에게 라우엘이 말해주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아그너스 님의 신변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도망쳤다는 말인가?”

그럴 리 없다.

이곳은 템빨국 수도 한복판이다.

철저히 방비되고 있었고 도처에 괴물들이 숨어있었으니 아그너스는커녕 그리드라도 이곳을 무력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 불렛에게 라우엘이 고개를 저었다.

“도망치지 못했고 끌려갔습니다.”

“끌려갔다고...? 설마!”

불렛은 아그너스가 7개 왕국에 수배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 이럴 수가....”

불렛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갈 곳 잃은 아그너스는 나에게 의탁하고자 적국이나 다름없는 템빨국에 숨어들어왔고, 7개 왕국의 추격자들은 그를 기필코 따라붙어 기습을 가한 것이다.

“아, 아그너스 님....”

적어도 템빨단원들 앞에서는 아그너스를 평대할 생각이었건만, 걱정이 앞서자 그만 우상에 대한 예우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는 불렛.

그 모습에 라우엘은 쓴 미소를 그렸다.

‘아그너스 님께도 그분만의 매력이 있는 거겠지.’

템빨단 초창기 시절.

그리드만 해도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는 쓰레기 개차반이었다. 실제로 그 시절 그리드는 독기에 충만했고 흉포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에게는 깊은 신뢰와 호감을 샀다.

아그너스에게도 비슷한 면이 있을 수 있었다.

사람이란, 실제로 겪어보지 않는 이상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법이다.

“라우엘.... 아그너스가 혹시 어디로 끌려갔는지 알아?”

“그건 왜요?”

“어? 그, 그냥.”

“설마 구출이라도 하실 계획이면 관두십쇼. 형장은 무려 7개 왕국의 병력이 지키고 있을 테고 그중에는 뛰어난 실력자도 몇 명 포함돼 있을 테니까요.”

네크로맨서이자 강시 제작자인 불렛은 대규모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7개 왕국이다.

그들을 상대로 혼자 덤벼봤자 개미가 코끼리에게 덤비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 사실을 불렛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그너스를 구출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아그너스를 도와주고 싶어.”

불렛은 보여주고 싶었다.

아그너스 당신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도 있다고.

지난날의 당신은 비록 고통과 배신만 겪어왔을지 몰라도, 앞으로의 당신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에게.... 당신이 꼭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

고독 속에 병들어가는 그의 모습은,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고통이었다. 당사자의 고통은 얼마나 끔찍한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불렛은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아그너스를 치유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라우엘의 반응은 냉랭했다.

“안 됩니다. 당신은 템빨국 소속이라는 사실을 잊었습니까? 당신이 나섰다가는 7개 왕국과 템빨국의 관계가 뒤틀릴 수 있습니다.”

“잠시 길드를 탈퇴할게. 강시를 쓰지도 않을 거야. 템빨국과의 연결고리를 절대로 노출시키지 않을 테니 그리드와 너희들에게는 결코 피해가 없을 거야.”

불렛은 템빨단원들에게도 아그너스만큼의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기꺼이 동료가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준 그들에게 불렛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즉, 지금 그의 말에는 일말의 가식도 없다는 뜻이다.

불렛은 정말로 혼자서 싸울 생각이었고 혼자서 모든 걸 감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라우엘의 반응은 끝까지 냉랭했다.

“템빨단이 우스워요? 본인 사정으로 멋대로 탈퇴하고 재가입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까?”

“.....”

라우엘이 불렛을 설득했다.

“당신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템빨단원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만 해요. 그리드 님이 당신에게 강시 제작법을 주신 이유가 뭔지 모릅니까? 빠르게 성장해서 템빨단에 보탬이 되어주길 바라서였습니다. 한데 제 발로 사지에 가서 죽겠다고요? 그건 그리드 님의 호의를 깡그리 무시하는 행위 아닙니까?”

“....”

“당신이 강시 제작법을 받고 템빨단에 가입한 순간부터 당신에게는 템빨단원으로써의 책임이 생긴 겁니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책임을 등한시하지 마세요.”

라우엘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그너스가 가엽기도 했고 아그너스라는 전력이 아깝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나설 수 없는 입장이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라면 미련을 빨리 버리는 편이 나았다.

불렛이 한탄했다.

“아그너스의 누명을 벗길 수만 있어도 다 해결 될 문제인데....”

“누명을 쓴 건 확실합니까? 아그너스 님이 세공사들을 살해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 아그너스가 다른 강자들은 서슴없이 죽일지 몰라도 약자를 해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못 봤거든. 그리고 엘리자베스 사건을 돌이켜 봐. 아그너스는 세공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입장인데 굳이 세공사를 죽여서 세공사들의 공공의 적이 되고 싶을까?”

그건 라우엘도 생각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부분이 누락됐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진범이 누구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최소한 진범으로 지목할 수 있는 용의자라도 있어야 누명을 주장하죠.”

“아마 야탄교일 거야.”

“아탄교?”

라우엘의 머리가 번뜩였다.

말의 앞뒤가 맞으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엿본 까닭이다.

“야탄교가 교황청을 습격했을 때 아그너스가 로드 왕자와 아이린 왕비를 도와줬다며? 야탄교와 공생하는 관계였던 아그너스가 그 두 사람을 도왔다는 말은 야탄교를 배신한 행위나 다름이 없으니까, 아마 야탄교가 보복하지 않았을까 싶어.”

“.....”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야탄교는 지난 10년 동안 어떤 수수께끼의 인물에게 큰 타격을 입고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는데 수년 전에는 유라까지 배신해서 굉장히 예민한 상태거든. 새로운 배신자 아그너스를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응징할 계획을 세운 것 같아.”

“흠....”

희망적인 계책이 떠오른다.

아그너스를 도와 빚을 지어놓는 한편, 아주 예전부터 신경 쓰였던 골칫덩어리를 한 번에 처치할 수 있는 방법이다.

라우엘이 페이커에게 질문했다.

“로제의 행방을 파악하고 계십니까?”

“점차 접근해가는 중이다. 꽤 많은 흔적을 발견했으니 빠른 시일 내로 소재를 파악할 수 있을 거야.”

유라의 뒤를 이어서 흑마법사 랭킹 1위가 되고 야탄의 종에 등극한 로제.

그녀는 32위 대악마 벨리알을 지상에 현신시킨 악역 중 하나다.

또한, 작년 교황청 습격 사건의 주동자 중 하나이기도 했다.

템빨국 입장에서 그녀는 커다란 경계대상인 한편 반드시 응징해야할 대상인 것이다.

감히 로드와 아이린을 해치려했던 그녀를 그리드도, 템빨단원들도 결코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하여 꾸준히 그녀를 추격해왔다.

“잠시...”

“....?”

불렛과 페이커를 곁에 덩그러니 세워놓은 라우엘이 누군가와의 귓속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은발을 쓸어 넘긴 라우엘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불렛, 당신에게 보다 현명한 길을 제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뭐지?”

한참을 기다렸던 불렛이다.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에게 라우엘은 굳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마침 길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길드 마스터 ‘그리드’가 플레이어 ‘로제’에게 척살령을 내렸습니다!]

“어...?”

이게 갑자기 무슨?

당황하는 불렛에게, 드디어 라우엘이 설명해주었다.

“그녀를 짓밟고 위협하세요.”

다른 누구도 아닌 야탄의 종이 진범은 야탄교라고 밝히면 어떻게 될까?

아그너스는 바로 누명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

‘로드와 아이린을 도와준 빚은 갚아야하니까.’

갈구노스의 사원 지하 1층.

로제에게 척살령을 내린 그리드는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아그너스 그 빌어먹을 놈한테 빚을 졌다는 사실이 내내 거슬렸는데, 이번에 빚을 갚을 기회가 생겼으니 속이 다 후련한 것이다.

어차피 응징해야할 로제를 처리하면서 있는 생색 없는 생색 다 낼 수 있게 되었으니 아주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건 정말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구나.’

당연한 말이지만, 앞으로 템빨골1과 템빨골2는 본인들이 만든 무기와 투구를 주력으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래야 특성이 최적화되고 능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가장 좋은 제작법들을 구해주려고 했는데....’

엄청난 문제가 있었다.

템빨골이 배울 수 있는 제작법이 단 하나뿐이라는 점이었다.

템빨골에게 최고의 제작법을 가르칠 경우 아이템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공수하기 어렵게 된다.

‘그럼 템빨골들은 대장일을 자주 할 수 없고 기껏 익힌 대장 기술을 써먹지도 못해.’

그렇다고 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제작법을 가르치면 제작 무기와 투구의 성능이 허접할 것이다.

‘결국 조율을 잘 해야 한다는 건데.’

재료를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제작법. 그러면서도 제작 아이템의 성능은 보장되는 제작법이 필요하다.

“....흐음?”

한참을 생각해보던 그리드가 템빨골들의 단단한 뼈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무척 묘해서, 어깨춤을 추고 있던 템빨골들이 동시에 흠칫 놀랐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