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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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47권 - 1화
머레이, 울티나, 바이올렛, 아크, 하켄, 로테몬, 글러시안.
어느 미친 살인마에게 세공사 장인을 잃은 7개 피해국 목록이다.
제작계열 장인은 무척 진귀한 존재이므로, 세공사 장인을 잃은 7개 피해국이 입은 국가적 손실은 굉장히 크다고 할 수 있었다.
7개 국가는 살인마를 반드시 징벌해야했고, 국민들 또한 그것을 바랐다.
백성이. 그것도 만인에게 존경 받는 장인이 살해당했는데도 왕실이 이를 책임지지 못한다면 백성들의 신뢰를 잃고 위신이 곤두박질치리라.
“드디어 잡았다. 이 더럽고 역겨운 놈.”
7개 왕국에서 파견한 사냥꾼들이 방안에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누군가는 왕실 기사단 소속이었고, 누군가는 명망 높은 용병이었으며, 또 누군가는 이름이 아예 알려지지 않은 무명인이었다.
이들 열다섯 명의 입장과 성격은 모두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 같이 뛰어난 실력자라는 점이다.
특히 필데아와 존네만이라는 용병의 실력이 막강했다.
이름부터 찬란하게 빛나는 네임드 NPC.
아그너스가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어려웠다.
하물며 저주를 받고 약화 된 지금은 그들에게 얼마 버틸 수도 없었다.
“이봐 아그너스. 쓸데없는 저항은 관두고 순순히 따라와라.”
당연한 말이지만, 사냥꾼 중에는 플레이어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부바트다.
이니시에이터의 역할에 최적화 된 그는, 지난 수개월 동안의 추격전 동안 아그너스에게 큰 압박을 주었었다. 그가 국대전 일정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면, 아그너스는 이미 진즉에 붙잡혀 단두대에 끌려갔을 것이다.
“여관 밖으로 천라지망을 펼쳤다. 네가 이곳을 설령 운 좋게 탈출하더라도 금방 다시 잡히고 말 거야.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쉽게 가자.”
사냥꾼들은 7개 왕국에게 큰 지원을 받았다.
그들이 은밀하게 운용하는 정예 병력이 수백 명이었으니 천라지망을 펼쳤다는 말은 허풍이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아그너스는 조금도 겁먹은 눈치가 아니었다.
“주둥이 털 시간에 죽이지 그래?”
지독한 광기가 금안에 스며든다.
자신을 둘러싼 적들을 보면서, 아그너스는 무력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단지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일방적인 재단을 당하고 온갖 고통을 겪어야했던 시절... 당시의 아그너스는 폭력 앞에 굴복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몇 번을 좌절하게 될지라도, 설령 많은 걸 잃게 될지라도 굴복하지 않는다.
차라리 뒤지겠다.
그게 아그너스의 신념이었다.
“잠깐.”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아드는 아그너스를 부바트가 황급히 말렸다.
“너도 이미 몇 번이나 겪어봤으니 알고 있잖아? 여기서 네가 싸우다가 죽어봤자 수배는 풀리지 않아. 우리들은 너를 단두대에 세울 때까지 계속 추적할 거고, 그때마다 네가 이런 식으로 저항하다가 죽어봤자 결국 너만 손해라고.”
아그너스가 죄인의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의 처벌을 받아야했다.
단두대에 올라 사형을 당하기 전에는 몇 번을 죽어봤자 수배와 저주가 풀리지 않았다.
게임을 접기 전까지 영원히 수배범 신세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순순히 단두대에 오르는 편이 나은 것이다.
물론 단두대에서 사형을 당할 경우 겪게 되는 페널티는 일반적인 사망과 비교할 수 없이 크다지만.... 추적자에게 쫓기며 자유를 억압당하고 지속적인 살해를 당하는 것보다는 법의 처벌을 받고 끝내는 편이 훨씬 깔끔했다.
“더군다나 여긴 템빨국 수도 한복판이다. 이곳에서 소란을 피웠다가는 그리드에게 찍히고 말거야. 그럼 너도 피곤해지지 않겠어?”
“나는 딱히 상관없다만? 킥킥, 설마 네놈은 그리드가 두려운 거냐?”
“.....”
부바트는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아그너스의 광소가 순간 멎었다.
그리드.
나와 비슷한 과거를 겪은 놈.
오로지 가해자와 방관자밖에 없는 세계에서 피해자로 격리 된 채 고통 받은 주제에, 때때로 타인을 위해 싸우는 호구 새끼다.
놈은 그 숱한 모멸과 고통을 잊은 건가?
아그너스는 그리드가 싫었다.
놈의 행보와 사상에 혐오를 느꼈다.
당연히, 놈의 이름을 언급하는 놈들도 싫었다.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듀레블!”
크워어어-!
아그너스의 광기어린 외침과 함께 악마가 튀어나왔다.
인간의 몸에 도마뱀 머리가 달린 악마였다.
괴기한 생김새가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한다.
놈이 뿜는 광선의 위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잘 아는 부바트가 욕설을 뱉었다.
“이런 제기랄!”
쿠와아아앙-!
2만의 고정 데미지를 입히는 광선이 듀레블의 입에서 쏘아졌다.
문제는, 광선이 닿는 지점에 추가로 8천의 폭발 데미지가 발생한다는 점이었다. 작은 건축물은 그 폭발을 감당할 수 없었다.
쿠콰콰콰콰콰쾅!!
폭발에 휩쓸린 여관 한쪽 벽면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지붕이 허물어지면서 뻥 뚫린 하늘이 보였다.
갑자기 벌어진 소동에 놀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네가 기어코!”
부바트가 이를 갈았다.
잠시 후면 템빨국 병사들이 몰려올 테니, 오늘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머잖아 그리드도 알게 될 것이다.
부바트는 벌써부터 후환이 두려워졌다.
작년, 템빨국의 대장간을 침략해서 소란을 일으켰던 임모탈이 어떻게 됐던가?
쫄딱 망해버렸다.
한때 최강의 길드 중 하나라고 손꼽혔으면서도 처절하게 박살나고 잿더미처럼 흩어졌다.
‘내 개인 퀘스트 때문에 야크 길드까지 피해를 입게 만들 수는 없다!’
부바트의 판단은 빨랐다.
소란을 틈타서 즉시 자리에서 물러났다.
다른 플레이어 사냥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그리드라는 지존은 도전해야 할 대상이지 적대해야 할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반면 NPC 사냥꾼들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그리드의 능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딱히 두려워하거나 동경하지는 않았다.
당연하다.
그들은 플레이어가 아닌 NPC였으니 그리드의 존재감을 딱히 크게 느낄 수 없었다.
현재 템빨국의 입지가 위태롭기도 했고.
“하압!”
듀레블의 공격은 5초 간격으로 이뤄진다. 빙글빙글 회전하는 꼬리에 맺힌 지옥불은 항시 유지됐지만 피해량이 매우 적어서 사냥꾼들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제히 무기를 뽑아 쥔 사냥꾼들이 듀레블을 무시하고 돌진해서 아그너스에게 달려들었다.
아그너스는 데스나이트와 리치를 소환해서 응수했다.
콰자작-!
사냥꾼들의 협공이 데스나이트를 제압한다.
퍼엉-!
리치 무무드는 강력한 마법을 쏘지 못했다. 장소의 특이성 때문이다.
시장 한복판에 있는 여관.
마법을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민간인들이 휩쓸릴 수 있으니 망설이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아그너스의 명령에 거역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현재 온갖 저주를 겪고 약화 된 아그너스는 무무드에게 완벽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굳이 존재를 규정하자면 초네임드급이라고 볼 수 있는 무무드의 강력한 의지를 통제하는 건 온전한 바알의 계약자만이 가능한 일, 지금의 그로써는 무리였다.
결국.
채챙-! 챙!!
몇 번의 칼부림 끝에 수세에 몰린 아그너스는 금방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의 사지를 구속하고 목에 칼을 겨눈 사냥꾼들이 쯧, 혀를 찼다.
“더러운 살인자 놈이 고생시키기는.”
몇 개월 동안 계속 됐던 지긋지긋한 추격전도 드디어 끝이다.
혐오 가득한 눈초리로 아그너스를 노려본 사냥꾼들이 아그너스의 몸을 동아줄로 꽁꽁 묶어놓는 그때.
“남의 나라에서 이게 무슨 난리죠?”
웬 금발의 소녀가 현장에 난입해왔다.
사냥꾼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소녀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템빨국 백작 유페미나에요. 타국에서 멋대로 무력을 행사하고 백성들을 위험에 빠뜨린 당신들에게 책임을 물어야겠네요.”
그러자 사냥꾼들이 즉시 자신을 소개하며 예를 갖췄다. 그리고 설명했다.
“이자는 우리 일곱 왕국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해온 극악한 범죄자입니다. 이자를 놓치지 않고 제압하기 위해서는 사태가 긴박했으므로 귀국에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이점 진심으로 사죄드리며, 오늘 귀국에 입힌 피해를 충분히 배상하도록 할 터이니 사정을 헤아려주소서.”
무려 7개 왕국에서 살인을 저지른 흉악 범죄자.
그를 체포하는 과정에 발생한 소요는 타국에서도 어느 정도 감안해주는 것이 통상적인 관념이었다.
하지만 유페미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자가 정녕 살인범이 맞나요?”
“그렇습니다만.”
“증거는요?”
“살인 현장마다 이자가 목격됐죠.”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지 않나요? 괜한 누명을 쓴 걸 수도 있잖아요?”
“...설마 지금 이자를 변호하시려는 겁니까? 템빨국의 저의가 의심스럽군요. 안 그래도 최근 템빨국은 이족을 받아들여 제국의 분노가 크다는 소문인데.... 설마 살인마 하나 때문에 우리 일곱 왕국마저 적대하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비약이 심하네요. 저는 당신들이 템빨국 수도 한복판에서 소동을 일으킨 이유가 과연 합당한가를 확인할 뿐이에요.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해서야 뭔가 의심스럽군요.”
“아니, 고작 범죄자 하나 잡은 일 가지고 뭘 그리 깐깐하게 구는 거지? 둘 사이에 뭐라도 있는 건가?”
잠자코 팔짱을 끼고 있던 존네만이 으르렁거렸다. 특정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용병인 그는 국제 문제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가 살벌해진다 싶을 때.
“지랄들 하네.”
포박당해 있던 아그너스가 콧방귀 뀌었다. 그는 유페미나를 아예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대했다.
“저 꼬마가 그렇게 대단해? 그냥 꺼지라고 하면 될 걸 고작 한 명한테 언제까지 발이 묶여있을 생각이지? 엉? 병신 머저리 새끼들아, 큭큭!”
“닥쳐라!”
“닥치게 만들고 싶으면 재갈이라도 물리고 빨리 끌고 가라.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아그너스는 유페미나의 도움을 거부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명확한 뜻을 표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페미나는 더 이상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나는 그녀에게, 줄에 묶인 채 개처럼 끌려가기 시작한 아그너스의 귓속말이 들려왔다.
-다음부터는 쓸데없이 나서지 마라. 짜증나니까.
-하지만 당신 이대로는....
-닥쳐. 네가 상관할 바야? 약속은 지킬 테니까 걱정하지 마.
호의는 낯설다.
낯설기에 불쾌하고 불안하다.
“....감히 템빨국에서 무력을 행사한 행위에 대해서 철저히 배상 받을 테니까요.”
아그너스의 독기어린 눈빛에 서려있는 고독을 엿본 유페미나는, 그를 끌고 가는 사냥꾼들에게 그렇게 엄포를 놓았다.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다섯 번의 레벨 업.
그리드가 불과 한 달 만에 이룬 쾌거다.
국가대항전 보상 버프 기간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업적이기는 했지만, 통합랭킹 1위 크리스가 1개의 레벨을 올리는데 평균 3개월 이상이 걸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상식적인 수준으로 빠른 레벨 업 속도였다.
실제로 지금 바깥세상은 그리드의 미친 레벨 업 속도가 연일 화제가 되고 있었다. 전 세계 플레이어들이 격변하는 랭킹에 주목한 채 그리드를 주제로 떠들었다. 얼마 전 그리드가 새롭게 얻은 <이족의 왕> 칭호 효과 덕분이라는 등,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의 관심사는 자신의 레벨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템빨골이다.
“그것도 안 맞아?”
딱! 딱딱!
갈구노스의 해골병사가 죽고 떨구는 뼈 조각.
아이템 이름은 ‘해골병사의 뼈 조각’으로 통일되지만, 공교롭게도 각자 부위가 달랐다.
어떤 것은 갈비뼈 조각이었고 어떤 것은 쇄골 조각이었으며 또 어떤 것은 왼쪽 팔뼈 조각이라는 식이었다.
물론 그리드가 봤을 때는 다 똑같은 뼈 조각으로 보였지만, 어찌됐든 뼈 조각의 부위가 저마다 달랐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템빨골이 자신의 몸에다가 뼈 조각을 덧붙이기 위해서는 ‘동일 부위’의 뼈 조각이 필요하다는 문제였다.
예를 들어서 오른팔을 강화시키고 싶으면 오른쪽 팔뼈 조각이 필요한 개념이다.
‘이런 썩을... 잡템 주제에 드롭률도 더럽게 낮다 싶더니.’
거기에 부위까지 나뉠 줄이야?
템빨골들이 모든 부위의 뼈를 강화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갈구노스의 해골 병사를 쓰러뜨려야할지, 감도 안 잡힌다.
계속 같은 부위만 드롭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설령 수만 마리를 사냥해도 모든 부위의 뼈 조각을 얻지 못할 공산도 컸다.
‘부위별로 강화할 수 있는 횟수가 1회밖에 안 되니까 중복 부위의 뼈는 나와 봤자 쓸모도 없... 응?’
그리드는 자신의 걱정이 쓸데없는 기우였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해골병사의 뼈 조각>을 획득하였습니다.]
딱! 딱딱!!
갈구노스의 해골병사들이 새롭게 드롭하기 시작한 뼈 조각들, 대부분 당장 필요한 부위의 뼈 조각들이었으니까.
그렇다.
걱정과 달리 중복 부위는 거의 나오질 않았다.
‘미쳤다...’
새로운 뼈 조각을 얻고 기뻐하는 템빨골들을 바라보면서, 그리드는 높은 행운 스탯의 위력이 얼마나 사기적인 힘인지 새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Satisfy를 접하기 전까지는 운이 아예 없었던 지난 인생이 억울하고 허무할 지경이었다.
템빨골들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템빨골 1과 템빨골 2가 모든 부위의 뼈를 강화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1차 각성 완료.]
[템빨골 1과 템빨골 2의 모든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템빨골들의 키가 전보다 1.2배가량 커졌다. 커다란 두개골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비쩍 말랐던 뼈들이 통뼈가 되었다.
체격이 마안족보다 꽤 커졌을 정도.
...두개골도 커지는 바람에 비율은 여전히 구렸지만.
‘예감이 좋다!’
그리드는 더욱 더 사냥에 박차를 가했다.
어느덧 198레벨을 달성한 템빨골들의 레벨을 내친김에 200까지 찍어서 2차 전직을 시키려는 계획이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템빨골들은 갈구노스의 해골병사와 비교해서 너무 약했다. 티라멧이 잠시만 한 눈 팔아도 어느새 죽어서 역소환됐다.
결국 그리드는 자신이 직접 템빨골들을 보호하며 적을 사냥했다.
그리고 며칠 후.
[템빨골 1과 템빨골 2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템빨골 1과 템빨골 2의 전직이 가능해집니다!]
그리드는 목적한 바를 이루었고, 템빨골들은 기쁨에 춤을... 추려다가 그리드의 눈치를 보면서 부동자세로 섰다.
꿀꺽, 기대감에 휩싸여 마른 침을 삼킨 그리드가 템빨골들의 전직 가능 직업 목록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