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6권 - 22화
미쳤다.
이 표현은 현대의 한국인이 흔히 사용하는 궁극의 감탄사 중 하나다.
하지만 그리드는 최근 그 사용을 자제해왔다.
일국의 왕이 사용하기에는 다소 저급하게 느껴지는 감탄사였기 때문이다. 내가 후로이도 아니고.... 기본적인 이미지 관리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체통이고 나발이고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와, 진짜 미친 초대박. 경험치 오르는 속도 개지려 미친. 이거 완전히 미친 거 아니냐?? 엉? 그치 노에야?”
“아까부터 뭐라는지 모르겠다옹....”
[<갈구노스의 해골 병사>를 해치웠습니다.]
[<갈구노스의 해골 병사>를 해치...]
[<갈구노스의 해골 병사>를....]
[경험치 15,905,099을 분배 받았습니다.]
[경험치 15,905,099을 분배...]
[경험치....]
<+4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검>
열망의 무아검에 ‘깨달음’이라는 수식언이 붙은 이유는 단순하다.
<깨달음> 스킬의 존재 때문이었다.
<깨달음>Lv.3
지속형 패시브.
캐릭터 경험치와 스킬 경험치 획득량이 10.9퍼센트 상승하고 명중률과 회피력이 20.3퍼센트 상승합니다.
*신화 등급 아이템에 귀속 된 스킬은 레벨 업이 가능합니다.
경험치 획득량 상승.
그렇다.
깨달음의 효과는 드래곤의 축복과 같았다. 아니, 레벨을 올릴 수 있으니 드래곤의 축복보다 조금 더 나았다.
열망의 무아검을 자기 몸처럼 애용해온 그리드는 깨달음 효과를 너무 당연하게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간과한 사실인데, 드래곤의 축복과 중첩 된 깨달음의 효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
경험치 상승량 항시 20.9퍼센트 적용.
이는 그리드가 대량의 명성을 투자해야만 뽑을 수 있는 <경험치 상승 물약>보다 무려 0.9퍼센트나 높은 수치다.
키야아악!!
케엑!!
갈구노스의 사원 지하 1층.
해골들이 죽어나간다. 경험치 물약까지 복용한 그리드의 경험치 게이지가 쑥쑥 오른다.
사실, 처음 지하로 내려왔을 때 그리드는 무척 실망했었다.
지상에 등장하는 <무덤을 빠져나온 무신의 추종자>보다 더 강하고 더 많은 경험치를 주는 몬스터가 출현하기를 기대했건만, 지하의 몬스터들은 무신의 추종자보다 도리어 약하고 경험치도 배 이상 적게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망은 잠시뿐.
그리드의 실망감은 희열로 바뀐 지 오래였다.
키야아!!
무신의 추종자와 달리 빠르게 학살 가능한 갈구노스의 해골병사들.
놈들의 개체수는 무신의 추종자보다 5배 이상 많았고 리젠 속도도 터무니없이 빨랐다.
물론 이건 일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해골계열 언데드의 내구력이 약하다고는 하지만, 갈구노스의 해골병사는 레벨이 350을 넘는 상급 몬스터였으니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특히 체력이 낮은 대신 높은 공격력이 압권이다.
단순한 만큼 빠르고 정확한 찌르기.
긴 창을 무기로 사용하는 해골병사들의 공격은 명중률이 굉장히 높았고 위력도 컸다. 현재 하이랭커들의 평균 방어력이라고 추정되는 4천 초반대 방어력도 위협할 수준.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리드의 방어력은 평균값을 가뿐히 웃돌았다.
체력 스탯으로 오르는 방어력만 해도 2,400에 육박하고 +3무한한 애정의 발할라 하나가 올려주는 방어력이 1,600이 넘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리드의 총 방어력은 6천에 육박해 있었다.
갈구노스의 해골병사가 아무리 후려갈겨도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에 불과했다.
심지어 독을 뿜는 바위다.
[3,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3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옵션 효과로 <독귀의 독>을 방출합니다!]
쏴아아아-
자욱하게 퍼지는 독무에 그리드를 둘러싸고 있던 해골병사들이 일제히 중독된다. 누리끼리했던 뼈가 녹색으로 삭아간다.
생명력을 잃어가는 녀석들을.
[<+4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검> 의 옵션 효과로 검은 불꽃이 폭발합니다!]
콰콰콰쾅!!
그리드가 극의에 오른 속도로 공격하자 검은 불꽃이 연속적으로 폭발하며 덮쳤고.
휘리릭-! 콰자작!!
번쩍!!
“연(聯)!”
“캬캭! 캬캬캬캭!!”
“....”
신을 겨누는 칼날과 빛의 정령, 그리고 랜디와 템빨골들, 마지막으로 티라멧이 그리드를 보좌하니 해골병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중독 된 상태로 불길에 휩싸인 채 칼에 베이고, 주먹에 얻어맞고, 뼈를 분쇄당하고, 은사에 넘어지는 등.
수십 단위의 해골병사가 일거에 무력화됐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재앙이 될 대량의 몬스터가 그리드에게는 몰이사냥이라는 축복으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지옥제일마수님 앞에서 무례하다냥!!”
퍼엉-!
몇 살아남은 해골병사들은 노에가 해치워주었으니, 마무리도 완벽하다.
“나 잠깐 쉰다.”
심지어 그리드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유니콘의 축복> 효과로 모든 자원의 회복 속도가 20퍼센트 상승합니다.]
전투 중간마다 템빨콘에 탑승해서 스태미나의 회복을 도모했다.
푸륵! 푸르륵!
상태:짜증. 우울.
(수컷 말고 암컷을 태우고 싶다.)
...템빨콘은 상당한 고충을 느끼는 듯했지만 그리드는 괘념치 않았다.
최대한 함께하며 호감도를 높이는 편이 좋기도 했고, 사냥 중에 템빨콘을 소환하면 템빨콘도 경험치를 분배 받고 레벨이 올랐으니 템빨콘도 꼬박꼬박 부려먹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레벨 오를 때마다 좋아하는 주제에 끝까지 튕기기는. 근데 쟤들은 아까부터 뭐하는 거지?’
템빨콘 위에 앉아 뜨개질 하던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템빨골들이 전장 곳곳에 떨어져있는 뼈 조각을 들어서 살펴보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마치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예림이(섹시여고생)의 모습을 닮아있었기 때문에 영 불안했다.
‘설마, 갖고 싶은 건가?’
안 된다.
세상에 어느 플레이어가 소환수하고 잡템을 나눈단 말인가? 자기 펫한테 있는 템, 없는 템 다 퍼주는 ‘냥멍이’도 아니고, 나는 그런 호구가 아니다.
황급히 템빨콘에서 내린 그리드가 지금 막 쿨타임이 돌아온 <초연>을 전개, 한쪽 길목에서 달려오고 있는 해골병사들을 쓸어버린 후 사방팔방에 떨어져있는 잡템들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물론 템빨골들이 유심히 살펴보던 <갈구노스의 해골병사의 뼈 조각>도 있었다.
‘고레벨 언데드의 유해니까 꽤 짭짤하게 팔릴 텐데.’
두껍고 누리끼리한 뼈 조각들.
제법 단단해서 방어구 제작 재료로 써도 좋을 듯하다.
물론 뼈로 만든 아이템은 내구력이 낮고 수리도 어려워서 굳이 직접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딱! 딱딱딱!
템빨골들이 그리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 ⌓ 이런 음흉한 눈매를 짓고 있던 녀석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빠각!
턱이 맞부딪치자 맞물리는 이빨에 손가락 마디 하나가 끊어져 나갔지만 템빨골 2가 그걸 더듬더듬 주워서 붙여주니 금방 낫는다.
“너희들... 정말로 이게 갖고 싶은 거야?”
딱! 딱딱!!
템빨골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흥분한 건지 턱을 맞부딪치는 속도가 순간적으로 엄청 빨라졌다.
“해골이라서 해골 뼈에 관심 있는 건가...? 하지만 전에는 안 그랬잖아?”
갈구노스의 해골병사가 뼈 조각을 드롭하는 확률은 대략 3퍼센트 내외였다.
잡템치고는 엄청 낮은 드롭 확률이었고, 이는 뼈 조각의 가치가 예상보다 높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되었다.
그리드는 영 내키질 않았다.
템빨골은 별도의 호감도가 존재하는 소환수도 아닌데 귀한 아이템을 굳이 선물로 줘야하나 싶었다.
하지만....
‘으으.’
템빨골은 비록 말만 못할 뿐이지 명확한 감정을 표출하는 고등급 소환수다. 생긴 것도 나름 귀엽고 말도 잘 들어서 그리드는 녀석들을 꽤 좋아했다.
무엇보다 미래에 거는 기대가 컸다.
진화하는 해골.
마왕 토벌전에서는 데스나이트와 리치의 스킨을 썼던 녀석들.... 어쩌면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좋아.”
한참을 고민해본 그리드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뼈 조각을 꺼냈다.
2개의 뼈 조각이었다.
“가져가. 선물이다.”
딱! 딱딱딱!!
도대체 얼마나 기쁘기에 저럴까.
그리드에게 커다란 뼈다귀를 선물 받은 템빨골들이 얼싸안고 탭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물론 그리드가 잽싸게 제지했다.
녀석들의 2차 전직 직업 목록에도 ‘댄서’가 추가될까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키에....
춤을 못 추게 하자 시무룩해진 템빨골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손에 쥔 뼈 조각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활짝 웃은 녀석들이 그것을 자신의 갈비뼈 틈새에 끼워 넣기 시작했다.
“....엉?”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에 그리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캬핫! 캬하핫!!
갈비뼈 한 대씩을 추가하고 기쁘다는 듯이 웃는 템빨골들.
녀석들의 골격이 조금 커졌다.
잘못 본 게 아니다.
작지만 확실한 변화가 있었다.
***
엘리자베스의 공방.
“안 오네.”
아직 엘리자베스가 템빨단에 가입하기 전.
바알의 계약자 아그너스는 그녀의 공방을 침략한 이력이 있다.
아그너스가 라인하르트를 방문한 목적이 엘리자베스일 거라고 추측한 경위다.
하지만 어찌 된 게 감감무소식이었다.
“.....”
로드를 목마 태운 라우엘과 그들을 호위하는 코크.
두 사내가 잠시 조용히 선 그때.
“도중에 놓쳤다는군.”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페이커가 보고했다.
“아그너스가 템빨그림자단의 추적을 따돌리고 사라졌다.”
***
같은 시각, 시장가의 작은 여관.
“오셨군요.”
기척을 느낀 유페미나가 말하자 피투성이의 사내가 방안에 들어섰다. 무너지듯 주저앉는 그의 로브가 벗겨지면서 초록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나왔다.
아그너스.
그는, 여태껏 셀 수 없이 많은 문제를 일으켜온 거악이다.
그는, 현재 수많은 장인급 세공사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살인마였다.
하지만.
“많이 다치셨네요.”
유페미나는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
그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일전의 만남을 통해서 알게 되었으니까.
‘도대체 몇 개의 저주에 걸린 거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그너스의 상태를 살피는 유페미나의 안색이 굳었다.
아그너스는 쇠약과 중독, 회복 불가 등의 온갖 저주에 걸려있었다.
그래, 저주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회복되는 상태이상과는 격이 다른, ‘스토리’와 ‘시스템’ 등의 강력한 인과율이 개입한 저주.
‘저주를 푸는 방법은 저주를 건 대상을 죽이거나 관련 스토리를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어.’
물약을 줘봤자 소용없다.
손수건을 꺼낸 유페미나가 아그너스의 창백한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핏자국을 닦아내주며 말했다.
“7개국에 수배당한 상태라더니, 꼴이 가관이네요. 억울하겠어요?”
유페미나의 손길을 신경질적으로 쳐낸 아그너스가 조소했다.
“큭큭, 내가 억울할 게 뭐가 있지?”
“세공사들, 당신이 죽인 게 아니잖아요.”
“.....”
움찔, 아그너스의 어깨가 떨렸다.
하지만 금세 다시 광소를 머금더니 말했다.
“긴 말할 필요 없다. 내가 너를 찾아온 용건은 하나뿐이야.”
사랑했던 사람이 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주었던 사람이다.
못난 나 때문에 끔찍한 일을 겪고 세상을 떠난 그녀를, 아그너스는 반드시 되살리고 싶었다.
그녀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무드를 해방시키겠다.”
무력한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고 쌓아올린 힘.
지난 수 년 동안 악착 같이 쌓아올린 모든 힘을. 아니, 나의 모든 것을 바치리라.
“반드시 약속을 지켜라.”
아그너스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광기가 사라진 금안이 유페미나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유페미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 명예를 걸고 약속을 지킬게요.”
눈앞의 사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런 선택을 내렸을지, 유페미나는 잘 알고 있었다.
평생토록 고통 받아온 사내를 배신할 정도로 그녀는 독하지 않았다. 무무드 해방 퀘스트를 완료한 뒤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었다.
....약속의 결과가 그를 더 불행하게 만들지라도.
콰앙-!!
방문이 부서져나갔다.
타국에서부터 아그너스를 추격해온 사냥꾼들.
아그너스의 몸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 그 괴물 같은 실력자들을, 아그너스는 완전히 따돌리지 못했던 것이다.
“...킥킥, 다음에 다시 만나야겠군.”
슬그머니 일어선 아그너스가 유페미나를 창문 바깥으로 밀어버렸다.
자신의 싸움. 더군다나 승산 없는 싸움에 꼬맹이가 휩쓸리는 것을 그는 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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