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6권 - 20화
“5마리씩은 어떠냐.”
“3마리.”
“그럼 4마리는?”
“3마리.”
“3마리는 너무 적다.”
“3마리!”
“...조금 생각해보마. 내일 다시 찾아오너라.”
“3마리!”
“내일 다시 찾아오라하지 않느냐!”
“넵...”
의외로, 네펠리나는 무척 신중했다.
협상을 함에 있어서 초월종의 격을 막무가내로 내세우지도, 후환을 언급하며 겁박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협상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고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선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드래곤은 세상 모든 존재를 하찮게 여긴다고 들었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그들을 보면 굉장히 잔혹하고, 이기적이고, 변덕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하던데 듣던 것과는 굉장히 다른 태도로군요. 아마 그녀는 불리한 입장에 있는 거 아닐까요? 우리에게 신세를 지지 않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던가....”
라우엘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스틱세이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은 탄생과 동시에 대부분의 마법을 깨우칩니다. 실제로 네펠리나가 유지시키고 있다는 공간 개조 마법은 평범한 인간 마법사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것이죠. 하물며 폴리모프까지 사용하다니.... 해츨링은 인간의 도움 따위 없어도 혼자서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100마리의 소와 돼지?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몇 분 만에 도축할 수 있겠죠. 가축을 지키려는 인간까지 모두 짓뭉개 죽이면서.”
“그런 네펠리나가 왜 ‘명령’을 내리지 않고 협상을 시도하는 걸까요?”
“미친 거죠.”
“....?”
“정신이 나간 겁니다. 그 해츨링은 미쳤어요.”
드래곤은 사회적인 동물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종족이기 때문에 오만하며 이기적이었다.
인간이 집을 지을 때 개미집을 무너뜨릴 것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드래곤 또한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고 자신의 뜻을 반드시 이뤄냈다.
인간을 배려한 시점부터 네펠리나는 보통의 드래곤과 완전히 다른 존재인 것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미쳤다니.... 오히려 상식적인 존재잖아?”
“드래곤이 상식적이니까 미친 겁니다. 본래 드래곤은 우리의 상식으로 평가할 수 없는 존재니까요. 우리 관점에서 그들은 늘 이기적이고 변덕을 부려야 정상입니다.”
“아직 해츨링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
“드래곤의 사고관은 탄생과 동시에 성립되기 때문에 나이를 논하는 건 무의미합니다.”
“흐음....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는데?”
“뭘 어떻게 합니까? 미친 용은 쉽게 볼 수 없으니 곁에 두고 연구해야죠.”
스틱세이가 드래곤이라는 종족에게 품고 있는 원한과 공포는 굉장히 큰 것이었다.
미식룡 레이더스 입장에서는 찰나의 유희에 불과했을 저주.
그 저주 탓에 평생을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우게 된 스틱세이는 드래곤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떨쳐내게 만들 정도로 네펠리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음... 하지만 매일 3마리씩의 돼지와 소를 바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그리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현재 돼지 한 마리의 시세는 2골드, 소 한 마리의 시세는 4골드였다.
18. 매일매일 18골드씩 소모된다는 뜻이다.
열흘이면 180골드, 100일이면 1,800골드다.
1,800골드의 가치?
한화로 무려 216만원이었다.
망설이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게슴츠레한 시선을 보냈다.
“해츨링의 호의를 살 수 있는 기회인데 그 정도는 싸다고 생각해야죠. 까놓고 말해서, 전하께서 아이템 하나 만들면 벌 수 있는 돈이 얼마입니까? 고작 하루 18골드에 연연할 입장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기야 해츨링의 가치를 생각하면 월 70만 원가량의 손실쯤 아무 것도 아니지.”
“그렇죠. 최저임금에도 훨씬 못 미치는 돈으로 해츨링을 묶어두는 겁니다. 완전히 호구 잡는 거예요. 심지어 축복까지 내려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닙니다. 그래도 정 돈이 아까우시면 나랏돈을 쓰십시오.”
“나랏돈?”
“네. 해츨링 밥값을 국가 재정으로 해결하겠습니다.”
“내 개인 퀘스트를 해결하는데 국가 재정을 쓴다고?”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이 나라는 전하껀데. 이 나라를 누구 돈으로 세웠는지 잊으신 건 아니죠? 전하께서 아직도 가난하신 이유가 뭡니까? 나라 세우느라 돈 홀라당 까먹어서 그러신 거 아닙니까. 심지어 국가사업이 손실을 입을 때마다 본인 돈으로 손실을 메꾸셨고.”
“....으음.”
물론, 그리드가 가난하다는 건 엄청난 비약이었다. 그리드는 수백 억 원의 자산가였으니까.
하지만 역시 재벌에는 한참 못 미친다.
그리드가 진짜로 엄~~청난 부자였다면 전용기도 고민 않고 구매했을 테니까.
“좋아. 그렇게 하자.”
스틱세이가 말했듯이 네펠리나는 이미 터무니없이 강력한 존재였다.
그녀를 쫓아내는 건 힘들다고 봐야하니 협상을 해야 할 수밖에 없고, 기왕 협상을 할 거라면 최대한 부담 없이 하는 편이 옳다.
‘나랏돈을 쓰자!’
결정한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축복을 받게 될지 궁금하군.’
무척 기대가 된다.
그리드는 빨리 내일이 오기를 바라면서 아이린과 로드를 찾아가려고 했다.
한데 그를 라우엘이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전하께서 동대륙에서 데려온 요리사 있잖습니까. 포이즌 마스터.”
“이단?”
“네. 그자의 요리 스킬 레벨이 벌써 1년 이상 정체되어 있습니다.”
“왜?”
“요리를 만들어도 아무도 먹어주질 않게 되었으니까요. 스킬 레벨이 오르니까 단지 만들기만 해서는 경험치가 오르는데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아무도 안 먹어주는데?”
“여태까지야 템빨단원들이 독 내성을 올리려고 죽을 각오를 해가면서까지 그자의 요리를 먹었지만....”
“이제는 독 내성이 오를 만큼 올라서 먹을 필요가 없게 된 건가?”
“네. 이단의 요리만으로 올릴 수 있는 독 내성 수치에는 한도가 있으니까요.”
“병사들에게 먹이면?”
“죽을 걸요.”
“....아직도 정상적인 요리는 못 만들어?”
“요리 스킬 레벨이 오를수록 조금 나아지고는 있지만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라우엘이 이단을 써먹을 방법을 그리드에게 설명했고, 한참을 잠자코 듣던 그리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라우엘 너는 천재야.”
“훗... 그래서 고독하지만요. 뭐, 저는 이미 이 고독을 즐기게 된 레벨이랄까.”
“어, 그래. 고독 잘 즐겨. 난 간다.”
***
“와, 저게 뭐야?”
“멋지다....”
라인하르트 인근의 중급자용 사냥터.
오늘도 열심히 사냥을 하고 아이템을 채집하던 플레이어들이 행동을 멈추고 한곳을 주시했다.
500명의 병사들이 보였다.
하나 같이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무장하고 있었으니, 그들은 템빨국의 정예 병사들이 분명했다.
심지어 그들의 선두에 선 아름다운 여기사 <메르세데스>는 이름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여기서 전쟁이라도 하나?”
저런 엄청난 정예 병력이 중급자용 사냥터를 방문한 이유가 뭘까?
플레이어들이 어리둥절할 때였다.
“이쯤이 좋겠군.”
병사들의 행렬이 멈추더니 한 쌍의 부부와 어린 소년이 나타났다.
템빨왕 그리드와 템빨왕비 아이린, 그리고 템빨왕자 로드였다.
펄럭-!
전설의 기사 메르세데스가 사냥터 한가운데 돗자리를 펼쳤고.
“자, 아이린. 앉읍시다.”
“네.”
그리드와 아이린이 돗자리 위에 나란히 앉아 차와 과자를 꺼냈다.
반면 검을 뽑아 쥔 로드는 템빨골 1과 2와 함께 몬스터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채챙! 챙!!
“이얍!”
“키엑!”
“하하하! 우리 아들의 검술 솜씨가 일취월장하는구려.”
“전하를 닮은 덕분이지요.”
“....”
아니, 뭐 저런 요란한 피크닉이 다 있...
날고뛰는 로드와 그를 사랑스럽게 지켜보는 그리드 부부.
사냥터 한가운데 펼쳐지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문득 자신의 주변이 엄청 한산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주변에 몬스터가 없었다.
템빨국 병사들이 보이는 몬스터에게 족족 돌멩이를 던져서 로드가 있는 방향으로 유인해갔기 때문이다.
500명의 정예 병력이 단 한 명의 왕자를 위해서 몹몰이를 하는 것이었다!
“저게 말로만 듣던 다이아몬드 수저냐.”
“부, 부럽다....”
우리도 그리드의 아들이고 싶다!
손가락만 쪽쪽 빨게 된 플레이어들이었지만 딱히 그리드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아니, 도리어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드가 그들을 충분히 배려해준 까닭이다.
“따라오시죠.”
황금빛 이름의 아름다운 여기사.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무려 전설의 기사인 그녀가 플레이어들을 버스 태워줬다.
보스 몬스터가 나타나는 장소마다 찾아가서 보스 몬스터를 죽기 전까지만 패놓고 플레이어들이 마무리할 수 있게끔 양보해줬다. 물론 아이템도 양도했다.
그리드 가족의 피크닉 덕분에 플레이어들은 예상치 못한 횡재를 한 셈이었다.
“템빨국 만세!!”
“템빨왕가 영원하라!!”
환희에 찬 플레이어들의 외침이 사냥터 곳곳에 울려 퍼졌다.
그들의 그리드를 향한 호감이 깊어질수록 템빨국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었다.
‘가족 모임을 이런 식으로 써먹게 하다니...’
아이린을 행복하게 해주는 한편 로드와 템빨골을 성장시키고, 동시에 국민들의 호감을 얻는다.
이 모든 게 라우엘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었다.
“전하, 주변의 보스 몬스터를 모두 정리했습니다.”
“음, 그래.”
메르세데스의 보고를 받은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린. 다음 사냥터... 아니, 다음 피크닉 장소로 이동합시다.”
***
다음날.
그리드는 마안족 왕과 함께 네펠리나를 찾아갔다.
네펠리나는 작은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몸길이는 2미터 정도였고 비늘은 푸른색이었다. 살랑거리는 꼬리와 동그랗고 커다란 눈이 사랑스럽다.
“4마리로 하자꾸나.”
“3마ㄹ... 음.”
끝까지 3마리를 외치려던 그리드가 입을 다물고 생각해본 후 물었다.
“그게 최대한의 양보인 겁니까?”
“그렇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지 않으려면 4마리씩은 먹어야하느니라.”
“좋습니다.”
더 이상 고집을 피우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직감이었다.
그리드가 지난 수 년 동안 쌓아올린 경험에 의하면, 여기서 더 욕심을 부렸다간 일 자체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드는 네펠리나의 요청을 들어준 것에 한술 더 떠서 비위까지 맞춰주었다. 어차피 거래를 성립시킬 거라면 기왕에 잘 보이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미래의 파멸자께서 저를 배려해주신 만큼 저도 흔쾌히 응해드려야죠. 앞으로 매일 소와 돼지를 4마리씩 진상하겠습니다.”
“이해해줘서 다행이구나. 네가 더 따지고 들었다면 조금 화가 났을 것이다.”
“그, 그렇군요...”
해츨링이 화를 내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욕심 버리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십년감수한 그리드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내 한 명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네펠리나가 동그란 머리를 갸웃거렸다.
“저 인간은 무엇이냐?”
“당신의 전속 요리사입니다.”
“전속 요리사? 오직 내 요리만 만드는 인간이라는 것이냐?”
“네, 맞습니다. 위대하신 해츨링께 보내는 최소한의 성의입니다.”
“흠흠. 마음에 드는구나.”
탁! 탁!
네펠리나의 꼬리가 좌우로 살랑거리면서 바닥을 때렸다.
꽤 기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행동이 요리사 이단에게는 사형선고처럼 보였다.
“요, 요, 용....”
용이 만들 음식을 만들라고?
뭐 이런 미친 경우가 있단 말인가?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단에게 그리드가 속삭였다.
“동대륙의 청룡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서대륙의 용은 아주 사악한 존재입니다. 괜히 맛없는 요리를 대접했다가 잡아먹히지 말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
“히익...”
해츨링은 독에 완벽한 내성을 갖추고 있다.
이단이 만든 요리를 아무리 먹어봤자 중독 될 염려가 없다.
또한 마안족은 요리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종족이다.
마안족 도시에서 살아온 해츨링은 아직 제대로 된 요리를 먹어본 경험이 없을 테니, 이단이 만든 요리를 딱히 맛없다고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라우엘의 분석이었다.
라우엘은 네펠리나에게 이단을 바침으로써 네펠리나의 호감을 사는 한편 이단의 요리 스킬 레벨을 크게 올릴 방안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방법은 무척 효과적이었다.
“그리드 너의 태도가 아주 좋구나. 내가 네게 아주 좋은 축복을 내려줄 테다.”
[퀘스트 <해츨링의 부탁>이 진행됩니다.]
[당신은 네펠리나에게 매일 4마리의 소와 4마리의 돼지를 진상하여야합니다.]
[퀘스트 수락 보상으로 <드래곤의 축복>을 받습니다!]
쏴아아아아....
그리드의 몸에 황금색 마력이 깃들기 시작했다.
플레이어 최초.
아니, 어쩌면 인류 최초로 드래곤의 축복을 받게 된 그리드의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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