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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49화 (844/1,794)

템빨 46권 - 18화

“.....”

대신들이 숨을 거뒀다.

우리가 간신히 쌓아올린 삶의 터전은 이미 진즉에 무너졌을 터.

못난 왕 탓에 고생만 해온 백성들과, 우리를 돕기 위해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와 싸워준 템빨국 병사들 또한 모조리 죽었음이라.

꾸욱...

옥좌에 앉은 마안족 왕이 작은 주먹을 거머쥐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파괴뿐.

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불가능하다.

너무나 강대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이 힘은 정녕 지독한 저주다.

“그대가 마안족 왕인가?”

“....”

침입자가 물어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대신들이 흘린 피 냄새가 짙어졌다.

마안족 왕은 당장에라도 눈을 떠 그에게 영겁의 고통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를 죽이고 백성들의 원한을 달래주고 싶었다.

하지만 인내했다. 질끈 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울분과 함께 씹어 삼켰다.

백룡의 눈이 위험하다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눈을 떠선 안 된다고 말했던, 템빨국 재상 라우엘의 신신당부를 잊지 않은 것이다.

고향에서도 버림받은 우리를 위해서 싸워준 은인의 유언을... 어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제와 내가 죽는다면, 나를 대신해서 희생한 템빨국 병사들의 원혼 앞에 고개 들 낯이 없어진다.

나는 살아야한다.

“저항조차 않는가.”

침입자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저벅저벅 다가와, 내 멱살을 움켜쥐고 옥좌에서 끌어내렸다.

지키지도 못하고 복수조차 못하는 무능한 놈에게는 그곳에 앉을 자격이 없다는 듯이.

그때.

“그 손 놔라!!”

누군가가 나타나 소리쳤다.

이 목소리의 주인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본 존재.

나와 시선을 교환하고도 소멸하지 않고 웃어주었던 인간.

‘...그리드.’

도우러 왔는가.

나처럼 쓸모없는 놈에게 너는 무엇을 바라고 얽매이는가.

감사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너는, 맹우를 잘못 택했다.

마안족 왕이 죄의식에 짓눌리는 순간이었다.

“십만대군 학살검!”

콰쾅!

쿠콰콰콰콰쾅!!

강력한 기운이 날아와 마안족 왕을 덮쳤다.

다짜고짜 얻어맞아 피를 토한 마안족 왕의 상념이 깨졌다.

‘저, 저놈이 나를 죽이려고.’

도와주러 온 거 아니었어?

당황한 마안족 왕이 끔찍한 고통 탓에 눈을 부릅뜨는 그때.

펄럭-

그랜드마스터가 마안족 왕의 띠를 풀어버렸다. 마안족 왕의 붉고 푸른 눈동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백룡의 눈> 있었다.

마안족 왕은 직감했다.

죽는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홍염이 나의 몸을 잿더미로 만들 것이며, 타오르는 화염마저 얼리는 냉기가 나의 영혼을 깨뜨리리라.

‘미안하오. 그대들의 희생을 헛되게 했소.’

죽음을 코앞에 둔 마안족 왕이 마음 깊이 사죄했다.

죽어간 템빨국 병사들을 향한 사죄였다.

한데.

“이걸 써라!”

매스 텔레포트를 타고 나타난 그리드가 안경을 씌워주었으니.

피시식...

마안족 왕의 눈에서 용솟음치던 마력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아....!”

색안경 너머 마안족 왕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린다.

파괴되지 않고 온전한 세계.

다른 이들에게는 지독히도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마안족 왕은 지금 이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다.

“이런... 어찌 이런....”

보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자.

세상과 단절되었던 고독한 존재가 처음으로 세상을 대면하게 된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컸다.

지독한 현실을 망각한 마안족 왕이 떨리는 시선으로 대리석 기둥을 바라보았다.

왕관을 쓴 꼬마가 보였다.

마안족 왕 자신이다.

“아... 아아....”

마안족 왕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대리석에 비치는 꼬마가 자신임을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알에서 막 부화한 광룡의 해츨링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구석구석 훑었다.

그리드가 말했다.

“이곳을 나가자. 더 큰 세상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리드....”

마안족 왕이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드는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너의 고독도 이제 끝이라고 말하듯이 커다란 손을 내밀어왔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무능한 내게.

하등 쓸모없는 나에게 너의 손을 붙잡을 자격이 있을까?

망설이는 마안족 왕.

어린아이처럼 우물쭈물하는 그의 작은 손을 그리드가 거머쥐었다.

“앞으로 많은 일을 하면 되잖아? 자, 가자. 모두가 기다리고 있어. 너의 백성들도, 나의 병사들도 네가 무사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이... 살아있었는가....”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꽈악.

마안족 왕이 그리드의 손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리드가 스틱세이에게 눈짓했고, 이미 매스 텔레포트의 주문을 외우고 있던 스틱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번쩍-!

마법이 발동했다.

그리드, 스틱세이, 마안족 왕, 그리고 그랜드마스터 네 사람이 모두 함께 성 밖으로 전송됐다.

“...엉? 넷?”

왜 넷이야?

“쟤, 쟤는 왜 달고 왔어!”

기겁한 그리드가 그랜드마스터를 가리키며 소리치자 귀신을 본 표정을 지은 스틱세이가 항변했다.

“쟤가 데리고 나온 게 아니라 저자가 마법에 멋대로 편승한 겁니다.”

“뭐? 그게 가능하다고?!”

“불가능하죠.”

“근데 지금 이 상황은 뭔데?”

“그러게 말입니다. 무척 흥미롭군요.”

당황하는 그리드와 탐구욕에 휩싸이는 스틱세이.

두 사람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마안족 왕은 성문 앞에 모인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성들이 보였다.

내가 수천, 수만 번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 늠름하고 아름다운 이들이었다.

“저자를 포위해라!”

템빨단원들과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드 일행 사이에 섞인 불청객을 포위하고 창과 칼을 겨눴다.

졸지에 수천 명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그랜드마스터는 그저 묵묵히 서있을 뿐이었다.

그에게 그리드가 으름장을 놓았다.

“순순히 물러나도록 해. 어차피 계획은 실패했잖아?”

팔짱 껸 그랜드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건 실패로군.”

그랜드마스터의 목적은 마안족 왕의 죽음이었다.

발할라 왕에게 넘겨받은 백룡의 눈으로 마안족 왕의 자멸을 유도하면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리드가 나타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고위 대악마가 지키고 있을 에테르 다이아몬드를 어떻게 구해온 거지? 흐음, 사마천에게 사기를 당했어.”

동쪽의 지보 사마천.

발할라 왕의 책사가 된 그는 백룡의 눈을 넘기는 대가로 제국에게 많은 요구사항을 늘어놓았고 제국은 그중 대부분을 들어주었다. 백룡의 눈의 가치가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뚱맞게 등장한 에테르 안경 탓에 백룡의 눈의 가치가 일부 하락했다. 적어도 마안족 왕을 해치우는 수단으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제국이 호구가 된 셈이다.

“어쩔 수 없지. 물러날 수밖에.”

그랜드마스터는 의외로 순순히 포기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발걸음을 돌리더니 저 멀리, 우물쭈물하며 대기하고 있는 골드히트와 흑기사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를 보고 십년감수하는 그리드의 곁으로 다가온 지슈카가 말했다.

“죽이자.”

그녀는 그랜드마스터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자가 언젠가 최대의 난적이 될 거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했다.

지금이 기회인 것이다.

휴전 협정 때문에 그랜드마스터의 공격력이 무력화 된 이때, 우리가 숫적 우위를 살려서 피아를 구분 않는 공격을 쏟아 붓는다면 그랜드마스터를 해치울 수도 있지 않을까?

호전적인 지슈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리드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지금 덤볐다가는 우리가 전멸해.”

골드히트가 광역 마법이라도 몇 번 난사했다가는 템빨국 병사들이 휩쓸려 죽을 것이다.

지공의 <마법 관조> 스킬이 늘 운 좋게 터져준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쿨타임 문제도 있었다.

아니, 다 떠나서 가장 큰 문제는 그랜드마스터 일신의 무력이다.

황제의 그림자이자 최강의 무력을 상징하는 베인.

영원의 탑의 주인이자 최강의 마법을 상징하는 골드히트.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귀재 카일.

마지막으로 ‘마갑’ 첸슬러.

위 네 사람과 달리,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는 다섯 기둥 중에서도 명성이 낮았다.

당연하다.

그는 영웅적인 활약성이 전무했으니까.

표면에 나서는 법이 없으니 명성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랜드마스터의 실체를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제국 최강!’

메르세데스가 말하길, 다른 네 명의 기둥 모두 그랜드마스터를 두려워하거나 공경한다고 했다.

임철호 회장조차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해주었던 요주의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영웅왕 시스템은 그를 ‘시대의 강자’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강자’라고 알려왔다.

그리드는 그랜드마스터를 최소 가람과 동격의 존재로 인식했다.

현재 시점에서는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내가 빨리 강해져야한다.’

넘어야할 산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 산 모두 넘을 수 있다.

불과 1년 만에 엄청난 성장을 이룬 크라우젤을 보고 품게 된 확신이다.

플레이어의 잠재력은, 아직도 무궁무진하다.

‘강해지자.’

재차 다짐한 그리드가 마안족 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에테르 안경 덕분에 백성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을 수 있게 된 그는 감격에 몸을 떨며 백성들과 대면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품에 안았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광경이었다.

쩌적. 쩌저적!

안경에 금만 안 갔으면.

“어? 자, 잠깐! 야! 눈 감아! 빨리!!”

기겁한 그리드가 마안족 왕에게 달려가 투구를 건네주었다. 에테르 안경이 달린 투구였다.

***

“저는 지금 템빨국 수도 라인하르트에 나와 있습니다!”

대장장이가 대거 유입된 후 호황을 맞이한 템빨국.

평소에도 사람이 바글바글한 그곳에 더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각국 방송국 기자들이 취재 경쟁을 벌였다.

마안족.

일반인에게는 많이 생소한 마족 집단이 템빨국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마족이라고 들었는데 하나 같이 귀엽게 생겼네.”

“그러게. 끔찍한 혼종을 상상했었는데.”

“인형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아.”

“근데 왜 죄다 안대를 쓰고 있는 거지?”

십공신의 뒤를 따라 대로를 걷는 일천 명의 마안족.

하나 같이 기고만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3등신 마족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행렬의 선두에는 그리드와 마안족 왕이 있었다.

금빛 햇살에 물든 대도시의 풍광.

그 장대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마안족 왕이 감탄했다.

“정녕 멋지구나... 하늘도, 태양도, 도시도... 모든 것이 다 내가 평생토록 상상해왔던 모습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아름답구나.”

그리드가 빙그레 웃었다.

“어서 적응해. 앞으로 매일 보게 될 풍경인데 언제까지 감탄만 할 거야?”

“....꿈만 같구나.”

마안족 왕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그리드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고 행렬도 정지했다.

거리의 만인이 모두 마안족 왕을 쳐다보았다.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마안족 왕에게 초점을 맞췄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맙다. 정말로.... 고마워.”

마안족 왕이 그리드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마안족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콰당! 우당탕!

커다란 머리가 기울어지자 균형을 잃은 몇 명의 마안족이 자빠졌지만, 못 본 거로 하는 편이 피차 좋겠지.

“우리 마안족은 네게 입은 은혜를 평생토록 갚아나갈 것이며.”

털썩!

마안족 왕이 무릎을 꿇었다.

당황한 그리드가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그는 그리드의 손길을 거부했다.

“너를 왕으로 섬기겠다. 그리드, 부디 우리를 거두어다오.”

“....!”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안족은 본래 부락을 이루고 사는 수준에 불과했던 종족에 불과했다. 템빨국과 국가 대 국가로써 교류한다는 건 사실 어폐가 있었다. 더군다나 삶의 터전마저 잃고 템빨국에 의존하게 되었으니, 그들이 템빨국 산하로 들어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태였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장소에서 선언할 줄은 몰랐다.

마족은 인간을 하위종으로 인식한다는 점.

마안족의 프라이드가 뱀파이어와 비견될 정도로 높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마안족의 행동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나의 저주받은 숙명을 네가 뿌리 채 뽑아내주었다. 의미를 잃은 옥좌에 멍하니 앉은 채, 영혼이 서리를 맞은 것처럼 차갑게 식어가고 있음을 느끼며 절망하고 있을 때 네가 나를 구원하였다. 다크 플레임 화이트 아이스 캐슬을 슬프게 적셨던 붉은 피를 바로 네가 씻겨내 주었다. 그리드, 나는 네게 충성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새로운」 숙명이며, 앞으로 마안족이 「영원불멸」 걷게 될 「길」이다. 나, 오늘부로 자격 없는 왕의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의 발아래 서겠다.”

“.....”

믿기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수만 명의 인파가 몰린 거리가 한 순간 적막에 빠진 것이다.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적막이었다.

한쪽 손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라우엘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중얼거렸다.

“아아─ 이것이 바로 「시간이 멈춘 광경」이라는 것이다.”

어찌됐든.

<(속보)그리드, 마족의 왕이 되다!>

<또 다시 플레이어 최초의 위업을 달성한 그리드!>

<템빨국의 국력은 어디까지 상승하는가?>

<(칼럼)마안족에 대해서 알아보자>

<교황 데미안, 마안족과 영혼의 동반자가 되고 싶다고 밝혀....>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제작사 월트 디즈디 컴퍼니, 마안족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 개런티는 템빨왕에게?>

그리드는 귀중한 전력을 손에 넣었다.

동료들의 희생과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리드가 얻은 것은 마안족 뿐만이 아니었다.

작은 용과의 만남이 그리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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