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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47화 (842/1,794)

템빨 46권 - 16화

“저자와 무슨 사이십니까?”

스틱세이가 질문해왔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마법왕 골드히트가 있었다.

“사이? 뭔 사이? 굳이 말하자면 서로 죽이고 싶어 하는 사이 아닐까?”

그리드가 걸음을 서두르면서 답하자 스틱세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저자는 왜 전하를 봐준 거죠?”

“봐줬다고? 상태가 안 좋은 게 아니라?”

“마법왕의 마력 회복 속도는 세계수의 힘을 빌린 엘프보다 빠릅니다. 본인의 컨디션이야 쉽게 조절할 수 있죠. 실제로 그는 전하와 대치하는 상황에서도 마력이 실시간으로 회복되고 있었는데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이 의아하군요.”

“육체에 한계가 온 거 아니야? 메르세데스가 말하기를 마법왕의 육체는 대체적으로 내구력이 약하다던데.”

“아뇨. 멀쩡해보였습니다만.”

“음.... 스틱세이 당신을 경계했다던가?”

“하하하... 마법왕의 실력이 저보다 한 수 위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지식을 탐구하는 자일 뿐, 마법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마법 잘 쓰잖아? 심지어 정령술도 쓸 수 있고.”

“지식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익힌 소양일 뿐. 대륙 제일의 마법사 앞에서 자랑할 수준은 아닙니다.”

‘....설마, 또 운인가.’

‘운 좋게’ 터진 지공의 효과 덕분에 마법 발동에 실패한 골드히트가 ‘운 좋게’ 내 실력을 과대평가했고, 또 ‘운 좋게’ 전의를 상실한 전개 같다.

요즘에는 삼류 만화나 소설에도 나오지 않을 운빨 착각 전개였지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나는 여태껏 그 황당한 삼류 전개를 몇 번이나 체험해왔으니까. 심지어 지금은 엄청난 운빨까지 갖춘 상태고.

‘살 맛 난다.’

이게 바로 위대한 행운의 힘!

드디어 불운을 완전히 극복한 기분이다!

‘그리고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전개는 일류문학 전개였다고!’

물론 근거 없는 주장이다.

하지만 어쨌든 일류 소설의 주인공이 된 느낌!

기쁨에 주먹을 불끈 말아 쥔 그리드는 어느새 분수대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익살맞은 표정의 알몸 소년 동상이 분수대를 장식하고 있다. 녀석의 작은 그곳에서 물이 졸졸졸 새어나온다.

마안족의 안내를 받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 마안족은 소년 동상의 특정 부위를 몇 번 간단히 조작한 끝에 마안족 도시로 향하는 입구를 열었던 바 있다.

“근데 그 간단한 조작법이 기억 안 나네. 라우엘한테 물어볼 테니까 잠시....”

“제게 맡기시죠.”

스틱세이는 데스티니 가디언즈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특유의 학구열이다. 덕분에 마안족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고 마안족 도시에 입장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었다.

쿠르릉.

스틱세이가 소년 동상을 몇 번 만져 조작하자 공간이 찢어지더니 포탈이 열렸다.

마안족 도시와 연결 된 포탈이었다.“수명이 많이 줄었군요.”

“수명?”

다짜고짜 수명이 왜?

스틱세이에게 저주로 인한 지병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 그리드가 질색했다.

“스틱세이, 당신 이제 죽는 거야!?”

“.....”

입을 닫은 스틱세이가 그리드를 노려보았다.

하이엘프답게 지독히도 오래 살아온 그였지만 그는 아직 더 오래 살고 싶었다. 안 그래도 심장이 저릴 때마다 죽을 것처럼 아파서 ‘죽음’에 민감한 입장인데 그리드가 섣불리 이를 논하자 짜증이 솟구쳤다.

“저는 아직 죽을 생각 없고요. 포탈의 수명을 말하는 겁니다.”

“포탈에도 수명이 있어?”

“물건과 마찬가지입니다. 마력으로 만든 장치라고 해도 영원토록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죠. 더군다나 이 포탈은 외부로부터 충격을 받은 까닭에 수명이 더 줄어든 상태입니다.”

“무슨 충격?”

“아무래도 골드히트가 이 포탈을 매개로 특이한 마법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때 포탈의 술식이 무리하게 바뀌어서 포탈이 데미지를 입고 수명이 크게 줄었어요. 앞으로 1년 내에 파괴되지 않을지....”

“파괴되면 어떻게 되는데?”

“마안족 도시와 지상을 잇는 통로가 사라지고 마안족 도시는 고립되겠지요.”

“다시 만들 수는 없나?”

“아마 힘들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반영구적으로 작동하는 포탈은 거인족밖에 만들지 못하는데 거인족의 행방은 묘연하니....”

“...흠, 괜찮아. 어차피 마안족은 이곳을 버려야 돼.”

당연한 일이다.

이제 마안족 도시의 위치가 만천하에 공개됐으니 마안족은 안전을 위해서라도 거처를 옮겨야했다.

“마안족을 템빨국으로 이주시킬 생각이신지?”

“당연히.”

“저도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마안족 도서관에 잠들어있다는 마족의 지식이 탐나는군요. 그럼 출발하시죠.”

그리드와 스틱세이, 그리고 전 자이언트 길드 출신 템빨단원들과 2천 명의 병사가 포탈을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 도시 입구에 도착한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도시의 상황이 그리드 일행의 예상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

오와 열을 맞춰 도시 입구를 막고 선 템빨국 병사들.

그들은 만신창이였다. 방어구에 성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들이 얼마나 모진 싸움을 해왔을지 엿볼 수 있었다.

지옥 같았을 터.

지쳤을 것이다.

한데 이 기세는 뭐란 말인가?

템빨국 병사들은 잘 벼린 칼처럼 기세가 강했다. 일말의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제국 병사들을 쏘아보았다.

반면 그들과 마주보고 선 제국 병사들은 기세가 완전히 죽어있었다. 호화스러운 갑옷에는 흠집 하나 없었고, 필시 체력에도 여유가 있을 텐데 마치 싸움에 진 개처럼 위축되었다.

“....?”

무슨 상황이지?

그리드 일행이 도시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제국 병사들을 노려보고 있는 템빨국 병사들의 등 너머로 피와 살이 난무하는 광경이 보였다.

흑발의 아름다운 미녀가 정체모를 기사의 배를 칼로 쑤시고 머리에는 총을 겨누고 있었다.

“사, 살려....”

울컥 피를 토한 기사가 애원했지만 부질없었다.

흑발의 미녀는 일말의 자비 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기사의 머리통은 수박처럼 터져나갔다.

“우와아아아아아!!”

쿵! 쿵! 쿵!

템빨국 병사들이 짐승처럼 포효하며 발을 굴렀다. 안 그래도 기가 죽어있던 제국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뒷걸음치고 말았다.

“아, 오셨어요?”

남은 적들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있던 흑발의 미녀가 뒤늦게 그리드를 발견하고 웃었다.

방금 막 4명의 기사를 도륙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화사한 미소였다.

“여, 여어, 유라, 고, 고생이 많아.”

<지옥 도약> 스킬의 응용일까?

허공의 어떤 통로를 통해서 사라졌던 유라의 검이 전혀 다른 방향에서 다시 등장, 적들을 사각에서 찌르는 모습에 그리드는 감탄을 넘어서 경악했다. 자신이라도 그녀의 공격에 대응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세졌군....’

만약.

정말로 만에 하나 유라와 결혼을 하게 되면 부부싸움이 났을 때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지 않을까?

전투 센스라는 건 현실에서도 발휘되는 재능이기 때문에 두렵다.

***

제국은 마안족 도시를 총 16개 구획으로 구분했다.

동쪽과 서쪽의 입구, 중앙 도서관, 양쪽 입구로부터 도서관까지 연결되는 가도 8개, 마안족 왕의 성, 도서관에서 성까지 연결되는 길목 4개.

제국이 도시에 전송시킨 병력 대부분이 이 16개 지점에서 출현했다.

청염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청염기사단의 주요 실력자들은 도서관과 성문 앞 상공에서 나타났으며 특히 성문 앞에 많은 인원을 투입했다.

“....이번 습격은 텀이 짧군.”

극검과 반트너 듀오.

힘들어 죽겠다는 듯이 大자로 뻗어있던 그들이 슬그머니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30명의 기사들이 보였다.

풀 플레이트 아머와 황색 망토. 손잡이가 사선으로 교차 된 은빛의 장검.

무장 상태부터 범상치 않다. 한 눈에 봐도 고가의 물품들을 온 몸에 도배하고 있는 수준이었고 행동에는 절도가 있었다. 마치 고위 귀족이나 왕가 소속의 기사단을 보는 듯하다.

“어째 유난히 세 보인다?”

지난 한 달 동안 상대해왔던 적들도 만만치 않았었다. 하지만 이들처럼 범상치 않은 기도를 지닌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극검과 반트너는 골치가 아파졌다.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음을 눈치 챈 것이다.

“긴장해야 돼. 방심하다가는 골로 갈 거다.”

방패를 세워 가슴을 가린 반트너가 기사들의 후위를 노려봤다.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이라도 하듯, 다른 기사들과 달리 투구를 쓰지 않고 잘생긴 얼굴을 드러낸 젊은 기사가 있었다.

녀석의 이름은 아폴로.

이름이 은색으로 빛난다.

준 네임드 NPC라는 뜻이다.

“최소 400레벨 이상이겠군.”

극검보다도 무려 20 이상 높은 레벨이다. 게다가 준 네임드급 NPC는 플레이어보다 능력치가 높았다. 극검과 반트너 둘이 협공해도 아폴로를 상대로 승산을 엿보기 힘들 것 같았다.

한데 아폴로는 부하까지 잔뜩 거느리고 있었다. 놈들의 레벨도 최소 330 이상으로 추정됐다.

“너희들은 당장 성 안으로 대피해. 성 안에는 마안족 대신들이 있으니까 그들의 지시를 받아라.”

극검이 명령했지만 병사들은 명령을 거부했다.

“후작님을 두고 갈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저희가 남아 시간을 벌 테니 후작님과 백작님께서 피하십시오!”

충성스러운 모습!

병사들은 극검과 반트너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목숨을 바칠 각오였다.

하지만 극검은 감동하기는커녕 눈살을 찌푸렸다.

“빨리 좀 꺼져. 이놈이 폭주하면 걷잡을 수가 없으니까.”

“....?”

이놈? 폭주?

누구를 뜻하는가?

병사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드득! 드드득!

극검의 허리춤에 매인 칼집이 제멋대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칼집 속 <이야루그트>가 극검을 쏘아붙이고 있었다.

-야 이런 호로 새끼야. 빨리 나 소환 안 하냐? 쉬부레, 이러다가 너나 나나 다 뒤지겠다.

“.....”

극검이 3년 2개월 내내 사용해온 덕분에 영혼이 강화 된 이야루그트는 이제 굳이 현신하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했다. 하지만 말투가 무척 거칠었다. 뒷골목 양아치의 표본 같은 언사였다.

지옥 제일 검사의 실체가 고작 이따위라니?

누군가는 충격 받고 실망하겠지만, 사실 이건 이야루그트의 본성이라고 볼 수 없다. 이야루그트는 단지 환경의 변화에 적응했을 뿐이다.

매국 기사마다 찾아가서 댓글 다는 게 취미인 극검과 대머리라서 민감한 반트너.

말투가 전반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그들과 꼬박 한 달을 넘게 붙어있었더니 이야루그트의 말투도 변해버린 것이다.

‘...그나마 후로이가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이곳에 후로이까지 있었다면.... 그건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하다. 이야루그트는 양아치 수준을 넘어서 남의 부모님을 언급하는 수준까지 타락했을 수도 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극검이 칼집에서 이야루그트를 뽑아 쥐었다.

투명한 선홍빛의 검신 곳곳에 이가 나간 상태였다.

-극검 네놈도 알고 있듯이 이 검은 내 영혼을 봉인하고 있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검이 부러지는 순간 내 영혼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장담 못해. 그대로 나가 뒤질 수도 있고, 네 몸을 빼앗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리바리 까지 말고 주의해라.

말투는 사납지만 걱정해주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피식 웃은 극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심할게. 결코 너를 부러뜨리지 않을 거야.”

한편 청염기사들은 눈에 이채를 띠우고 있었다.

특히 아폴로는 노골적인 욕심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검이로군. 귀하처럼 투박한 남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예술품이야. 내가 갖겠다.”

“풋.”

마검을 보고 예술품이라니?

저놈 눈은 옹이구멍인가?

“뭐가 웃기지?”

비웃는 극검을 아폴로가 노려봤다.

어지간한 사람은 감당하지 못할 무서운 살기가 극검을 짓눌렀다.

하지만 극검은 멀쩡했다.

국가대항전에서 전대 영웅조차도 쓰러뜨린 극검의 입장에서 아폴로는 크게 두려운 대상이 아닌 것이다.

“뭐가 웃기기는 개뿔. 너 따위한테 내가 뭣 때문에 웃는지 일일이 설명해야 되냐? 비융신 날강도 같은 새끼. 이 검이 누구건 줄 알고 지 따위가 감히 탐을 내고 앉았어.”

“....곧 죽을 걸 알고 막나가는 건가.”

“곧 뒤질 건 너지. 나와라! 이야루그트!”

고오오오오-!

이야루그트가 혈빛의 마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범상치 않은 기운에 놀란 아폴로와 청염기사단이 검을 뽑았고, 안색을 굳힌 반트너는 병사들을 추슬러서 멀찍이 물러났다.

안개처럼 짙어진 마기가 구슬처럼 응고되더니 급기야 사람의 형상을 갖춰나갔다.

지옥제일 검사, 검귀, 검마, 대악마 제파르의 유일한 적수 등등.

살아생전 온갖 광오한 수식어를 거머쥐었던 이야루그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답답한 새끼야 다음부터는 빨리 빨리 소환해라.”

혈빛의 마기를 타오르는 불꽃처럼 전신에 두른, 허리 굽은 노인.

이마에 날카롭게 솟은 외뿔을 통해서 자신이 마족임을 증명하고 있는 그가 극검을 쏘아붙인 후 신형을 날렸다.

“...!?”

아폴로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반면 다른 기사들은 반응하지 못했다.

스파앗-!

만월을 그리는 참격.

“....?”

이변을 뒤늦게 눈치 챈 기사들의 몸이 양단 된다.

푸콰카카카칵-!!

분수처럼 솟구치는 선혈 속에서.

“제법 쓸만한 놈이 섞여있었군.”

낼름, 칼에 묻은 피를 혀로 핥은 이야루그트의 시선이 아폴로에게 꽂힌다.

“지고의 검.”

극검과 함께한 세월 동안 총 5회의 <한계 돌파>를 달성한 이야루그트.

그는 생전의 힘의 절반에 육박하는 힘을 되찾았다.

영혼만으로 형성시킨 육체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지극히 짧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잔챙이들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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