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6권 - 15화
‘이놈이 정녕 미쳤구나!’
대단위 공격마법의 가장 큰 단점은 피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예외의 마법도 있었지만 열 중 아홉은 그랬다.
템빨왕이 반경 200미터 일대에 번개를 소환한 행위는 노골적인 선전포고였으며, 실제로 놈의 마법은 제국 병사들의 육신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콰자작-!
왠지 낯설지 않은 마력의 번개.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그것이 자력을 발생시키며 오브를 진탕시켰다. 귀를 찢는 천둥소리가 머릿속을 혼잡하게 흔들어 마법 캐스팅을 훼방 놓았다.
머리 위로 번개가 떨어지기 직전, 실드를 펼쳐서 몸을 지킨 골드히트가 당황했다.
‘약해?’
그리드의 마법에는 분명히 묘한 이치가 담겨있었다.
자력을 발생시킴과 동시에 마법 캐스팅 속도를 저하시켰으니 보통 마법의 범주는 확실하게 초월했다.
하지만 공격력이 너무 약했다.
실드를 굳이 10겹이나 중첩 전개할 필요도 없었다. 2겹이면 충분했을 것 같다.
그리드가 브라함의 영혼을 얻고 <강화 마법>을 습득했다는 정황을 이미 오래 전부터 포착해왔던 골드히트는 당혹스러웠다.
‘강화 마법을 아직 완전히 깨우치지 못한 건가? 아니, 제국과 제대로 척을 지는 건 두려워서 일부러 힘을 아낀 걸 수도 있다. 병사들이 죽기라도 했다가는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셈이 되니.’
조금 더 시험해볼 필요가 있다.
“템빨왕이여! 협정은 그대가 먼저 위반한 것이다!!”
상대는 전설이자 건국왕.
능구렁이 100마리는 품고 있을 테니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확실한 저력을 엿보기 위해서는 벼랑 끝까지 몰아붙여야할 것이다.
콰르르르릉!!
판단한 골드히트가 마법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대지가 출렁였다.
이제 곧 거대한 지진이 밀려오면서 템빨왕과 템빨국 병사들을 구렁텅이로 빠뜨릴 것....이라고 골드히트는 생각했지만.
‘뭣이?’
피시식.
마치 비웃듯이, 김빠지는 소리가 나면서 골드히트의 마법 술식이 파훼되었다.
그것은, 보다 고차원적인 지식의 증명이었다.
그리드의 마법 지식이 골드히트의 마법 지식을 낱낱이 파헤치고 부정해버린 결과였다.
골드히트가 기겁했다.
‘이, 이럴 수가! 이 능력은!’
스승 릴리스의 말이 떠오른다.
“나의 스승께서는 마법에 한해서 전능하셨다. 타인의 마법 술식을 손쉽게 간파하고 망가뜨림으로써 마법의 발동 자체를 차단시켰다. 무무드를 제외한 모든 마법사가 스승 앞에서는 무력했으니 모두가 지공(智公)을 두려워했다.”
지공.
마법을 원천 차단할 정도로 위대한 지식!
그것은 1의 마력으로 100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강화 마법보다 더 비현실적인 힘이었다. 신화시대의 이야기처럼 허황되었기에 골드히트는 믿지 못했었다. 과장이 너무 심하다며 웃어 넘겼었다.
한데 이 순간 그리드가 증명한 것이다.
브라함으로부터 계승한 지공의 전능을!
‘실체하는 힘이었다니...!’
상대의 저력이 자신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자 충격을 받은 골드히트가 잠시 넋을 잃었고.
콰자작!
빈틈을 드러낸 그의 정수리를 번개가 강타했다.
1만의 고정 데미지를 입히는 번개였다.
마법 저항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속성은 위협적이지만 위력 자체는 형편없었다.
하지만.
콰작! 콰자작!!
작은 말뚝일지라도 일점(一點)을 계속 때리면 바위를 부수는 법.
정수리를 12차례 연속으로 강타당한 골드히트는 머리가 띵해졌다.
200미터 반경에 불규칙하게 떨어지던 검은 번개가, 어느 순간부터 마치 자아를 지닌 것처럼 골드히트만 집요하게 노렸다.
‘대단위 마법을 완벽하게 통제하다니!’
대단위 마법이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단점을 지닌 이유는 제어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데 그리드는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었다.
무려 200미터 범위의 대단위 마법을!
‘이것도 지공의 힘인가...!’
어느덧 잦아지기 시작한 폭풍우.
번개는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지만, 골드히트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의 재능은 대단하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고 할 수 있지. 너는 반드시 천하제일의 마법사가 될 것이다.”
스승의 칭찬이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천하의 모든 마법사들이 자네를 마법왕이라고 추앙하더군.”
“당연하지. 내가 마법사들의 지존이다.”
지존을 논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열패감.
너무나도 낯선 감각이 골드히트를 엄습해왔다.
“이익....!”
내가 왜 이런 저급한 감정을 느껴야 하는가?
악에 바친 골드히트가 그리드를 노려보려다가....
“.....”
....관뒀다.
그는 두려웠다.
템빨왕의 시선에 담겨있을 모멸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일단 여기서는 물러서는 게 낫다.’
그리드가 지공의 경지에 오른 이상, ‘골드히트는 그리드를 이길 수 없다.’는 공식이 세상의 진리에 추가된 셈이다.
골드히트는 뱀 앞의 쥐처럼 굳어서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강화 마법을 얻기 위해서는 앞으로 그리드에게 접근하는 방법과 태도를 전면 수정해야한다고 판단하면서, 지금부터라도 밉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희망은 충분히 있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자신은 그에게 호감을 표하는 등 밑밥을 깔아뒀으니까.
“드, 들어가시오.”
골드히트가 냉큼 길을 열어주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땅을 보고 있었다.
***
“.....”
마안족 도시에 고립 된 템빨단원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철저히 은폐했다. 대장일에 집중해야할 그리드가 괜한 근심 때문에 집중력을 잃을까봐 염려한 까닭이다.
물론 처음에는 통제가 됐었다.
무려 20일 이상, 그리드는 마안족 도시의 상황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레이단에서 원군이 출정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리드에게도 마안족 도시의 상황이 전달됐다.
그리드에게도 눈이 있고 귀가 있었으니까.
레이단에서 군대가 움직인 순간 피아로에게 보고가 들어갔고, 피아로는 마안족 도시의 상황을 파악했으며, 이 소식은 다시 메르세데스에게 전달되어서 그리드에게 이르렀다.
하지만 그리드는 동요하지 않았다.
도리어 대장일에 더 몰두했다.
그것이 자신이 당장 해야 할 일이었고, 동료들의 바람이었으니까.
또한, 그는 동료들을 믿었다.
그렇다.
그리드는 십공신을 비롯한 템빨단원들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한데 정작 레피오 마을에 도착해서 상황을 보니, 사태가 생각과 달리 심각했다.
이미 열흘도 전에 레이단에서 출정한 병력이 여전히 마을에 진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드는 분노했다.
골드히트의 역겨운 면상을 보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당장 놈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강한 살심을 느꼈다.
하지만 시스템이 골드히트를 ‘우군’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아쉽게도 그리드는 <전격 마기의 폭풍>을 이용한 화풀이밖에 할 수 없었다.
한데 높은 행운 스탯 때문인지 화풀이가 화풀이 수준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대상에게 1만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1만의 피해...]
[대상에게 1만...]
[<지공>의 효과로 대상의 마법을 간파하였습니다! 대상의 마법을 무효화시킵니다!]
마구잡이로 떨어져야 정상일 번개들이 집요하게 골드히트를 노리기 시작했다. 지공의 힘이 골드히트의 마법을 봉쇄했다. 덩달아 골드히트는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육체’에 어떤 문제라도 생긴 건지 무력하게 물러났다.
“드, 들어가시오.”
“....쯧.”
상종하고 싶지도 않고, 지체할 시간도 없다.
제국은 돈이 얼마나 썩어 넘치는지, 고가의 아이템으로 중무장한 덕분에 번개에 얻어맞고도 비교적 멀쩡한 제국군 병사들.
주춤거리는 놈들을 헤치고 나아간 그리드가 아군에게 눈짓했다.
“가자.”
“예!”
힘차게 대답한 템빨단원들과 병사들이 그리드의 뒤를 따랐다. 거침없이 마을에 입장하는 그들의 앞길을 제국군은 막아서지 못했다. 총사령관 골드히트가 길을 열어준 마당에 일개 기사나 병사가 나설 수는 없던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흑기사단 단장이 우려를 표하자 골드히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랜드마스터가 막을 것일세.”
그는 이곳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터.
곧 직접 백룡의 눈을 가지고 행차하리라.
그리드가 날고 뛰어봤자 마안족 왕은 죽을 운명이었다.
***
“돌격하라!”
“이곳은 우리의 땅이다! 감히 우리 땅 지하에 기생해온 마족과 그들을 비호하는 사특한 템빨국을 용서치 말라! 대의는 우리에게 있다!!”
마안족 도시로 전이 된 청염기사단.
기존의 침입자들과 마찬가지로 허공에서 불시에 나타난 그들은 하나 같이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악마의 백성이며 인류의 적인 마족과 우리 왕국의 주적이라 할 수 있는 템빨국을 당장 처단하고 쫓아내고 싶은 것이 그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이곳은 우리의 영토.
적들이 멋대로 날뛰어선 안 되는 장소다.
화르륵-!
기사들이 휘두르는 검 끝에 푸른 불꽃이 맺혔다.
템빨국 병사들의 몸이 진즉에 허물어진 갑옷과 함께 통째로 베어졌다. 하지만 템빨국 병사들은 사기를 잃지 않았다. 가슴을 베인 자는 피를 토하면서, 어깨를 베인 자는 무기를 반대쪽 손에 고쳐 쥐면서, 다리를 베인 자는 기어서라도 전진하여 기사들에게 반격을 가했다. 그 독기어린 모습에 청염기사단의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이놈들... 컥!”
좀비처럼 달라붙는 템빨국 병사들에게 재차 검을 휘두르려던 기사가 소리 없이 날아온 화살에 미간을 꿰뚫리고 쓰러졌다. 대열이 무너지는 신호였다.
푸슛.
푸푸푸푸푹!
어둠과 동화 된 화살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날아왔다.
청염기사단의 선두가 무너졌고, 그들의 가슴을 타고 오른 템빨국 병사들이 짐승처럼 검을 쑤셔댔다.
“너희들 혹시 쥬드한테 훈련 받았어?”
용맹무식한 템빨국 병사들의 모습에 누군가가 혀를 내둘렀다.
병사들의 후위에 선 채 화살을 쏘는 그녀의 정체, 지슈카였다. 타오르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과 매끄러운 구릿빛 피부가 그녀를 어둠 속에서도 아름답게 가꿔주고 있었다.
“에휴. 너희가 안 도망치면 나도 물러설 수가 없잖니.”
이제 남은 화살은 고작 13발.
지슈카는 그 몇 개 남지 않은 화살을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호신용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이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버티고 싸우자 그녀 혼자서 도망칠 수가 없게 됐다.
“....뒤져도 같이 뒤져야지.”
호흡을 고르며 당긴 시위를 놓자.
푸욱-!
세상에서 잠시 사라졌던 화살이 적의 심장에 박히며 모습을 드러낸다.
동시에.
[크리티컬!]
[약점 공격에 성공하였습니다!]
[당신이 약점 공격으로 사살한 적의 숫자가 누적 1,000만을 달성하였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입니다!]
[<최고급 보우 마스터리> 스킬이 <필살의 보우 마스터리> 스킬로 승급합니다!]
“어라?”
지슈카는 새로운 진화를 맞이했다.
‘내가 여태껏 잡아 죽인 놈이 1,000만밖에 안 됐나?’
남이 들으면 어이없어할 생각을 품으면서.
이어서 놀라운 상황이 전개됐다.
[성스러운 음성이 귓가에 들려옵니다.]
-그대.... 세계수로... 오라....
[★히든 클래스 전직 퀘스트★ <포비아의 후예>가 발생했습니다!]
“...!”
포비아.
분명히 전대 전설의 궁사의 이름이었다.
엘프족 출신으로 세계에서 활을 가장 잘 쏘는 여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후예가 된다는 말은 즉 전설이 된다는 뜻.
지슈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설 클래스를 얻을 수 있는 조건을 달성한 것이다!
한데....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싫은데?”
-....
[정말로 퀘스트를 거부하시겠습니까?]
“응.”
[전직 퀘스트를 거부하였습니다.]
지슈카는 의외의 선택을 내렸다.
아니, 오히려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신궁(神弓)이라고 불려왔으니까.
“나는 포비아를 뛰어넘을 건데 그녀의 후계가 되는 게 웃기잖아.”
피식, 지슈카는 단 한 번의 미소로 사태를 쉽게 넘겨버렸다.
범인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태도.
천재이기에 품을 수 있는 자신감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치 못한 선택은 새로운 전개를 야기했다.
[히든 클래스 <궁성>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전직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헤에.”
역시 전사는 싸워야한다.
한 달 넘게 이어진 사투가 ‘우리’를 성장시키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흡족한 미소를 그린 지슈카가 <매의 눈>으로 전장을 관조했다.
곳곳에서 전투 중인 템빨단원들의 모습이 보였고 그들 모두가 극한의 상황 속에서 한계를 돌파하는 중이었다.
“앞으로는 밥값 제대로 할 수 있겠네.”
템빨단은 더 이상 그리드 원맨팀이 아니다.
푸슉.
마력으로 빚어진 화살이 청염 기사의 목젖에 꽂혔다.
화살 없이 활을 쏘는 신위가 기사들을 경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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