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6권 - 14화
마안족 도시 보호 20일째.
“쓸데없는 저항은 관둬라!”
“싸워봤자 네놈들만 손해다!”
오늘도 어김없이 적들이 찾아왔다.
처음 그날의 적들과 마찬가지로, 바로 어제의 적들과 마찬가지로 놈들은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기고만장하게 지껄이는 꼴을 보아하니, 역시나 침입자들은 공통 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본인들이 강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아하하핫! 덤벼! 우리가 바로!”
“도시 방위대! 템빨러맨! 출동이다!!”
“...너희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템빨단원들은 기운이 넘쳤다. 특히 극검과 반트너 듀오가 흥분을 주체 못했다. 열흘 동안 멍하니 자리만 지킬 때와 비교하면 즐거워 죽겠다는 눈치였다.
슈콱!
극검의 새로운 절기, 오연참(五聯斬).
이야루그트가 다섯 갈래의 섬광을 그리며 뻗어나가자 침입자 다섯 명이 양단 되서 죽었다.
[이야루그트의 경험치가 0.01퍼센트 상승하였습니다!]
“좋군!”
극검이 콧김을 내뿜었다. 매일 계속되는 전투가 스킬 숙련도는 물론이고 아이템 경험치까지 올려주었으니 썩 보람이 있었다. 그가 흡족한 표정을 짓자, 방패 뒤에 숨겨뒀던 철퇴로 적의 머리통을 분쇄시킨 반트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너는 왜 그렇게까지 이야루그트에 집착하는 거냐?”
“엉? 갑자기 뭔 말이야?”
“너도 금메달 보상을 얻었잖아? 그걸 재료로 그리드에게 신검을 제작해 달라고 부탁하면 이야루그트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기를 얻을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이야루그트만 고집하느냐 이거다.”
극검은 사실상 이야루그트를 양도 받았다. 벌써 1년 이상 이야루그트를 주력 무기로 사용하며 경험치를 축적하고 있었는데, 성장형 아이템의 경험치 상승 속도가 달팽이 이동속도만큼 느리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척 비효율적인 짓이었다.
이야루그트보다 강력한 무기를 구할 수 있는 입장이고, 설령 이야루그트가 최종 등급까지 성장하더라도 사신의 신검보다 대단하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극검이 굳이 이야루그트에 집착하는 이유는 미스터리할 지경이었다.
“음....”
반트너의 의문이 합당하다고 느낀 극검이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답했다.
“무기 성능을 떠나서 이야루그트라는 마족이 큰 힘이 될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너도 알다시피 그리드는 강력한 NPC들을 섭외했지만 그들의 목숨이 유한하다는 이유로 적극적인 활용을 못하는 상태야. 반면 이야루그트는 소환수로 분류되기 때문에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부릴 수 있지. 나는 이야루그트를 완전히 해방해서 그리드에게 새로운 힘을 주고 싶다.”
“이야루그트를 최종 승급하면 그리드에게 다시 넘기겠다는 거지?”
“당연하지. 나는 일종의 아이템 대리 육성 중인 거야.”
“참나....”
반트너가 할 말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극검의 선택과 행동이 모두 그리드를 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극검에게도 자신만의 입장과 삶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타인을 위해서 몇 년이나 되는 시간을 희생할 수 있다니?
다시 허공에 나타난 침입자들을 방패로 때려잡은 반트너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네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리드를 위하는 이유가 대체 뭐지? 물론 나 또한 그리드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고 그리드가 좋아. 나도 그리드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나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 하지만 너처럼 몇 년에 이르는 시간을 희생할 수 있느냐면 그건 아니야. 아마 못할 거야.”
이건 의리라는 개념을 떠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였다.
타인을 위해서 기약 없이 나를 희생한다?
그건 정말로 힘든 일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괴이한 생물을 보는 것 같은 눈빛을 보내오는 반트너에게 극검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우선 그리드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점이 가장 크지. 형이하학적인 예를 들자면 첫째로 세금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게이머라는 직업은 비용을 인정받지 못하는데, 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수익과 지출하는 금액 모두 50퍼센트에 육박하는 세금을 나라에 지불하게 돼.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료 같은 개념을 모두 합쳐서 말이지. 어쨌든 그러니까 그리드는 자신의 수익 절반을 매해 조국에 바친다는 뜻인데, 그리드는 마음만 먹으면 외화를 수백억 단위로 벌어올 수 있는 능력자다.”
“....조국을 부강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감사함을 느끼고, 예의를 표한다는 건가?”
“응.”
“미친... 네가 대통령이야? 그걸 왜 네가 감사해해?”
“네가 대한민국 애국지사의 마음을 어찌 알꼬.”
“애국심이 왜 그렇게 강한 건데?”
“대대로 이어져온 애국심이니까. 나는 항상 그리드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고, 그리드라는 존재를 돕는 일이야말로 애국보훈임을 깨달았다. 나는 영원히 그리드를 위해서 살아갈 거야.”
“어쨌든 정상은 아니군.”
“흐흐흐. 어릴 때부터 그런 소리 많이 들었다.”
“칭찬 아닌데.... 음,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나도 그리드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꼈다면 너처럼 됐을 수도 있을 것 같군.”
“그리드가 대머리가 될 일은 없으니까 평생 동질감 못 느끼겠군.”
“이런 썩을 놈이!”
마안족 도시 보호 22일째.
“으으... 또....”
템빨국 병사들이 눈에 띄게 지치기 시작했다.
벌써 열흘 넘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적들이 침략해왔고, 심지어 매번 갑작스러운 기습 형태였으니 정신적인 압박감이 무척 심했다.
적들의 기본 실력이 병사들을 가볍게 압도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양산형 그리드 세트와 레이단 연금술 시설에서 보급해온 최상급 회복 물약이 없었으면 벌써 몇 번이나 목숨을 잃었을지... 갑옷 곳곳에 남은 상흔을 살피는 병사들의 안색이 하얗다.
마안족 도시 보호 25일째.
“병사들이 한계야.”
“지원은 아직인가?”
“제국의 병력이 레피오 마을을 점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길을 열어주질 않아서 지원 병력이 진입할 수가 없다고 해요.”
“이런 제길!”
템빨국이 자랑하는 정예병사 600명이 완전히 지쳤다. 체력을 채워줄 물약은 이미 엊그제 다 떨어졌고, 연속되는 전투의 여파로 갑옷과 무기는 넝마가 되었다. 마안족 도시에는 대장간도, 대장장이도 없었다.
그나마 위안인 점은. 아니, 대단한 점이라고 말해야할까. 적들의 수준이 워낙 높다보니 보름간의 전투 동안 병사들의 레벨이 평균 20 이상 올랐다. 300레벨을 달성하고 3차 전직을 이룬 병사도 몇 명 눈에 띄었다.
병사들은 사실상 템빨단 최고의 엘리트들에게 본격적인 쩔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이들이 모두 살아남고 무사히 귀환할 수만 있다면... 템빨국의 군력이 크게 상승하리라.
마안족 도시 보호 28일째.
“길을 여시오.”
“현재 이곳은 의문의 세력에게 침략을 당하는 중입니다. 전시 상황에 아무나 함부로 들일 수 없습니다.”
“아무나 함부로? 대 사하란 제국의 군대를 지금 아무나라고 했소?”
불쑥 찾아온 제국의 정규군이 마안족 도시 입구에서 깽판을 부리기 시작했다.
템빨국은 그들이 도시에 입장할 수 없게끔 병력을 입구에 집결시킬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피폐해진 병사들이 흐리멍덩한 몰골로 입구를 가로막고 서자 제국의 병사들은 도시에 입장하지 못했다.
소위 말하는 길막이다. 서로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한 수법이었고, 이 수법을 먼저 사용한 것은 제국이었다.
레피오 마을의 모든 입구를 봉쇄한 제국 병력이 템빨국 군대의 진입을 방해하고 있었으니, 템빨국 군대들은 레피오 마을 지하에 있는 마안족 도시에 입장할 방법이 없었다.
마안족 도시 보호 31일째.
“으으....”
템빨국 병사들의 전의가 희미해졌다.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제국의 병사들.
대치 상황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침입자들.
망가진 갑옷과 무기. 도착하지 않는 원군...
연속되는 절망은 이미 체력과 정신력이 방전되기 시작했던 템빨국 병사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
후방에서 적의 습격을 막아주던 마안족들도 벌써 이틀째 입을 다문 상태다. 곧 죽어도 주둥이는 살아있을 것 같던 마안족도 지칠 대로 지치자 말할 여력이 사라진 것이다.
반면 마주보고 선 제국군 병사들의 시선은 여유롭다.
제국의 조롱 속에서, 템빨국 병사들의 절망이 더욱 커지는 그때.
타앙-!
옥빛의 마력탄이 상공을 관통했고, 새로운 침입자들은 등장과 동시에 절명하고 말았다.
인형처럼 아름다운 흑발의 여성이 병사들에게 단언했다.
“당신들은 안전해요.”
그리드의 재산, 내가 골백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낼 테니까.
뒷말을 삼킨 유라가 마력을 탄환으로 치환시켰다.
마안족 도시 보호 33일째.
“허억... 허억....”
십공신과 템빨단원들이 기세를 잃어갔다.
둘씩 교대하며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끔 안배해왔지만 그들의 아이템 또한 ‘내구력’이라는 한계가 존재했다.
소수 대 다수의 전투가 매일 같이 반복되자 언젠가부터 갑옷과 무기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수리 도구 세트는 진즉 다 썼다. 어쩔 수 없이 서브 아이템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전투력이 급감했다. 적들이 조금 더 강하게 느껴졌고, 적들의 많은 숫자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끝을 바라게 되었다. 아군을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병사들 앞에서 내색하지 못하고 버티려다보니 심력의 소모가 더욱 빨라졌다.
“.....”
가장 의욕적이던 극검과 반트너 듀오도 더 이상 상황을 즐기지 못했다.
상황이 너무 안 좋다.
마안족 도시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레피오 마을의 분수대’에서 공간 계열 마법을 사용해야했는데, 레피오 마을이 제국 군대에 완전히 점령당한 까닭에 원군을 바란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제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줘.”
템빨단원들이 라우엘을 의지하기 시작했다.
라우엘의 입지를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그리드가 그러했듯이, 템빨단원 대다수가 라우엘을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템빨국을 세운 일등공신이었으니까.
라우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는 할 일 다 했습니다.”
“....”
이게 최선이었다는 건가?
남은 해결책이 없다고?
좌절하는 동료들에게 라우엘이 빙그레 웃어주었다.
“이제 다 끝났다고요. 애초에 우리의 임무는 ‘때가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잘 버텼습니다.”
***
레피오 마을.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 오래도 버티는군.”
이제 10살이나 되었을까?
작은 소녀가 나이에 냉소를 지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하지만 이제 한계일 겁니다.”
소녀의 곁을 지키고 선 칠흑 철갑의 기사가 말했다.
“도시의 상황을 보고 온 수하가 말하기를, 적들의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고 합니다.”
“그 말은 며칠 전부터 들은 것 같은데.”
“하하, 그때는 적들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었지요.”
“흐응,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꺾였다?”
“네, 한계가 온 것이 확실합니다. 하긴 당연하지요. 무려 20일이 넘도록 매일 갑자기 나타나는 적들과 싸워왔는데 어찌 버티겠습니까? 여기까지 버틴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칠흑 철갑의 기사가 눌러쓴 투구 측면에는 금색의 사선이 5갈래 양각되어 있었다. 그것은 제국 흑기사단의 1인자를 상징하는 휘장이었고, 중년인의 정체는 놀랍게도 흑기사단 단장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어린 소녀는 단장을 하대했고 단장은 그녀를 극진히 대했다.
당연하다.
소녀의 정체는 마법왕 골드히트.
대륙 최강의 마법사이자 영원의 탑의 주인이며 제국의 다섯 기둥 중 하나였으니까.
제아무리 흑기사단이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단 중 하나라지만, 골드히트 앞에서는 명함을 내밀기 힘들었다.
“흐음, 경의 말을 믿어보지. 슬슬 마력도 한계이니 마지막으로 그놈들을 보내야겠어.”
골드히트는 지난 수십일 동안 무려 1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마안족 도시로 전송시켰다.
마족의 마법지식을 엿볼 수 있는 워프 장치 <분수대>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천하의 마도구도 만능은 아니었기에 골드히트는 큰 마력을 사용하고 말았고 지금은 보기보다 지친 상태였다.
“찾으셨습니까...”
잠시 후.
50명의 기사가 골드히트 앞에 섰다.
가우스 왕국이 자랑하는 청염기사단이었다.
청염기사단의 검술에는 푸른 화염을 소환하는 묘리가 담겨있는데 그 실력이 제국의 흑기사와 비교해도 좋을 정도였다. 물론 최근 막대한 자원을 쏟아 붓고 숫자를 천 명까지 늘린 흑기사단과 비교하면 규모 면에서 한없이 밀렸지만.
골드히트가 청염기사단장에게 말했다.
“분수대 위로 서게. 마안족 도시로 전송시킬 테니 템빨국의 잔당들을 쓸어버리면 되네.”
“.....”
청염기사단장이 이를 악 물었다.
물론 가우스 왕국 최대의 적은 템빨국이었다.
템빨국이 아직 에트날 왕국이던 시절부터 그리드와 싸워온 가우스 왕국은 템빨국을 주적이자 원수로 인식했다.
템빨단에게 많은 병력을 잃었던 청염기사단장 또한 기회만 온다면 언제라도 템빨국에 복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자신은 가우스 왕국의 기사이지 제국의 기사가 아니니까.
어째서 우리가 제국의 명령을 받아야한다는 말인가?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청염기사단장이 대답 않고 서있자 눈살을 찌푸린 골드히트가 으르렁거렸다. 살기가 솟구치자 청염기사단원들이 숨 쉬기를 힘들어했다.
“....”
골드히트와 흑기사들이 밟고 선 대지.
우리의 영토일진데....
잠시 골드히트의 작은 발을 쳐다보던 청염기사단장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닙니다. 적을 처단하고 오겠습니다.”
제국에게는 대항할 수 없다.
우리는 싸워야한다.
제국이 청염기사단의 사용권을 요구하면서 왕궁에 보인 ‘성의’는 무려 황금 이백관.
명령을 받들 명분도 확실하다.
‘그래, 우리는 제국의 개가 아니라 조국을 위해서 싸우는 거다.’
청염기사단장이 결의를 세웠고, 피식 웃은 골드히트는 살기를 지우고 그들을 마법으로 전송시켰다.
“슬슬 말라 죽겠군.”
마안족 도시에 버티고 있을 템빨국 귀족들과 병사들.
이제 곧 제풀에 꺾여 쓰러지리라.
마안족 왕을 처치하고 마안족 실험체와 마족의 지식을 대량으로 확보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큭큭큭....”
살아있는 마안족의 눈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
골드히트는 희열에 찼다. 자신이 직접 이 먼 오지까지 찾아와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템빨왕이 왔습니다.”
골드히트의 막사로 찾아온 흑기사가 보고해왔다.
흑기사의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템빨왕의 등장에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눈치다.
당연히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템빨왕은 현재 적이 아니었고, 설사 적이었다고 해도 이쪽에는 흑기사단 2개 중대와 마법왕이 있었으니까.
“흠....”
자리에서 일어난 골드히트가 마을 입구로 향했다.
흑발의 사내가 팔짱 낀 채 서있었다. 머리 위에 얹은 은색 관을 보자, 일국의 왕이라는 지위에 한껏 심취해 있는 듯했다. 그 꼴이 가엽다.
“오래간만이요.”
입구를 철통 같이 지키고 선 병사들을 해치고 나온 골드히트가 인사를 건네자, 그리드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에도 어린 아이들을 납치해서 개돼지처럼 키우는가보군.”
“개돼지와 어린 아이들에게 어떤 차이가 있소?”
“....?”
“둘 다 힘없기는 매한가지. 그럼 순순히 키워지고 잡아먹혀야지.”
골드히트가 힐끗, 땅 밑으로 시선을 돌렸다.
템빨국 병사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을 지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 또한 개돼지 신세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쓸데없는 짓 말고 돌아가시오. 그래도 명색이 왕이라는 자가 그리 엉덩이가 가벼워 쓰겠소?”
사실 골드히트는 그리드에게 관심이 많았었다. 현존하는 전설에 대한 관심. 그것은 차라리 호의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리드에게 우레석을 빼앗긴 골드히트의 원한은 보기보다 무척 컸다.
‘....흠?’
그리드를 한껏 조롱해준 후 등을 돌리던 골드히트가 멈칫했다. 천상에 마력이 들끓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하늘로 시선을 올려본 그가 뇌운을 감지하더니 콧방귀 뀌었다.
“제국과 템빨국의 휴전 협정은 아직 3개월 가까이 남아있을 텐데? 템빨왕이여. 귀하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우리를 공격하는 건 불가능하오. 인과율(因果律)을 거스를 수 없다는 건 우리보다 그대가 더 잘 알 터. 괜한 발악이오.”
골드히트가 말하는 ‘인과율’이 무엇인지, 그리드는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대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필시 ‘시스템’을 말하는 것일 터다. 그리고 그리드는 시스템을 이용할 줄 알았다.
“개돼지를 짓밟는 걸 발악이라고 표현하나?”
쏴아아아아!
폭우가 쏟아진다.
“전격 마기의 폭풍.”
콰지직-!
뇌광이 회오리쳤다.
적아(敵我)를 구분하지 않는 막강한 힘이 마을 입구를 봉쇄하고 있는 병사들을 휩쓸었다.
“....미쳤군!!”
콰작-!
실드를 10겹이나 겹쳐서 벼락을 막아낸 골드히트가 폭풍우 속에서 포효했다.
마법왕의 분노!
그것은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며, 재앙을 암시하는 전조였다.
지금의 골드히트를 보고도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대륙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그리드다.
영웅왕의 투기를 끌어올린 그리드가 흉흉한 눈빛으로 골드히트를 노려보았다.
“네게는 내 앞길을 가로막을 자격이 없다.”
“....!”
세상에, 마법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니?
여태껏 태연한척 있던 흑기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템빨왕이 이렇게 막 나갈지도 몰랐을 뿐더러, 템빨왕이 보여주는 기세가 상상 이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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