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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44화 (839/1,794)

템빨 46권 - 13화

크리스는 이번 임무의 성공 가능성을 9할 이상으로 점치고 있었다.

제국과의 휴전 기간이 아직 4개월 이상 남았다는 점이 컸다.

국가 간의 협약은 시스템으로 보호되는 바, 템빨국과 제국은 서로를 공격할 수 없으므로 템빨국이 마안족 도시를 지키고 있는 이상 제국이 함부로 날뛸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제국이 마안족 도시를 침략하더라도, 템빨단이 성문을 지키고 버티면 그리드가 도착할 때까지 마안족 왕을 충분히 지킬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한데.

‘이놈들!’

제국은 예상과 다른 방법으로 행동에 나섰다.

외부 세력을 이용해서 간접적인 침략을 감행해온 것이다.

크리스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제국 놈들, 우리를 철저히 소모시킬 작정이군!’

퍼엉-!

이를 악 문 크리스가 그리드의 대검을 빠르게 휘두르자, 어둠을 벗으며 등장한 어쌔신 2명의 상체 위로 십자 모양의 검광이 아로새겨지더니 잿빛으로 산화했다. 태생적으로 방어력이 낮은 어쌔신들은 극강한 공격력을 갖춘 크리스에게 쉽게 참살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빌어먹을, 난장판이군.’

가까운 저택 지붕 위로 뛰어오른 크리스가 도시 전경을 살펴보며 치를 떨었다. 도시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마을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둘씩 짝을 짓고 나타난 어쌔신은 템빨국 정예병력 2개 소대를 상대로 우세를 점할 정도로 강력했다.

‘정예병 2개 소대는 100만위대 고레벨 플레이어도 쉽게 감당하기 힘들어할 텐데 저 정도라니...’

제국이 직접 고용한 만큼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는 건가?

쾅-!

폭군의 힘을 끌어올린 크리스가 신형을 날렸다.

이동하는 거리가 길어질수록 그의 공격력이 상승했다.

콰자작!!

“크리스 공작님!”

어쌔신들을 포위해놓고도 역으로 위기에 빠져있던 템빨국 병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질풍처럼 나타난 크리스가 일격에 어쌔신들을 해치웠으니 목숨을 구원받은 셈이었다.

크리스가 소대장들에게 명했다.

“병력을 추려서 마안족 왕의 성으로 집결해라. 그곳이 뚫리면 절대로 안 된다.”

“예!”

크리스는 십공신 중에서도 지슈카와 쌍벽을 이루는 권력자였다. 현장에서 자신의 판단대로 병력을 운영해도 문제될 게 없는 것이다.

힘차게 대답한 병사들이 다른 소대를 구원하고 합류, 그대로 성이 있는 방향으로 진군했다.

그 틈에 지붕 곳곳에서 암기를 날리고 있는 어쌔신들을 해치운 크리스는 도시 중심부로 향했다.

도시 중심부에는 소규모 도서관이 있었다. 라우엘과 지슈카, 그리고 폰과 레가스가 교대로 근무를 서는 장소였다.

최고 실력자들이 밀집한 이유는 이곳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도우러 왔다.”

도서관을 포위하고 있는 어쌔신들을 돌파한 크리스가 라우엘의 곁에 섰다. 지슈카의 엄호사격을 등에 업고 버티던 라우엘이 십년감수 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대로 제국은 이곳에 저장 된 지식과 정보를 탐내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다른 장소에는 2명씩 등장했던 어쌔신이 이곳에는 수십 단위로 등장하고 있었다.

급기야 100명이 넘는 어쌔신들을 마주보고 서게 된 크리스가 침음했다.

“이놈들은 도대체 뭐지? 무슨 스킬을 갖고 있기에 출입구를 거치지 않고 하늘에서 나타나는 거야? 이건 페이커도 못하는 일 아닌가?”

“마법의 힘을 빌린 겁니다.”

“마법?”

“네. 어떤 뛰어난 마법사에 의해서 공간 자체를 도약하고 워프하는 거죠.”

“곳곳에 분산 되서 나타나는 걸 보면 메스 텔레포트랑은 다른 느낌인데.... 대마법사쯤 되면 이런 마법을 쉽게 쓸 수 있는 건가?”

“평범한 대마법사는 모르겠고, 아마 마법왕쯤 되면 쉽게 쓸 수 있지 않을까요?”

“마법왕...!”

제국의 다섯 기둥 중 하나이자 영원의 탑의 수장.

골드히트의 악명을 떠올린 크리스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더럽게 사기적인 마법이군... 그놈이 이런 식으로 계속 병력을 파견하면 우리가 무슨 수로 버티지? 체력에는 한계가 있다. 물량을 이겨내지 못하고 지쳐서 나가떨어질 거야.”

크리스는 마음 속 불안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라우엘이 현재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라우엘의 지능이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늘 승승장구했던 건 아니기 때문이다. 라우엘도 사람인 이상 모든 변수에 대처할 수는 없었고 실수할 때도, 실패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라우엘은 현재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의 체력에 한계가 있듯이 마법왕의 마력에도 한계가 있겠죠.”

“굳이 전이 마법을 쓰지 않고 정면으로 물량공세를 해와도 똑같다. 한꺼번에 대량의 병력이 쏟아져 들어오면 막을 수 없어.”

“애초에 물량공세를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미 설명했을 텐데요?”

“...?”

“제국이라고 해서 자금이 무한한 건 아니니까요. 하부세력을 운용하려고 해도 보상을 주지 않으면 안 되니, 대단위 병력을 쉽게 쏟아 붓지 못할 겁니다.”

“제국이 하부세력을 움직이는데 돈을 낸다고? 힘으로 압박해서 공짜로 움직일 수도 있잖아?”

대륙의 거의 모든 국가나 단체들이 수백 년 동안 제국에 공물을 바쳐왔다. 완전히 제국의 노예인 것이다. 제국이 그들을 움직이는데 보상을 지불한다는 것을 크리스는 납득되지 않았다.

라우엘이 설명했다.

“기존의 단체들이 제국에게 덤벼볼 생각도 못하고 쥐 죽은 듯이 살아온 이유가 뭔지 압니까?”

“....?”

“제국의 저력이 무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국은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되는 입장이라는 거죠. 제국이 돈이 없는 티를 내는 순간 다른 국가들은 제국의 저력을 의심할 테고, 이는 즉 지배권의 약화로 직결될 겁니다.”

“그러니까 하부 세력을 움직일 때마다 무조건 보상을 줄 거라는 거야?”

“허장성세는 흔히 쓰이는 계책이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라우엘, 너는 어째서 자꾸만 제국이 가난하다는 듯이 말하는 거지?”

이상하다.

수백 년 동안 서대륙을 지배해온 제국이다. 제국은 온갖 자원을 독식하며 타국을 침탈해왔다.

한데 고작 몇 개의 하부세력을 움직이는 게 힘에 벅찰 정도로 가난하다고?

5억 명의 플레이어에게 단체 퀘스트를 내리는 거야 지출이 너무 크고 효율이 적겠다 싶었지만, 하부세력조차 움직이기 힘들 거라는 추측은 너무 과한 억측이다. 제국이 그 정도로 가난하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쿠콰쾅!

크리스의 의문을 들으면서, 라우엘은 묵묵히 마법을 전개하고 있었다.

시시각각 풍향을 바꿔서 지슈카가 쏘는 화살의 위력을 극대화시키는 한편 어쌔신들의 투척술을 무력화시켰고, 적들이 접근해올 때마다 미세한 지진을 일으켜서 그들의 경로를 크리스에게 향하게끔 유도하는 등.

라우엘은 보유하고 있는 전투 스킬이 적은 것에 반해서 너무 효과적으로 전투를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스포츠 선수나 격투기 선수들을 극찬하는 표현 중에 ‘영리하게 싸운다.’는 표현이 있는 이유를 깨닫게 해주는 전투 방법이랄까.

라우엘의 뛰어난 두뇌는 그를 타고난 무재(武才)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국가대항전 내내 마장기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저 고대의 유물을 발굴하기 위해서 제국은 얼마나 많은 인력과 금력을 투자했을까? 저 고대의 유물을 복원하기 위해서, 그리고 운영하기 위해서 또 얼마나 많은 기술과 돈을 쏟아 붓고 있을까?”

“네 말은 제국이 마장기 때문에 가난해졌다는 건가?”

“아니요. 마장기는 원인 중 하나에 불과하겠죠. 저는 조금 더 근본적인 의문에 도달했습니다.”

“근본적인 의문?”

“제국이 알려진 것과 같은 부국(富國)이었다면, 그들은 템빨국과 발할라를 진즉에 토벌했어야 정상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이었죠.”

“....?”

“무한한 자원으로 병력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파견함으로써 템빨국이고 발할라고 쉽사리 짓밟았어야 정상 아닙니까? 지금 당신의 주장대로 말이죠.”

“아...!”

크리스는 머리에 벼락을 맞은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제국의 인해전술을 누구보다 먼저 염려했던 사람이 라우엘이었고, 제국의 인해전술에 한계가 있음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도 라우엘이었던 것이다.

“너는.... 정말로 영리하군....”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탄사를 뱉는 크리스에게 라우엘이 훗하고 웃어주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요.”

그리드가 성장해왔듯이 라우엘도 성장했다. 많이 공부하고 생각하며 지식을 쌓고 안목을 길렀다.

“군신 아레스가 어떤 천재를 영입했는지는 몰라도.”

쿠콰캉!

은신해서 접근해온 어쌔신들을 미리 파놓은 함정으로 처리한 라우엘.

그가 한쪽 손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며 으르렁 거렸다.

“지금의 저를 상대하려면 각오해야할 겁니다.”

라우엘은 확신한다.

절대지존 그리드와, 해를 거듭할수록 급격히 성장 중인 크라우젤.

전략과 전술을 무용지물로 만들 정도로 절대적인 무력을 지닌 그들이 아닌 이상에야, 천하의 그 누구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거라고.

콰쾅!

콰콰쾅!!

마안족 도시 곳곳에서 쉬지 않고 잿빛 기둥이 솟구쳤다.

침입자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기둥들이었다.

‘저쪽은...’

크리스와 라우엘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시 출입구가 있는 방향이었는데 가장 빠르게, 가장 많은 잿빛 기둥이 발생하고 있었다.

유라가 지키는 구역이었다.

크리스가 혀를 내둘렀다.

“라우엘 네 예상이 틀려서 제국이 인해전술로 나와도 안 뚫릴 것 같다?”

“...그러게 말입니다. 잠시 건물 안으로 피하죠. 마안족 주민들과 교대할 시간입니다.”

“오케이.”

인간의 체력이 무한이 아니듯 마안족의 마력도 무한이 아니다. 마안족 왕이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마안족은 하루에 2시간 정도만 마안을 해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2시간이면 충분했다.

“히, 히이익!”

“살, 살려줘...!”

냉혹한 어쌔신들조차 무릎 꿇고 애원하게 만드는 마안의 위력!

마안족 주민들은 불과 30분 만에 어쌔신 잔당 대부분을 해치웠고, 그 사이 충분한 휴식을 취한 템빨단과 다시 교대했다.

제국의 선발대는 사실상 아무런 활약도 못하고 궤멸한 것이다.

“크크큭... 그대들, 제법이군. 인간이라는 「틀」에 가두기 힘든 힘이야.”

“하하하... 너희들도 입만 산 건 아니었네.”

***

십공신이 마안족 도시로 떠나고 정확히 19일째 되는 날이었다.

[<에테르 안경>의 이해도가 100퍼센트가 되었습니다!]

[<에테르 안경>의 제작법을 획득하였습니다!]

“와, 드디어 끝났네.”

19일 내내 대장간에 틀어박힌 채 안경과 씨름을 벌이던 그리드가 드디어 첫 번째 과제를 달성했다.

이제 안경을 투구, 혹은 면갑 등의 방어구 형태로 개조하고 그 제작법을 얻으면 된다.

‘나도 직접 사용할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면갑보다는 투구가 좋다.

면갑과 가면은 함께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마왕 토벌전에서도 큰 도움이 됐던 최상급 보물, <도살귀의 가면>을 그리드는 아직 버릴 생각이 없었다.

‘최소한 삼겹갑 정도의 가치를 발휘하는 투구가 하나 필요하기도 했고. 좋아, 투구와 안경을 일체화시키도록 하자.’

결정한 그리드가 <전설적 대장장이의 개조> 스킬을 전개, 에테르 안경을 개조 대상으로 설정하고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백호의 숨결>을 떠올렸다.

‘백호검은 돌을 소환하니까 백호의 숨결로 투구를 만들면 바위처럼 단단해지지 않을까?’

돌대가리라는 표현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바위처럼 단단한 투구를 만들어서 이상적인 돌대가리가 될 경우 급소 방어율이 급격히 상승할 여지가 컸다.

‘...음... 나중에 에테르 다이아몬드 하나 더 구해서 내 투구를 만들 때는 백호의 숨결을 넣어보도록 하자.’

그리드는 국가대항전에서 얻은 8개의 보상 중 4개를 사신의 숨결로 선택했다.

덕분에 현재 총 보유한 숨결은 주작, 청룡, 백호가 하나씩, 현무의 숨결이 2개였다.

사신의 기운이 깃든 무기와 방어구로 몸을 도배하기까지 그리 오래 남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순수한 에테르까지 떡칠하면 현재 시점에선 궁극의 템빨을 갖추게 되는 셈인데.’

그때쯤이면 제국의 강자들을 상대로도 충분히 싸워볼만하지 않을까?

“....?”

아이템 개조를 진행하며 생각해보던 그리드가 조금 당황했다.

제국을 방문했을 당시 마주쳤던 ‘시대의 강자’들에게 위축 됐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들이 딱히 두렵게 느껴지질 않았다.

내 간덩이가 부은 건가?

아니다.

가람 그 개자식 때문에 보는 눈이 올라간 거라고 보는 편이 옳은 것 같다. 마왕이 된 경험도 자신감이 되는 것 같고.

“흐음....”

잠시 제국의 전력을 고민해보던 그리드가 힐끔 날짜를 확인했다.

마안족 도시로 떠난 동료들에게 특별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제국의 침공은 아직 없는 듯하다. 덕분에 그리드는 아이템 개조에 집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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