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6권 - 11화
장신구 제작은 세공사의 영역이다.
제아무리 그리드가 날고 기어봤자 보석 세공 스킬을 배우지 못하는 이상 장신구를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드에게는 묘안이 있었다.
‘아이템 이해도.’
최근에서야 깨달은 사실인데, 아이템 이해도는 파그마의 후예의 가장 원천적인 힘이자 사기적인 개념이었다.
대상 아이템을 관찰하고, 사용하고, 수리하고, 분해하고, 조립하기를 반복함으로써 아이템 이해도를 높일 수 있고 이해도를 100퍼센트 달성 시 제작법 획득.
그렇다.
아이템 이해도 스킬이 있는 한 그리드는 장신구 제작법도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이템 이해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면밀한 노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노력의 대가인 그리드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처럼 꼭 필요한 아이템 제작법을 얻기 위해서는 열흘이고 한 달이고 투자할 의사가 있었다.
‘물론 제작법이 있다고 해서 모든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제작법을 얻는다고 해도 세공 기술의 부재가 문제다.
그리드가 에테르 안경의 제작법을 익혀봤자 세공 기술이 없는 한 실질적으로는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리드에게는 그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그건 바로.
‘아이템 개조!’
이해도가 100퍼센트인 아이템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형태로 구성하는 스킬.
그리드는 이 스킬을 사용해서 에테르 안경을 투구, 혹은 면갑과 일체화시킬 계획이었다.
에테르 안경을 장신구가 아니라 방어구로 분류함으로써 그 방어구를 제작할 수 있는 ‘합당한 권리’를 얻을 의도였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와 합작한다.’
템빨왕관을 만들었을 때와 같은 이치다.
에테르 다이아몬드의 세공은 엘리자베스에게 맡기고, 그리드는 안경 형태로 세공 된 에테르 다이아몬드를 재료로 방어구를 만들어서 아이템 완성도를 극상으로 높일 계획인 것이다.
아이템 개조는 사용 횟수에 제한이 있는 스킬이었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마안족 왕한테 그 정도 투자야 뭐.’
또한, 에테르 안경으로 만든 방어구의 성능 자체도 기대해볼만했다.
높은 마법저항력을 발휘하는 방어구가 탄생할 경우 언젠가는 양산해서 템빨단의 전력을 강화할 수단으로 삼을 수 있었으니까.
‘좋아. 제대로 해보자.’
의욕을 불태운 그리드가 작업에 열중했다. 대장간에 몇날며칠이고 틀어박힌 채 안경을 탐구하는 그의 모습은 대장장이 랭킹 1위이자 템빨국 수석 대장장이인 판미르를 걱정시킬 정도였다.
‘사냥이나 퀘스트 진행 같은 거 안 하고 저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제4회 국가대항전이 끝난 후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레벨업 열풍이 불고 있었다.
The Gap is Closing.
플레이어들의 레벨이 오를수록 클래스 간 격차는 줄어들 거라던 임철호 회장의 장담이 현실이 된 여파다.
플레이어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멀 클래스 전직자들은 제4회 국가대항전에서 희망을 엿보았고 희망은 열정이 되었다. 그리고 히든 클래스 전직자를 비롯한 랭커들은 제2의 그리드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마침 국가대항전 보상으로 장기간 경험치 획득 버프까지 얻었으니, 플레이어 대부분이 사냥에 목 매단 상황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한데 이 중요한 시국에 그리드는 며칠 째 대장간에만 있었고 십공신들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마안족 도시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판미르는 그들이 어깨에 짊어진 무게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책임져야할 일이 많아질수록 손해를 보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군소리 한 번 안하는 거 보면 정말 대단들 해.’
템빨국은 더욱 더 강해질 것이며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
확신한 판미르 또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대장간 지구에 있는 수십 개 대장간을 바삐 뛰어다니면서 대장장이들을 독려했다.
따앙! 따앙! 따앙!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망치질 소리는 템빨국 수도 라인하르트의 상징이었다.
***
레피오는 사방에 논과 산밖에 없는 작은 영지다. 가우스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벽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무척 뜸했다.
“마안족 도시가 이런 촌구석 지하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아주 제대로 꽁꽁 숨었어. 이쯤 되면 제국도 쉽사리 못 찾아내지 않을까?”
“큭큭큭... 머리 없는 인간이여. 비록 수고스럽지만 내 친히 네놈의 말을 정정해주마. 우리는 이곳을 마안족 도시가 아니라 어둠의 다크니스와 혼란의 카오스가 공존하는 적막한 대지라고 부르며, 우리는 숨어 지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봉인」한 것이다. 마안의 힘이 자칫 날뛰기라도 했다가는 세계가 그대로 멸망할 테니까─”
“내가 듀라한이냐? 왜 멀쩡히 머리 붙어 있는 사람을 머리 없는 인간이라고 부르는 거야? 하여튼 뭐라고 떠드는 건지 당최 알아먹을 수가 없네.”
“....”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콧방귀 뀌는 반트너를 십공신 모두가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방금 마안족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인간은 반트너가 유일하다는 뜻이었다.
유페미나가 화제를 돌렸다.
“아름다운 곳이네요.”
어둠의 다크니스와 혼란의 카오스가 공존하는 적막한 대지.
...이하 마안족 도시는 십공신의 상상과 전혀 다른 풍경을 자랑했다.
아무래도 마족이 사는 곳이다 보니 음기가 넘실거리는 척박한 대지를 상상했는데, 실상은 작고 동그란 형태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예쁜 도시였다.
“집집마다 지붕 색채가 환해서 해가 뜨면 훨씬 더 예뻤을 텐데 아쉽네.”
“큭큭큭. 태양보다는 달이 좋은 법이다. 차가운 월광의 빛 아래서 몸을 씻어낼 때야말로 비로소 내 몸 속의 혈류가 안정을 되찾고 「나」라는 이름의 괴물이 포효를 멈추게 되거든.”
“여긴 지하라서 달도 안 뜨잖아요?”
“.....”
레가스의 순수한 질문이 핵심을 찔렀다.
여태껏 기고만장하게 떠들던 마안족이 움찔하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십공신들이 혀를 내둘렀다.
‘마안족은 눈치 없는 놈한테 약하구나.’
지슈카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이대로 곧장 마안족 왕을 알현하러 가자. 근시일 내에 제국의 토벌대가 습격해올 가능성이 높으니까 시간이 없어.”
이미 도시 전역으로 흩어진 페이커와 템빨그림자단이 도시를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제국의 토벌대가 어떤 경로를 이용해서 도시를 침략할지 고려해보고 도시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을만한 지형과 지물을 수색하는 것이었다.
데스티니 가디언즈의 안내를 받은 십공신이 잠시 후 성 앞에 도착했다.
성은 정말 작았다.
마안족들의 평균 신장이 1미터 20센티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마안족 도시의 모든 건축물은 크기가 작았는데 그건 마안족 왕이 기거하는 성도 마찬가지였다. 성문의 높이부터가 1미터 50센티미터를 간신히 넘을 정도였으니 미니어처를 보는 것 같았다.
유페미나를 제외한 모든 십공신들이 허리를 숙여서 성문을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마안족 최고의 귀족들.
일명 ‘대신’이라는 존재들이 십공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3명의 대신 모두 벽을 짚고 선 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거나 얼굴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대들이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우리의 위대한 왕을 수호하기 위함이며, 또한 그대들이 우리 대신들을 굴복시킨 유일한 인간 그리드의 신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대들을 순순히 왕에게 보내줄 수 없다. 그대들이 우리의 위대한 왕을 영접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야한다.”
“이건 적의가 아니다. 우리의 왕은 단지 눈빛만으로 인간의 목숨과 운명을 빼앗는 절대적인 지배자. 자격도 없는 자가 그분을 영접하였다가는 영겁의 지옥에 빠지고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지옥을 배회하게 될 터다. 하니 그대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시험해봐야 한다. 복종안.”
3명의 대신이 동시에 안대를 벗었다.
안대를 벗자 노출 된 그들의 마안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십공신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마안족과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강력한 마안이 당신의 정신과 영혼을 굴복시킵니다.]
[상태이상 ‘복종’에 걸립니다!]
[지금부터 3초 동안 당신은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행동하게 됩니다!]
3초짜리 상태이상.
지속시간만 놓고 보면 하급 효과로 분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능은 가히 사기적이었다.
“이게 무슨...!”
반트너는 자신의 민머리를 양손으로 빡빡 문지르기 시작했고 극검은 개처럼 왈왈 짖었으며 지슈카는 자신의 가슴 사이즈를 측정하는 등 십공신 모두 본인의 의지와 전혀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마안족 대신들이 십공신에게 ‘서로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미친...! 어마어마한 능력이다!’
차원이 다른 마안족 대신들의 마안에 십공신은 솔직히 감탄했다.
제아무리 제국이라도 이들이 지키는 관문을 통과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품을 지경이었다.
마안족 대신들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대들에게는 자격이 없군. 우리의 위대한 왕을 알현할 기회는 다음에 노려보도록 해라.”
“우리는 단지 그대들의 안전을 위하는 것일 뿐이니 기분 상하지 마라. 우리는 그대들을 내칠 생각이 없고 도리어 반기며 감사하고 있다. 숙소를 제공해줄 터이니 앞으로 당분간 잘 부탁하겠다.”
“우리의 왕과 도시를 잘 지켜다오.”
대신들의 태도는 의외로 순순하고 호의적이었다.
그들 또한 제국의 침략을 미리 예상하고 있던 눈치였다.
“마안족에도 뛰어난 책사와 정보력이 있나보군....”
감탄하는 십공신 사이에서 라우엘이 고개를 저었다.
“주민의 숫자가 고작 천 명밖에 안 되며 폐쇄적인 공간에서 생활하는 마안족이 책사나 정보력을 갖췄다고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미래시」의 힘이겠지요. 후후훗... 참 대단한 종족이야.”
“....”
“십공신 여러분. 이미 몇 번이나 말씀드렸다시피 제국은 근시일 내에 반드시 이곳을 침략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임무는 왕을 보호하는 것. 머나먼 타지에서 마냥 적을 기다린다는 건 필시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여러분 모두 부디 책임감과 의욕을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마안족 왕을 잃어선 안 됩니다.”
“알았다.”
이후 십공신과 템빨그림자단은 마안족 도시에 완전히 터를 잡았다.
교대로 순찰을 돌고 경계를 취하며 마안족 왕의 안전을 도모했다.
그리고 3일 뒤.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지금부터 저희도 임무에 합류하겠습니다.”
코크와 제드노스, 그리고 라엘라가 600명의 정예 병사를 이끌고 마안족 도시를 찾아왔다.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무장한 병사들이 마안족 도시 곳곳을 철통 같이 지켰다.
‘이쯤 되면 적기사가 쳐들어와도 쉽게 막겠군.’
평소에는 보기 힘든 페이커와 유라를 포함한 십공신 전원이 모인 것만 해도 장관이었는데 정예 병력까지 합류한 상황이다.
템빨단원들은 제국의 침략이 두렵지 않았다. 설사 대악마가 나타날지라도 토벌할 자신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리드가 나설 필요 없이 우리끼리 잘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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