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6권 - 9화
국가대항전이 끝나고 하루가 지났다.
그동안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모든 언론사들이 유라의 공개 고백 사건을 비중 있게 다뤘다.
여론의 관심은 하늘을 찔러서, 인터넷과 SNS는 24시간 내내 그리드와 유라의 이야기로 도배 되다시피 했다.
-오늘 그리드랑 유라 동반 입국 한다는데?
-결국 사귀기로 했나보네.
-아, 부럽다.
-그래도 응원해줘야지. 유라가 얼마나 용기내서 고백했는데....
-맞아. 그게 진정한 팬의 자세지.
인천국제공항.
그리드와 유라의 동반 입국 소식이 알려지자 공항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방송사와 기자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화제의 주인공들을 보겠다고 공항을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
그리드의 걱정과 달리 사람들은 그리드를 저주하지 않았다. 용기내서 고백한 유라를 응원하는 한편 그리드에게는 고백 받을 자격이 있다며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 일행이 입국하자 현장의 분위기가 사늘하게 식었다.
그리드와 유라의 이름을 연호하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어버렸고 기자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리드가 유라와 단둘이 입국한 것이 아니라 지슈카까지 대동하고 나타난 까닭이었다. 심지어 지슈카는 그리드에게 바짝 붙어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ㅡ.ㅡ....
-그리드 저 XXX...
그리드의 입국 장면이 전 세계로 실시간 중계되는 즉시 그리드의 천만 안티가 창궐하고 말았다.
두 여자 사이에 선 채 인파를 마주한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공항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적의와 살의를 보내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이건 우정의 표시라고.’
지슈카는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이기 때문에 팔짱을 껴온 것이었다. 그래, 이건 애정행각이 아니라 우정행각이다. 한데 또 양다리로 오해 받아서 죽일 놈이 되다니?
‘억울하다...’
그리드의 분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염한 미소를 그린 지슈카는 그리드에게 가슴을 더욱 더 밀착시키고 있었다.
유라는 자신들의 입국 정보를 흘린 범인이 지슈카일 거라고 의심했다.
***
일명 그리드촌.
그리드의 빌딩이 세워진 이후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거리를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리드의 빌딩 옆으로 여섯 채의 고층 빌딩이 공사 막바지에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지슈카 소유의 건물이었다.
“완공까지 딱 보름 남았어.”
그리드 빌딩 바로 옆에 서게 된 지슈카 빌딩.
구조를 보아하니 지슈카 또한 그리드처럼 펜트하우스를 자택으로 삼을 계획인 듯했다. 한데 어째 너무 오픈되어 있었다.
‘거리도 가까운데 외벽은 죄다 유리라고? 밤에 불 켜면 우리 집에서 다 들여다보일 것 같은데.’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이니, 정원과 수영장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그리드가 무의식중에 눈길만 한 번 돌려도 엿보기범으로 몰릴 수 있는 구조였다.
반대쪽에는 벽 높이 세워놨으면서 왜 이쪽에는 벽을 안 세웠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완공까지 보름 남았다고?”
“응. 그래서 보름 동안 머물 곳을 구해야해. 한국은 아직 많이 낯설고, 여자 혼자인 만큼 조금 무섭기도 하지만... 호텔에서 지낼 생각이야.”
“뭘 굳이 호텔에서? 우리 집으로 와. 남는 방 많아.”
머나먼 이국땅에서 날아온 친구다.
숙소 정도야 기꺼이 제공할 수 있었고 그게 예의였다.
지슈카의 아름다운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 그리드!”
“가, 갑자기 껴안지는 말고!”
***
굉장히 지친다.
지슈카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단 하루 만에 정기가 죄다 빠져나간 기분이다.
‘남미 여자들은 원래 집에서 그런 차림으로 다니는 건가....’
캡슐에 앉아 잠시 멍하니 있던 그리드가 상념을 털어내고 로그인했다.
본 서버 접속은 거의 이틀 만이었다.
그리드는 가장 먼저 아이린을 찾아갔다.
유라에게 고백 받은 이후부터 아이린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혼란스럽다.
Satisfy와 현실은 결국 단절 된 세계.
현실에서 유라에게 호감을 품게 되었다고 해서 아이린에게 죄의식을 품어야할까?
반대로, 아이린이 Satisfy에만 존재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기만한다면, 내가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는 거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
궁전에 도착하자, 정원에 서서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린의 아름다운 옆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나보다 연상이 된 여인.
그리드의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졌다.
“전하!”
아직 멀리 선 그리드를 어찌 발견하고 아이린이 달려왔다.
씁쓸한 미소를 흘린 그리드가 그녀에게 다가가 꼭 안아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듣고 싶은 이야기도 참 많소. 오늘 밤새 담소를 나눕시다.”
“네, 전하.”
그리드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아이린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녀의 머리를 꼭 끌어안은 그리드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녀를 배신할 수 없음을.
“사랑하오.”
“전하도 참... 보는 눈이 많사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좋아했을 거면서, 이제는 나이 좀 들었다고 체통을 우선시한다.
괜히 오기가 생긴 그리드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아이린을! 사랑한다!!”
“저, 전하.”
아이린이 얼굴을 붉혔고, 고개를 조아린 시중들은 서로 웃으며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왕과 왕비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큰 귀감이 되었다.
그날 밤.
“전하의 젊음은 처음 만난 그날과 변함이 없군요.”
그리드와 단둘이 정원을 걷던 아이린이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그리드의 미소에 감춰진 수심을 엿보고 있었다. 지금의 그리드, 수애에게 잠시 마음이 흔들렸던 시기와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저는 필멸자. 언제까지고 전하의 곁을 지킬 수 없습니다.”
“아이린, 갑자기 무슨 말이오?”
“저는 전하께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여인을 비로 맞이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말 마시오.”
“전하를 사랑하기에 밝힐 수 있는 간절한 진심이에요.”
“....”
다르게 흐르는 시간.
이미 각오했건만, 그 각오가 무색하게도 두렵고 원망스럽다.
아이린의 푸른 눈동자에 깃든 슬픔과 결의를 엿본 그리드는 두 번 다시 NPC를 사랑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
국가대항전이 끝나고 3일이 지난날이었다.
밀린 업무를 수행하고 있던 라우엘의 시야에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해양왕국 메디아가 멸망하였습니다.]
[사하란 제국이 메디아의 모든 영토와 권리를 흡수하였습니다.]
[메디아 왕가의 생존자들이 사하란 제국에게 큰 원한을 품습니다. 그들의 복수심은 영원히 대물림 될 것입니다.]
[사하란 제국의 기세가 무섭게 상승합니다! 앞으로 열흘 동안 사하란 제국 소속 플레이어들의 경험치 획득량이 10퍼센트, 아이템 획득 확률이 5퍼센트 상승합니다.]
‘메디아가?’
메디아는 라우엘도 방문한 경험이 있는 국가였다.
바로 번헨 열도가 있는 곳이었으니까.
비록 작지만 아름다운 나라였고 상당한 부가 축적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정예군의 수준은 상당할 것으로 예측되었는데, 하루아침에 멸망해버린 것이다.
‘마장기를 쓴 건가?’
라우엘이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십공신과 참모진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귓속말이 날아왔다.
한데 귓속말을 보내온 상대가 엄청난 거물이었다.
군신(軍神).
아레스였다.
-백룡의 눈은 내가 먼저 선수 쳐서 빼돌려놨으니까 안심하라고.
‘백룡의 눈이 뭐지?’
라우엘은 처음 들어 보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정보의 부재를 노출해봤자 좋을 것이 없다.
-그래요? 용건은 뭡니까?
태연하게 반문하는 라우엘에게 아레스가 뭘 그리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보상을 바라는 거야. 우리와 거래하는 무기 시세를 기존보다 4배 이상 낮춰주시게.
그리드가 헥세타이아 신의 축복을 받은 이후, 상당수의 대장장이가 템빨국으로 이주해버렸고 라우엘은 이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아이템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하고 시세를 높여 유통하면서 폭리를 취해온 것이다.
솔직히 발할라 입장에서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기존보다 3배 이상 폭등한 무기 값 때문에 기껏 징집한 병사들을 제대로 무장시킬 수가 없는 사태에 이르렀다. 나라의 모든 재정을 무기 구입에 써도 부족한 판국이었다.
대륙 각지에서 템빨국을 비판하고 있었으니 라우엘이 도를 지나치긴 했다.
하지만 여태껏 아레스는 단 한 번도 템빨국을 비난한 적이 없었다. 그리드에게 도움을 받았던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일국의 왕인 이상 언제까지고 호구 잡혀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상을 요구한다고?’
라우엘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메디아의 멸망, 메디아를 멸망시킨 제국, 그리고 백룡의 눈....
‘제국이 메디아를 침공한 이유가 백룡의 눈이라는 아이템 때문이라 이거고, 제국이 백룡의 눈을 얻었을 경우 우리에게 피해가 왔을 거라 이건데....’
일단 백룡의 눈에 대해서 알아보는 게 급선무다.
-그리드 전하와 논의한 후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겠네.
라우엘의 기약 없는 말에도 불구하고 아레스는 별 미련 없이 물러났다. 마치 패는 이쪽이 쥐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그런 태도였다.
더욱 더 찝찝해진 라우엘이 그 즉시 스틱세이를 찾아갔다.
대현자 스틱세이는 역시 치트키였다.
그는 백룡의 눈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백룡의 눈은 ‘모든 종류의 힘’을 반사하는 비보일세.”
“모든 종류의 힘을?”
엄청난 사기 아이템이다.
제국이 탐낼만했다.
하지만 이걸 발할라가 가로챈 행위가 어째서 템빨국에게 이득이 된다는 거지? 아레스는 어째서 보상을 논했는가?
회의실로 돌아온 라우엘은 십공신과 상의해보았지만 쉽게 연관 짓기가 힘들었다.
2시간쯤 지나서 페이커가 보고해왔다.
“메디아는 열흘 전에 백룡의 눈을 인양했고, 제국은 곧바로 그 정보를 입수했다. 메디아는 당연히 정보를 은폐하려고 시도했지만 제국의 정보망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던 거야.”
“...흠.”
수백 년 역사의 왕국을 하루아침에 멸망시키면서까지 제국이 그것을 탐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
또 수십 분을 고민하던 라우엘이 벼락에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안족 왕!”
“....?”
어리둥절하는 십공신들.
그들에게 라우엘이 설명해주었다.
“엘프, 드워프, 오크, 뱀파이어, 거인족, 마안족, 어인족 등의 이종(異種)과 마족은 대륙통일을 노리고 있는 사하란 제국의 입장에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중에서도 마안족은 마안족 왕의 개안(開眼)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강력하므로 사하란 제국이 가장 경계하는 변수였겠죠.”
한쪽 손을 들어 올린 라우엘이 얼굴의 절반을 가렸다. 드러난 한쪽 눈이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면 얼마나 멋졌을까, 생각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은 그가 말을 이었다.
“백룡의 눈은 모든 종류의 힘을 반사하는 비보. 그것이 마안족 왕의 시선을 반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안족 왕을 자멸시킬 수 있다는 건가?”
“맞습니다. 제국의 손에 백룡의 눈이 들어가선 안 됩니다.”
여기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군신이 그리드 전하와 마안족 왕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마안족 왕이 전하와 호의적인 관계라는 것을 알고 중간에 개입해서 백룡의 눈을 가로채고 이를 토대로 우리와 거래를 트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
장내가 조용해졌다.
모두 눈치 챈 것이다.
라우엘이 쐐기를 박았다.
“그렇습니다. 발할라에는 뛰어난 기재가 있어요. 템빨국과 제국의 입장을 헤아리고, 한 발 앞서 행동함으로써 정국을 주도할 수 있을 정도의 천재가.”
그놈에게 완전히 당했다.
국가대항전에 참가했던 것이 패착이 됐다.
‘내가 국대전에 참가하는 일은 두 번 다시없을 것이다.’
분해 이를 간 라우엘이 다짐하면서 발의했다.
“현재 우리는 발할라에게 협박을 당하는 입장이 됐습니다. 군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백룡의 눈이 제국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사정은 대강 들었다.”
라우엘이 한참 심각한 표정으로 말할 때였다.
갑자기 그리드가 회의실에 난입했다.
그는 웬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테는 보석처럼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렌즈는 신비로운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안족 왕은 걱정할 거 없어.”
“....?”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혼자서 선글라스 끼고 나타나 히죽히죽 웃다니?
당황하는 십공신들에게 그리드가 단언해보였다.
“마안족 왕은 스스로 개안을 조절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용의 눈깔인지 뭔지는 아무 문제없어.”
드디어 시작 된 사하란 제국의 대륙 통일 에피소드.
템빨국은 시작부터 태풍의 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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