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6권 - 8화
후우... 후우...
츄르릅. 츕츕...
하아아...
“정말 너무...”
땀투성이가 된 유라의 얼굴이 희열로 물들었다.
“정말 너무 맛있어요.”
쪼옥.
마지막 남은 면발을 빨아들이는 유라.
그녀는 인스턴트 라면이 이렇게 맛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애초에 접해볼 기회가 없어서 라면을 글로 배웠는데, 라면 후기를 읽어봐도 특별히 맛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정작 먹어보니 5성급 호텔에 있는 중식당의 총주방장이 직접 만든 수타면처럼 쫄깃하고 탱글탱글한 면발과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었다.
다소 생소한 조미료의 맛이 혀끝을 자극할 때마다 등골이 오싹오싹하다.
“더군다나 식자재를 세척할 필요도 없이 바로 조리해서 먹으면 된다니... 간편하기까지...”
연신 감탄을 터뜨린 유라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조신한 몸가짐이었다. 이곳이 라면 냄새 풀풀 풍기는 중국의 한 호텔이 아니라 프랑스의 고급 레스토랑처럼 보이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반면 그녀 건너편에 앉은 그리드는 동네 국밥집 분위기를 연출했다. 대접에 얼굴을 묻을 기세로 국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키야~ 조옿다.”
그리드는 본인이 끓인 라면의 맛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한 치의 오차 없는 물의 양과 불 끄기 1분 45초 전에 넣은 계란, 그리고 불 끄기 8초 전에 넣은 파가 삼위일체를 이루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정석이되 이상적인 라면의 맛이었다.
‘이런 걸 보고 일취월장이라고 하던가?’
확실히, 성장했다.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3개 받은 레스토랑 주방장이랑 라면 끓이기 대결을 해도 패배하지 않을 자신감이 생길 정도이다.
그리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짬뽕도 직접 끓여먹어 볼까?’
중국집에서 시켜먹는 것보다 내가 끓이는 짬뽕이 더 맛있을 수도?
‘으음....’
식자재를 준비하고 요리에 정력과 시간을 투자하는 일.
본래의 그리드라면 당연히 꺼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건너편에 앉은 유라의 활짝 편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소중한 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앞으로는 요리를 취미로 삼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만요.”
그리드와 시선이 마주친 유라가 새 냅킨을 챙겨 그리드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그윽한 꽃의 향기 같은 체취가 그리드의 코끝을 찔렀다.
“....”
그리드는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을까 걱정이었다. 미칠 듯이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없었던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라....!”
“네...? 네!”
그리드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이름을 부르자 놀란 유라가 뒤늦게 바짝 긴장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그리드가 콧김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꿀꺽....
유라가 마른 침을 삼켰다.
이게 바로 연애학에서 말하는 <라면 효과>라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이 순간을 바라고 있었고, 각오도 했지만 아무래도 경험이 없다보니 두려운 건 어쩔 수 없다.
살짝 몸을 떤 유라가 마음을 다잡고자 노력하는 그때였다.
“화, 화장실 좀 다녀올게.”
“....”
유라를 홀로 남겨둔 그리드가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곧장 거울을 확인했다. 혹시 이에 고춧가루가 끼었을까봐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리드의 치아는 건강했고 틈새가 벌어지지 않아 이물질이 쉽게 끼지 않았다. 하얀 이가 반짝였다.
‘내가 잘 생겼다는 말이지?’
입을 헹구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는 그리드의 입 꼬리가 연신 씰룩거렸다.
이제 보니 <지존도> 속 모습과 실물이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지존도가 포샵처리 된 사진 같아서 민망해하던 자신과 달리 라우엘을 비롯한 템빨단원들, 그리고 아이린과 로드는 아무런 저항감 없이 그림이 멋지다고 감탄해줬던 일들이 떠올랐다.
‘확실히, 예전보다는 나아졌다는 생각이 종종 들긴 했었어.’
운동을 벌써 4년째 하루도 쉬지 않고 꾸준히 해왔다.
운동을 하나도 안 했던 시절과 비교해서 얼굴형이 다부져졌고 이목구비가 똑바로 자리를 잡아서 확실히 보기가 좋았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여드름 자국 같은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피부였다. 4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땀을 한 바가지씩 흘렸더니 노폐물이 빠져나가서 피부가 좋아진 것 같았다. 물론 땀 흘린다고 누구나 다 피부가 좋아질 수는 없을 테니, 조금쯤은 타고난 면도 있는 거 아닐까 싶다.
“음....”
그리드가 온갖 포즈를 취해보았다.
넓게 벌어진 어깨와 곧게 편 허리, 그리고 나름 큰 편에 속하는 키 덕분인지 어떤 포즈를 취해도 태가 났다.
‘...멋있는 것 같기도.’
그리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정말 몇 년 만에 외모에 자신감을 찾자 자존감이 급격히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흠흠.”
손을 닦은 그리드가 대충 헤어를 만졌다.
말 그대로 대충이었다. 서너 번 휙휙 건드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리드의 헤어스타일은 청담동 미용실의 디자이너가 만져준 것처럼 멋져졌고 외모가 한층 더 빛이 났다.
라면을 잘 끓인 이유와 일맥상통했다. 바로 손재주의 힘이었다.
게임에 접속하면 쉬지 않고 재단을 하거나 대장일을 했으니, 그의 섬세한 손가락 움직임은 ‘기억’ 혹은 습관으로 남아 현실에서도 일부 발현되는 것이었다.
“와...”
화장실에서 나와 거실로 향한 그리드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햇볕이 들어오는 거실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유라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벌써 몇 년째 보고 있는 얼굴인데도 적응이 안 돼서 잠시 넋을 잃어버렸다.
‘갈수록 더 예뻐지는 거 같은데.’
근데...
어째 그새 옷차림이 바뀐 것 같다?
원래 청바지에 스웨터 차림이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으로 바뀌었다. 멜로영화 속 주인공 그 자체였다. 길게 뻗은 흰 다리가 절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외출하게?”
건너편에 앉은 그리드가 질문하자 얼굴을 붉힌 유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래.”
편한 차림으로 쉬고 싶었나보구나.
대수롭지 않게 넘긴 그리드가 그녀의 일정을 확인했다.
“한국에는 언제 돌아가?”
“영우 씨 일정에 맞추려고요. 제 비행기 타고 가세요.”
“오, 잘 됐다. 전용기가 편하긴 엄청 편하던데.”
“말씀만 하시면 언제라도 빌려드릴게요.”
“정말?”
사실, 그리드도 전용기를 한 대 살까 고민했었다. 자신보다는 가족들의 편의를 생각하면 한 대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용기는 비행기 모델과 연식, 인테리어에 따라서 가격이 천차만별로 달라졌고, 그리드가 원하는 수준의 전용기는 가격이 천억을 가뿐히 넘겼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살 수야 있었지만, 아무래도 서민 출신이라 그런지 한꺼번에 그만한 거액을 지출한다는 건 생리적으로 부담이었다.
“그럼 나야 고맙지. 어차피 자주 필요한 것도 아니고 가끔 부모님 해외여행 보내드릴 때마다 필요할 것 같은데 가끔씩 부탁할게.”
“네! 제가 잘 모실게요!”
부모님이라는 말이 나오자 유라가 눈을 빛냈다. 이상할정도로 의욕적인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린 그리드가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할아버지랑은 통화했고?”
“....네. 더 이상 후계 문제를 논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어요.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유라는 조부에게 자세한 내막을 들었다.
그리드가 자신을 위해서 애써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눈물이 흐를 정도로 기쁘고 감사했다.
이후 긴 대화가 이어졌다.
유라는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그리드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자신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라 말했고 그게 바로 Satisfy라고 하였다.
“영우 씨가 제 꿈을 지켜준 거예요. 평생이 걸리더라도 꼭 은혜를 갚을게요.”
“그냥 곁에 있어주면 그걸로 족해.”
“곁에...”
“같이 템빨국을 열심히 키우자.”
“....”
역시, 오늘 당장 대답을 듣는 건 무리가 있겠지.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되고도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그리드의 모습에 유라는 큰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재촉할 수도 없는 거고, 그리드의 입장도 충분히 헤아렸기에 유라는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때였다.
“누구지?”
찾아올 손님이 없는데 벨소리가 들리기에 유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실수가 생겼다.
조부에게 내 삶의 권리를 인정받고 그리드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등.
오늘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지라 심력을 크게 소비한 탓일까.
소파에서 일어나는 순간 유라는 현기증을 느꼈고,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를.
“괜찮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리드가 부축해주었다.
그의 커다란 손에 허리와 목을 감싸인 유라의 눈빛이 애처로워졌다.
“영우 씨...”
“...꿀꺽.”
두근! 두근! 두근!
그리드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절세가인이 코앞에 얼굴을 맞댄 채 간지러운 신음을 보내왔으니 미칠 것만 같았다. 끓어오르는 욕망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뚝!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선이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린의 모습이 잠시 흐려졌다.
이성을 잃은 그리드가 유라의 살굿빛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는 순간이었다.
벌컥!
“...!?”
“....?”
현관문이 갑자기 멋대로 열렸다.
깜짝 놀란 그리드와 유라가 황급히 몸을 떼어내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청객의 정체를, 그리드는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시선이 불청객의 특정 부위에 고정돼버려서 얼굴을 살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한 그리드가 경악했다.
“지슈카?”
“안녕? 둘이 뭐하고 있었어?”
“어... 그, 그게...”
여전히 거친 호흡을 뱉고 있는 유라를 대신해서 설명하려던 그리드가 문득 의문에 휩싸였다.
“근데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빙그레 미소지은 지슈카가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나이프였다.
“....”
“...헤, 이게 아니네.”
나이프를 다시 넣은 지슈카가 반대쪽 주머니에서 마스터키를 꺼냈다.
“이 호텔, 우리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체인점이거든. 빽 좀 썼지. 애초에 나하고 유라 사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 친구하고 연락이 안 돼서 걱정 된다니까 순순히 키를 넘겨주더라고.”
“....”
“그래서. 둘이 뭐하고 있었니?”
시선만으로 사람을 태워 죽이는 게 가능할까?
지슈카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마주보고 선 그리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지슈카가 갑자기 새로운 소식을 전해왔다.
“아, 그리고 나 오늘부터 곧바로 한국으로 이주할 거야. 쥐새끼 한 마리가 거슬려서.”
지슈카는 유라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실로 표범 같은 기세가 뻗어 나왔지만 유라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한국에 오시는 걸 환영해요. 내년 국가대항전이 기대되네요.”
“딱히 기대할 것도 없어. 어차피 너랑 같은 종목에 출전할 거라서 메달 총량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사적인 감정을 내세우는 건가요? 프로답지 못한 태도군요.”
“프로? 내가 월급 받고 게임하는 것도 아닌데 웬 프로? 그냥 꼴리는 대로 하는 거지.”
“기본적인 책임감을 논하는 거예요. 국가대표로써 출전하는 대회인 만큼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얌체 짓이나 하는 주제에 책임감은 개뿔.”
파지직!
서로를 노려보는 유라와 지슈카의 시선에 스파크가 튀었다.
중간에 선 그리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환장할 노릇이었다.
‘얘들 왜 이렇게 사이가 안 좋아졌지?’
***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4회 국가대항전이 끝난 후.
크라우젤은 곧바로 대륙제일창을 찾아갔다.
창성 키리누스.
직업 퀘스트를 진행하는 도중에 만났던 기연이다.
장작을 패고 있던 키리누스가 크라우젤을 알아보고 말했다.
“뮐러의 그림자를 쫓았으면 훨씬 더 쉽고 빠르게 강해졌을 것을, 괜한 고집을 피워 느린 길로 돌아갔던 기인 아니신가.”
크라우젤이 무릎을 꿇었다.
“검성 뮐러조차도 때때로 창술에 의지할 때가 있었노라 하셨지요.”
“검이 아닌 창이야말로 최강의 무기이니 그럴 수밖에.”
“창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청룡의 소드 브레이커.
단 하나의 아이템 때문에 검성이라는 직업 자체가 부정당한 크라우젤.
이제 그는 한 가지 길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드가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아이템을 활용하듯이, 크라우젤 자신 또한 다양한 무기를 다룰 수 있어야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자격이 있었다.
“네가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구나. 그래, 무(武)는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고 하지만 수련의 과정이 다른 법이다. 그리고 과정은 결과만큼이나 중요한 법. 내 검성의 명예를 생각하여 너의 뜻을 존중해주마.”
[히든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3년.
무려 3년 동안이나 한 장소에 머물러야하는 퀘스트였다. 퀘스트 내용을 보아하니 레벨이 정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망설이지 않고 퀘스트를 수락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일한 경쟁자, 그리드.
크라우젤은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끊임없이 정진하고 실력을 증명함으로써 그리드와의 관계를 영원히 이어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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