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6권 - 6화
“그리드입니다.”
짧은 한 마디로 자신을 소개한 그리드가 회견장을 둘러보았다. 천 명이 넘는다고 했던가? 넓은 회견장을 빼곡하게 채운 기자들의 모습이 시루에 가득 찬 콩나물 같다.
하지만 그리드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일국의 왕인 그는 이런 자리가 익숙했다.
느긋하게 기자들의 면면을 살핀 그리드가 금발의 여기자를 지목했다.
“질문하세요.”
그리드에게 첫 번째 발언권을 얻은 행운의 주인공은 캐나다 국영방송 소속 기자였다. 그리드에게 호의적인 시선도, 부정적인 시선도 보내지 않고 기자로서 순수한 열정을 품고 있음을 표정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드에게 선택 받은 이유다.
회견장을 잠깐 둘러본 것만으로 기자들의 각기 다른 의도를 읽은 그리드는 기자회견이 무난하게 시작되게끔 유도했다.
“캐나다 CBC 문화부 기자 케롤라인입니다. 우선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홀로 400명의 랭커와 싸워 이기는 위업을 세우셨는데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물론 기쁩니다.”
“처음부터 본인이 승리할 거라고 예상하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단지 운이 좋았습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을 운이라고 하시는 거죠?”
일단 지공(智公)의 <마법 관조> 스킬 발동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선수들이 멋대로 오해해준 덕분에 그리드는 마왕 토벌전 내내 마법사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그보다 더 큰 행운은 크라우젤이 참전하지 않고 방관했다는 점이고.
하지만 그리드는 이 사실들을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지공에 관해 말하는 건 스스로의 한계를 노출하는 셈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며, 안 그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는 크라우젤을 굳이 화두에 올릴 생각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질문 권한이 다음 기자에게로 넘어갔다.
“윤상민 이사는 그리드 선수에게 아무런 특혜도 주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마법을 반사하고 마장기를 소환한 능력 또한 그리드 선수의 고유 능력이라고 해석해야 되는데,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리드는 이번 마왕 토벌전에서 모든 전력을 투명하게 공개해버렸다. 다소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허장성세를 펼쳤다.
지공의 효과가 확률성이라는 점과, 마장기를 소환한 게 아니라 대가를 지불하고 복제한 거라는 사실 등을 설명하지 않고 사람들이 받아들인 그대로 오해하게끔 놔뒀다.
‘애초에, 아이템 복제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를 테니.’
그리드 본인이나 그의 측근이 아닌 이상 아이템 복제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그렇기에 예리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마장기의 생김새가 지발 선수의 마장기와 꼭 닮아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국의 문장까지 똑같은 위치에 새겨져 있었죠. 그리드 선수가 보유 중인 마장기 또한 본래 제국 소유의 기체였다는 뜻일 텐데, 도대체 어떤 경위로 제국의 병기를 손에 넣으신 겁니까?”
충분히 나올법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미리 상정하진 못했다.
그리드가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하는 와중에, 질문했던 기자가 멋대로 추측했다.
“황제의 초대를 받고 제국을 방문하셨을 때 선물로 받은 거 아닙니까?”
“....?”
황제가 미쳤다고 퍼줘?
그것도 고대의 유물을?
황당한 추측이다. 하지만 근거가 썩 없지도 않았다.
사하란 제국이 건국 최초로 화친을 제안한 국가가 바로 템빨국이었고, 황제의 초대를 받은 그리드는 친히 황궁을 방문한 바 있으니까.
사하란 제국과 템빨국의 관계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더욱 더 특별하지 않을까?
랭커들을 압살했던 마장기를 선물로 내어줄 정도면 그리드와 황제의 관계는 보통이 아닐 것이다.
그리드가 침묵하자 긍정의 대답이라고 해석한 기자들이 술렁이며 타이핑을 서둘렀다.
‘그리드, 사하란 황제의 총애를 받다?!’, ‘템빨국과 사하란 제국은 영원한 우방?’ 등의 자극적인 기사가 지금쯤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을 테지.
‘뭐... 싫어하지는 않았지.’
확실히, 황제 쥬앙데르크는 알려진 것과 다른 면이 많은 인물이었다. 난폭한 방법으로 대륙을 지배하는 폭군인 한편 공과 사는 또 명확해서, 언젠가 자신의 방해물이 될 수도 있을 그리드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주기까지 했다.
바로 메르세데스.
전설의 기사였다.
마장기보다 훨씬 더 귀한.
‘정확히 말하면 내게 준 선물이 아니었지만.’
황제가 메르세데스를 템빨국으로 보낸 이유는 당연히 그리드를 위해서가 아니라 피아로를 위해서였다.
대악마 아스타로트의 농간에 넘어가 자신의 친우이자 충직한 기사였던 피아로를 배신자라고 선포한 황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 자신 때문에 불행해진 피아로가 말년이라도 편안히 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메르세데스를 그의 곁으로 보낸 것이다.
물론 황제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피아로가 농부가 돼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여전히 황비 마리를 향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는 사실을.
‘피아로의 마음도 복잡해지겠군.’
세 번째 질문 권한은 중국인 기자에게 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드를 탐탁찮은 시선으로 노려보던 기자였다.
“전투 초반, 당신은 수백 명의 선수들을 굴복시키는 스킬을 사용했었죠. 그때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당신은 메이샤오 선수를 저격해서 해쳤습니다. 그 행동에는 어떤 의도가 담겨있었습니까?”
중국인들은 그리드를 싫어한다.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한국 태생이 중국의 영웅이었던 하오에게 패배를 안기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지존이라는 위치에 섰으니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러다보니 중국 언론 또한 그리드에게 호의적일 수가 없었다. 중국 언론은 자국 여론의 뜻에 따라서 그리드가 하는 짓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드가 메이샤오를 저격한 행위를 놓고 중국에 대한 악의가 드러난 사건이었다는 기사까지 써갈겼다.
물론 그리드도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신중하게 처신했다.
“메이샤오 선수는 2세대 플레이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게도 뛰어났습니다. 전투 초반, 그녀가 가장 위협적이기에 그녀를 가장 먼저 노릴 수밖에 없었죠. 만약 그녀의 저격에 실패했다면, 저는 분명히 마왕 토벌전에서 패배했을 겁니다.”
“...메이샤오 선수의 실력을 인정하신다는 겁니까?”
“그녀가 올해 국가대항전에서 보여준 모습들을 고려하면 누구라도 인정할 것 같습니다만?”
“그, 그렇군요.”
뻔한 질문을 해서 민망하다는 듯이, 얼굴을 살짝 붉힌 중국인 기자가 마이크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무척 흥분 된 표정으로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기자회견을 실시간으로 시청 중인 중국 인민들 또한 마음이 한껏 누그러졌다.
그리드가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마치 물을 보고 물이라고 말하듯이 당연하게 메이샤오를 극찬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2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메이샤오는 진정한 중국의 신성이라는 사실과, 그리드가 중국이라는 나라에 딱히 어떤 편견이나 악의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중국을 싫어했으면 메이샤오를 인정했을 리도 없지.
-그리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짬뽕이래. 중국식 국수야!
-그리드는 친중파였구만.
-단순한 놈들. 립서비스에 홀라당 넘어가서 좋다고 실실 거리네.
-메이샤오의 실력을 인정한 게 립서비스라고?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게 왜 립서비스냐? 연변 놈이냐? 꼭 보면 연변 놈들이 중국이랑 한국 이간질하던데.
아군은 많을수록 좋다.
칸을 잃었을 때부터, 그리드는 이 당연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 감정대로 행동해서 괜한 적을 만드는 행위를 이제 최대한 자제하기 위해서 노력 중이었고 그 효과는 컸다.
아르헨티나 기자가 조심스럽게 질문해왔다.
“수에론 선수를 가장 처음 해친 것도 메이샤오 선수와 같은 이유에서였습니까?”
‘아뇨, 그건 치질 유포설 때문인데.’
....라는, 목구멍까지 치솟는 말을 간신히 삼킨 그리드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맞습니다. 사상자가 늘어날수록 급격히 강해지는 수에론 선수를 가장 경계했거든요.”
이후 30분.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불사를 2번이나 사용하신 것으로 추측되는데 어떤 능력이 개입한 건가요?”
“비장의 한 수라고만 밝히겠습니다.”
“크라우젤 선수와의 1대1 승부는 서로 사전에 약속한 겁니까?”
“아닙니다.”
“한국에서 극히 일부지만 비난 여론이 생기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그리드 선수가 한국 소속이 아니라 개인으로 대회에 참가한 바람에 한국의 종합 순위가 낮아졌다는 게 그 이유인데요. 그들의 반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오래간만에 복귀한 지발 선수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비약적인 발전에 몇 번이나 감탄했습니다. 마왕 토벌전에서도 가장 경계한 선수 중 한 명입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가신을 거느리고 있을 군신 아레스를 가장 강력한 차기 마왕 후보로 손꼽고 있습니다. 그리드 선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또한 후보 중 한 명으로 아레스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명은 교황 데미안이죠. 레베카의 딸들이 성문을 지킨다고 생각하면 정말 무섭네요.”
“템빨단 선수들의 전력이 해를 거듭할수록 강해지고 있는데 템빨국의 세를 확장할 계획은 없으신 겁니까?”
“국가대항전과 관련 된 질문만 해주십시오.”
등등.
아주 무난한 흐름이었다.
기자들은 시청자들이 궁금해할만한 질문을 계속해서 추가로 던졌고 그리드는 능수능란하게 대응했다.
전 세계 모든 국가의 ‘가장 많이 본 뉴스’가 전부 그리드의 기자회견으로 도배됐다.
기자회견은 그렇게 무난하게 끝나는 듯했다.
기자들 입장에서는 살짝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자들이 그리드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염려해 차마 자극적인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바로 그때 이슈에 목매는 한 명의 기자가 용기를 냈다.
“그리드 선수는 세계 3대 명차로 손꼽히는 벤틀리, 롤스로이스, 마이바흐를 비롯해 억 소리 나는 슈퍼카 브랜드들의 광고 모델 제안을 몇 차례나 고사하셨다고 알려졌습니다. 한데 오늘 마왕 토벌전이 끝난 직후 대진 자동차와 모델 계약을 맺은 것으로 추정되는 발언을 하셨는데요. 대진 자동차가 세계 최고의 브랜드들을 재치고 그리드 선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이유는 혹시 유라 선수 때문입니까?”
그리드의 단 한 마디 때문에 대진 자동차는 일약 유명세를 탔다.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대진 자동차라는 브랜드를 알게 됐고, 유라가 대진 그룹 회장의 손녀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됐다.
하니 대진 자동차에 그리드와 유라의 관계를 엮는 건 무척 손 쉬운 일이었다.
차마 기자들이 노골적으로 질문할 수 없었던 이유는, 워낙 사적인 내용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끼눈 뜬 스태프들이 방금 막 무례한 질문을 던진 미국인 기자를 끌어내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제지했다.
놀랍게도, 그리드는 지금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기자들 뒤에 장벽처럼 늘어선 수십 대의 카메라를 똑바로 마주본 그가 준비해놨던 대답을 꺼냈다.
“제가 대진이라는 브랜드를 선택한 이유는, 대진 자동차에서 이번에 새롭게 출시한 럭셔리 브랜드 킹제너럴시스의 차량이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저는 다음 차량으로 여러분도 익히 아시는 슈퍼카를 계약하려 했었는데, 우연히 대진 자동차 영업소를 지나가다가 전시되어 있는 킹제너럴시스 차량의 자태를 발견하고 단번에 매료되었죠. 귀신에 홀린 심정으로 영업소로 들어가 친절한 직원분의 권유로 시승해보니 장난 없더군요. 엄청 아름답고 잘 나갔습니다. 하지만 물론 아쉬운 부분은 있었습니다. 럭셔리 브랜드로 출시했다고는 하나 세계 3대 명차들과 비교해서는 가격대가 꽤 저렴한 편이었고, 그래서인지 일부 제원이 저를 100퍼센트 만족시켜주지 못했죠. 오로지 저를 위한 킹제너럴시스가 갖고 싶어진 저는 직접 대진 자동차에 문의를 넣게 되었습니다.”
“...어떤 문의였습니까?”
그리드는 대놓고 홍보를 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뻔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드가 하필 궁금한 부분에서 말을 멈춘 까닭이다.
그리드가 다소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진 자동차에서 오직 저를 위한 상위 모델 갓제너럴시스을 제작하겠다고 흔쾌히 대답해주셨습니다. 대진 자동차의 신속한 고객 대응 서비스에 감동한 저는 저 스스로 대진 자동차의 모델이 돼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죠.”
“.....”
기자 회견장의 분위기가 잠시 어색해진 그때.
“갓제너럴시스는 뭐야? 그리드에게 그런 걸 만들어주기로 했었어?”
대진 그룹 임직원 회의실은 의문에 빠졌다.
그리드가 픽션을 너무 진지하게 늘어놓자 이게 정말로 허구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대진 자동차 사장이 식은땀을 훔쳤다.
“...아무래도 만들어줘야겠군요.”
“전 세계가 관심을 갖게 될 차량이니 당연히 만들어줘야지. 롤스로이스와 비교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을 최고의 디자인과 제원을 갖춰야할 것일세.”
“네....”
그리드는 소중한 동료를 지킴과 더불어 광고비와 새차를 동시에 얻었다.
물론 대진 자동차 그룹은 천문학적인 광고 효과를 누렸으니 결코 손해가 아니었고.
‘엄청난 녀석으로 만들어주겠지?’
기자회견이 끝난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견장을 나온 그리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유라였다.
울기라도 했던 건가? 눈이 살짝 충혈 된 상태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괜찮아?”
그리드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는 순간.
“제 방에서 라면 먹고 가실래요?”
유라가 제안했고.
찰칵! 찰칵찰칵!
그리드보다 한 발 늦게 회견장을 빠져나왔던 기자들이 카메라 플레쉬를 터뜨렸다.
“엥?”
그저 당황하는 그리드와 달리, 오히려 그리드의 곁에 바짝 붙어 서는 유라.
기자들은 하나 같이 특종을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극검이 코크에게 질문했다.
“유라랑 지슈카랑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냐?”
“저 같은 허접은 감히 상상도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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