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6권 - 5화
화면 속.
홀로 남은 사내가 전장을 돌아본다.
천장 없는 대전(大殿).
빛나는 대리석과 화려한 융단으로 도배되었던 그곳이 폐허로 변해 있었다.
하늘을 받치고 있던 백 개의 기둥은 먼지가 되어 흩어져 사라졌고, 웅장함을 자랑했던 오르간은 장작더미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
템빨왕 그리드.
텅 빈 전장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지나간 전투를 복기하는 그의 상처투성이 얼굴에 온갖 감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당장 웃어도, 혹은 울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표정이다.
전투에 승리했다는 사실에 환희를 느끼고, 전투 내용에 후회하기도, 아쉬움을 느끼기도 하면서 감격하는.
그런 다양한 감정이 검은 눈동자에 교차하고 있었다. 가라앉은 눈빛에는 대중의 감응(感應)을 불러일으키는 깊이가 있었다.
관중석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드의 올해 나이 고작 서른.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 해도 치기어린 감정을 숨기지 못했던 젊은 청년이다.
한데 불과 4년 만에 홀로 우뚝 서 저런 연륜을 보이다니?
세상이 숨을 죽인 그때.
“...대진 자동차.”
그리드가 읊조렸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사람들의 가슴을 차갑게 식히고도 남을만한 멘트였다.
-방금 뭐라고 한 거임? 설마 기업 홍보 한 거임?
-....제2의 혜성그룹이냐....
-지리네.
진즉부터 모델 활동을 접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4년째 ‘광고주가 원하는 모델 1위’를 고수하는 이유가 있다.
그리드의 책임감은 광고계를 완전히 사로잡을만한 것이었다.
***
대진 그룹 임직원 회의실은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보고가 빗발치고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 북미와 남미,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총 6개 대륙의 모든 국가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상단을 대진 자동차가 차지했다는 보고였다. 지구촌 전체가 대진 자동차와 대진 그룹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부정적인 관심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상관없다. 노이즈 마케팅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전 세계에 브랜드를 알렸다는 점에 의의를 둬야했다.
“앗싸!!”
대진 자동차 사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환호했고, 다른 계열사 사장들은 부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흥분한 대진 자동차 사장이 이진명 회장에게 소리쳤다.
“과연 그리드입니다! 회장님의 예비 손녀사위답게 비범함이 보통이 아니에요! 어찌 저리도 완벽한 시점에 홍보를...!”
흥분할법했다.
수십 억 명이 시청하는 국가대항전.
그중에서도 시청률이 최고점을 찍은 타이밍의 기업 홍보다. 억만금을 줘도 살 수 없을 홍보 효과를 누린 것이다.
한데 의외로 이진명 회장은 침착했다. 큰 기회가 다가왔을 때야말로 신중해야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골똘히 생각해본 그가 그룹 홍보 팀장에게 말했다.
“홍보 기사 말이야. 내보내지 말게.”
“예? 아, 알겠습니다.”
전 세계의 이목이 그리드에게 집중 된 바로 지금이야말로 대진을 홍보할 절호의 기회였다. 글로벌 기업들의 모델 제안조차 거절해왔던 그리드가 대진 그룹을 선택했다는 기사를 인터넷에 도배만 해도 천문학적인 홍보 효과가 발생할 것이었다.
이진명 회장도 이에 동의했었다.
한데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이다.
홍보팀장은 무척 당황했지만 감히 이유는 묻지 못하고 황급히 전화를 돌렸다.
대진 자동차 사장이 모두를 대표해서 질문했다.
“회장님의 대단하신 혜안을 저 같은 범인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지 여쭤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그리드에게 믿고 맡겨볼 생각일세. 수천 개의 기사 따위보다 훨씬 더 값진 한 마디가 그의 입에서 나올 것 같으니.”
이진명 회장이 봤을 때 그리드는 미숙한 사내가 아니었다.
Satisfy라는 새로운 사회 덕분에 승천할 수 있었던 인재. 그저 개천에서 태어난 용, 운 좋아 여의주를 물었다 생각해왔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드 본인은 스스로를 어리숙하다고 평한 바 있으나, 그것은 지독한 겸손이었다.
이진명 회장은 장담했다.
‘그리드는 천재다.’
상황을 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돌이켜 보면, 유라를 놓고 거래를 제안했던 타이밍부터가 무척 절묘하지 않았던가.
‘깊은 눈빛이라....’
현실에서는 쉽게 쓸 수 없는 표현이다.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표현이었다.
실제로, 이진명 회장은 70년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깊은 눈빛을 가졌다고 평할만한 상대는 몇 번 만나보지 못했다.
한데 화면 속 그리드의 눈은 깊었다.
고작 서른의 나이에 말이다.
용의 승천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그리드가 바라보는 정상은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을 거라는 사실을 이진명 회장은 눈치 챘다.
‘어쩌면 황제를 꿈꾸고 있을 수도...’
두근. 두근.
젊지 않은 심장이 펄떡펄떡 뛴다.
이진명 회장은 그리드의 날개가 되어주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단지 (예비)손녀사위라서가 아니라, 그리드라는 위인 개인에게 매료된 것이다.
***
마왕 토벌전 시상식의 분위기는 초상집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마왕 토벌에 실패했으니까.
선수들이 얻은 메달은 각 5개씩의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이 전부였다.
4천왕 레이드 성공에 따른 기여도 보상과 마왕 레이드 참여에 따른 기여도 보상. 마왕 토벌전이 보장했던 ‘최소 보상’이었다.
만약 마왕 토벌에 성공했으면 각 3개씩의 메달이 추가됐을 테고, 더 많은 선수들이 시상대에 올랐을 테니 선수들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부 다 그런 건 아니다.
4천왕 레이드와 마왕 레이드 전부에서 기여도 1등을 달성하고 2개의 금메달을 목에 건 지슈카는 승리의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활약 덕분에 종합 순위 9위를 굳건히 지키게 된 브라질 현지는 축제 분위기였다.
금메달 1개와 은메달 1개를 목에 건 크리스 덕분에 종합 순위 2위를 차지한 캐나다, 크라우젤과 지발의 활약으로 종합 순위 1위를 공고히 한 미국 또한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종합 순위 2위를 놓치고 4위로 전락한 중국은 커다란 분노에 휩싸였다.
중국인 참가자들이 단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한 까닭에, 금메달을 하나 얻은 한국에게 순위가 뒤집힌 것이다. 본래 종합 순위 6위였던 한국이 3위로 껑충 뛰었다.
“올해도 3위에 들지 못했다고? 대륙의 기상이 곤두박질 쳤구만.”
“빌어먹을... 하필이면 한국 따위 소국에게 밀려서....”
“자책할 거 없어. S.A그룹의 한국 밀어주기에 당한 거지 실력으로 밀린 게 아니니까. 애초에 마왕 역할을 한국인에게 맡기는 게 말이 돼? 대회 자체가 정정당당하지 못했어. 진정한 3위는 우리 중국이야.”
중국인들의 의심과 분노는 합당했다.
마왕 그리드는 전투 초반에 중국의 신성 메이샤오를 저격했으니까.
소란 속에서 기자회견이 마련 됐다.
Satisfy 운영이사이자 국가대항전 위원을 겸임 중인 윤상민 이사의 기자회견이었다.
천 명이 훌쩍 넘는 기자들을 홀로 마주하고 앉은 그가 조금도 긴장한 기색 없이 마이크를 들었다.
미국 최대 뉴스 채널인 CNM 기자에게 첫 번째 질문의 권한이 주어졌다.
“마왕 역할을 맡은 그리드 선수에게만 특별한 혜택을 준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과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S.A그룹이 한국 기업이기 때문에 한국인 플레이어에게 유난히 호의를 보였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여론이 있을 정도인데요. S.A그룹은 그들의 불만을 어떤 식으로 잠재울 계획이십니까?”
“불만 자체를 납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드 선수에게 특혜를 주지 않았으니까요.”
“네?”
“우리는 마왕 토벌전을 정식 종목으로 채택했습니다. 마왕 토벌전은 앞으로 매해마다 개최될 예정이며, 마왕 역할은 올해의 그리드처럼 자격을 갖춘 상위 랭커가 맡게 될 것입니다. 한 번 마왕을 했던 플레이어는 두 번 다시 마왕을 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으므로, ‘마왕 토벌전 보상은 오직 그리드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오해에 대한 해명이 되겠지요.”
“내년의 마왕도 올해의 그리드와 똑같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물론입니다. 똑같은 업적을 세운다면 똑같은 보상을 받게 되겠죠. 우리는 마왕 토벌전이 ‘플레이어가 함께 만드는 대회’라는 취지에 무척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선수들과 마왕 양측에 많은 보상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선수 여러분께서 부디 즐겁게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국가대항전은 어디까지나 세계의 화목을 도모하는 축제이니까요.”
“능력치 보정도 똑같이 받는 겁니까?”
“능력치 보정이요?”
“그리드가 마왕 역할을 맡은 대가로 얻은 능력치 보정 효과 말입니다. 사실 사람들의 의심과 불만은 보상보다도 능력치 부분에 있었습니다. 1대 400을 이길 수 있을 정도의 과도한 능력치 보정은 사실 너무 과한 게 아니냐는 게 사람들의 한결 같은 반응이죠. 내년의 마왕 또한 올해의 마왕 그리드와 똑같은 보정 효과를 받아야 공평성이 성립될 텐데, 이 경우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불만을 터뜨릴 겁니다. 마왕 토벌전은 마왕 역할을 맡는 ‘행운’을 누리게 되는 극소수의 사람만을 위한 축제로 전락하고 말겠죠.”
“하하, 그거 참 재미있는 착각이군요. 우리가 마왕에게 주는 보정 효과는 ‘보스 몬스터’라고 자처할 수 있을만한 최소한의 자격, 즉 생명력뿐입니다.”
“...?”
상상도 못한 대답 탓에 CNM 기자는 혼란을 느꼈다. 말문을 닫은 그가 대답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고자 노력하는 사이, 다른 언론사 기자가 냉큼 질문을 던졌다.
“생명력 외의 다른 능력치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의 혜택도 주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맞습니다. 마왕은 4천왕이 지키는 모든 성문이 공략당하기 전까지 10분 당 50만의 생명력을 얻습니다. 그건 ‘레이드’라는 구도를 성립시키기 위한 기본 규칙이며 불가피한 혜택이죠.”
“10분당 50만의 생명력이라 하면, 4천왕 레이드의 총 진행 시간은 1시간 38분이었으니, 그리드는 총 450만의 생명력 보너스를 얻었다는 말씀이시군요?”
“아, 그리드는 10분 당 20만의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네? 방금 전 50만이라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기본 규칙이죠. 내년에 마왕 역할을 맡게 될 선수는 규칙대로 10분 당 50만의 추가 생명력을 얻을 것입니다.”
“아니, 근데 왜 그리드는 규칙과 다르게 20만을...?”
“4천왕 역할을 맡은 그리드의 가신들이 너무 강했으니까요. 어쩔 수 없이 그리드 선수에 한해서 제약을 주었습니다.”
“....?”
너무 강해서 제약을 줬다고?
올해부터 <마왕 토벌전>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내년부터 매해마다 꾸준히 진행 될 예정이라면... 앞으로 마왕 역할을 맡게 될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서 그리드 혼자서만 불리한 싸움을 진행했다는 뜻이다.
그리드 혼자만 특혜를 받았다고 생각했더니 도리어 역차별이었다.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윤상민 이사는 마왕 토벌전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리드는 10분 당 20만의 생명력만을 얻었다.
한데 놀라운 사실은, 자료화면 속 그리드는 전혀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4천왕 레이드가 진행되는 내내 묵묵히 대장일에 열중했을 뿐, 자신이 페널티를 감수해야한다는 점에 대해서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명백한 지존의 태도였다.
지존인 내가 이 정도조차 감내하지 못한다면. 고작 이 정도도 희생하지 못한다면 부끄럽지 않겠느냐고.
마치 그런 정신으로 견디는 것 같았다.
“....”
기자회견장이 정적에 휩싸였다.
생중계 중인 기자회견을 지켜보는 전 세계 시청자들 또한 조용해졌다.
그들 모두 그리드의 태도에 감명 받은 것이다.
정적을 깨뜨린 사람은 일본인 기자였다. 조심스럽게 거수한 그가 윤상민 이사의 허락을 받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4천왕들의 정체가 그리드의 가신이라고 하셨습니다만... 그리드 소유의 NPC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S.A그룹이 지원해준 것이 아니라요?”
“네, 앞으로 공개 될 ‘마왕 지원서’ 양식 정보에 명시 된 사항인데, 마왕 지원자는 본인의 NPC나 펫, 혹은 소환수를 4천왕으로 임명해야합니다. 마왕 본인의 전력을 사용해야 진정한 마왕의 4천왕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4천왕에게는 어떤 보정 효과를 주시는지요?”
“마왕과 같습니다. 레이드가 성립할 수 있도록 추가 생명력을 주죠. 단, 정확한 추가 수치는 4천왕의 수준에 따라서 각기 다를 예정이므로 정확히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 외의 능력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참고로 올해 마왕의 4천왕들은 생명력 보정도 거의 없었습니다.”
“....예?”
그리드의 4천왕.
너프 당하기 전까지 각자 100명의 랭커들을 몰살시켰던 그 괴물들이 순정 상태였다고?
그리드 개인이 보유한 NPC가 400명의 랭커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 된다. 심지어 그리드는 왕 아닌가? 그가 보유한 NPC는 고작 4명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도대체 그리드의 전력은 어느 정도인 거지?’
‘어쩌면 제국과도 싸울 수 있는 거 아니야?’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선행 됐던 윤상민 이사의 기자회견은 도리어 더 큰 혼란을 야기했다.
기자들의 머릿속을 온통 그리드가 가득 채웠다.
힐끔.
윤상민 이사의 기자회견은 아직 끝나지 않았건만, 기자들의 시선은 자꾸 시계로 향했다.
그들은 윤상민 이사 다음으로 회견장에 들어설 그리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너무 느리게 흘렀다.
기자들이 체감하기로 한참이 지나서야....
“그리드입니다.”
윤상민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잘생긴 동양인 사내가 회견장에 들어섰다.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뭔가 결의에 찬 표정이었기 때문에 기자들의 기대감이 더욱 고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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