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6권 - 3화
마왕 토벌전에서 탈락한 선수들로 붐비는 대기실.
“....”
그리드가 마왕이 된 경위는 무엇이며, 마왕이 된 대가로 얻은 건 뭘까?
혹시 많은 보상을 독점하는 건 아닐지? 만약 특혜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우리 또한 문제를 제기하고 실리를 챙길 수 있는 기회다.
선수들의 머릿속은 무척 복잡했다. 신경 써야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벌써 몇 분 째 서로 의논도 않고 침묵 중이다.
모든 선수가 화면 속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격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전력을 엿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이다.
“....?”
몇 분이 지났을까.
숨 막히는 공방 뒤, 다소 불리한 입장에 서는 듯 보였던 그리드가 소드 브레이크를 꺼내 쥐었다. 아이템 제작이라는 황당한 소리를 외치더니만, 크라우젤을 동요시키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했고 인벤토리에서 꺼낸 듯하다.
검을 부수는 검.
검성 크라우젤에게 카운터를 치겠다는, 아주 단순하고도 분명한 의도가 엿보이는 아이템 선택이었다.
하지만 과연 효력이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이도류 저거 아무나 못 쓰는데.”
“관련 패시브 스킬을 보유한 게 아닌 이상 제약이 생기고 컨트롤하기도 까다롭지.”
“그리드도 이도류는 몇 년 전에 잠깐 쓰고 관뒀던 거 보면 제대로 못 다룰 것 같은데.”
술렁이는 선수들 사이에서, 지슈카가 크리스에게 질문했다.
“저거, 위험한 판단 아니야?”
지슈카는 궁사다.
하지만 검술에도 조예가 깊다.
지존을 꿈꾸는 여자였으니까.
궁술에 응용하고자, 혹은 궁술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그녀는 가능한 모든 분야의 무예를 배우고 공부해왔다.
“자충수가 될 것 같은데.”
지슈카는 불안했다.
그녀의 식견으로 봤을 때, 그리드는 여태껏 자신이 경험하고 학습해온 것들을 우직하게 실천하는 방식으로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쌓아온 경험의 총량이 워낙에 높아 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이 뛰어났지만, 아무래도 창의성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크라우젤의 움직임은 하나부터 열까지 창의적이었다.
그리드가 쌓아온 경험의 총량이 조금만 더 적었어도. 그리드의 스탯과 템빨이 조금만 더 떨어졌어도. 크라우젤과 벌써 4번째 싸우는 게 아니었다면.
....그리드는 훨씬 더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렸을 가능성이 높다.
재능.
또 그놈의 지긋지긋한 재능 타령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드의 컨트롤 솜씨가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선수들보다는 뛰어날지 몰라도, 천재 중의 천재인 크라우젤보다는 확실히 아래에 있었다. 그가 소드 브레이커라는 위협적인 무기를 사용할지라도 그걸 과연 제대로 활용할 기회나 있을지 걱정이었다.
크라우젤의 검로가 소드 브레이커를 철저히 비껴나갈 테고, 그리드는 도리어 익숙하지 않은 무기를 사용한 대가를 크게 치러야할 수도 있었다.
까드득.
지슈카가 붉게 칠한 손톱을 깨물었다. 그리드의 선택을 옳다고 보기 힘들어서 불안을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흐음, 뭐. 위험해 보이긴 하지. 크라우젤을 프로 레이서라고 가정할 경우 그리드는 운전 경력 2년차의 일반인쯤으로 비유해야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실력 차이는 명확하니까.”
“그건 너무 심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우리 그리드를 뭐로 보고?”
“아니, 나는 그리드를 비하할 의도가 전혀 없고 그저 적절한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3년차. 3년차로 하자.”
“....그래.”
운전 경력 2년차나 3년차나 그게 그거 아닌가?
눈살을 찌푸리는 크리스였으나, 그리드가 조금이라도 나은 취급을 받길 바라는 지슈카의 마음을 뻔히 알았으니 따지고 들기도 웃겼다.
보면 볼수록 느끼는데, 지슈카는 상당히 난폭하고 무서운 여자였지만 ‘그리드에 한해서’만큼은 좋은 신붓감이 분명했다. 내조를 무척 잘할 것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그에게 지슈카가 재촉했다.
“하던 말 계속 해봐. 크라우젤이 프로 레이서면 그리드는 4년차 운전자라고?”
“3년.... 그래, 4년차 운전자와 프로레이서. 그 정도로 둘의 실력 차이는 명백해. 하지만 말이야.”
크리스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크라우젤의 차는 중국산 경차고 그리드의 차는 페라리라는 거지.”
그 사실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이 바로 그리드다.
재능과 템빨 중에서 보다 상위의 개념?
당연히 템빨이다.
이제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템빨이 짱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을 직접 증명해왔던 장본인이 바로 그리드였다.
자신의 실력이 크라우젤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을 그가 과연 평범한 소드 브레이커를 꺼내들었을까?
저건 필시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그리드의 기술을 보완해줄 수 있는.
크리스가 확신하는 그때였다.
까가각-!!
화면 속.
그리드의 소드 브레이커가 크라우젤의 검을 낚아채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건 그냥 마술이었다.
자신을 미끄러지듯이 비껴가는 크라우젤의 검을 소드 브레이커가 끌어당기더니 톱날 같은 홈 사이에 끼워버렸다.
“저게 무슨?”
“허... 뭔 효과가 저래?”
“도대체 무슨 원리지?”
선수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조금 전 장면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양손을 불끈 말아 쥔 지슈카가 예쓰!를 외쳤고, 눈을 동그랗게 뜬 크리스는 혀를 내둘렀다.
‘부가티였어?’
***
<청룡의 소드 브레이커>
등급:레전드리
내구력:350/350 공격력:695
*공격 속도 40퍼센트 상승.
*전격 속성 공격력 50퍼센트 추가.
*암흑 속성 공격력 30퍼센트 추가.
*높은 확률로 자력을 내포한 마기를 방출하여 도검류 무기를 끌어당깁니다.
*도검류 무기를 낚아챌 경우, 대상 무기의 내구력 하락(大)을 유발합니다. 대상 무기가 에픽 등급 이하라면 보통 확률로 ‘무기 파괴’ 스킬이 발동합니다. 무기 파괴 스킬은 대상 무기의 현재 내구력과 관계없이 대상 무기를 완전히 파괴합니다.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가 제작한 소검입니다.
한쪽 날에 깊은 홈이 여러 개 파여 톱날 같은 형태를 이룹니다. 그 용도는 검을 차단하고 파괴하는 것. 세상 모든 검사가 두려워할 것입니다.
<강화 된 청룡의 숨결>이 <아스타로트의 뿔>에 담긴 뇌전의 기운을 극강으로 이끌어냈습니다.
사용 조건:300레벨 이상. 고급 소드 마스터리 레벨 1.
무게:280.
파직! 파지직!
푸른 뇌전이 점멸하는 묵색의 소드 브레이커.
그 형태는 단단함이나 예리함과 거리가 멀었다.
검신이 짧고 날은 반쪽밖에 없으니 공격 용도로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잔뜩 파인 홈 때문에 철의 함량 자체가 낮아 내구력도 형편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검을 부수기 위해서 태어난 검을 두려워하지 않을 검사가 어디 있겠는가.
크라우젤이 평범한 검사였다면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검성.
검에 통달하여 뜻하는 대로 검을 다룰 수 있는 자였다.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격류 같은 검로를 구사하여 그리드를 도리어 압박했다.
퍼엉-!
폭음 같은 파공성과 동시에 우측을 찔러오는 백호검. 열망의 무아검을 세워 아슬아슬하게 막아낸 그리드가 왼손의 소드 브레이커로 백호검을 낚아채고자 시도했다. 신속하고 거침없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동작이 크면 한계가 있다.
백호검을 미끄러뜨리면서 몸을 그리드에게 밀착시킨 크라우젤이 그리드의 왼 손목을 팔꿈치로 때렸다.
백호검을 노려오던 소드 브레이커가 하단으로 떨어졌고, 단단한 어깨로 그리드의 가슴을 밀쳐낸 크라우젤은 미끄러뜨렸던 백호검을 다시 위로 들었다.
휘리릭!
마치 뱀처럼 열망의 무아검을 기어오르는 백호검.
서걱-!
그리드의 정신을 어지럽히더니, 사선을 긋는다.
가슴을 베인 그리드가 뒷걸음쳤다. 기술의 차이 때문에 초근접전은 불리하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크라우젤이 놓치지 않았다. 악착 같이 그리드에게 달라붙은 그는 그리드가 양손에 쥔 검을 휘두를 틈도 주지 않고 강하게 압박했다.
주먹조차 휘두르기 힘든 지근거리에서 폭풍 같은 검술을 구사하는 그의 솜씨는 해설진의 말문을 닫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는 동요하지 않았다. 크라우젤의 공세가 강해질수록 그리드는 도리어 침착해졌다.
그에게 축적되어 있는 경험의 힘은 대부분 어려운 전투에서 쌓아올린 것.
그리드는 상황이 불리해질수록 사고의 저변이 넓어졌고 더 잘 싸울 수 있었다.
‘신격. 아이템 합체.’
이를 악 문 채 스킬을 전개하는 그리드.
그가 무장하고 있는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 위로 <삼겹갑>이 덧씌워진다.
그렇다.
갑옷과 갑옷의 합체였다.
물리 공격으로 받는 피해 30퍼센트 경감. 베기, 찌르기 공격으로 받는 피해 50퍼센트 경감. 그리고 패시브 스킬 <소드 브레이커> 생성.
검사에게 한없이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삼겹갑의 옵션이 발할라에 추가됐다.
쩌어엉-!
“...!?”
갑자기 모습이 바뀐 그리드의 갑옷.
때마침 그 위로 칼을 꽂았던 크라우젤의 동공이 흔들렸다.
[대상에게 3,88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입히는 데미지가 큰 폭으로 줄어든 것은 둘째 치고,
[<군림하게 될 백호의 검>의 내구력이 25 하락하였습니다!]
천하의 그리드가 제작해준 신검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은 까닭이다.
‘갑옷까지 소드 브레이커 옵션을?’
아니, 이건 좀 치사....
순간적으로 위축 된 크라우젤이 한 걸음 물러섰을 때.
쐐액-!
열망의 무아검과 비교하면 길이가 무척 짧은 청룡의 소드 브레이커가 크라우젤을 덮쳐왔다.
물론, 크라우젤은 쉽게 당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소드 브레이커의 톱날 부분은 철저히 배제하고, 칼날 부분으로 백호검을 미끄러뜨려서 소드 브레이커의 궤도를 비틀고자 시도했다.
한데 뜻대로 되질 않았다.
자신과 하나여야할 검이, 말을 듣지 않았다.
끼릭-!
소드 브레이커의 칼날을 타고 가던 백호검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제자리에 멈추더니.
콰작!!
자력(磁力)에 이끌린 것처럼, 톱날 부분으로 맞물려 들어갔다.
‘뭐?’
크라우젤이 흠칫 떨었다.
검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소드 브레이커.
그것은, 검술의 극의에 오른 자에게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불합리였다. 섭리의 개념을 파괴하는 개차반 포식자였다.
“극살(極殺).”
쿠오오오오오-!
숨 막히는 살기를 내포한 베기가 굳어 선 크라우젤의 가슴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황급히 정신을 차린 크라우젤이 소드 브레이커에 맞물려 있는 백호검을 강제로 빼냈다.
대가는 컸다.
[<군림하게 될 백호의 검>의 내구력이 153 하락하였습니다!]
“큭...!”
무려 10분의 1이 넘는 내구력을 한 번에 잃다니?
얼굴을 확 일그러뜨린 크라우젤이 비장을 전개했다. 날개의 환영을 펼쳐서 자리를 그대로 이탈했다.
그리드가 너무나도 바랐던 전개였다.
“플라이.”
터엉-!
허공만 벤 극살을 회수한 그리드가 그대로 상공에 떠올랐다.
크라우젤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갓 핸드들을 붙잡고 늘어지는 중인 4자루의 이기어검을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설마?’
그리드의 의도를 읽은 크라우젤의 안색이 굳는다.
비장의 후폭풍을 겪은 그가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을 때.
쩌정-!
쩌저저저저저저정!!
그리드는 갓 핸드들과 격돌 중인 4자루의 검을 모조리 파괴해버렸다.
이어서.
퍼어어어어엉-!
드디어 자유를 되찾은 갓 핸드들이 크라우젤을 표적 삼아 매직 미사일을 쏘았다. 검막을 펼친 크라우젤이 막아냈다.
그리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검 한 30자루 갖고 있던가? 그거 다 꺼내보던가.”
하늘에 선 그리드.
턱을 살짝 추켜세운 채 팔짱 끼는 그를 4개의 황금 손이 비호한다.
대중에게 아주 친숙한 모습이었다. 마왕일 때보다 더 건방지고 재수 없는 느낌이랄까.
“초연(超聯).”
쾅-! 쿠콰콰콰콰콰쾅!!
검기의 폭풍이 지상을 휩쓸고, 묠니르를 쥔 갓 핸드들이 크라우젤을 따라붙는다.
청운진을 펼친 크라우젤이 이기어검을 전개, 갓 핸드의 저격을 시도했으나, 어느새 초연의 발동을 멈춘 그리드가 귀신 같이 나타나 검들을 모조리 부서뜨렸다.
쩌어어어어어엉-!
비산하는 칼의 파편들.
그 안에 수백 개로 쪼개어진 크라우젤의 얼굴이 담긴다.
크라우젤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곤혹이었다.
“...곧 끝나겠군.”
선수들이 직감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분명히 격양 돼 있었다.
자신이 추구해야할 이상(理想)을 보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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