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6권 - 2화
칭송받는 자.
유라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말은 없었다.
대진이라는 배경과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재능. 오만하지 않고 강직한 성품과 독보적인 미모.
타고난 모든 요소가 그녀를 빛나게 만들었다.
Satisfy에서 이룬 업적은 그녀의 날개가 되었고, 다른 한국인 랭커들은 외면했던 국대전에 홀로 참가하면서 보여준 책임감은 만인의 귀감이 되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사람들의 찬사 속에서, 유라 본인 또한 스스로에게 긍지를 품었다. 그녀는 자신이 충분히 잘해 나가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리드를 만난 이후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드는 유라와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운과 재능을 타고나지 못하여 늘 뒤쳐졌던 그는 수없이 많은 역경을 겪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좌절과 비난에 몇 번이나 엎어졌을 것이고, 밤을 눈물로 지새운 날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모되지 않았다. 도리어 강철처럼 단련됐다.
남들이 산의 정상을 바라볼 때 중턱을 바라보며.
남들이 10개의 계단을 오를 때 1개의 계단을 밟으며.
남들이 잠시 쉬어갈 때도 멈추지 않으며.
그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위로 나아갔다.
온갖 불운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견뎌 행운을 쟁취했고, 하나의 행운에 안주하지 않고 노력을 계속했다.
그 끝에, 이제 그는 정상에 있었다.
유라는 그를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리드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으니까.
유라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타고난 재능이 있어도 최고가 될 수 없었던 그녀이기에, 그녀는 그리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세상 누구보다 잘 알아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또 아무리 재능을 무기 삼아도 그리드와 나란히 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까닭이다.
유라의 긍지는 추락했다.
단지 운이 좋아서 남들보다 더 나은 조건을 타고났음에도 최고가 되지 못한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자신을 증명해야만 부끄러움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드와 당당히 마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해내지 못했다.
“....”
제4회 국가대항전.
금메달과 은메달을 쟁취하고도 만족하지 못한 채. 아니, 도리어 절망한 채 모니터를 바라보는 유라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그녀는 화면 속 마왕의 정체가 그리드라는 사실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리드는 지옥에 있었다.
홀로 수백 개의 창칼을, 전 인류의 야유와 분노를 감당하고 있었다.
“왜....”
창과 칼에 찔린 그리드는 금방 피투성이가 되었고 급기야 넝마가 되었다.
그가 비명을 토할 때마다 유라는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아픔을 느꼈다.
“...당신은 왜 그렇게까지....”
그리드가 마왕이 된 경위, 유라는 당연히 모른다.
그것이 재물이던, 명예이던.
그저 원하는 게 있기에 마왕이 됐으리라고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하지만 그리드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반드시 승리일까?
아닐 것이다.
400대 1의 싸움에서 승리를 논하는 건 불합리했다.
그리드는 꼭 승리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S.A그룹과 그렇게 계약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리드는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중이었다.
차디찬 대지 위에 못 박혀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을지언정, 피와 비명을 토할지언정 그는 투지를 잃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유라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리드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이후로, 더 이상 할아버지에게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영민한 유라는 자신이 모르는 동안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간파해버렸다.
“왜....”
그리드는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분신을 만들어서 대폭발을 일으키더니 수백 명의 선수를 학살했다. 이후 또 사투가 벌어졌다. 80여 명의 생존자들과 그리드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서 서로에게 살수를 펼쳤고, 이 과정에서 그리드는 몇 번이고 위기를 겪었다. 급기야 불사마저 잃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모두를 쓰러뜨렸다.
생명력 게이지가 텅 빈 상태로 마지막 적을 베어 넘긴 후, 저 멀리 고고히 선 크라우젤을 돌아보기 전, 그는 카메라에 시선을 돌렸다.
깨진 가면 너머 눈동자는 분명히 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만 믿어.’
언젠가 그렇게 말했을 때와 꼭 닮은 눈빛이었다.
유라는 울컥하고 말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여태껏, 자신을 위해서 싸워준 사람은 그리드가 유일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그녀가 스스로 잘할 거라고 믿었었으니까. 그녀를 슈퍼맨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공교롭게도 유라는 슈퍼맨이 아니었다. 남보다 조금 더 잘할지는 몰라도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작은 주먹을 힘껏 말아 쥐는 그녀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곁에서 모른 척 지켜보던 비올라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참 가녀리네, 라고 생각하면서.
***
채챙! 채채채챙!!
“....”
“....”
서로를 말없이 마주보고 선 두 남자의 머리 위.
4자루의 검과 황금 손이 쉬지 않고 충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몰랐지만, 두 사람의 심력은 극도로 소모되는 중이었다.
크라우젤은 발검 타이밍을 엿보는 한편 4자루 검을 직접 컨트롤 중이었고, 그리드는 크라우젤의 공격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집중하는 한편 머릿속으로 새로운 아이템을 창조 중이었기에.
둘 다 보통의 집중력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쩌어엉-!
갓 핸드와 이기어검이 정확히 89번째 충돌했을 때.
퍼엉!
이기어검을 비껴간 매직 미사일 한 발이 크라우젤의 발치에 떨어졌다.
허리를 낮추고 있는 크라우젤의 오른쪽 어깨가 움찔하는 모습을 그리드가 포착했고,
스파앗-!
크라우젤이 칼을 검집에서 뽑았다.
섬광이 그리드를 향해서 꽂혔을 때, 그리드는 도란의 반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0.1초 차이로 늦고 말았다.
서걱-!
[18,5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도란의 반지>를 착용하였습니다.]
타격을 입은 후에야 반지를 착용한 까닭에, 도란의 반지의 옵션 효과가 발생하질 않았다.
“큭...!”
얼굴을 확 일그러뜨린 그리드가 뒤로 크게 물러서며 열망의 무아검을 세워들었다.
쩌엉-!
발검 후 다시 검을 회수, 어느새 그리드에게 도달해 재차 검을 휘둘렀던 크라우젤의 공격이 가로막힌다.
[...옵션 효과로 검은 불꽃이 폭발합니다!]
퍼어엉-!!
화염이 크라우젤을 덮쳤으나.
[대상에게 3,2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미 그는 열망의 무아검과 교감하기 시작한 단계에 있었다. 검성의 직업 효과가 열망의 무아검을 간파하고 검은 불꽃의 피해량을 줄였다.
퍼억-!
불꽃을 꿰뚫고 날아온 발차기가 그리드의 안면을 가격한다.
도란의 반지의 옵션 효과가 허무하게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고작 900대에 불과한 발차기의 피해량 중 일부를 도란의 반지가 회복해버렸다.
이때 크라우젤은 사선으로 회전하고 있었고, 하단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온 백호검이 그리드의 턱 끝을 노렸다.
하지만 <이무기 승천>조차 회피하는데 성공했던 그리드이다. 높은 통찰력과 도살귀의 안대의 힘으로 크라우젤의 발검 타이밍까지 정확히 읽었던 그가 고작 이 정도 수준의 연계에 당할 리 없었다.
보스를 레이드할 때 가장 조심해야하는 것이 바로 하단 공격. 하단 공격에 한해서 그리드는 무척 강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가볍게 고개를 비틀어 피한 그가 열망의 무아검을 휘둘러 반격하려 했지만.
퍼억-!
“...!?”
이미 앞서간 백호검의 경로에 뒤따라 솟구친 돌기둥이 그리드의 복부를 가격했다.
*공격 시 보통 확률로 <기둥> 방출. 거대한 돌의 기둥은 공격 대상을 최대 5미터 날려버리는 ‘차징’ 효과를 발휘합니다. 이때 적용되는 피해량은 무기 공격력의 50퍼센트입니다.
<천하를 짓뭉갤 고귀한 백호의 검>에 귀속 된 옵션과 똑같은 효력을 발휘하는 기둥이었다.
쿵! 쿠당탕탕탕!!
멀찍이 뒹굴며 날아간 그리드가 이미 반파되어 있던 오르간에 처박혔다.
황급히 고개를 털고 일어서는 그의 시야를 뾰족한 검 끝이 파고들었다.
눈을 노리는 공격.
그것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반응할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질색한 그리드가 칼을 들어 막으려던 찰나, 생각을 바꿨다.
크라우젤이 위협적이되 그만큼 뻔히 보이는 공격을 했다는 점이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쩌엉-!
그리드의 눈을 찔러오다가 마치 극살(極殺)처럼 궤도를 비튼 백호검이 허공에서 가로막혔다.
그리드가 횡으로 세운 열망의 무아검이 백호검의 경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
허초를 간파 당한 크라우젤의 눈가가 씰룩였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었으나, 그는 벌써 몇 번이나 놀라는 중이었다.
무릎 꿇렸던 자세 그대로 플라이를 사용해서 반격했던 점이나 하단 공격을 2회나 회피한 점, 이제는 급기야 허초마저 구분하는 그리드로부터 크라우젤은 전율을 느꼈다.
눈앞의 사내, 더 이상 자신과 궤를 달리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부족한 감각과 판단력, 그리고 실력을 오로지 템빨로 보완했던 템빨왕은 이제 없다.
전대 영웅들과 대련을 펼친 끝에 승리를 쟁취하고, 그 경험을 꾸준히 단련하여 성장한 <영웅왕>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는, 인공지능의 힘으로 일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수준에 그쳤던 <영웅>과 차원이 다른 압박감을 전달하는 존재였다.
크라우젤의 타고난 감각과 재능을 위협하는 수준의.
“극(極)!”
크라우젤보다 확실히 우위에 있는 근력을 이용, 맞물린 백호검을 힘으로 밀쳐낸 그리드가 필중의 검무를 펼쳤고.
“하늘 찢기.”
크라우젤이 반격했으며,
“회(回)!!”
그리드 또한 반격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찝찝함을 털어낼 수가 없었다.
양쪽 다 반격기를 하나씩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반격기는 먼저 사용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던 까닭이다.
‘설마 새로운 반격기를 창조한 건가?’
크라우젤이 검술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그때.
“비장(飛將).”
“...!?”
흑색과 백색으로 점멸하는 날개의 환영을 펼친 크라우젤의 신형이 그리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콰아앙-!
2개의 반격기에 의해서 극한까지 강화 된 극의 기운이 대지를 갈랐고, 그 갈라진 대지 위로 크라우젤이 다시 나타났다.
백호검은 이미 그리드의 어깨를 베어버리고 있었다.
한데 데미지가 3번 중첩되어 들어왔다.
3대 공격 패시브 스킬 중 하나로 분류되는 비장의 힘이다.
물리적인 개념을 무시하고 자리를 이탈, ‘확정 공격’을 1회 회피하고, 4초 내에 반드시 ‘제자리로 복귀’하며, 다음 일반 공격을 3배 강화하는 스킬.
날쌔고 용맹한 장수를 뜻하는 이름 그대로 유틸성이 무척 뛰어났다.
단, 시전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제약이 상황에 따라서 큰 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제약은 확정 공격을 1회 회피한다는 최대 강점을 무너뜨릴 수 있는 요소이기도 했다.
간단한 예로, 4초 이상 유지되는 광역 스킬을 피하려고 비장을 써봤자 4초 내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니 결국 화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드의 신장이 ‘확률’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닌 것처럼 비장 또한 완전하지 못했다.
물론 칠악성의 편을 들면 제약이 풀리고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크라우젤은 특정 세력에 소속되는 것을 쭉 지양해온 인물이다. 그는 칠악성의 편에도, 신의 편에도 서지 않았다.
만약 그가 어느 한쪽의 편에 서게 된다면, 그때는 이미 길드에도 가입한 상태일 것이다. 물론 그가 가입을 염두에 둔 길드는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XX 내꺼만 구려.’
속사정 모르는 그리드는 이를 갈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신장이야말로 제일 쓰레기 스킬이었다.
챙-! 채챙!!
생명력을 3분의 1 이상 잃은 그리드와 아직 경상을 입은 수준에 그쳐있는 크라우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 펫도 소환하지 않고 물약도 마시지 않는 그들의 치열한 공방을 지켜보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대한민국 치킨집 사장님들조차 이미 오래 전부터 울리지 않고 있는 전화기를 인지하지 못한 채 TV에만 집중했다.
콰앙-! 콰쾅!!
파(派)의 검기가 대지를 부셨고 파천(破天)의 기세가 하늘을 휩쓸었다.
전장이 점차 더 협소해진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충돌하는 간격이 짧아지며 횟수가 잦아졌다.
푸우욱-!
도살귀의 안대의 힘을 빌린 그리드가 크라우젤의 허리를 베면, 초감각의 힘을 빌린 크라우젤이 치명상을 모면하고 역공을 날려 그리드의 허벅지를 베었다.
공방을 교환하는 횟수가 누적될수록 그리드가 불리해진다는 사실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을 때.
“아이템! 제작!!”
드디어 아이템 창조를 끝낸 그리드가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처럼 소리쳤다.
『...?』
“...?”
“...?”
전투 중에 아이템을 만들겠다고?
손에 땀을 쥔 채 경기를 시청 중이던 해설진과 관중들, 그리고 시청자들이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너무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룡의 소드 브레이커!!”
그리드가 소리쳤고, 그의 왼손에 빛이 폭사했다.
푸른 전류에 휩싸인 묵색의 소검이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대악마 아스타로트의 잔해로 제작한 그것의 칼등 부분은 홈 깊은 톱날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크라우젤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카메라에 포착되자 세계 모든 커뮤니티가 발칵 뒤집혔다.
-검성 상대로 소드 브레이커;;
-와! 졸라 치사하다!
-그저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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