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832화 (46권) (827/1,794)

템빨 4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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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46권 - 1화

지존도(至尊圖)는 우연의 산물이다.

당대 최고 수준의 화가가 지존(至尊)을 그릴 기회를 운 좋게 얻어 탄생시킬 수 있었던 명화.

화가 입장에서야 커다란 행운이었다.

지존을 화폭에 담을 기회가 어디 쉽게 찾아오겠는가?

177년 만에 새로운 지존도를 탄생시킨 삐까소는 높은 명성과 능력치, 그리고 히든 퀘스트까지 얻는 쾌거를 이뤘다.

반면 그리드는...

<지존도의 주인공>

*1회 한정 스킬

사용 시, 지존도가 그려진 시점의 정보로 회귀합니다.

단, 스탯과 스킬 정보에 한합니다. 인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칭호, 직업, 지위, 종족, 나이 등의 부가 정보는 회귀가 불가능합니다.

...이 어중간한 스킬을 하나 얻었을 뿐이다.

세이브 포인트 개념의 스킬.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는 유효하게 작용할 수 있겠으나, 실제로 사용할 가능성은 희박한 스킬이었다.

세이브 시점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리드는 힘겹게 쌓아온 능력을 잃게 될 테니까.

그리드는 본인이 지존도를 사용할 일이 없을 거라고.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국대전 서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존도>가 그려질 당시의 자신을 회상합니다.]

[과거의 기억과 영광, 그리고 육체가 현재의 당신에게 스며듭니다.]

[<지존도>가 그려진 시점으로 회귀합니다!]

[레벨이 하락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일부 스킬 정보가 변경됩니다.]

조금의 바람만 불어도 나부끼던 장발이 차츰 짧아진다.

짐승의 것처럼 뻗어 나왔던 송곳니와 발톱이 작아졌다.

근육질의 상체 위로 칠흑의 갑옷이 덧씌워졌고, 한 쌍의 날개가 붉은 망토로 변했다.

이마에 달린 3개의 뿔은 아름답고 기품이 넘치는 은색의 왕관이 되었다.

마왕의 모습을 벗고 지존도 속 모습으로 회귀한 그리드.

그는 분명히 약화됐다.

3개의 레벨이 떨어졌고, 여신의 축복으로 강화한 대장장이 기술과 파그마의 검무가 강화 전 상태로 되돌아갔으며, 바알의 계약자 버전 파그마의 눈과 무작위 엘릭서 234개를 복용해서 얻은 스탯 또한 모조리 상실했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의 시선을 끄는 변화는, 국대전을 앞두고 강화했던 열망의 무아검의 강화 수치가 1이 됐다는 점과 부셔진 발할라가 복구 됐다는 점, 그리고 전장을 겨누는 대포가 갓 핸드 형태로 되돌아갔다는 점이다.

지존도 당시로 스탯 회귀.

여기서 말하는 스탯. 즉 능력치란, 당시 착용 중이던, 혹은 사용 중이던 아이템의 효과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림 속 ‘모습’과 일체화시키는 스킬이었으니, 그림 속 무장 상태로 돌아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불과 몇 달 전의 나인데.’

아주 오래 전으로 되돌아온 기분이다.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깨달을 수 있어 뿌듯하다.

피식 웃은 그리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잔여 스탯 포인트를 투자하고 여신의 축복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295개의 능력치 포인트를 민첩성에 투자합니다.]

[<파그마의 검무>Lv.4가 <검호 파그마의 검무>로 강화됩니다.]

[검술에 통달하여 물리 공격력이 40퍼센트, 치명타 확률이 50퍼센트, 치명타 공격력이 80퍼센트 상승합니다.]

[검무 사용에 필요한 보법의 횟수가 반보~일보 줄어듭니다.]

“뭘 한 거지?”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의문이었다.

늘 침착하고 냉정한 크라우젤이 드물게 동요하고 있었다.

잃었던 아이템을 복구하고 넝마가 됐던 육신을 회복한 그리드의 변화는 크라우젤의 지식과 정보로도 수용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한 가지 밝혀두자면, 마왕 역할을 맡은 대가로 얻었던 보너스 혜택은 이제 없어.”

지금부터 너와 싸울 ‘나’는 한줌의 거짓 없는 진짜 나다.

그리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몇 달 전으로 회귀한 바람에 실제보다 다소 약하다는 사실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았다.

크라우젤의 레벨이 1로 떨어진 것은 불과 2년 전의 일.

자신보다 훨씬 못한 상태에 있는 그를 상대로 굳이 핑계거리를 만드는 건 창피한 일이었다.

애초에, 정말로 크게 약해진 것도 아니었고. 엘릭서가 올려준 스탯 태반은 손재주였다.

“간다.”

드디어 맞는 옷을 걸친 기분이다.

본래의 모습을 되찾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그리드가 크라우젤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섰다.

“락(落).”

쿠오오오오-!

하늘이 내려앉는다.

하늘의 추락한 권위를 알리는 검무가 부지불식간에 크라우젤을 덮쳤다.

마왕 토벌전에서, 단 일격으로 십수 명의 랭커를 위기에 빠뜨렸던 광역 스킬. 무엇보다 가장 큰 강점은 즉발에 가깝다는 부분에 있었다.

채애앵-!!

검술을 전개한 크라우젤이 방어했다.

끼릭-! 끼기긱!

표표한 불길을 토해내는 열망의 무아검과 칼날 같은 가시를 쏟아내는 백호검이 맞물린 채 공명한다.

두근! 두근! 두근!

현 지존과 전 지존.

불길에, 가시에 뺨을 베인 두 사내의 심장 소리가 하나처럼 얽힌다.

극도로 치닫는 흥분 속에서, 그리드는 깊은 감사를 느꼈다.

크라우젤이 제4회 국대전에 참가한 이유는 순전히 자신의 부탁 때문이었으니까.

마지막 승부를 가르자는 자신의 억지를 들어주고자. 그 승부를 망치지 않고자 세상의 비난마저 각오하고 이 순간을 기다려준 크라우젤이 그리드는 너무 고마웠다.

“실망시키지 않을게.”

“그래야지.”

채앵-!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같다.

맞물린 검을 동시에 떨쳐낸 두 사내가 한 바퀴 크게 회전했다.

얼핏 보면 똑같이 회전하는 듯 했지만, 두 사람의 행동에 담긴 의도는 전혀 달랐다.

크라우젤은 검과 검의 충돌 간에 발생한 반발력에 거부하지 않고 순응해서 회전력을 강화, 다음 공격에 더 큰 힘이 실리도록 유도한 반면, 그리드는 검과 검의 충돌 간에 발생한 반발력을 힘으로 찍어 누르고 이 과정을 검무의 동작으로 연계했다.

“초(超) 폭풍검.”

“연살(聯殺).”

쩌정-! 쩌저저저저정!!

콰콰콰콰쾅!!

일격이 일격을 파쇄하고, 이격이 일격을 상쇄하며, 이때마다 발생하는 충격파가 전장을 난도질한다.

출렁이는 대지 위에서도 두 사내는 중심을 잃지 않은 채 서로에게 집중했다.

이 세상 위에 존재하는 사람은 오로지 너와 나, 둘뿐이라는 것처럼.

펑-! 퍼퍼퍼펑!

상공의 갓 핸드가 매직 미사일을 쏘고,

챙! 채채챙!!

솟구친 4자루의 검이 장막을 펼쳐 크라우젤을 지킨다.

콰아아앙!!

갑자기 무게가 늘어난 백호검의 일격이 그리드의 한쪽 무릎을 꿇렸고,

빠각-!

그리드가 무릎 꿇린 자세 그대로 플라이를 전개하자, 뾰족하게 세워진 그의 무릎이 크라우젤의 턱을 강타했다.

덥썩!

그대로 승천을 시도하는 그리드의 발목이 크라우젤에게 붙잡힌다 싶더니.

콰자작!!

땅으로 던져져 처박힌다.

발할라가 진동하며 자욱한 독무가 펼쳐졌다.

휘리릭-!

칼을 회전시킨 크라우젤이 독무를 역방향으로 날렸다. 그 위로 살(殺)이 꽂혀왔고, 수백 개의 진퇴로를 자랑하는 백광보의 묘리를 이용한 크라우젤은 아슬아슬하게 회피한 후 일장을 날렸다.

때마침 펄럭이는 란스티어의 망토에 가로막혀 타격에 실패하는 듯 보였으나.

“호랑이 울음.”

퍼어엉-!

방어의 개념을 무용(無用)으로 돌리는 발경이 망토 너머, 그리고 발할라 너머 그리드의 육신에 타격을 입혔다.

속이 진탕당한 그리드는 추돌하는 차 속에 갇힌 사람처럼 시야가 흔들리는 위험을 겪어야만 했다.

“만월.”

서걱-!

보름달처럼 큰 원을 그리는 검술이 그리드의 가슴을 집어삼켰다. 크게 베이고 울컥 피를 토한 그리드가 고개를 숙였다.

카메라는 그의 표정을 잡지 못했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기뻤다.

자신의 동경이. 소중한 친구이자 경쟁자가 다시 건재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퍼펑-! 펑!!

파공성이 쉬지 않고 터진다.

크라우젤은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았다.

흘러나온 피를 닦아낼 겨를도 없이, 그리드는 날카로운 공격을 피해내고 막아내느라 바빴다.

그냥 맞아주고 때리는, 일명 템빨러 전술을 구사하는 건 아직 이르다는 판단이다.

유니크 등급까지 성장한 백호검의 위력은 그리드에게도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쪽이 살을 내어준다고 해서 뼈를 내어줄 상대도 아니었고.

‘일단 더 신중하게. 확실한 틈을 노리자.’

콰자작-!

크라우젤의 연격이 멈췄다.

그리드가 기습적으로 날린 즉발 스킬, <꺾을 수 없는 정의>가 그에게 방어를 강요해버렸다.

“이무기 승천.”

위력이 워낙 큰 탓에 완전히 방어하지 못하고 각혈한 크라우젤.

충격에 기운 몸을 비틀어 올린 그가 그리드의 하단을 파고들었다.

스파앗-!

턱을 들어 반격을 회피하는 그리드의 시선이 하늘을 향한다. 새벽녘의 하늘이 솟구치는 검기에 꿰뚫리고 있었다. 구름들이 모조리 찢겨나가 <전격 마기의 폭풍>의 전개를 방해하는 형국을 만들어버렸다.

만약 의도한 거라면 소름 돋는 일.

전율한 그리드가 연(聯)을 날렸다.

영웅보다 한 타이밍 빠른 그의 검무 전개 속도에 크라우젤은 아직 온전히 적응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기어검을 이용한 검무 차단에 실패하고 어쩔 수 없이 회피를 선택했다.

“....”

“....”

너무 빠른 공방 탓에 벌써부터 살짝 가빠진 호흡.

하지만 거리를 벌린 채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내는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철컥!

백호검을 칼집으로 회수한 크라우젤이 허리를 낮추며 발검의 자세를 취했다. 기왕 벌어진 거리를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

황룡 자수가 놓인 묵색 도포.

국대전 내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아온 화려한 의상이 고즈넉한 바람에 펄럭인다. 땀과 피에 헝클어진 흑발 아래 고요한 두 눈이 그리드의 발끝을 주시한다.

지난 세월 동안 극검이 수차례 증명해왔듯이, 발검의 자세를 완성한 검사는 화살 먹인 시위를 힘껏 당긴 궁사와 다르지 않다.

그리드는 뒤로 물러나도, 앞으로 돌진해도 표적이 될 뿐이다. 이미 크라우젤의 사정권 안에 있었다.

“...그리드가 움직이는 순간부터 시간이 다시 흐를 거다.”

앞서 탈락한 선수들과 함께 모니터를 주시하던 극검이 조용히 말했다.

시간이 다시 흐르고, 싸움이 재개되었을 때.

그때는 그리드가 무척 불리한 입장에 놓일 거라는 말을, 그는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

“....”

여전히 가만히 선 그리드와 크라우젤.

서로를 주시하는 그들의 머리 위에서 현란하게 격돌 중인 갓 핸드와 4자루의 검만이 시간이 멈춘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앞선 대폭발에 휩쓸려 반파 된 오르간은 연주를 멈춘 지 오래였으니까.

‘...아이템 창조.’

언제라도 칼을 뽑을 기세로 있는 크라우젤의 손끝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그리드는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인벤토리에는 명성 상점에서 얻은 <아이템제작 즉시 완료 주문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

『....』

“....”

해설진과 관중들은 벌써 몇 분 째 침묵 중이었다.

돌이켜 보면, 복선은 많았다.

S.A그룹이 제4회 국가대항전을 논할 때마다 ‘플레이어와 함께 만드는 대회가 될 것’이라는 말을 밥 먹듯이 해댔었고, 4천왕과 마왕의 취약점을 가장 빨리 파악한 선수들은 하나 같이 템빨단원들이었다.

또한, 크라우젤은 사람들의 비난을 뻔히 예상할 것이면서도 전투를 방관했고.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군요. 지금 크라우젤 선수와 싸우고 있는 사람은 진짜 그리드가 맞습니다.』

마왕이 영웅과 비슷한 스킬을 사용했을 때도.

지발이 그리드의 이름을 절규하듯 외쳐댔을 때도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었다.

마왕이 그리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상식’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었기에.

하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왕 스스로가 진짜 모습을 공개한 마당에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해도 웃겼다.

이제는 인정하고 분석해야할 때였다.

『지금의 그리드보다 마왕일 때의 그리드가 훨씬 강했습니다. 일단 생명력부터가 20배 이상 높았죠. 아무래도 마왕 버전일 때는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았을 겁니다.』

『그렇겠죠. 그렇지 않으면 제아무리 그리드라도 혼자서 400명의 선수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겠죠. 지금의 그리드와 마왕은 별개로 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드를 폄하하는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관중들과 시청자들은 묵묵히 경기에 집중했다. 해설진의 떨리는 목소리 따위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전후사정이 어찌됐든, 합리와 불합리를 논하기 전에, 지금 당장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승부의 향방이었다.

그리드와 크라우젤.

전 지존과 현 지존의 3번째 진검승부.

1대1 전적을 보유하고 있는 그들 중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는 건 과연 누구일까?

이번 대결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직감한 전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한참 동안 마른 침만 삼키다가 일제히 소리쳤다.

“누가 됐든 이겨라! 둘 다 응원한다!!”

“우와아아아아아!!”

지금, 사람들은 깨닫고 있었다.

자신들이 그동안 유독 PvP 종목에 관심을 가지고 기대해왔던 이유.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승부를 다시 보고 싶어서였음을.

그래, PvP라는 종목 자체보다는 아직 끝나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정말로 1년 내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이번에도 이겨라, 그리드!”

“이번에는 이겨줘, 크라우젤!”

“에이 씨, 그냥 둘 다 이겨라!!”

올해 최대의 이슈였던 마왕 토벌전이, 단 두 사람의 대결을 위한 오프닝 무대로 전락해버린 순간이었다.

S.A그룹조차도 상정 못한 결과였다.

“이러다가 두 사람의 이름값이 국가대항전 이상이 되는 건 아닐지 우려됩니다.”

“....”

윤상민 이사가 반 농담처럼 던진 말에 아무도 웃지 못했다.

S.A그룹 임원진 회의실의 분위기는 다소 불편했다.

반면 대진 그룹 임원진 회의실은 막말로 축제분위기였다.

“그리드가 우리 자동차. 아니, 우리 그룹의 얼굴이 될 걸세.”

“오오!”

“그리드가. 아니, 갓리드가 내 사위가 될 수도 있어.”

“...오오!”

의외로 인터넷 댓글 반응 같은 거 많이 보시나?

이진명 회장이 갓리드라는 말을 알자 임원들이 당황하는 그때, 대진 자동차 사장은 양쪽 엄지를 추켜세웠다.

“갓리드를 사위로 두시다니! 과연 갓장님이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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