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5권 - 19화
‘이 상황을 의도적으로 설계한 거라는 말이지?’
그리드가 <차징 샷>에 적중당한 순간 폭발하는 마장기를 보면서, 지슈카는 명확히 표현하기 힘든 어떤 불안감에 휩싸였었다.
마장기의 폭발 타이밍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으니까.
폭발에 휩쓸린 그리드는 커다란 허점을 노출하고 말았고, 선수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산개해있던 수백 명의 선수들이 밀집해서 그리드를 둘러쌌다.
함정에 빠진 것이다.
차징 샷을 순순히 허용한 시점부터, 그리드는 작금의 대폭발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있었으리라.
“갈수록 더 섹시해지네.”
다섯 명으로 증식한 그리드의 갑옷이 붉게 달아오르던 장면을 떠올린 지슈카가 몸서리쳤다. 아름다운 얼굴 위로 붉은 홍조가 덧씌워졌고, 도톰한 입술 틈새로는 거친 숨결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그리드의 두개골을 해부해보고 싶었다. 뇌 주름마저 섹시할 것 같았다.
스윽.
마왕의 탈을 쓴 그리드의 시선이 지슈카에게 꽂히고 있었다.
지슈카의 홍조가 더욱 짙어졌다. 극도로 흥분한 그녀가 바들바들 떨었다.
“와줘.”
끼릭-!
아직 80명에 가까운 선수들이 생존한 상황.
크리스와 극검을 비롯한 대부분의 템빨단원들이 사망했다고는 하나, 마장기를 소환한 지발과 데미안 등 아직 강한 선수들이 많이 살아남아있었다.
한데 그리드는 나를 보고 있다. 오로지 내게 집중하고 있다.
내가 그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된다는 뜻.
지슈카는 그리드의 시선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에 커다란 희열을 느꼈다.
---!!
검게 칠해진 화살이 소리 없이 쏘아졌다.
그것이 정확히 몇 발인지 아는 사람은 지슈카가 유일했다.
그녀와 똑바로 마주보고 선 그리드조차도 자신에게 몇 발의 화살이, 당최 어떤 궤도로부터 날아오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투쾅-!
그리드는 도리어 돌진했다. 어차피 불가능한 방어와 회피에 연연하지 않았다.
황소 같은 모습이었다.
지슈카라는 이름의 붉은 천에게 매혹당한.
“그래, 내게 와!”
지슈카의 흥분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푹-! 푸푹!!
그리드의 몸에 화살이 박혔다.
인중에, 눈에, 미간에.
아주 지독한 살수들의 향연이었다.
체다카 출신들이 지슈카의 성정을 맹수, 사냥꾼으로 비유하는 이유를 잘 알 수 있었다. 표적을 앞둔 그녀에게 자비라는 개념은 없었다.
본래라면 크게 위축됐어야할 그리드였으나.
‘파그마의 검무.’
현재 그리드는 <움직이는 요새>의 가호를 받고 있는 바, 물리적인 상태이상마저도 완벽하게 저항하는 상태다.
눈가에 화살이 꽂혀 핏물이 철철 넘쳐도 시야를 방해받지 않았다.
‘연.’
핏-! 피피피피핏!!
화살 세례를 돌파하고 지슈카에게 도달한 그리드가 수십 개의 검광을 그렸고,
피잉-! 피잉-!
지슈카는 화살을 뽑는 동작에서 반 바퀴, 활시위를 당기는 동작에서 또 반 바퀴 회전하며 그리드에게 거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검격을 몇 번이나 회피하고 도리어 반격했다.
[8,9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7,59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13,58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조준도 완벽했다. 지슈카는 갑옷이나 견갑 등의 보호구를 피해서 그리드에게 온전한 타격만 입혔다. 급소를 노리는 만큼 약점 공격의 발동 횟수도 잦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었다.
궁사 랭킹 1위 지슈카의 민첩성이 제아무리 높다한들 그리드의 민첩성 또한 그녀 못지않았고, 검을 휘두르는 동작이 한 바퀴 회전하면서 화살을 쏘는 동작보다야 훨씬 빠르게 연계되었기 때문이다.
[대상에게 29,3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25,76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단 두 번의 검격을 허용한 것으로 생명력을 절반 이상 잃은 지슈카.
급기야 화살통과 활대를 이용해서 몇 개의 검격을 막아낸 그녀가 이때 발생한 반동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그러자 그리드와 지슈카의 거리가 다시금 벌어졌고, 그리드의 발밑에는 어느새 덫이 깔려있었다.
철컥!
덫이 작동하면서 그리드의 발목을 세차게 물었다. 덫이 유지되는 5초 동안 무리해서 움직이려고 했다가는 발목이 뜯겨나갈 수도 있는 함정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무시하고 내달렸다.
지금의 그는 움직이는 요새였으니까.
고작 덫 따위가 요새에게 제동을 걸 수는 없는 법이다.
“너무 멋지잖아.”
지슈카의 황홀경이 짙어졌다.
뇌는 섹시하고, 몸은 터프한 그리드의 이중적인 매력에 그녀는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아쉬웠다.
빚만 없었다면.
그리드와의 관계에 채권자와 채무자라는 오점만 찍히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빚쟁이가 감정을 전달해봤자 꽃뱀으로밖에 안 보이겠지.’
끼릭-!
아쉬움에 쓴 미소를 흘린 지슈카가 전력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덫으로도 붙잡아둘 수 없는 그리드를 무슨 수로 감당하겠는가?
이길 수 없다.
다만, 죽기 전에 그 가죽만은 취해가겠다.
이건 호감과 별개의 긍지.
맹수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투콰앙-!
코앞까지 쫓아온 그리드를 향해서, 지슈카는 자신의 모든 자원을 집중시킨 최후의 화살을 쏘아냈다.
한데 조준 지점이 여태까지와 달랐다.
갑옷의 이음새에 있는 급소들이 아니라, 갑옷의 정중앙을 조준하는 화살이었다.
지척에서 쏘아진 화살.
순식간에 갑옷 위에 닿아오는 그 한 발의 화살이 그리드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1분 동안 유지되며,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현재 내구력은 30이 됩니다.
움직이는 요새의 발동 페널티.
그로 인해 넝마가 된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가 과연 이 화살을 버틸 수 있을까?
못 버틸 것이다.
판단한 그리드는 비장의 패로 남겨둔 <종횡무진>을 발동해야한다는 결론까지 세웠으나.
콰자작-!!
애초에 코앞에서 쏘아진 화살이다.
지슈카의 화살은 이미 발할라를 관통하고 있었고, 산산조각 난 발할라는 수천 개의 파편으로 나뉘어서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지슈카가 화살을 쏜 동시에 그녀의 의도를 읽어내고, 판단하고, 행동했다면 피할 수 있는 결과였으리라.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리드는 그만큼 순발력이 좋지도, 눈치가 빠르지도 못했다.
그는 크라우젤과 달리 선택 받은 인간 즉, 천재가 아니었으니까.
푸욱-!
창인지 검인지 구분하기 힘든 외형을 뒤집어 쓴 무기.
열망의 무아검이 지슈카의 허리를 관통한다.
그리드의 갑옷이 부셔짐과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습니다!]
“자존심 센 여자라서 미안해.”
실 끊어진 인형처럼 고꾸라지며, 그리드의 품에 얼굴을 묻은 지슈카가 사죄한다.
그것은, 그리드에게 활을 겨눈 행위에 대한 속죄가 아니었다.
비록 비현실 속이라고는 하나, 감히 칸의 유작을 훼손시킨 점에 대한 사죄였다.
넝마가 된 발할라의 모습을 엿보고도 처음부터 그것을 노리지 않았던 이유, 망설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그리드가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별 걸 다 사과하네.”
“훗... 쿨럭!”
쏴아아아아--
그리드의 품속에서, 잿빛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싶더니 곧 기둥이 되어 승천했다.
지슈카의 죽음을 알리는 표시였다.
“그리드으으으!!”
실명에서 간신히 벗어난 직후, 갑자기 나타난 웬 거구의 뱀파이어에게 붙들려 있던 백색의 거신이 다시금 그리드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드가 지슈카를 쓰러뜨리는 동안, 또 다른 최대의 위협인 지발은 티라멧을 해치우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티라멧을 벌써.’
역시 마장기는 괴물이다.
제작에 필요한 재료가 죄다 고대의 유물로 분류되던데, 국대전 보상으로 선택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보면서, 그리드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가 꺼낸 아이템은 <용작살>과 망치였다.
발할라마저 잃은 지금, 지발과 정면으로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이다.
“스피어 샷.”
콰앙-!
제2회 국가대항전 당시, 드레이크를 레이드하기 위해서 제작했던 거대한 작살이 그리드의 투창술에 반응하여 대포처럼 쏘아졌고.
푸우욱-!!
가슴에 작살이 박힌 레이더스는 멈칫했다.
“거기서 안 내리면 안 싸워준다니까?”
작살과 연결 된 끈에 달린 말뚝을 지면에 박아 넣은 그리드가 곧바로 자리를 이탈했다.
넓은 전장 곳곳.
대폭발의 여파에서 간신히 벗어나고 있는 선수들의 면면이 보였고, 그리드가 다음 표적으로 삼은 대상은 교황 데미안이었다.
‘연살파극.’
쿠오오오오-!
팽이처럼 회전하며 전쟁을 가로지르는 그리드.
그의 손에 쥐어진 열망의 무아검이 지독한 살의를 품으며 포효한다.
힐을 사용, 폭발에 휩쓸릴 때 입었던 상처를 간신히 회복하고 있던 데미안이 질색하며 방패를 세워들었다.
하지만 그의 방패는 그리드의 발할라가 그랬던 것처럼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절규해라.”
연살파극의 다른 이름이 마왕의 입을 통해 읊조려지고.
투콰앙-!
데미안의 방패는 첫 번째 타격조차 감당 못하며 산산조각난다.
“으윽...!”
거대한 황금색의 마법진을 등 뒤로 소환,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는 데미안이었으나.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죽어있었다.
“그리드으으으!!”
어느새 용작살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난 레이더스가 또 다시 그리드를 쫓아오는 중이다.
이번에 그리드는 레이더스를 피하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흑단 같은 장발을 흩날리며, 제자리에 우뚝 선 채 레이더스를 응시했다.
탑승석에 앉은 지발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반파 된 가면 틈새로 드러난 그리드의 눈매가 사나워 위축 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리드의 분신 중 하나가 포식이불족발이 세운 요새를 폭발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역시나.
투콰앙-!
오르간 옆에서 청룡의 숨결을 축적하고 있던 황금색 대포가 포격을 개시했고.
“크윽...!”
레이더스의 거창이 헐벗은 그리드의 몸에 닿기 직전.
쿠콰콰콰콰콰콰콰쾅!!
대포에 얻어맞은 레이더스의 몸이 크게 기울었다.
이어지는 자기장.
파직! 파지지지지지직!!
전류의 격동이 레이더스의 거체를 흔들기 시작했고, 레이더스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드....!”
탑승석의 지발이 절망했다.
자신이 의도치 않게 배포한 잘못 된 정보 탓에 급변한 전장의 흐름을 끝끝내 되돌려놓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규했다.
그리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올해의 당신이 보여준 모습들, 멋졌다.”
“....”
내가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었던가.
2년 전의 그 기고만장하던 그리드가. 자신을 벌레처럼 내려 봤던 그가 나를 치하해주고 있음에 곧바로 감회를 느낄 정도로.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몰라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지발이 레이더스를 회수했다. 그리고 곧바로 나타나는 페가수스 위에 올라 타며 그리드에게 돌진했다.
다른 선수들도 지발을 뒤쫓고 있었다.
생존한 80여 명의 선수들이 일제히 그리드를 덮쳤다.
갑옷을 잃은 마왕.
지난 수 년 동안 단련해온 육체를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는 그 또한 선수들 못지않게 상처투성이였다.
선수들은 짧지만 한없이 길게 느껴졌던 이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드 또한 마찬가지다.
심호흡한 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서, 설마 포기하는 걸까요?』
『그럴 수밖에요. 자원은 이미 진즉부터 한계에 이른 것 같았고, 갑옷마저 잃었으니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죠.』
해설진은 마왕의 최후를 논하고, 관중들과 시청자들의 환호성은 극에 치닫는 이때.
피잉-!
하늘 곳곳에 수백 개의 별이 떠올랐다.
그 아래, 마왕 그리드와 그를 덮치는 선수들이 있었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폭격(爆擊).
그리드가 알람 마법으로 설정해놨던 200여 개의 매직 미사일이 선수들의 머리와 등을 관통하며 지상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해 비명을 내지르는 선수들.
그들을.
‘랜디, 노에, 죽은 자의 왕이 될 수도?’
온전한 모습의 마왕과 검은 화염을 두른 호랑이, 그리고 한 마리의 리치와 데스나이트가 등장해 덮쳤으니....
『아... 아아아....』
또 몇 분이 흘러 전장에 남은 것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걸레짝이 된 채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마왕과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검성.
얽히는 시선 속에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검성 크라우젤이었다.
“불사까지 잃었군.”
“그러게. 다들 너무 강하더라고.”
“....”
이래서야 공정한 대결이 아니다.
판단한 크라우젤이 갑옷을 벗더니 스스로의 심장을 칼로 겨눴다.
그를 말린 건 마왕이었다.
“지존도.”
어느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그리드가 회귀한다.
마왕의 모습이 희미해지더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어떤 사내의 모습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템빨왕이자, 영웅왕이었다.
『그...리드?』
마왕의 정체를 놓고 여전히 반신반의하고 있던 사람들이 자지러졌다.
마왕 토벌전 시청률이 폭주했다.
각국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가 하나도 빠짐 없이 그리드로 교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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