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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30화 (825/1,794)

템빨 45권 - 18화

“...!?”

폭발직전의 마장기에서 뛰어내린 직후, 그리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궤적을 남기지 않고 나타난 지슈카의 화살이 그의 가슴에 쇄도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전투 내내 단 한 번도 막지 못한 화살이다.

소리 없이 날아오는 화살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두 달 전쯤인가.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새로운 궁술을 익혔다고 신나하던 지슈카의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맹수가 괴물로 진급했다는 사실을 그때 눈치 챘어야하는데.’

그리드는 장담했다.

지형과 지물이 지슈카의 손을 들어주는 장소에 한해서는, 지슈카 또한 지존을 논할 만큼 강할 거라고.

몇 년째 최고의 폼을 유지하더니 급기야 천외천의 영역까지 넘보는 것이다.

정말 굉장한 사람이다. 그녀가 나의 친구이자 동료라는 사실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또, 한편으로는.

‘유라.’

전설이 되고도 연이은 좌절만 맛보고 있는 유라가 떠오르며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노력가에 재능까지 겸비한 그녀가 유난히 잦은 고배를 마시는 이유는... 단지 운이 없다고밖에 볼 수 없다.

불운의 시기를 겪어본 그리드는 그녀가 얼마나 힘든 상태일지 가늠할 수 있었다. 안타까웠고, 돕고 싶었다.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투콰앙-!

찰나의 상념 속에서, 무방비 상태로 화살에 얻어맞은 그리드가 마장기에 처박힘과 동시.

쿠와아아아앙!!

마장기가 폭발해버렸다. 폭발에 휩쓸린 그리드의 시야가 빙글빙글 회전했고 아이템 내구도가 큰 폭으로 하락했다.

혼란스러울 법도 하건만, 그리드는 침착하게 대처했다. 어지러운 시야를 이겨내고 일어나 검부터 고쳐 쥐었다. 도살귀의 안대와 통찰력에 의지하며 사위를 경계했다.

하지만 크리스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템빨국 십공신 중 하나이자 현 랭킹 1위의 공격은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푸욱-!

레가스에게 던져지고, 폰에게 찔리고, 데미안과 극검에게 베이고...

300인 선수들의 온갖 스킬 폭격이 그리드의 생명력을 빠르게 앗아갔다.

땅에 못 박힌 채 짓밟히면서, 그리드는 숫자가 지닌 힘의 위대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다구리에 장사 없다는 성어를 만드신 선조들의 지혜에 무릎이라도 탁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이지, 지상에 추락한 순간부터 손가락 하나 까딱할 틈도 없었다.

사방팔방에서 딜레이 없이 꽂혀오는 공격이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했고, 비록 약한 공격일지라도 누적되자 엄청난 위협이 되어 다가왔다.

초당 수만~수십만의 생명력이 쑥쑥 빠져나갔으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만이었구나.’

사실, 그리드는 이번 전투를 앞두고 자신감이 충만했었다.

마왕 토벌전의 시스템을 오직 혼자서만 파악하고 있었고, 이를 토대로 온갖 대비책을 강구할 수 있었으며, 국대전 서버와 본 서버가 완전히 분리 된 까닭에 모든 대장기술을 부담 없이 구사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드는 자신이 유리한 고지에 섰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갔다.

선수들을 쉽게 봤다.

템빨단원과 소수의 하이 랭커를 제외한 선수들은 스킬 한 방, 평타 두어 방에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사실상 1대 400이 아니라 1대 30쯤의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오판이었다.

일단 공격을 명중시키는 일 자체가 어려웠다.

다수의 이점을 철저히 살린 선수들은 ‘공격력’이라는 그리드의 원천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거기다 방어력도 훌륭했다. 최소한 각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니만큼 스쳐도 사망이라는 공식이 쉽게 성립되질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템빨단원들이 선수들에게 제공하는 ‘정보’였다.

마왕의 정체가 그리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지슈카와 크리스는 선수들을 완벽하게 통솔했고, 그들의 오더 탓에 그리드의 광역기 대부분이 제대로 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주작궁을 복제해서 <날아오르라!>를 사용했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적의 숫자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사실에 그리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엄청 당황했을 정도다.

[3,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10,04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내구력이 19 하락하였습니다.]

[상태이상 ‘출혈’에 당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최초의 왕> 칭호 효과로 인해서 <대왕의 위엄>이 발동합니다.]

[상태이상을 반격합니다.]

[2,7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5,8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내구력이...]

...

...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반격은 시도조차 못한 채 구타를 당하면서, 그리드는 무력했던 학창시절마저 떠올렸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고도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극복한 트라우마였으니까.

이성 관계 트라우마는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지만, 지금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최초의 왕>의 칭호 효과가 발동합니다!]

[최근 1분 동안 잃은 생명력만큼의 보호막이 생성됩니다. 모든 지형 적응력이 100퍼센트 상승하고 이동속도와 방어력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불과 수십 초 만에 70퍼센트의 생명력을 잃었나.

보호막을 얻고 여유를 되찾은 그리드가 시간의 흐름을 자각한다.

만신창이가 되고도 고요하기만 한 그의 시야에 선수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걸레짝이 되어가고 있는 발할라가 내뿜은 독무에 중독돼서 헐떡이는 이들이 있었고, 대왕의 위엄이 반사한 상태 이상에 혼란을 겪는 이들도 있었다.

상태가 무척 위험해 보이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들 모두 물러섬 없이 공격에 열중했다.

마왕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타격을 입히고 메달을 노리겠다는 욕심이 그들을 철저히 지배한 상태였다.

“....”

보호막이 벌어준 시간. 그리고 티라멧의 힘이 벌어줄 수 있는 시간을 고려한 그리드가 침착하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종횡무진과 플라이에 이어서 초연까지 연계 가능한 마나가 남아있었다.

3개 스킬을 콤보로 사용할 경우, 그리드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것으로 모자라 또 수십 명의 선수를 학살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그 후가 문제다.

마나가 바닥을 기게 된다.

플라이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다시 추락해서 같은 꼴을 당하게 될 것이었고, 그때는 정말로 위험해진다.

고작 수십을 죽이는 수준으로는 승산을 엿볼 수 없다는 뜻.

‘벨리알의 힘으로 화염의 길을 만들어도 결과는 똑같아.’

결국 마나가 문제다.

‘알람 마법의 발동은 아직 멀었고.’

그리드는 4천왕이 언제 돌파 당할지 ‘대충’은 예상했지만 완벽하게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알람 마법과 매직 미사일의 대량 연계를 최대한 늦게 설정해 놓았다. 아직 의지할 수 있는 타이밍이 아니다.

그리드의 뇌리에 노에와 랜디, 템빨골과 빛의 정령, 그리고 티라멧이 스쳐지나갔다.

당장의 위기만 모면하고 곧바로 그들을 소환한다?

‘시기상조다.’

노에의 확정 방어 스킬과 스탯을 빼앗아오는 스킬은 필시 큰 도움이 될 테지만, 승리를 확실히 보장하는 패는 아니었다.

300명 가까이 남은 선수들을 상대로 펫과 소환수들이 오래 버틸 리 만무했다. 빠르게 역소환 될 것이고 그리드는 금세 다시 혼자가 될 것이다.

더군다나 빛의 정령은 따로 사용처가 있다.

[23,0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내구력이 37 하락하였습니다.]

쩌적. 쩌저적...

어느새 완연한 적색으로 물든 반쪽짜리 가면.

본래는 <기괴한 가면>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것에 점차 더 심한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균열의 틈새로 새어들어 오는 바람이 끈적거리는 피에 절은 그리드의 얼굴을 차갑게 식혀주었다.

‘이거....’

그리드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한다.

자신이 무척 큰 위기에 빠졌음을, 그는 이제 완전히 깨닫고 있었다.

패배, 실패.

수도 없이 겪었음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결코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단어들이 그리드의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좌절감이나 절망감이 밀려오지 않고 도리어 흥분된다.

그리드는 직감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직 떠올리지 못한 해결책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지난 수년의 세월 동안 쌓아올린 경험과 노력이 만들어낸 ‘지혜’의 태동이었다.

‘거짓의 권능?’

그리드는 여태껏 자신이 외면해왔던 그 힘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크라우젤과 영웅의 격전이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었다.

영웅은 거짓의 힘을 적극 활용했다. 다수의 분신으로 스킬을 활용하는 방법을 보여줬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활용하지 못한다.’

영웅과 비교해서 순발력이 너무 딸린다.

‘하지만 이런 내게도 영웅보다 나은 점이 있어.’

템빨.

바로 템빨이다.

영웅은 갖지 못했던 칸의 유산.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에는 <움직이는 요새>라는 스킬이 있다.

착용자의 생명력이 10분의 1 이상 하락하면 활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현재 내구력을 방어력으로 전환시킵니다. (내구력1당 방어력2) 모든 상태이상에 완전히 면역합니다. (물리적인 상태이상 포함) 1분 동안 유지되며,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현재 내구력은 30이 됩니다. (움직이는 요새의 지속 시간이 끝나면 현재 내구력이 최대 내구력의 3분의 1만큼 회복)

*내구력이 0으로 떨어질 경우 아이템이 영구적으로 파괴되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최근 5분 동안 입었던 모든 데미지의 절반을 반경 50미터에 방출하는 광역 공격 스킬 <난공불락>이 활성화됩니다.

스킬 자원 소모: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최대 내구력이 영구적으로 200 하락.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0분

‘할 수 있다.’

그리드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맞춰진다.

지혜가 개화하는 순간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수준의 지혜에 불과했으나, 둔재 그리드에게는 각별한 힘이었다.

‘흑화. 벨리알의 힘.’

[암흑의 룬에 봉인되어 있던 대악마 벨리알의 힘을 개방하였습니다!]

[벨리알의 세 가지 권능 전부를 인간이 소화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반마족 상태입니다. 육체가 거대한 힘의 압박을 견뎌냅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 가지 권능을 동시에 소화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벨리알의 세 가지 권능 <어둠>, <불>, <거짓> 중 하나만을 택일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거짓의 권능을 선택하였습니다!]

생명력을 실시간 소모 중인 그리드가 빠르게 분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전장을 보는 시야가 쪼개지며 넓어졌다.

나를 둘러싼 적들의 얼굴이, 나를 둘러싼 적들의 등이, 나를 둘러싼 적들의 발과 정수리가.

그리드의 시야에 한꺼번에 들어왔다.

“이건?”

선수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왕에게서 영웅의 모습을 엿본 것이다.

“산개해! 어서!!”

다급히 외치는 크리스와 그에 따르는 선수들.

『저, 저건 전대 영웅의 분신술...?』

『어, 어째서 마왕이 영웅의 능력을...!』

말을 더듬는 각국 해설진.

-뭐야? 뭔 일임?

-설마...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사로잡힌 관중들과 시청자들.

‘움직이는... 요새.’

쿨럭, 각혈하며 읊조리는 마왕.

지슈카가 쏘는 화살이 발생시키는 물리적인 상태이상을 모조리 저항하고 몸을 일으킨 그가.

“흐읍...!”

코피까지 쏟아낼 정도로 집중하며 분신들을 컨트롤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포위하고 있던 선수들 사이로 분신들이 난입하게끔 유도했다.

또한.

덥썩!

“헉! 야, 이거 놔!”

그리드 본인은 크리스를 붙잡고 늘어졌다.

싫은데?

마치 그렇게 답하듯이 피씩 웃은 그리드가 기겁하는 크리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난공불락.”

콰앙-!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최근 5분 동안 입었던 ‘모든 데미지의 절반’을 반경 50미터에 방출하는 광역 공격 스킬.

상대가 강할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위대한 폭발이 전장을 휩쓸어버렸다.

수백 개의 잿빛 기둥이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고,

번쩍-!

뿌옇게 일어나는 흙먼지 너머로 녹색의 안광이 빛을 흩뿌렸다.

쿠와아아앙-!

마력 부스터를 등에 달고 빛처럼 쇄도해오는 백색의 거신.

그것은 지발의 마장기 레이더스였다.

“그리드으으으!!”

마왕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마왕의 정체를 확신하는 지발.

그만큼 그리드의 힘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은 제아무리 그리드라도 400대 1의 싸움이 가당키나 하냐며,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으나 지발은 달랐다.

그리드라면 가능하다.

간단하게 생각하며 마왕의 정체를 유추했다.

쿠오오오오-!

거대한 창이 넝마가 된 그리드를 조준하며 날아오는 그때.

“...섬화.”

간신히 호흡을 고른 그리드가 빛의 정령을 소환했고, 정령이 폭사시킨 강렬한 빛 탓에 마장기 탑승석에 앉은 지발은 실명에 빠져버렸다. 그 탓에 거창은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거기서 안 내리면 안 싸워줘.”

타고난 악당처럼 사악하게 웃어준 그리드.

이제 거의 깨지기 직전인 가면 너머 그의 검은 눈동자가 지슈카에게 꽂힌다.

지슈카는 떨고 있었다.

겁에 질린 것이 아니다.

마왕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황홀경 그 자체였으니까.

한 남자에게 여러 번 반했을 때나 보여줄 법한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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