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부끼는 흑색의 장발, 이마에 왕관처럼 달린 3개의 뿔, 눈가를 가리는 회색 가면 너머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 안광, 2장의 날개, 얼굴보다 더 큰 손, 송곳 같은 이빨과 칼날 같은 손톱.
등을 곧게 세우고 선 마왕은 고고하면서도 위압적이었다. 가면 아래 드러나는 입매가 웃는 것처럼 보였으니 여유가 느껴졌고, 선수들은 마치 벌레 취급을 당하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야만 했다.
‘이름 표기부터가 남다르네.’
Satisfy에서 네임드 취급을 받는 존재들은 대부분 이름이 금색으로 덧칠돼 있다. 한데 <마왕>이라는 이름 두 글자는 짙은 적색을 띄었고 그 위에 금색 테를 두르고 있었다. 남다른 특별함과 위압감이 느껴졌다.
“전원 산개해!”
몇 초나 흘렀을까?
마왕의 생김새를 관찰하는 그 시간, 결코 길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찰나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지,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
아득히 들려오는 크리스의 외침이 선수들의 멈춰있던 시간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화들짝 놀란 선수들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날렸다.
하지만 마왕과의 거리가 워낙 가까웠다.
스스로 적진 한가운데 뛰어든 마왕을 포위하고 섰던 형국이었으니 거리를 빠르게 벌리기가 어려웠다.
덥썩!
어느새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마왕이 굼뜬 탱커 한 명의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낚아챘다. 그리고 속삭이듯 읊었다.
“살육의 폭풍.”
그것은, 본래 <전격 마기의 폭풍>이라는 이름을 지닌 필드 마법이었다.
강한 비바람이 범위 내의 선수들을 느려지게 만들었고, 미처 마법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선수들의 머리 위로 낙뢰가 연속적으로 떨어져 내렸다.
선수들은 방패나 무기를 들어서 낙뢰를 막아보려 했지만, 낙뢰에 깃든 마기가 자석의 양극처럼 작용하여 아이템을 끌어당기거나 밀어내었으니 쉽지가 않았다.
쿵-!
콰쾅! 쿠콰콰콰쾅!!
“....”
간신히 마법의 범위에서 벗어난 선수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전장을 바라본다.
독일 대표 웰던의 거구를 한 손으로 붙잡고 선 마왕과 무력한 초식동물처럼 발버둥치는 웰던.
그 둘의 주변으로 회오리치는 낙뢰의 연속이 수십 명의 선수들을 파멸로 몰아넣고 있었다. 난무하는 비명과 핏줄기 사이로 잿빛의 기둥이 몇 개나 떠올랐다.
지면에 흐르는 용암이 빗줄기를 수증기로 만들었으니 더욱 위험천만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웰던! 뭐해!”
“정신 차려!!”
같은 독일 대표 선수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웰던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왕의 근력이 너무 높아서 손을 뿌리칠 수 없다?
그건 아니었다. 수호기사 랭킹 6위인 웰던은 물리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스킬을 몇 개나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럼, 단지 겁이 나서 위축 됐다?
부정하기 힘들다. 단 일격에 수에론을 해치우고 자신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린 채 학살을 자행하는 마왕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탱커의 기본 소양은 ‘두려움에 맞서는 것’이었다. 만약 웰던이 두려움에 맞서지 못하는 인물이었다면 탱커로 대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웰던이 마왕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는 이유는.
“하으응....”
이마와 뺨, 그리고 목덜미에 스치는 마왕의 손가락이 기이한 감각을 전달해왔기 때문이다.
그건 쾌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웰던은 이 쾌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마왕의 손길로부터 벗어나기 싫었다.
얼굴을 상기시킨 채 거친 호흡을 뱉는 그의 모습을 목격한 랭커들이 뒤늦게 깨달았다.
‘매혹 마법까지 구사하는 건가?’
‘인큐버스 계열이었어? 어쩐지 생긴 것부터 멋지더라니.’
‘제길, 골치 아프게 됐군.’
“제길! 멍하니 있지들 말고 어서 실드를 써!!”
필드 외곽.
흙을 일으켜서 웰던의 몸을 감싸 보호한 고샤루가 마법사들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잠시 혼란에 빠졌던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격수들은 마왕에게 원거리 공격을 날렸고, 마법사들은 필드 마법에 공격 받고 있는 아군을 대상으로 몇 겹의 실드를 중첩 사용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사탕까지 복용한 그리드의 전격 마기 폭풍이 아닌가.
그 범위 안에 들어가 수초 동안 공격을 허용한 랭커들은 이미 죽음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런...!”
“무슨 공격력이...!”
잿빛 기둥이 늘어만 가자 마법사들이 초조해졌다. 아직 살아있는 아군을 찾아서 실드를 사용해 보지만, 그때마다 족족 대상이 잿빛으로 산화하여 무의미한 짓이 되었다.
“레가스, 멈춰.”
아군을 구출하고자, 마왕의 필드 속으로 몸을 날리려고 하는 레가스를 붙잡아 세운 폰이 지슈카를 돌아보았다.
지슈카의 등 뒤로 거대한 불의 새가 솟구치고 있었다.
“날아오르라!!”
화르르르륵-!
불의 비를 내리며 쇄도하는 주작.
신화급 주작궁으로 발현 된 그 스킬은 그리드가 복제하는 전설급 주작궁의 스킬과 차원이 달랐다.
훨씬 더 강력할뿐더러, 주작궁의 고유 옵션 효과 때문에 공격 지점에 있는 아군을 힐링시켜주는 기능까지 겸비했다.
“우와아!!”
지슈카의 주작이 4천왕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한편 수많은 아군을 살려줬던 장면을 이미 목격한 바 있는 선수들과 관중들, 그리고 시청자들이 환호했다.
그들은 악독한 마왕의 필드에 갇힌 선수들을 지슈카의 주작이 구원해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흥.”
가볍게 콧방귀 뀐 마왕이 자신의 코앞으로 쇄도해오는 주작을 향해서 손을 뻗자.
키이이이잉-!
활활 타오르던 거대한 주작이 마왕의 손끝으로 빨려든다 싶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스킬 삭제> 효력을 지니고 있는 <다크버스의 반지>의 위력이었다.
그리드는, 오늘 정말로 모든 패를 다 꺼낼 각오를 다진 것이다.
그건 단지 보상 때문만이 아니라 유라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너, 아무데도 못 보내.’
사라져버린 주작을 보고 놀란 선수들이 석상처럼 굳어버린 상황.
카메라를 향해 시선을 돌린 그리드가 경기를 지켜보고 있을 유라에게 무언의 의지를 전달한다.
***
『아니, 뭐죠? 지금 설마 도발하는 건가요?』
『아무리 봐도 그렇군요.』
카메라를 응시하는 마왕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자 각국 해설진은 소름이 돋았다.
마왕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너희들 인류가 믿고 응원하는 영웅들 따위, 내게는 한낱 벌레에 불과하니 헛된 희망을 품지 말라고.
그리드가 알게 되면 슬퍼할만한 일이었다.
그리드는 유라를 의식했기 때문에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었건만, 세상 사람들은 그걸 썩은 미소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말씀드리는 순간 폭풍이 걷혔습니다!』
『스킬의 위력이 강력한 대신 지속 시간이 짧은 것 같군요. 필시 재사용 대기 시간도 길겠지요. 선수들은 이때를 노려야합니다.』
『레가스 선수와 폰 선수가 선두에 서는군요! 앗! 폰 선수의 창이 마왕의 발을 찌른데 이어서 레가스 선수의 발차기가 마왕의 턱을 올려 찹니다! 그림 같은 합격이네요!』
『데미안 선수의 버프가 크리스 선수와 지슈카 선수에게 집중 됩니다! 크리스 선수의 거검이 마왕을 베려고 했지만 마왕이 이를 피해버리네요!』
『마왕이 크리스 선수의 공격을 크게 의식하는군요. 절대 맞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아! 하지만 제아무리 마왕이라도 지슈카 선수의 화살은 피하지 못합니다!』
『지, 지슈카 선수의 화살이 마왕의 손목에 정확히 꽂히면서 마왕이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절묘한 한 수였다.
지슈카는 마왕이 4천왕보다 높은 방어력과 생명력을 겸비한 점을 제대로 의식하고 있었다. 무리해서 치명상을 입히려고 시도하기보다 무기를 쥐고 있는 오른 손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물리적인 제약을 걸어서 무기를 못 쓰게끔 만드는 것이다.
마왕이 무기를 반대쪽 손으로 고쳐 쥐려고 했으나.
『메이샤오 선수의 천이 마왕의 왼 팔을 구속합니다!』
『카츠 선수의 혈풍과 극검 선수의 발검이 마왕의 신형을 무너뜨리네요!』
무려 400대 1로 시작한 싸움이다.
다구리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듯이, 4천왕을 2번씩이나 상대하면서 합을 맞춰본 선수들은 마왕을 철저하게 공략해나갔다.
처음 등장할 당시만 해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마왕이 제대로 된 반격도 못하고 일방적인 구타를 당했다.
대부분의 선수들과 관중들이 환호하는 반면.
‘함정이다!’
마왕의 정체를 눈치 채고 있는 템빨단원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왕이 굳이 제자리에 버티고 선 채 불리한 싸움을 계속하는 이유. 필시 노림수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크하하하하하하하!!
전혀 반대편에서부터 마왕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선수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향했다.
선수들 전원 당황하고 있었다.
여태껏 자신들이 최선을 다해서 공격한 마왕은 분신에 불과하며, 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에 진짜 마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선수들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잘못 된 판단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그건 그리드가 알람 마법을 설정해서 저장해놓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한 눈 팔면 쓰나.”
“....!?”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던 선수들이 다시 마왕에게 시선을 회수했다.
그리고 보았다.
속박에서 풀려난 마왕의 폭주를.
“꿇어라.”
본래 <십만대군 봉쇄검>이라는 이름을 지닌 스킬.
‘시야’에 보이는 모든 적에게 공격력의 20퍼센트 피해를 입히며 3초 동안 ‘봉쇄’ 효과를 줍니다. 봉쇄에 걸린 대상은 이동이 불가능하며 스킬과 마법 사용이 차단됩니다.
투기를 소모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으나, 절대다수에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무패왕의 검술이 선수들을 모조리 무력화시킨다.
스킬을 사용하던 격수들도, 마법을 외치던 마법사들도.
동시에 난도질당하더니 위축되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
해설진도, 관중들도, 시청자들도 침묵했다.
각국을 대표하는 수백 명의 랭커들이 마왕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큭...! 크윽...!”
거짓말처럼 고요해진 전장 곳곳에 침음이 흘렀다.
누군가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누군가는 분하다는 듯이, 누군가는 무섭다는 듯이 고개를 떨군 채 몸을 떨었다.
오직 한 사람.
“.....”
검성 크라우젤만이 꼿꼿이 선 채 마왕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선수들이, 관중들이, 시청자들이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크라우젤이 마왕으로부터 동료들을 지켜주길 바랐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기대에 응하지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 선 채 방관할 뿐이었다.
“마지막 승부를 겨루자.”
작년에 그리드와 나눴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다.
결국 그 끝에 기다릴 것은 패배와 비난, 멍에뿐임을 알지라도ㅡ 크라우젤은 그리드와의 약속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너와는 1대1로 싸우겠다.’
그리 말하는 크라우젤의 눈빛을 읽은 그리드가 중국 대표 메이샤오의 목을 베었다.
응하겠노라는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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