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5권 - 10화
[어리석을 정도로 충직한 기사 벤츠(메르세데스)가 침략자들을 모조리 격퇴하였습니다. 대회 종료 후 보상이 지급됩니다.]
[동료를 배신하고 심마(心魔)에 빠진 2인자 빈(아스모펠)이 침략자들을 모조리 격퇴하였습니다. 대회 종료 후 보상이 지급됩니다.]
[칭찬과 애정을 갈구하는 뱀파이어 백작 코볼트(놀)가 침략자들을 모조리 격퇴하였습니다. 대회 종료 후 보상이 지급됩니다.]
시스템이 서술하는 4천왕의 특징이 그리드의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개개인의 성향이나 상태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점이 재미있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아스모펠을 생각하면 어서 빨리 황비와의 일을 해결해야할 텐데...’
그러니까 강해져야한다.
광룡철과 뮤토 상단을 이용해서 소심한 복수를 한 번 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애교 수준에 불과하니까.
과거의 빚을 완전히 청산하기 위해서는 일단 무력이 필요했다.
되새기며, <아이템 오토 제작>의 효과로 모루 위 철을 때리는 그리드는 마지막 알림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4천왕 중 최강자라고 단언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 피아로.
그가 마지막 조. 아마도 크라우젤이 속해있을 최후의 조를 전멸시켰다는 메시지를 기다리는 것이다.
선수들이 마왕(나)에게 도달하지 못하기를 바라서?
아니, 그런 마음이 아니다.
그리드는 선수들이 반드시 4천왕을 돌파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들과 직접 싸우고, 무찔러야지만 더 많은 보상을 얻을 수 있을뿐더러 대진그룹 회장이 원하는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까.
‘선수들이 4천왕을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전멸은 반드시 겪어야한다.’
그리드는 <마왕 토벌전>의 숨겨진 규칙을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플레이어다.
그는 4천왕 단계에서 모든 조가 전멸할 경우 전원 부활해서 재도전할 기회를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침착한 것이다.
‘결국 전원 여기까지 오게 될 거야.’
마왕 토벌전은 애초에 그런 게임이다.
평균 레벨이 450에 육박하는 전설급 NPC들.
그들을 현재 시점의 랭커들이 레이드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아니, 원래는 쉬웠을 수도 있지만 그리드의 템빨을 무장한 시점부터 힘들어졌다.
그리드가 그렇게 만들었다.
내 기사들이 사람들 앞에서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내 기사들이 이만큼 강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기에.
따앙-!
대포의 포신 부위가 완성되어간다.
마왕 토벌전 개시 후 40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마왕 토벌전 특전으로 최대 생명력이 20만 증가합니다. 현재까지 총 추가된 생명력 수치는 80만입니다.]
[작은 씨앗에 담긴 우주를 엿보고 깨달음을 얻은 구도자 가르뎅(피아로)이 침략자들을 모조리 격퇴하였습니다. 대회 종료 후 보상이 지급됩니다.]
“소환, 명성 상점.”
[최고의 명사들만을 위한 특별한 서비스가 찾아옵니다!]
황금색 마차가 그리드의 눈앞에 떨어졌다.
***
“용오름.”
쿠오오오오오-!
갯벌에서 불러 올려진 바닷물과 진흙, 그리고 온갖 어패류가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었다. 승천하는 용의 허리처럼 구불구불 휘는 모습이 위협적이다.
강기의 집약체였다.
순전히 인간이 만든 재앙이다.
깨닫는 순간, 크라우젤은 압사(壓死)의 악몽을 떠올렸다.
대악마 벨리알의 한쪽 팔마저 날려버렸던 어느 농부의 절기.
눈앞의 용오름은 그것과 형태가 무척 다르되 꼭 닮은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용오름은 씹...!”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져 내리는 용오름을 바라보면서, 곳곳의 선수들이 비명. 아니, 욕설을 토했다.
<자갈 들춰 날리기>, <조개 캐기>, <게 낚시>, <낙지 뽑기>, <어망 투척>, <갈매기 부르기>, <해감> 등등 별 해괴한 스킬들에 괴롭힘 당하느라 노이로제 걸리는 판국에 이제는 하다하다 진흙과 해산물이 뒤엉킨 토네이도에 짓뭉개지게 생기다니?
두렵다기보다 더럽다.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얼굴에 들러붙은 낙지를 떼어내다가 갯벌을 뒹굴고, 날아오는 조개와 게새끼들에게 발가락을 물려 비명을 지르고, 조갯살 주워 먹겠다고 날아온 갈매기 부리에 쪼여서 머리털이 뽑혀나가는 등.
이건 결코 영광스러운 싸움이 아니었다.
“씹어 먹어도 부족할 어부 새ㄲ....! 으어억!!”
관중들의 시선조차 잊을 정도로 큰 분노에 휩싸인 선수들이 방어 스킬을 전개하다가 신음을 토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토네이도가 선수들의 몸을 짓뭉개고 있었다. 토네이도에 깃든 강력한 무게가 그들이 전개한 방어스킬까지 모조리 싹 다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
비명이 그치고 적막해진 갯벌 위에 살아남은 사람은 단 두 명.
크라우젤과 크리스였다.
“...저 사람, 내가 아는 그 사람 맞지?”
가르뎅이라는 이름의 4천왕.
그가 <플랑크톤 뿌리기>를 사용하자 일대의 조개들이 급격히 성장하는 광경을 봤을 때부터였다.
크리스는 가르뎅의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 챘다. 물론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조금 전 용오름을 보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크라우젤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분이 맞다.”
“....그럼 마왕은?”
“누가 떠오르지?”
“....어떻게 이기라고.”
마왕과 4천왕의 정체를 깨달은 크리스가 좌절했다.
놀라운 태도였다.
그는 눈앞의 어부보다도 그리드를 두려워하는 눈치였으니까.
“어망 회수. 먹물 쏘기.”
갯벌 너머에서 날아온 어망에 잔뜩 들어있는 오징어 두 마리를 양손으로 꺼내 쥔 어부가 총 쏘듯이 먹물을 쏴댔다.
정확히 눈을 노린 조준 사격이었기 때문에 크라우젤과 크리스는 시야를 잃고 말았다.
“미끼 꿰기.”
빛살처럼 날아든 낚싯줄이 크리스를 구속했고, 그를 끌어당기며 발생한 반동을 타고 몸을 날린 어부는 크라우젤의 코앞까지 날아와 모종삽을 찔렀다.
“껍질 깨기.”
본래는 <필멸>이라는 이름을 지닌 즉사기였다.
0.1초의 간극 동안 크라우젤은 고민했다.
<비장>까지 꺼내들고 발악해야하나?
‘아니, 포기한다.’
모든 수를 동원해서 싸워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미 A조를 제외한 모든 조가 전멸한 상태다.
정황 상, 크라우젤은 확신했다.
‘재도전할 기회를 줄 거다.’
5초의 불사 동안 무저항하고 순순히 잿빛으로 산화한 그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곧 알게 된다.
[동문 공략을 담당했던 A조가 전멸하였습니다.]
[동문의 수호자가 큰 피해를 입은 상태입니다.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공략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4천왕의 강력한 힘 앞에 모든 도전자가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첫 번째 도전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두 번째 도전이 시작됩니다. 모든 도전자가 부활합니다.]
[4천왕의 생명력이 모두 회복됩니다. 단,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은 초기화되지 않으며 능력치가 30퍼센트 하락합니다.]
[두 번째 도전에 실패할 경우 금, 은, 동메달 보상 중 동메달 보상이 삭제됩니다.]
***
7.<마왕 토벌전> 참가자들이 관문 돌파에 실패할 경우, S.A그룹(을)은 참가자들에게 다시 도전할 권리를 줄 수 있으며 그 방법은 신영우(갑)와 논의해야한다.
S.A그룹과 그리드가 맺은 마왕 프로젝트 협약의 14개 조항 중 7번째 조항이다.
마왕 토벌전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길 바라는 간절함과 4천왕의 강함을 우려하는 불안감이 탄생시킨 조항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첫 번째 도전에 실패하는 랭커들의 모습을 확인한 임철호 회장이 너털웃음 흘렸다.
사실, 마왕 프로젝트의 초기 기획 단계에서는 예상하기 힘들었던 결과다.
그리드가 지난 수년 동안 공들여 수집해온 네임드 NPC들은 필시 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랭커 100명을 홀로 상대하는 건 결코 불가능한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변수가 있었다.
바로 NPC들의 성장력과 그리드의 아이템 제작 능력이다.
그리드는 참으로 특이한 인물이었다.
보통의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기껏 얻은 네임드 NPC를 늘 곁에 두며 펫과 비슷한 개념으로 이용했을 터인데, 그리드는 굳이 그들을 구속하기보다는 자유를 줬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실컷 밭일만 해온 피아로.
자신이 범한 죄에 책임을 지고자 전대 적기사들을 찾아 떠난 아스모펠.
그리드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개별적으로 활동하며 견식을 넓혀온 메르세데스.
뱀파이어의 도시를 관리하는 한편 피아로의 도움을 받아 공복을 다스릴 수 있게 된 놀.
그들 모두 예측 범위 이상의 성장을 거두었다.
더군다나 그리드는 대장장이 기술 능력을 한계치까지 성장시켰으니, 그가 직접 제작한 전설~신화 등급 아이템은 4천왕을 불과 몇 달 만에 괴물로 만들어버렸다.
“의도한 걸까요?”
설마 100인의 랭커가 4천왕 하나 돌파하지 못할 줄이야?
예상외의 결과에 넋을 잃은 윤상민 운영이사의 질문이었다. 그의 태도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리드는 NPC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 그들의 성향과 과거를 철저히 분석하고 그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육성한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리드는 결코 둔재가 아니다. 과거에 보여줬던 모든 모습이 연기였다고 판단해도 좋을 정도의 천재다.
임철호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의도한 게 아니라는 건 자네도 알지 않나.”
“....”
임철호 회장이 그랬듯이 윤상민 이사 또한 기적의 5인방을 지켜봐왔다. 그중에서도 초기의 그리드에게 반감을 품고 그를 집중적으로 지켜보다가 차츰 반해갔다.
그렇기에 잘 안다.
그리드는 결코 계산적인 남자가 아니었다. 아니, 계산하다가 도리어 자충수만 뒀었다. 최소 작년까지는 말이다.
“그리드의 지적발달이 급격히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가 4천왕들을 육성시킨 방법은 지식만으로 강구할 수 있는 게 아닐세. 순전히 마음으로 다가갔기에 가능한 일이야.”
“마음....”
그리드를 논할 때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어다.
진이 빠진다는 듯이 의자에 등을 기댄 윤상민 이사가 기분 좋게 웃었다.
“회장님과 개발팀원들이 그리드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싫어할 수가 없지. 우리가 만든 자식들(NPC)을 처음부터 존중해준 사람 중 하나가 바로 그리드니까.”
“그만큼 아쉬우시겠군요.”
“어떤 점이?”
“그리드(마왕)는 토벌당할 테니까요.”
1차 도전이 40분 만에 끝난 상황이다. 약화 된 4천왕을 상대하는 2차 도전은 그보다 훨씬 더 빨리 끝날 공산이 컸다.
그리드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최대 1시간 반에 불과할 것이었고, 이는 그리드의 생명력이 200만을 초과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아이템 제작 또한 현실적으로 어려울 테고.
염려하는 윤상민 이사의 표정을 읽은 임철호 회장이 대소를 터뜨렸다.
“자네, 그리드와 직접 계약서를 작성해놓고도 그의 변화를 제대로 체감하지 못했군. 1시간 반? 지금의 그리드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지.”
임철호 회장은 단언했다.
“철저히 준비한 그리드는 4천왕보다 약하지 않아. 결코 쉽게 토벌당하지 않을 걸세.”
오늘, 그리드는 플레이어의 이상(理想)이 될 것이고 열정의 근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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