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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18화 (813/1,794)

템빨 45권 - 7화

템빨국.

Satisfy 내에서는 아직 작은 나라지만 그 규모를 지구에 대입시킬 경우 일본보다 큰 나라다.

일명 ‘헥세타이아 사태’ 이후에는 인구수도 급격히 늘어났고 제작 아이템 시장을 독점하면서 경제가 호황을 맞이했다.

한데, 그 나라의 소유주가 단 한 명의 플레이어다.

템빨왕 그리드.

단어 그대로 왕(王)인 그는 수천만 명의 백성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템빨국 전역에 분포되어있는 자원을 합당하게 독점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자였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나라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익을 현금으로 환산하여 자신의 금고를 채우는 일도 가능했다.

그것은 막말로 일국의 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더 비대해질 재력이다.

대한민국 재계 7위에 빛나는 대진 그룹조차도 그리드 앞에서는 한낱 구멍가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머리를 어떻게 굴려 봐도, 그리드와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은 무조건 좋았다.

그를 대진의 얼굴로 내세울 경우 수십 억 단위 인간에게 대진의 이름을 각인시킬 수 있었고, 그를 대진의 우방으로 삼을 경우 국제무대에서 대진의 입지를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결국, 대진 입장에서 일대일대의 기회라는 뜻이다.

“...알았네. 자네의 제안을 수락하겠네. 자네 말마따나 마왕 토벌전에서 승리하고 정체를 밝혀준다면 장기 계약을 맺고 유라 또한 놓아주도록 하지.”

아찔한 정신을 간신히 수습한 이진명 회장이 전화기 너머의 그리드에게 대답했다.

그리드와 대진의 협력 관계를 맺을 수만 있으면 굳이 유라에게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혈육이야 둘째 딸의 자식들이 남아있었으니까.

비록 이씨 성을 잇지 못한 반푼이 놈들이라고는 하지만 핏줄은 핏줄이다. 그리드라는 후광을 등에 업은 이상 성씨쯤이야 양보할 수 있다.

“한데...”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이진명 회장.

대진의 찬란한 미래를 그리며 미소 지은 그가 그리드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유라와는 무슨 사이인가?”

단순히 친구나 동료사이라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나설 리 없다.

이진명 회장은 그리드와 유라가 소문대로 연인 사이이거나, 혹은 그리드가 유라를 마음에 두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뭐, 핏줄이라고 옹호하는 게 아니라 내 손녀는 세계에서 가장 예쁘다.

거기에다가 똑똑하고 고결하기까지.

사내놈이라면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다.

능구렁이처럼 웃는 이진명 회장의 귓가로 그리드의 대답이 들려왔다.

-글쎄요. 저는 유라 양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는데 그녀도 저와 같을지는 잘 모르겠군요.

“많은 부분을 의지한다는 건...?”

-일단 게임 내에서 유라의 무력이 큰 도움이 되고, 현실에서는 제가 사회생활을 제대로 못해봐서요. 언론을 상대할 때나 세무 쪽으로 많은 조언을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설마 그게 끝인가?”

-그렇습니다만....

“둘이 스캔들도 났던 사이 아닌가? 손녀가 자네 집에서 묵고 간 날도 있다고 들었네만?”

둘의 사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제1회 국가대항전 기간 동안 손녀는 그리드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었다.

그리드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유라 양이 너무 취해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데려가서 재워줬던 거예요. 집에 부모님도 계셨고, 진짜로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

꽈악!

핸드폰을 쥐고 있는 이진명 회장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건 명백한 분노였다.

그리드가 고자일 줄이야?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부분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약속을 돌이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드라는 과실은 다소의 하자가 있더라도 삼켜야할 정도로 달콤했기 때문이다.

“후우.... 뭐, 알았네. 그럼 무운을 빌지. 마왕 토벌전이 끝나고 자네가 정체를 밝히는 순간 대진과 자네의 계약에 관한 기사가 홍수처럼 쏟아져나갈 게야. 단, 한 가지 명심해주게. 극적인 홍보 효과를 위해서는 그전까지 자네의 정체가 노출 되어선 안 돼.”

-원하던 바입니다.

첫 단추가 올바르게 꿰였다.

계약의 세부사항은 마왕 토벌전에서 실적을 남긴 후에 조율하면 충분하다.

***

“고생하셨어요.”

“아쉽게 됐어.”

“축하해도 모자랄 판에 아쉽기는 개뿔. 은메달이 뭐가 아쉬워? 세계에서 2위야, 2위. 엄~~청나게 대단한 거라고.”

“은메달이 별로라는 게 아니라 유라 님의 실력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결과라는 거죠.”

“맞아. 금메달도 충분히 노릴 수 있었는데 아깝지.”

한국 선수 대기실.

PvP가 끝나고 한참 후에야 돌아온 유라를 동료들이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PvP 2위.

20억 플레이어 중에서 한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사람들만이 노려볼 수 있는 위업이지만, 동료들은 유라를 축하하기보다 위로하는 실정이다.

그만큼 유라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다음을 노리면 되잖아.”

극검이 호탕하게 말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기회는 또 있잖아. 1위는 그때하면 되지. 안 그래?”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유라에게는 다음이 없었다.

플레이어 유라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니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던 유라가 그저 쓴 미소를 지을 때였다.

[20분 뒤 마왕 토벌전이 시작됩니다.]

[400인의 도전자 여러분께서는 전용 대기실로 이동해주십시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20분 뒤 마왕 토벌전이 시작....]

안내음이 울려 퍼졌다.

마왕 토벌전.

올해 국대전 최대의 이슈다.

400명의 랭커에게 경쟁이 아닌 협력(協力)을 요구하는 신규 종목.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할 것이 분명했고, 그만큼 세간의 관심도 높았다.

<마왕 등장> 이벤트 이후로는 더욱 더.

감히 장담컨대, 지금 이 순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마왕 토벌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유라, 푹 쉬고 있어. 너만큼은 못하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좋은 성적을 거둬올 테니까.”

“난 금메달 딸건데?”

코크, 극검, 포식이불족발.

마왕 토벌전의 한국 대표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남긴 후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잔뜩 긴장한 코크를 보자 유라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크라우젤과의 재대결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성검 뽑기>와 <공성전>에 출전했던 유라다.

할아버지에게 크라우젤을 꺾는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의 가능성을 입증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유라는 순전히 자신의 욕심 때문에 코크에게 큰 짐을 떠넘긴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어두운 표정을 짓는 유라의 가녀린 어깨 위로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한복 차림의 여성, 비올라였다.

“너는 참 착해. 정말로 별걸 다 신경 쓰는구나?”

“조금도 착하지 않아요. 이기적이죠.”

“아니, 착해. 한국인 랭커 모두가 외면했던 제1회 국가대항전부터 홀로 싸워왔던 사람이 바로 너야. 너는 할 만큼 했어. 언제까지고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질 필요가 없다고. 이제는 욕심 좀 챙기는 게 당연한 건데 고작 이런 일로 죄책감을 느끼니? 애도 참, 어쩜 이렇게 티 없이 맑을 수 있을까.”

“....”

유라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할 만큼 했다.

그 짧은 한 마디가 조금의 위안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제는 쉬어도 되겠지.

유라가 마음을 달래는 그때였다.

핸드폰이 울린 것은.

이번에야말로 할아버지의 전화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액정에 뜬 이름은 또 다시 신영우였다.

“...여보세요?”

-끝까지 지켜봐.

“뭘 말이죠?”

-마왕 토벌전.

“...?”

-너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네?”

-그럼. 다음에 보자.

“여보세요? 여보세요! 영우 씨!”

이미 끊겨버린 전화기에 대고 외쳐봤자 아무 소용없었다.

유라의 떨리는 시선이 모니터로 향했다.

***

마왕 토벌전의 무대가 공개됐다.

원형을 이루는 성벽에 둘러싸인 거성이었다.

『동서남북으로 총 4개의 성문이 있습니다. 각각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이 바로 4천왕이죠.』

성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성문도 엄청나게 컸다. 높이는 20미터가 넘었고 넓이는 40미터에 육박했다.

4천왕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결코 열리지 않을 성문이었다.

『400명의 선수들은 각각 100명씩 조를 이뤄서 4천왕을 격파해야 합니다. 모든 4천왕이 쓰러지고 모든 성문이 열려야지만 비로소 내성 안에 있는 마왕의 방까지 이어지는 통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되죠.』

『꼭 조를 이뤄야하나요? 400명이 한꺼번에 움직여서 4천왕을 하나씩 각개격파하면 안 되는 겁니까?』

『안 됩니다. 각 성문 일대가 인스턴스 던전으로 분류되며 던전의 입장 제한 인원이 100명으로 제한되거든요.』

『흐음.... 4개 성문 중 공략에 실패하는 곳이 발생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다른 파티가 대신 공략해야합니다.』

『앞서 공략에 실패하고 전멸한 파티원들은 그대로 실격처리 되고요?』

『아니요. 그냥 죽은 상태로 방치됐다가 모든 성문이 개방되는 순간 전원 부활하게 됩니다.』

『4개의 파티가 전부 다 전멸하지 않는 이상 실격이라는 개념은 없다, 이 말씀이군요? 결국 선수들은 400명 전원이 마왕과 싸우게 되겠네요?』

『네, 4천왕 단계에서 실패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400대1의 전투가 진행되게끔 설계 된 종목이죠.』

그만큼 마왕이 강하다는 뜻이다.

최소 중위권의 대악마급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추측했다.

실제로 마왕 등장에 출현했던 마왕은 강렬한 포스를 보여줬다.

마법을 파훼하고 반격하는 능력...

그것은 마법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수준을 넘어서 독으로 바꾸는 힘이었다.

400명의 참가자 중 최소 80명은 병풍 신세 예약인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법사들이 맹렬히 반발하고 있었다.

“아니,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특정 직업군을 차별하는 게 말이 됩니까?”

“마법사들은 보상 같은 거 꿈도 꾸지 말라 이거요?”

마왕 토벌전 참가자 대기실.

인도의 고샤루를 주축으로 삼은 80인의 마법사들이 주최측에 항의했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차별은 없다’고 일축할 뿐이었다.

매번 똑같은 태도다.

사람 속 끓게 만드는데 도가 튼 놈들이다.

“XX! 어디서 새로운 가상현실게임 안 나오나? 진짜 더러워서 못 해먹겠네!”

관중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장소이니만큼 욕설도 난무했다.

험악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제법 영리한 사람들이 그럴듯한 추측을 쏟아냈다.

“마왕이 마법에 높은 내성을 지닌 대신 4천왕들은 마법에 약한 거 아닐까요? 마법사가 없으면 4천왕을 돌파할 수 없는 구조인 거죠.”

“4천왕들도 메달 준다잖아. 마법사들은 4천왕에서 활약하고 메달 얻으면 되겠네.”

“마왕전에서는 찌그러져 있고?”

“페이즈 개념 몰라? 대부분의 네임드 보스들은 생명력 상태에 따라서 특성이 바뀌잖아. 마왕도 그렇겠지. 특정 구간에서는 마법 내성을 잃거나 도리어 마법에 취약해질 가능성이 높아.”

“흐음....”

역시 랭커들답다.

그들의 추측은 꽤나 논리적이었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좋아. 아무래도 우리가 초반과 후반에 활약하는 구도인 것 같은데 그만큼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게 되겠군.’

‘나도 이번 기회에 스타 되고 CF좀 찍어보자.’

***

“요호호후.”

흙마법사 랭킹 1위 고샤루.

B조에 소속돼서 서문 공략을 담당하게 된 그가 환희의 미소를 흘렸다.

거대한 성문 아래 홀로 서있는 4천왕의 상태가 썩 만만했던 까닭이다.

널찍한 붕대를 얼굴에 둘러서 이마와 눈을 가리고 있는 여성이었는데, 아이템 상태가 굉장히 별로였다.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헤비아머 세트를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목보호대 달린 투구,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갑옷, 무릎 위까지 올라가는 강철신발.

정말이지, 신체에 노출되는 부분이라고는 입술과 턱, 그리고 손이 전부였다.

여성 캐릭터의 방어력은 노출도와 비례한다는 공식을 깡그리 무시하는 행색이었다. 저런 허접한 행색은 초보 마을에서밖에 못 본다.

“너무 연약해 보이는데?”

“방심은 금물이야. 그 미친 마왕의 4천왕이다.”

“마왕이 강한만큼 4천왕은 약할 수도 있지. 안 그래? 애초에 이번 종목은 마왕이 메인이고 4천왕은 들러리잖아.”

고샤루는 자신감이 넘쳤다.

마왕 등장 이벤트에서 꼴불견을 보여줬던 그는 지금이야말로 설욕할 기회라고 믿었다.

“가라! 거인의 소오오온!!”

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손이 히드라의 목처럼 위협적으로 몸부림치며 날아가 4천왕을 덮쳤다.

콰아아아아아앙-!

격렬한 폭음!

“오...!”

“효과가 있나?”

기대에 찬 B조 선수들이 뿌옇게 일어나는 흙먼지 너머를 주시했다.

그곳에는, 방패까지 꺼내든 4천왕이 꼼짝도 않고 서있었다.

방패에 가로막힌 거인의 손은 먼지가 돼서 허무하게 흩어질 뿐이다.

“....혹시 네가 약한 거 아니냐?”

선수들의 게슴츠레한 시선이 고샤루에게 집중됐고 고샤루는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그의 시야에는 다음과 같은 알림창이 떠올라 있었다.

[대상이 마법의 위력을 대부분 차단하였습니다!]

[대상에게 12,09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고작 1만의 피해?

역속성 몬스터에게는 50만대의 데미지까지 입히는 궁극의 마법 중 하나가?

‘4천왕은 마법에 약할 거라고?’

염병!

‘여캐의 방어력은 노출도와 비례한다고?’

지랄!

고샤루는 여러모로 사기를 당한 심정이었다.

철컥.

중무장한 여기사.

<벤츠>라는 이름을 머리 위에 달고 있는 4천왕이 검을 뽑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처럼 아름다운 선홍빛의 장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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