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5권 - 6화
“탈것은 소환수나 펫으로 분류되는 게 정석이었지만 마장기는 다를 것 같습니다. 아이템으로 구분되는 겁니까?”
“어떤 자원을 동력으로 삼아서 움직이는 겁니까? 마장기의 크기와 출력을 미루어 보면 외부 자원을 끌어와야 장시간 가동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마장기에서 사하란 제국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제국의 소유물이라는 뜻 아닙니까? 제국에서 지발 선수의 입지가 얼마나 크기에 마장기를 사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거죠? 황실과 끈이 닿은 건가요?”
“제국은 총 몇 대의 마장기를 보유하고 있나요?”
PvP 시상식이 끝난 후.
지발의 기자회견은 무난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예상 범위 내의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갔다.
하지만 기자 중에 신사는 드문 법이다.
대부분의 기자들이 원하는 것은 보다 자극적인 기사였고 결국 분위기가 묘하게 변질됐다.
“지발 선수! 결승전에서 페가수스를 먼저 꺼낸 이유가 뭡니까? 유라 선수는 마장기 없이도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셨던 건가요?”
4강전에서 크리스를 만난 지발은 처음부터 마장기를 소환했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결승전 무대에서는 페가수스와 마장기를 순차적으로 소환했고, 이로 인해서 사람들의 억측이 난무하는 상황이었다.
지발이 유라를 우습게 본 거다. 지발은 페가수스만으로 유라를 잡을 생각이었다. 랭커의 시선으로 봤을 땐 유라가 크리스보다 한 수 아래라는 뜻이다. 유라가 전설 클래스를 얻은 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인 셈이다, 등등.
이슈만 생겼다 하면 이를 빌미로 타인을 비하하고 비난하길 즐기는 사람들이 유라의 ‘자격’을 운운했고, 기자들은 이 부분을 파고들었다.
지발이 피식 웃었다.
그건 명백한 조소였다.
같잖은 질문을 던진 기자와, 모니터 너머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시청자들을 향한.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페가수스는 적의 자원을 빠르게 소모시키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라의 유틸성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페가수스의 도움이 필수불가결이었죠.”
결론은.
“저는 그녀가 쉬운 상대이기 때문에 페가수스만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던 게 아니라, 도리어 어려운 상대였기 때문에 페가수스와 마장기를 전부 다 활용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지발은 유라를 추켜세웠다.
아니, 합리적으로 평가했다.
결승전까지 올라와 자신과 치열하게 싸운 강자를 과소평가하거나 조롱할 정도로 지발은 막돼먹지 않았으니까.
***
전부 다 끝났다.
플레이어 유라는 이제 없다.
어느덧 5년 넘게 활동해 왔던 Satisfy에서의 생활도 오늘로써 끝이다.
“…….”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화장실로 달려온 유라는 탈력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스스로의 무능을 탓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벗어나지 못하게 됐네.’
유라는 아버지를 생생히 기억한다.
욕심이 없는 분이셨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셨던 분이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욕심을 강요했다. 가족이 아닌 회사를 위해서 희생하라고 명령했다. 그것이 응당한 책임이라고 못 박았다.
아버지는 점차 기운을 잃어 갔다.
유라는 아직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아버지가 가엽게 느껴졌다.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동정받는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고 싶었다.
유라는 천진함을 연기했다. 마냥 예쁜 딸이 되어 아버지의 피로를 덜어 드리고자 노력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솔직할 수 있었으리라.
“아빠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우리 딸이 자유롭길 바라서지 할아버지가 무서워서가 아니야. 유라야, 너는 오직 행복해질 수 있는 일만 하도록 하렴. 아빠가 지켜 줄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딸에게 고한 소망과 다짐.
그 결연한 진심은 유라의 마음속에 깊숙이 각인됐다.
세월이 흐르고,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게 된 후에도.
유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자유와 행복을 갈망했다. 그리고 Satisfy를 만났을 때 운명을 느꼈다. 할아버지의 집착을 따돌리고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결과는 이처럼 참담하다.
유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 드리기는커녕 아버지와 똑같은 신세가 되게 생겼다.
지이잉. 지잉…….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들려오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유라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발신자가 누구일지 뻔히 예상했다.
할아버지일 것이다.
배려와 양보를 모르며, 오로지 책임만을 강요하는 분.
당장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것일 테지.
“……?”
빛을 잃은 유라의 새카만 눈동자가 휴대폰 액정으로 향했다가 멈췄다.
액정에 표기된 발신자 이름.
할아버지가 아니라 신영우였다.
벌써 4년 넘도록 인연을 쌓아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연락 한 번 없었던 사람.
어떨 때 보면 정이 넘치는 것 같다가도 평소에는 매정하기 그지없는 차가운 남자.
“…….”
유라가 전화받기를 망설였다.
하필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그리드의 전화를 받으면 괜히 더 서러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드가 전화를 거는 경우는 오직 하나.
유라의 도움이 필요할 때였으니까.
‘지금 내가 영우 씨를 도와줄 처지가 아닌데.’
의지되는 사람.
내가 그리드를 그렇게 느꼈듯이, 그리드 또한 나를 그렇게 느꼈으면 좋겠다.
유라는 그런 마음으로 그리드를 도와 왔고 앞으로도 쭉 그럴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어떤 도움도 될 자신이 없었다.
이틀. 아니, 딱 하루.
단 하루만이라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라고, 유라는 생각하면서도.
“…여보세요?”
전화를 받고 말았다.
순전히 그리드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였다.
나른하면서도 힘이 깃든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면 왠지 조금이라도 기운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괜찮아?
그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 달리, 그저 마냥 상냥한 음성이었다.
“…….”
차갑게 가라앉았던 유라의 마음에 열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하얗게 질린 채 떨리던 손끝에 온기가 깃드는 것을 느낀 이 순간, 유라는 깨달았다.
세상에 홀로 남은 자신이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 그리드가 유일했음을.
-무슨 일인지 말해 봐.
“무슨 일을 말하라는 거죠?”
-너, 힘든 일 있잖아. 시치미 떼지 말고. 오늘 유난히 표정이 안 좋았잖아.
“…제 표정이요?”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 연기한 경력이 있는 만큼 유라는 본인이 연기를 잘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데미안도 그랬고, 그리드도 이러는 걸 보면 착각이었나 싶다.
‘아빠…….’
유라가 울컥했다.
아버지가 어린 딸의 연기를 알면서도 넘어가 준 거라고 생각하자 안타까웠다. 어린 딸을 걱정시키는 아빠가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고 슬프셨을까.
숨죽여 우는 유라의 귓가로 그리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넘치는 힘이 잠재된 목소리였다.
-너를 돕고 싶어. 아니, 도울 거야. 말해. 내가 뭘 하면 되지?
“…고마워요.”
유라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드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런 관계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도울 수 없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지금이 그랬다.
“영우 씨.”
-응?
“저, 게임 접어요.”
-…응?
“그간 감사했어요.”
***
저, 게임 접어요!
이는 한때 ‘부모가 자식에게 듣고 싶은 말’ 1위에 뽑혔던 대사다.
과도한 게임 이용은 인생을 피폐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지인이나 가족이 게임을 접는다고 말하면 그걸 당연히 환영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Satisfy가 출시되고 5년이 지난 지금은 전혀 달랐다.
Satisfy는 부와 명예, 심지어 권력까지 거머쥘 수 있는 수단.
이제는 부모가 직접 나서서 자식에게 Satisfy를 시키는 시대였고, 이러한 시대가 오게끔 일조한 인물이 바로 그리드였다.
그렇기에 충격이었다.
그리드는 유라가 게임을 접는다는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개인적인 관계를 논하기에 앞서서 유라는 템빨단원이었고, 템빨국 최대의 전력 중 하나였다.
그녀가 게임을 접는 건 큰 문제다.
“아…….”
한참을 멍하니 있던 그리드가 몇 년 전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기사를 떠올렸다.
유라가 대진 그룹 회장의 손녀라는 내용의 기사였고, 당시 대진 그룹 회장은 조만간 손녀를 회사로 불러들일 예정이라고 선전했었다.
소식이 해외까지 전해졌는지 라우엘이 호들갑을 떨었던 게 기억난다.
유라가 회사에 들어가게 되면 게임을 플레이하는 시간이 적어지는 거 아니냐고 걱정했던가.
“…그게 현실이 될 줄이야.”
심지어 최악의 형태로.
어쩌지? 어떻게 해야 되지?
뇌에 과부하가 걸린 그리드가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다가 멈춰 섰다.
라우엘을 안심시켰던 유라의 인터뷰 내용이 뒤늦게 떠올랐다.
‘나는 회사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라고 했던가?’
우선 확인이 필요하다.
유라에게 다시 전화를 건 그리드가 딱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회사에 들어가는 거지? 그건 네가 원하는 일이야?”
-…….
대답은 없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그리드가 문자함을 뒤졌다. 지난 문자 내역을 쭉쭉 내린 끝에 대진 자동차에서 날아왔던 문자를 발견했다.
<연락이 안 닿아 부득이하게 문자를 남깁니다. 대진 자동차의 신규 럭셔리 브랜드 모델이 되어 주십시오. 꼭 만나 뵙고 말씀 나누고 싶습니다. 연락 부탁드립니다.
-대진 자동차 홍보팀 최진구 실장->
“여보세요? 최진구 실장님? 저 그리든데요. 네, 네.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대신 거기 회장님 연락처 좀 알려 주세요.”
일국의 왕이자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는 천문학적인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 힘은 현실 세계의 정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도였다.
***
“뭐? 그리드가?”
대진 자동차 사장의 연락을 받은 이진명 회장이 화들짝 놀랐다.
지난 2년 동안 CF와 방송 출현을 자제해 왔던 그리드.
이제 그는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국왕이라는 지위 탓인지, 언젠가부터 그는 돈보다 명예에 집착했다.
언론에 자신을 노출하고 이미지를 소모하기보단 오로지 Satisfy 내에서만 활동하고 업적을 세우는 데 주력해 왔다.
한데 그가 대진 자동차의 CF 모델이 되겠다고 연락을 해 왔다는 것이다.
기대치 못했던 기회다.
대진 자동차의 럭셔리 브랜드를 전 세계에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하지만…….’
이진명 회장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드가 일면식 없는 자신과의 통화를 원한다는 점.
그리고 유라가 PvP에서 패배한 직후라는 점.
“…손녀와 연인이라는 건 헛소문이라고 들었는데.”
이진명 회장은 그리드와 유라의 스캔들을 당연히 철저히 조사했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 헛소문이라는 걸 알고 크게 실망했었다.
한데 이제 보니 사실일 수도 있겠다 싶다.
“내 연락처를 알려 주도록 하게. 아니, 아니야. 내 쪽에서 연락하는 편이 좋겠군. 템빨왕 전하를 상대로는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게 좋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 일단 들어나 보자.
고민 끝에 결정한 이진명 회장이 그리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영우 씨 되시오? 나, 대진 이진명 회장이외다.”
-손녀를 제게 주십시오.
“……!!”
난데없는 소리에 이진명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대기업을 이끄는 리더답게 엄청난 속도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유라를 후계자로 삼았을 때와 그리드를 손녀사위로 삼았을 때의 가치를 저울 위에 올려놓고 철저히 계산해 보았다.
계산은 빠르게 끝났다.
그리드의 가치와 잠재력이 너무 컸다.
“날짜는 언제로 잡을 겐가?”
***
-날짜는 언제로 잡을 겐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리드가 혀를 내둘렀다.
‘노인네 성격 참 급하시네.’
아직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은 마당에 CF 촬영 날짜부터 논하다니?
뭐, 그만큼 내가 욕심난다는 뜻이겠지. 아마도 유라는 계속 게임을 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날짜야 뭐… 회장님이 알아서 잡아 주십시오. 회장님께서 먼저 양보해 주셨으니 저도 최대한 맞추겠습니다.”
-허허! 인륜지대사를 내게 맡기겠다고? 과연 한 시대를 이끄는 영웅답게 호탕하구만!
“…인륜지대사요?”
난데없는 말이 튀어나오자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타인은 나를 멋대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 사실을 숱한 경험을 토대로 깨닫고 있는 그리드였기에 작금의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잠시만요.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오해?
“장가가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저는 유라 양을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그건 수지타산이 안 맞는군.
“귀사와 장기 계약을 맺겠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움찔하는 이진명 회장이 느껴졌다.
잠시 망설였으리라.
하지만 공교롭게도 망설임으로 끝났다.
-…자네 다소 오만한 거 아닌가? 자네의 올해 가치는 작년만 못해. 올해 자네는 국대전에 불참한 만큼 상품성이 떨어진단 말일세. 작년의 자네라면 또 모를까, 올해의 자네를 굳이 내 손녀를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섭외할 생각은 없네.
“만약.”
-……?
“만약, 제가 올해 국대전에서 제 상품성을 한 단계 더 높이게 된다면 긍정적으로 검토하시게 되겠군요?”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자네는 올해 국대전에 불참했잖은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일세.
“마왕.”
-마왕?
“제가 마왕입니다.”
-……!!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켠 이진명 회장이 그 숨을 다시 토해 내질 못했다. 얼굴이 붉어진 채 괴로워하는 그의 사정을 알 리 없는 그리드가 말을 이었다.
“마왕 토벌전에서 승리하고 제 정체를 밝히겠습니다.”
-……!!
도통 숨 쉴 틈을 주질 않는다.
이진명 회장은 요단강을 반쯤 건넜다가 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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